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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관중과 포숙 (5)
제나라에서는 제희공이 죽고 그의 맏아들 제양공(齊襄公)이 군위에 올랐다.
제양공의 정치 능력은 관중이 예측한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미 앞서 기술했던 대로 제양공은 여동생 문강과의 불륜, 그것을 감추기 위한 노환공 살해, 이복 동생 팽생(彭生)의 처형 등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끊이없이 일으켰다. 모든 대부들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팽생이 참수 당하고 난 뒤부터 공족들은 가능한 한 제양공 앞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관중(管仲)과 포숙은 변함없이 규(糾)와 소백(小白)의 보좌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관중과 포숙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서로 마음도 통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두 사람은 다른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관중(管仲)은 임기응변에 능했고 유연했다. 반면, 포숙은 고지식하고 모든 일에 원리원칙대로였다. 두 사람의 이러한 성격과 스타일의 차이는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져가는 시국에 대한 처세 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관중은 늘 규(糾)에게 말했다.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숲의 나무들은 다 시들게 마련입니다. 일이 어렵고 쉬운 것은 적고 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아는 데 있습니다. 현자(賢者)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깊은 곳에 숨어 은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공자께서는 부디 주공의 비위를 건드리지 마시고 조용히 침묵하고 계십시오. 때가 온 후 어깨를 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숙(鮑叔)은 정반대였다.
그는 틈날 때마다 소백을 일깨워주었다.
"주공께서 음탕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백성들은 노래까지 지어 주공을 비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음탕한 행위를 고치면 지나간 허물을 덮을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주공의 동생이십니다. 아우 된 도리로 마땅히 간하여 문강(文姜)과의 교제를 끊도록 하여야 하건만, 공자께서는 어찌 못 본 척 입을 다물고 계십니까?"
이에 소백(召白)은 기회를 엿보다가 제양공이 문강을 만나기 위해 축구 땅으로 나가려 할 때 찾아가서 간했다.
"노환공이 죽은 일에 대해 세상에선 말들이 많습니다. 형님께서는 이제부터라도 문강 누님 만나는 일을 그만두십시오."
그러나 제양공(齊襄公)이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노환공을 죽이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공자 팽생을 참수한 사람이 아닌가. 그는 동생 소백의 입에서 문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눈에 퍼런 불을 일으켰다.
"이놈, 네가 감히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것이냐? 네놈이 다시는 지껄이지 못하도록 목을 베어버리겠다."
그 서슬에 소백(召白)은 크게 겁을 먹고 얼른 궁정에서 도망쳐나왔다.
그길로 포숙을 찾아가 의논했다.
"공연히 간언을 올렸다가 내 목숨만 위태롭게 되었구려. 형님 성격에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소?"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포숙(鮑叔)은 소백의 하소연에 한숨을 지었다.
"참으로 지금 주공은 구제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제가 듣건대, 괴상한 일을 벌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괴상한 재앙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대로 나라에 머물렀다가는 공자마저 해를 당하기 쉽습니다. 이 기회에 공자께서는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다른 나라라면...........어느 나라로 가는 것이 좋겠소?"
"공자의 외가가 위(衛)나라이긴 합니다만, 그 곳은 너무 멀고 또한 큽니다. 멀면 속히 돌아올 수없고, 크면 변덕이 심합니다. 차라리 거나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나라와 가깝고, 나라 또한 작으니 공자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영원히 망명하는 것이 아닌만큼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좋소이다. 내 어찌 편한 것을 바라겠소."
이리하여 그 날 밤, 소백(召白)과 포숙은 임치성을 바져나가 거나라로 망명하였다.
거나라는 현재의 산동성 거현이다.
주나라 창업자 주무왕이 황제(黃帝)의 장남인 현효의 후예를 찾아내서 분봉한 나라이다. 고대의 성인(聖人)을 숭상한다는 상징적 의미였기 때문에 나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작위는 자작(子爵)이다.
그러나 포숙(鮑叔)이 소백의 망명지로 거나라를 택했다는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바가 크다.
- 기필코 돌아오리라!
장래에 발생하게 될지 모를 군위 다툼에 대한 강한 의지였다.
그러나 제양공에게 어찌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을 것인가.
그는 굳이 소백의 뒤를 쫓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관중만이 그들의 뜻을 짐작하고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 소백(召白)이라.............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랬다.
관중(管仲)은 규와 소백이 언젠가는 제나라 군주 자리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여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중이 보기에 제양공의 종말은 멀지 않았다. 후계자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여러 공자 중 군위 다툼을 벌일 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규(糾)와 소백(召白)뿐이다.
두 공자 중 하나가 제(齊)나라 군위에 오를 것이다.
'그때...........바깥보다는 안이 유리하다.'
관중(管仲)이 규에게 침묵한 채 기다리라고 간언한 것도 바로 그러한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와 규(糾)는 타국으로의 망명 대신 집 안에 특어박혀 때가 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한 중에 연칭과 관지보가 반란을 일으켜 제양공을 살해했다.
관중(管仲)의 예감이 적중한 것이었다. 다만 연칭과 관지보가 그 주동자라는 것이 다소 뜻밖이었다.
'원로대신 고혜나 대부 옹름 정도가 되지 않을까.'
관중은 나름대로 여러가지 각본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빗나갔다. 또 한가지 허를 찔린 것은 공손무지(公孫無知)의 등장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공손무지는 제희공의 동복동생인 이중년의 아들이었다.
그는 공손일뿐 공자가 아니다. 군위계승에 대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데 연칭과 관지보는 그런 공손무지(公孫無知)와 결탁했다. 이것은 관중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철저히 준비해왔는가.'
제양공의 죽음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은 전혀 규를 군위에 올릴 틈을 찾지 못했다. 공손무지가 임금이 되고, 연칭은 정경, 관지보는 아경에 올랐다.
앗, 하는 순간의 일이었다.
'자칫하면 규(糾) 공자의 목숨까지도 위험하다.'
정통성이 없는 자가 군주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정통성을 지닌 자를 제거하는일이 아니겠는가?
'떠나자.'
관중(管仲)은 망명 준비에 착수했다.
"언제쯤 떠나는 것이 좋겠는가?"
규의 또 다른 보좌관 소홀이 물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관중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가까우면서도 큰 나라, 또한 규 공자를 후원해줄 수 있는 나라."
"그렇다면 노(魯)나라밖에 없군."
"그렇네, 규 공자가 가실 곳은 바로 그곳밖에 없네."
규(糾)의 생모는 노나라의 공녀였던 것이다.
관중과 소홀이 한창 이런 의논을 하고 있는 중에 궁정에서 사람을 보내왔다는 기별이 왔다. 관중(管仲)은 궁에서 나왔다는 공손무지의 사자를 만나보았다.
- 아경 관지보께서 그대를 천거하였소. 이에 주공께서는 그대를 대부에 임명하기로 결정하시었소. 내일 아침 조당에 들어 주공을 알현하시오.
사자는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관중(管仲)은 뜰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겨울 하늘은 짙은 회색빛이었다.
그는 하늘에게이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목도 튼튼하지 못하거늘, 나의 신세까지 망치려 드는구나."
다음날 아침, 궁에서 나온 사자가 관중(管仲)의 집 대문을 열었을 때 그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관중의 집뿐만이 아니었다. 소홀(召忽)의 집도 비었다.
공자 규(糾)의 행적도 묘연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