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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이야기 스크랩 울산시 임진왜란 때 불탄 태화루 복원한다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15 12.04.16 08: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울산시 임진왜란 때 불탄 태화루 복원한다

영남 3대 누각 중 하나, 2013년 복원

 

태화루 복원도

 

 

조선시대 영남루,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루'로 꼽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울산 태화루(太和樓)가 정면 7칸, 측면 4칸의 주심포(柱心包)식 누각으로 복원된다.

울산시는 26일 시청에서 박맹우 시장과 태화루 건립자문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태화루 실시설계 최종 보고회를 하고 중구 태화동 옛 로얄예식장 일대 1만403㎡에 정면 7칸, 측면 4칸, 넓이 233㎡의 누각을 복원하기로 했다.

구조형태는 외관이 웅장하고 내부가 아름다운 주심포식과 팔작(八作)지붕이다.

누각 앞쪽에는 면적 139㎡에 정면 9칸, 측면 2칸의 대문채를 건립한다.

누각은 창건 시기가 확실하지 않고 조선 초 중건됐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점을 고려해 조선 전기의 양식에 따라 건립하되 지리적으로 가깝고 입지가 유사하며 현존하는 조선시대 누각인 밀양 영남루 등을 참고했다.

이와 함께 누각 앞쪽으로 태화강 생태공원과 중구 우정동 둔치를 연결하는 산책로를 조성해 시민의 이용 편의를 도모하고 야간에 누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도록 경관 조명을 설치할 계획이다.

또 홍보실과 휴게실,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설치한다.

울산시 관계자는 "태화루를 복합역사공원으로 복원해 울산의 역사를 되살리고 시민의 문화적 긍지와 정체성을 높이겠다"며 "야간에는 조명을 활용해 최고의 볼거리로 만들고 산책로를 조성해 태화강 생태하천의 중심축이 되면서 지역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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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은 우리네 선비들의 풍류와 정신 수양의 터였다.

영남지방에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가 ‘영남 3대 누각’으로 불리며 이름을 떨쳤다. 특히 태화루는 그 빼어남으로 옛 문헌에 자주 오르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울산강에 이르러 누각을 바라보니 층층절벽 위에 우뚝 서 있어 맑고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빼어나고 장엄함에 감탄하여 물으니 태화루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태화루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불에 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으며, 같은 일을 당한 다른 누각들과 달리 여지껏 복원되지도 못했다.

 

울산 태화루가 오는 2013년께 부활한다. 울산시는 15일 “연말까지 (태화루 복원을 위한) 설계 용역이 끝나면 내년 3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을 거쳐 12월 착공에 들어가 2013년 12월 완공된다”고 밝혔다. 지역 문화계 인사들과 향토사학자들의 복원 움직임이 23여년 만에야 결실을 맺는 것이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400억원이나 넘는 예산을 들여 복원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일기도 했고, 울산시가 2005년 4월 공식 복원을 결정한 뒤에는 복원 터에 아파트를 지으려던 건설업체 등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건설업체와 이 회사에 땅을 판 20여명의 지주가 시에 건축허가를 신청했다가 불허되자 국무총리실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던 것이다.

2006년 이 행정심판에서 울산시가 이기면서 복원사업에 속도가 붙었고, 이어 공청회와 터 매입 등이 진행돼 오늘에 이르렀다.

 

복원될 누각의 모습은 교수와 전문가들로 이뤄진 태화루건립자문위원회의 구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자문위는 누각 규모를 220㎡로 주문했다. 정면 7칸(21.6m)과 측면 4칸(11.4m)에 대문채(118㎡)를 설치하고 누각 앞에는 태화교와 태화들을 연결하는 보행전용 산책로 개설을 건의했다.

또 휴식마당을 설치하고 태화루 마당에는 매화, 자귀, 배롱나무 등을 심고 대나무정원, 석정원, 야생초화원을 조성하는 것도 검토하길 권고했다.

 

 

*********************************************************<한겨레 울산/김광수 기자  2009.11.26>

 

 

 

태화루

 

태화루의 위치가 과연 어디였나 

 태화루가 로얄예식장 자리였다는 설과 남쪽으로 조금 더 지나 태화강 대밭이었다는 설로 양분된다

사진은 로얄예식장과 태화강 모습

 

 

조선전기 명학자인 서거정(1420~1488)이 극찬했다는 태화루. 서거정은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동참하면서 태화루를 기록에 남겼지만 그 위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서거정이 오늘의 태화루 위치 논란을 예견하지는 못했나 보다.

울산지역 문화유산해설사인 장성운씨는 "태화루는 조선조말 '태화루' 현판을 보유하다 언제부턴가 현 울산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남문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이 현판은 현재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이휴정(울산문화재자료 제1호, 조선시대 문루)에 보관돼 있다.

태화루의 소실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태화루는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2009년 2월 10일 울산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울산도호부의 객사(客舍)였던 학성관의 남문루(南門樓.현 울산초등학교 교문 인근)가

중수될 당시 쓰인 상량문(上樑文)

 

 

과거 태화루 현판이 있던 객사 문루(지금 울산초등학교자리)

 

 

 

 

성종대왕과 태화루의 물고기

 

고려 제6대 성종이 영남지방을 두루 순행하던 길이었다. 이윽고 울산에 당도하여 태화루에 올라가보니 강벼랑 위에 우뚝 솟은 누각의 경관이 참으로 장관이라 감탄하였다. 벼랑 아래로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태화강에는 고기떼들이 뛰놀고, 강 건너 장춘오(藏春塢)에는 우거진 해죽림(海竹林) 사이로 산다(山茶)를 비롯한 오색찬란한 꽂들이 피어 있었으며, 동남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 너머로 울산만이 안중에 들어오니, 천하 제일경이라고 찬사를 남겼다.

 

당시 저절로 시상이 떠오르고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지라, 왕은 산해진미로 차린 술상을 마주하고 신하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며 악공들의 풍악소리에 흥이 절로 났다. 누각 아래에는 성종대왕의 행림을 환영하기 위해 사방에서 운집해온 향민들이 조심스럽게 부복하며 성은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각 아래로 흐르는 태화강 물에서 큰 해어(海魚) 한마리가 난데없이 솟아오르더니 물가의 백사장에 툭 떨어져서 꿈틀거리지는 것이었다. 이에 한 노인이 얼른 뛰어가서 고기를 부둥켜안으며 붙잡았다. 노인은 왕이 납시었다고 동해용왕이 보내주신 선물이라 하며 왕에게 바치자, 모두들 입을 모아 기뻐하였다.

 

누각에서 보낸 즐거운 한때를 왕은 곧 고려의 서울인 송도(개성)로 환궁하여, 울산 태화강에서 가져온 귀한 고기를 왕과 신하들이 함께 나눠먹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부터 왕은 병석에 눕게 되었고, 영영 회복하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이에 세상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고기는 선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동해용왕이 왕을 환영하기 위해 보낸 특사였는데 속세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잡아먹었으니 용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라고 수군거렸다.

 

성종대왕에 얽힌 이같은 일화를 지닌 이 누각은 그후 고을을 다스리기 위해 부임해 온 역대 수령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며 단장을 하니, 울산을 찾아드는 귀빈들의 영빈관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공청으로 쓰이게 되었다.

 

                                           <자료참조> "울산의 전설과 민요" 울산문화원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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