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의 믿음론, 기독교강요 제3권 2장 1(1559년 라틴어 최종판 완역, 문병호 옮김, PP.40-43)
1.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대상(對象)이신 그리스도
독자들이 믿음의 의미와 본성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도록 믿음의 정의를 보다 분명히 제시한 후 이 모든 것은 더욱 쉽게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전에 교훈받은 바 있는 것들을 다시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율법을 통하여 규정하신다.
만약 우리가 그 일부분에서라도 걸려 넘어진다면, 그것이 내리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무서운 심판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둘째, 율법을 그 요구대로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량을 넘어서고 우리의 능력 밖에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고 우리가 응당 감당해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되새겨 본다면, 선한 소망은 조금도 남음이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당해 영원한 멸망 아래 처한 우리의 모습만 비칠 것이다.
셋째,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렇듯 비참한 곤경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는 자유의 수단은 한 가지, 구속주(救贖主)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에 있다.
왜냐하면 무한한 선하심과 관용 가운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늘 아버지가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견고한 믿음으로써 이러한 자비를 파악하고, 명멸(明滅)하지 않는 소망으로써 그 자비(慈悲) 가운데 쉼을 누리게 된다.33)
33) 여기서 그리스도의 중보의 필연성을(Institutio, 2.6.1-2.7.13) 상기시키는 동시에 구원의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자녀로 삼아진 자는 누구든지 천국을 소유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견해 혹은 심지어 어떤 감화가 있더라도 이렇게 대단한 일이 효과적으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주의와 열심을 다하여 믿음의 속성(屬性)에 대해서 깊이 살피고 탐구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위험에 이를 정도로 기만(欺瞞)을 당하고 있다.
실로 많은 수의 세상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우리가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Institutio, 1.2.1;1.10.1; 2.6.4), 그들은 통상 복음(福音)의 역사(歷史)로 받아들여지는 것 이상을 생각하려고 들지 않는다.
심지어 스콜라학파 가운데에서 이것이 논의될 때에도,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그 대상이라고 부르면서, 헛된 사색에 빠져, 불쌍한 영혼들을 그 목적으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길로 빗나가게끔 낚아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적용. 딤전 6:16) 필히 중간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야 한다.
그는 자신을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부르신다. 다른 곳에서는, 자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시므로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생명의 원천"(시 36:9) 이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오직 그만이 아버지를 아시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기를 원하신 바 된 성도들만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이다(눅 10:22).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전 2:2).
그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자기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을 선포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내가 너를 이방인 가운데 보내어 그들이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적용. 행 26:17-18).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可視的)이 되고, 이에 비견하리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知識)의 조명(照明)이 그의 얼굴 안에서 찬란하다고 증언한다(고후 4:6).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요 17:3) 것이 더하여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빛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아주 멀리 숨어 계신 채로 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아버지는 자기가 가지신 모든 것을 독생자 가운데 두셔서 그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선한 것들을 나눔으로써, 아들의 광채가 아버지의 영광의 참 형상을 표현하게끔 되었다(히 1:3).
앞에서 말했듯이(Institutio, 3.1.4),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어 그리스도를 찾도록 일깨움을 받아야 하는 한편,
오직 그리스도의 형상(形像) 가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성령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이 사안을 탁월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믿음의 목적을 논의하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목적지가 어디이며 믿음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知識)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후,
곧 이어서 모든 오류에 맞서는 가장 잘 무장된 길은 동일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그리로 방향을 정해야 할 목적지(目的地)가 되시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법(方法)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둘 모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실상 바울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선포할 때, 그에게는 자기가 믿음에 대해서 그렇게 자주 강조하는 그 모든 견고함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번복(飜覆)하려는 의도는 없다.
진정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이 둘을 가장 적절히 연결시키고 있다(벧전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