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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백주 (11)정씨 점쟁이
봄볕이 푸근하게 쏟아지는 마당을 지나 큰방 마루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점을 보러온 아낙들이 방안에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가득 앉아있는 듯 신발이 여러 켤레 토방에 놓여있었다.
“어르신 계신가요?”
신씨 부인이 방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 또 점 보러 오셨남?”
방안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벌컥 문을 열고 말했다.
“예, 제가 어려운 가정사가 있어서.........”
신씨 부인이 말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허어!?점 볼 것 없어!?그것 참 모든 것이 다 잘 해결되었구만!”
서너 명의 아낙들에게 둘러 싸여 아랫목에 앉아있는 수염이 허연 노인하나가 신씨 부인 얼굴을 떡 올려다보더니 대뜸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그 용하다는 정씨 점쟁이 영감이었던 것이다.
신씨 부인을 지긋이 쏘아보는 그 눈매가 송곳 끝처럼 매서운 데가 있었는데 다시 보니 마치 세상의 도(道)를 다 깨달은 자처럼 온화한 인상의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얼굴이었다.
“무 무엇이........해해 해결되었다는 것인가요?”
아직 점을 볼 내용도 말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니 신씨 부인은 느닷없는 말에 정씨 점쟁이 영감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금 젊은 새댁이 산길을 지나오면서 큰일을 당하고 오는 것 아닌가!”
“예! 무무........무 무슨 일을요?”
‘헉! 그놈에게 방금 당한 그 몹쓸 일은 나와 하늘과 그 천벌 받을 놈 외에는 절대로 아무도 몰라야 할 일이 아니던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신씨 부인이 금세 얼굴이 새빨간 홍당무가 되어 화들짝 놀라 모기만한 소리로 더듬거리며 겨우 말했다.
“방금 그 사내놈은 그곳에서 몇 발짝 가지 못하고 급살을 맞아 바로 죽었어!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서 저고리를 거꾸로 입고 그 사내놈 시체 앞에서 ‘아이고!?아이고!?아이고!’하고 딱 세 번만 곡을 하고 가! 그렇게 하고 집에 가보면 남편 병이 다 나았을 것이야!”
‘뭐라고! 저 자가 지금 귀신인가? 사람인가?’
저 정씨 점쟁이 영감이 마치 신씨 부인이 방금 전 저 산 고개 마루에서 흉악한 사내놈에게 붙들려 몹쓸 짓을 당한 그 일을 마치 두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한양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운이 좋지 못하여 어쩔 수없이 못된 놈에게 당한 일은 당한 일이라 치더라도 저 정씨 점쟁이 영감의 말처럼 곧 숨이 넘어 갈 것만 같은 남편의 몸이 다 나았다고 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없지 않겠는가!
기생 소백주 (12)신선한 기적
그 말을 들은 신씨 부인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만 엉거주춤 방안에 앉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간다는 인사말도 못한 채 그만 정씨 점쟁이 영감 집을 허겁지겁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 흉악한 짓을 당한 그곳을 다시 지나가며 그놈이 죽어 자빠진 것을 보고 ‘아이고!’ 하고 저고리를 거꾸로 입고 곡을 세 번하고 가라니 겁이 나고 공포가 밀려와 도무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흉한 작자의 죽은 몰골을 어찌 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반드시 치러내야만 할 운명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기꺼이 그리해야했다. 그리만 하면 남편의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 하지 않은가! 신씨 부인은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앙 다물었다. 그리고는 집을 향해 곧바로 나는 듯 길을 달려갔다.
그렇게 바삐 걸어가는 신씨 부인이 어느새 못된 사내놈에게 봉변을 당했던 산 고개 마루 풀숲 언저리에 당도했다. 신씨 부인은 정씨 점쟁이 영감 말을 떠올리며 정말 그 말이 맞을까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언저리를 샅샅이 눈여겨 살펴보았다.
자신을 강탈해 욕보인 그 흉악한 사내놈이 그 곳 풀숲 언저리 어디쯤에 급살을 맞아 고꾸라져 죽어있다지 않았는가?
신씨 부인이 조심조심 풀숲 아래 소나무 바위 쪽으로 난 길을 유심히 살펴보니 거기 하얀 옷깃 같은 게 희미하게 보였다.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살금살금 그리로 가보니 거기 검은 수염이 온통 얼굴에 돋아난 웬 시꺼먼 사내가 두 눈을 하얗게 뜨고 죽어 나자빠져있지 않은가!
신씨 부인은 크게 날숨을 들이쉬며 두려운 마음을 애써 가다듬고는 정씨 점쟁이 영감이 시킨 대로 얼른 저고리를 벗어 거꾸로 입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고 허리를 구부려 세 번 곡을 했다.
그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얼른 뒤돌아서서 잽싸게 몸을 빼고는 집 가는 길로 쏜살같이 내빼듯 뛰어 달렸다.
흉악한 꼴을 본 신씨 부인은 자꾸 쿵쾅쿵쾅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정말 남편의 병이 다 낫기 만을 바라며 뛰는 듯 나는 듯 잰 걸음을 재촉하며 부리나케 집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한참 만에 헐레벌떡 집에 당도한 신씨 부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곧바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방안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남편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 벌겋게 보이는데 허겁지겁 달려 들어간 신씨 부인을 보고는 배가 고프다며 얼른 먹을 것을 달라고 말을 하지 않는가!
기생 소백주 (13)운명
백약이 무효이던 남편이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건강이 회복했단 말인가? 다 죽어가던 남편이 살아나자 신씨 부인은 신기한 기적(奇蹟)을 만난 듯 뛸 듯이 기뻤다. 생각해 보니 그날 복채도 주지 못하고 온 그 신통한 정씨 점쟁이 영감에게 무어라도 보답을 해야만 했다.
마음을 정한 신씨 부인은 장날 십리 밖 멀리 있는 고을의 장에 나가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샀다. 떡이며 고기며 각종 생선을 정성을 들여 바리바리 장만하고 또 술을 맛있게 빚어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어느 날 아침 정씨 점쟁이 영감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러 갔다.
신씨 부인이 음식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씨 점쟁이 영감 집에 들어서자 방안에 있던 점을 보러 온 아낙들이 나와 맞았다.
“젊은 새댁이 무슨 맛난 이바지를 이렇게 많이 가져 오냐!”
늙은 아낙이 떡 바구니를 받으면서 말했다.
“저 어르신이 점을 하도 잘 쳐 줘서 다 죽어가던 우리 남편이 살아나 고마워서 좀 드시라고 가져 왔네요.”
신씨 부인이 말했다.
“아이구! 안 가져와도 괜찮은데 새댁이 뭘 이런 귀한 것을 멀리서 힘들게 다 해왔다냐!”
정씨 점쟁이 영감이 음식바구니를 열어보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르신, 제 남편이 병이 다 나아 이제 건강하게 생활을 합니다.”
신씨 부인이 말했다.
“사실은 그날 새댁의 관상을 보니 남편을 죽일 상부(喪夫)할 팔자였어. 그런데 그날 그 산에서 만난 그 놈이 새댁과 강제로 부부 연을 맺는 바람에 그 상부할 살을 대신 맞고 죽어간 거야! 사냥꾼이 꿩을 보고 화살을 쏘았는데 동시에 꿩을 노리고 날아오던 매가 꿩 대신 화살을 먼저 맞고 죽어버린 거지! 그래서 남편이 살아난 것이야! 기가 막힌 우연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운명이라고 하지! 다 하늘이 정한 일이야!”
정씨 점쟁이 영감이 신씨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하의 모든 물체는 다 자신의 운명(運命)을 타고 태어나서 그 운명의 길을 살다가 간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정한 성향이 없다고 한다면 자연과 우주는 질서를 잃어버리고 무질서 속에서 상호 충돌하여 찰나에 사라져버리고 말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생사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할 내밀한 법칙이 내재되어 있어 실상은 그러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자연과 세상일에 형통(亨通)한 현자(賢者)들이 세상사나 인생사의 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먼저 알아보고 그것을 미리 예견하거나 현재를 고쳐나가기도 하는 것인데 과연 신통하지 않은가!
기생 소백주 (14)경상도 김선비
충청도 부여 땅에서 왔다는 입담 좋기로 소문 난 조선비가 용한 정씨 점쟁이 이야기 한 자락을 풀어놓자 그 이야기를 열댓 명이나 함께 엉겨 듣고 있던 각지에서 올라온 선비들이 그 신통력에 놀라 다들 한마디씩 했다. 경상도 상주 땅에서 온 김선비도 그 틈에 끼어 이야기를 듣고는 탄성을 질러댔다.
“허어! 정씨 점쟁이 영감 정말 용한 점쟁이네!”
“사주를 뽑아 보지도 않고 관상을 보는 것만으로 단박에 길흉을 예측하다니 대단하네!”
“남편이 죽어나갈 상부할 사주인데 그 못된 놈이 대신 맞고 죽어 나갔구만!”
“잘됐네! 잘됐어! 못된 놈이 대신 급살을 맞아 죽어서!”
“으음!........사람이 본시 자신의 타고 난 운명을 피해가기가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이야!”
김선비가 한양 땅 이곳 이정승의 사랑채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선비들과 어울려 머문 것도 그새 삼년이었다. 이 방안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이 집 주인 이정승의 눈에 들어 지방의 미관말직(微官末職)이라도 얻어가려는 선비들이었다.
그런데 정말 지금 신씨 부인 이야기를 한 저 조선비의 말처럼 사람의 운명이란 게 과연 정해져 있는 것일까?
삼년 동안 이 나라의 권세를 틀어쥐고 있는 이정승만을 바라보며 김선비는 어디 지방의 작은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어 금의환향(錦衣還鄕) 해볼까 하고 사랑채에 뒹굴며 이제나 저제나 밤낮으로 학수고대하며 기다렸건만 이제껏 감감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어디 정말 정씨 점쟁이만큼 용한 점쟁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가 보고 자신에게 관운(官運)이 없다고 한다면 이제 그만 모든 기대를 접고 낙향(落鄕)을 해야 옳을 듯만 싶기도 했다.
그런저런 고민에 깊이 빠져 있는 김선비의 고향은 경상도 상주 땅이었는데 이름은 유경이었다.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김선비는 당시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가야할 길인 학문을 연마하여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길을 갔다.
어려 천자문을 배우고 소학, 대학 등 사서삼경을 두루 배워 익히면서 임금 앞에 나아가 과거시험을 보고 떡하니 급제하여 벼슬자리를 얻어 관리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것이다.
훤한 이마에 얼굴이 둥그스름 두 눈에 촉기가 빛나는 총명하게 잘 생긴 김선비는 어려 글을 아주 잘했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가르치는 스승도 김선비는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자리를 얻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김선비의 글공부는 열다섯에 이웃마을 이씨 처녀와 혼인하고 나서 더욱 늘게 되었다. 밤낮으로 서방님 글공부 열심히 하라고 마음으로부터 정성을 드리며 내조하는 아내의 덕분에서인지 김선비의 문장은 하루가 다르게 도란도란 거침없이 흐르는 산골짜기 물처럼, 바다를 향해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침 없이 일취월장(日就月將) 하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15)한양길
그러나 김선비에게는 정말로 관운이 없어서였을까? 스무 살 무렵부터 꾸준히 과거를 치렀지만 보는 족족히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시험 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귀신이라도 붙은 것일까? 유려한 문장도 고운 필체도 박학다식(博學多識)한 학식도 과거급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평생을 과거급제에만 매달려오며 아까운 청춘을 다 버리고 그새 마흔 줄이 되어버린 김선비는 길이 탄식하였다. 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도 중앙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높은 관리들과 연줄이 있어야 가능하고 또 엄청난 뇌물을 갖다 바쳐야 급제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부정한 소문들이 심심찮게 들리더니 과연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깊은 고민 끝에 김선비는 어느 날 마음을 정했다. 정직과 곧은 정신으로 사사로운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야할 선비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글공부를 해서 과거급제도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벼슬자리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살다 죽느니 가산을 정리해 먼 인척관계에 있는 지금 조정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주고 있는 한양의 이정승을 찾아가 지방의 하급관리자리라도 하나 달라고 한번 청탁(請託)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더더욱 김선비가 그리 마음을 정한 것은 늙은 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다. 늙은 어머니는 죽기 전에 김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떡하니 사모관대를 쓰고 임금이 하사한 교지를 들고 나타나 여봐라! 하고 호령하며 천하를 굽어 다스리는 늠름한 모습을 보는 것을 소원했던 것이다.
오직 벼슬을 하여 가문을 빛내는 것을 바라는 늙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서라도 김선비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버리고 선비로서는 도무지 해서는 아니 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한양 땅의 이정승을 찾아가 굽실거리며 부탁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을 보는 족족히 보기 좋게 낙방하는 것이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운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인지 김선비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급기야 김선비는 그해 거둬들인 곡식을 모두 팔아 처분하고 또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논밭을 얼마간 팔아 돈 천 냥을 만들어 젊은 하인 등 지게에 짊어지게 하고 한양 땅에 사는 이정승 집을 찾아 길을 떠났다.
김선비는 이른바 거액의 뇌물을 챙겨들고 떡하니 벼슬자리를 청탁하러 한양의 실권 있는 이정승을 찾아 길을 나섰던 것이다.
김선비가 여러 날 걸어 한양 땅에 당도하여 조정의 우의정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한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는 이정승 집에 당도하여 보니 과연 그 집이 대궐 같았다.
99칸 기와집이라더니 고래 등 같은 집들이 어깨를 서로 마주하고 들어서 있었다. 우선 하인이 안내해 주는 사랑방에 여장을 풀고 밤이 되어 이정승이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오자 김선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록 낯을 들 수 없을 만큼 비굴한 일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한양까지 왔으니 최선을 다해야했다. 김선비는 마음을 굳혀 먹고 사랑방을 나서 이정승이 있는 서실(書室)로 향해 갔다.
기생 소백주 (16)이정승
학이며 소나무가 그려진 여덟 폭 진기한 병풍이 방안을 빙 둘러 쳐져 있고 값나가는 붓과 먹과 벼루, 은빛 황금빛 광택이 고운 번뜩이는 장롱과 청자 백자 문양 고운 도자기, 여러 진기한 서책과 글씨 편액들이 가지런히 걸려 서실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여쁜 여동생이 임금의 빈(嬪)으로 간택되어 외척의 세도를 단단히 누리게 된 이정승은 그 힘으로 우의정 자리를 거머쥐었다고 소문이 파다했는데 각진 이마에 성질깨나 사나운 듯 눈꼬리가 위로 북 치켜 올라간 것이 첫눈에도 살진 얼굴에 탐욕이 덕지덕지 흘러넘치는 것이 참으로 거만(倨慢)한 인상이었다.
나이를 따져보자면 이정승이 김선비 보다 열 살 쯤 더 많았다. 흡사 커다란 멧돼지 같은 몸집의 이정승은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엎드려 절을 하는 김선비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으음!… 경상도 상주 땅의 김유경이라!… 내 당고모할머니의 손자라 하셨는가?”
“예, 그렇사옵니다.”
김선비는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며 자신을 내리 깔아보는 이정승의 오만한 눈빛을 의식하며 자신도 모르게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청탁하러 간 처지를 생각하고는 공손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챙겨간 돈 꾸러미를 이정승 앞으로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그 그건… 무슨 짐 보따리인가?”
이정승이 묵직하게 보이는 뜻밖의 짐 보따리를 보고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실은 제가 워낙 천학비재(淺學菲才)라 이제껏 글공부라고 하였으나 과거를 보는 쪽 쪽 낙방하여 어디 미관말직이라도 하나 얻어 볼까 하고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이정승님께 약소하나마 돈 몇 냥 챙겨 왔습니다.”
요즈음 거액의 뇌물을 받고 지위 높은 권세가들이 벼슬자리를 거래한다고 나라 안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특히나 외척의 세도를 단단히 누리고 있는 학식도 변변찮은 이정승이야말로 뇌물 밝히고 뒷거래 잘하기로 최고으뜸이라는 것을 조선팔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어 어흠!… 뭘 이런 것 까지나…”
이정승이 헛기침을 하면서 김선비가 들고 간 돈 보따리를 눈어림으로 가늠해 보고는 다시 입맛을 쩝! 하고 다시며 말했다.
“아! 그래... 으 으음!... 그거라면 저 사랑방에 가서 며칠 묵으며 기다려보시게나!”
“아! 예! 정승나리!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정승과의 면담은 그것으로 짧게 끝이 났다. 김선비는 공손히 이정승에게 절을 하고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날 밤 김선비는 이정승과 헤어져 사랑방으로 가면서 멀지 않아 어디 지방의 미관말직이라도 하나 챙겨 주리라는 가슴 부푼 기대를 한껏 가져보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17)뇌물 삼천냥
그러나 그 기대는 말짱 허사였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무려 일 년, 이제나 저제나 이정승이 자신을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며 가슴 졸이며 사랑방의 식객 노릇을 해왔건만 도무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렇게 이정승의 사랑방 식객이 되어 기다리는 동안 김선비는 조선 팔도의 그렇고 그런 변변찮은 수많은 선비들이 세도가인 이정승 집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누구누구 연줄을 타고 돈 꾸러미를 챙겨들고 몰려와서 벼슬을 청탁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드물게 몇몇은 소원을 성취하여 가기도 했는데 거개가 자신과 같은 꼴이 되어 하염없이 세월만 죽이고 기다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지쳐서 그곳을 떠나 낙향하기도 했고 또 다른 실력자를 찾아 청탁을 하러 떠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선비는 이정승 말고는 비빌 연줄도 없었고, 다른 뾰쪽한 방도도 없었다. 죽으나 사나 여기서 승부를 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아무래도 돈을 많이 가져다바친 사람 순으로 벼슬자리를 먼저 얻어 나가고 자신처럼 돈을 적게 바친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나보다 하고 생각하기에 이른 김선비는 하인을 시켜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얼마간 남은 논밭을 팔아 처분하여 다시 천 냥의 돈을 만들어 보내라고 했다.
몇 달 뒤 그렇게 하인의 등짐에 짊어져 올라온 돈 천 냥을 김선비는 이정승에게 또 가져다 바쳤다.
“뭘 힘들게 이런 거를 또 가져왔어 ! 으음 !……그거라면 저기 사랑방에 가서 며칠 묵으면서 기다려 보시게나 !”
이정승은 지난번 같이 똑같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선비는 설마하니 이번에는 정말로 무슨 소식이 있겠지 하고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또 맹꽁이 파리 잡아먹은 듯 돈 천 냥을 꿀꺽하고 삼켜먹고는 꿩 구워먹은 속처럼 감감무소식이었다. 가슴을 바삭바삭 태우며 다시 일 년을 더 기다려보아도 소식이 없자 답답한 김선비는 아무래도 바친 뇌물이 아직도 부족한가 보다고 생각하고는 또 하인을 시켜 고향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남은 논밭을 더 팔아서라도 천 냥의 돈을 더 만들어 보내라고 하였다.
기왕에 벼슬을 구걸하러 작정을 하고 돈을 짊어지고 한양 길을 왔는데 뜻도 이루지 못하고 여기서 물러선다고 한다면 도무지 아니 될 일이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생각한 김선비는 집안의 전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기필코 뜻을 이루어야만 했다.
더구나 지금 이정승에게 바친 돈이 얼마인가? 논밭을 팔아 마련한 돈 이천 냥이 아닌가 ! 여기서 포기한다는 것은 조상대대로 물려온 전답을 팔아 만든 그 피 같은 돈 이천 냥을 포기한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몇 달 뒤 또 김선비는 아내가 전답을 팔아 마련해준 돈 천 냥을 하인이 지게에 짊어지고 오자 또다시 이정승에게 고이 가져다바쳤다.
김선비가 이정승에게 바친 뇌물은 이제 삼천 냥이나 되었다.
기생 소백주 (18)청천벽력
거금 삼천 냥을 갖다 바쳤으니 반드시 지방의 미관말직이라도 하나 붙들어 주겠지 하고 김선비는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으음!...... 그래! 그거라면 저기 사랑방에 가서 며칠 묵으면서 기다려보시게나!”
지난번과 똑같은 이정승의 이 말을 들은 김선비는 이번에는 절대로 거짓이 아니겠지 하고 굳게 믿으면서 사랑방으로 물러나왔다.
그런데 아뿔싸! 이제나 저제나 이정승이 언제나 불러주려나 하고 가슴 졸이며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도무지 소식 한 점 없었다.
삼천 냥을 갖다 바쳤는데도 도무지 이정승에게서 이렇다 할 소식 한 자락 없자 김선비는 아무래도 그 삼천 냥이란 돈도 이 나라의 벼슬자리 하나 사기에는 아직 작은가 보다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심고심 하던 어느 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다시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집안에 있는 남은 논과 밭과 세간을 모두 팔아 돈이란 돈은 전부 다 긁어모아서 하인 편에 올려 보내라고 말이다.
이왕 작정한 것 몇 만 냥이라도 긁어다가 죄다 갖다 바쳐 기필코 뿌리를 뽑자고 김선비는 생각했던 것이었고, 또 이정승 하는 꼴에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하는 단단한 오기가 옹이처럼 가슴에 들어차 이글이글 타오르기도 했던 것이다.
하인 편에 들려 편지가 가고 한 달 뒤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다.
부랴부랴 편지를 읽는 김선비의 낯빛이 일순 침통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내용인즉슨 이제 집안의 돈이란 돈은 죄다 없어지고 그간 삼천 냥 바친 돈 마련하느라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고, 더구나 늙은 어머니의 몸이 많이 편찬은 데다가 사실은 식구들이 모조리 굶어 죽게 생겼으니 벼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 편지를 받은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김선비는 하늘이 온통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학문을 연마해 과거를 치렀는데도 보는 족족히 낙방을 했고, 또 벼슬을 구걸해 뇌물을 바치기를 삼천 냥, 삼 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있는 대로 모조리 돈을 긁어다 바쳐서라도 반드시 뜻을 이루고 난 다음에야 고향에 떳떳이 내려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 그 길도 아예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당장에 이정승에게 쫓아가 멱살이라도 부여잡고 패대기를 치며 벼슬을 주지 않으려거든 돈 삼천 냥을 당장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기실은 돈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제 손으로 돈을 싸들고 가 바리바리 바치지 않았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도무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낙망한 김선비는 당장 혀라도 콱 깨물고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막상 또 그러지도 못하겠고 그만 뜬눈으로 한밤을 꼬박 지새우며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지난 세월을 홀로 아련히 회상해 보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19)귀거래사
지나 온 세월 나름대로는 열심히 글공부를 한다고는 했으나 생각해보니 건성건성 술과 풍류를 즐기며 노는데 더 열중이었던 것만 같고, 부모에게는 늦도록 공부 핑계를 대며 살아왔으나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했으니 커다란 불효를 한데다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식들만 맡겨두고 고생만 시킨 것이었다.
자식들에게는 또 어떤가? 무관심으로만 일관하지 않았는가! 김선비는 자신의 과거사를 생각해 볼수록 잘못만 하고 살아온 인생살이였던 것이다.
급기야는 이렇게 집안을 버리고 벼슬을 사러 떠나와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온 가산을 모조리 팔아 탕진하도록 뇌물을 바칠 돈을 마련해 올리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인생인가!
자식으로도 남편으로도 아버지로도 모조리 소홀히 한 실패한 인생이었다. 이제 집안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이정승에게 바쳐버린 탓으로 늙은 홀어머니는 병이 들고 가족들이 굶주린다는데 도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 흉악한 원수 같은 이정승을 만나 종국에는 원하던 벼슬도 사지 못하고 집안의 돈이란 돈은 모조리 긁어다가 갖다 바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안을 온통 망쳐버렸지 않은가!
김선비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 수렁 속에 깊숙이 추락해 빠져 박혀버린 캄캄한 앞날을 생각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며 장탄식을 했다.
터무니없는 벼슬자리 욕심은 당초에 갖지를 말고 행실을 수양하고 학문을 깊이 연마하며 고요히 제 주어진 일에나 충실히 하였다면, 그러면서 혼탁한 시절을 매섭게 비평하는 지조 높은 청빈한 선비로 초야에 은일(隱逸)하며, 동진(東晉)의 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거울삼아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자급자족하면서 살아왔더라면 결코 이런 낭패는 없을 일이 아니었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선비는 자신에게는 애시 당초 조정의 녹을 먹을 관록이 없는 사주팔자인데다가 이정승에게 삼천 냥을 갖다 바친 것은 재수가 없어 손재수(損財數)가 든 것으로 여기자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
급기야 김선비는 이게 다 부정부패로 이 세상이 온통 썩은 탓이 아니겠는가하고 생각하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기대를 접고 내일 아침에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 굶주리는 노모부터 챙기고 식솔들이라도 잘 건사하자고 마음을 다잡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혀를 깨물고 그 자리에서 죽어 넘어지더라도 집에 돌아가서 죽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부당하게 벼슬을 탐한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온갖 생각에 젖어 한잠도 자지 못하고 가슴을 치고 길이 탄식을 하며 밤새 뒤척이다가 낙향을 결심한 김선비는 날이 밝기 무섭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길 떠날 행장을 꾸렸다.
그리고는 사랑방에서 나가 아직 입궐하기 전인 이정승을 찾아갔다. 이정승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아침을 먹을 채비를 하고 있다가 김선비를 맞이했다.
“아침 일찍 무슨 일인가?”
기생 소백주 (20)울분
“예, 정승나리, 오늘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하직(下直) 인사차 왔습니다.”
이 말을 할 때 김선비는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한 자락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정승도 사람이라면 삼천 냥이나 되는 뇌물을 받아먹고 나 몰라라 하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삼 년이라는 긴 세월을 꼼짝하지 않고 이정승의 식객으로 사랑방에서 목을 빼고 기다렸으니 무슨 작은 벼슬자리라도 하나 챙겨 주겠다는 약속의 말이라도 있지 않을까 김선비는 내심 고대하였던 것이다.
“무 무어?... 왜? 좀 더 있지 않고...“
이정승은 김선비의 눈치를 살피는 듯 잠시 바라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늙은 어머니를 뵙지 못한지가 그새 삼년이옵니다. 늙은 어머님이 몸도 편찬다고 하니 이제 고향에...”
“으음! 그래! 그럼, 잘 가시게나!”
이정승은 김선비가 더듬더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마치 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렇게 무 자르듯 단박에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
그 말을 들은 김선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이정승을 쓱 올려다보았다.
뭐라! 돈 삼천 냥을 갖다 바치고 벼슬자리를 기다리며 삼년 동안이나 사랑방 식객 노릇을 했는데 ‘그럼, 잘 가시게나!’ 저자가 도대체 사람인가? 짐승인가? 김선비는 순간 머리에 피가 몰리고 으드득! 이가 갈려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손에 쥔 칼이라도 있다면 당장에 달려들어 저자의 목을 따고 싶은 극한 충동을 꾹 눌러 참으며 김선비는 이정승을 다시 쓱 올려다보았다.
김선비의 눈에 들어온 이정승의 얼굴은 막 커다란 개구리를 삼켜 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독사의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탐욕스런 사악한 악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런 자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걸고 돈을 있는 데로 다 긁어다가 뇌물로 바쳤다니!’ 김선비는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잠시 머뭇거렸다.
“저저... 정승나리! 그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가가 강녕(康寧)하시기 바 바랍니다!”
김선비는 욱! 하고 끓어오르는 순간의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김선비의 눈가로 울컥 불꽃같은 울분(鬱憤)의 눈물이 스미어 올라 그것을 재빨리 삼켜 무느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순간적으로 더듬거렸던 것이다.
이게 다 권력과 지위만 보고 사람을 볼 줄 몰랐던 자신의 잘못이지 않은가! 부정한 뇌물도 사람다운 사람에게 들이 밀어야 약발이 나는 것이던가! 벼슬자리에만 눈이 멀어 사람을 볼 줄 몰랐던 자신의 탓이지 않는가!
김선비는 씁쓸히 이정승의 방을 나왔다. 샛노란 현기증이 일어 김선비는 순간 하마터면 방문 앞에 쿵하고 고꾸라져 기우뚱 넘어질 뻔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