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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고전 읽기(7. 16.) 자료입니다.
이번에도 끝내지 못합니다. 재미 있어서...
L.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역, 갈무리 1995.
제7장 소련의 가족, 청년, 문화
1. 가족 내부의 테르미도르 반동
10월 혁명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하였다. 갓 탄생한 소련 정부는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모든 정치적⋅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유사 이래 어떤 정부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에게 모든 형태의 경제적⋅문화적 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조치를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취했다. 그러나 가장 대담한 혁명도 ‘전능한’ 영국 의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임신, 출산, 육아 등의 부담을 동등하게 남성과 여성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다.(배반164)
계획에 따르면 일종의 폐쇄된 소기업인 가정 대신 산부인과 병원, 탁아소, 유치원, 학교, 공공 식당, 공공 세탁소, 보건소, 병원, 요양소, 체육단체 영화관 등의 완벽한 공공 서비스 체제가 가정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사회의 기관들이 가족의 가사를 완전히 소화하여 모든 세대들을 연대와 상호부조의 틀로 통일시킬 경우 여성과 사랑하는 부부는 천 년이나 지속된 족쇄를 진정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배반164)
그러나 아직까지 문제들 중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4천만 소련 가정은 절대 다수가 중세적 반동, 여성 노예제와 히스테리, 아동에 대한 일상적인 모욕, 여성과 아동의 미신 등이 자라는 어두운 소^굴을 이루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소련의 가족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연속적인 변천은 소련 사회의 실제 현실과 소련 지배층의 진화 과정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배반164-165)
정부가 창설한 탁아소, 유치원 등과 같은 기관을 신뢰하지 않던 시기를 잠시 경과한 후 근로여성과 이후 좀 더 선진적인 농민들은 가사의 사회화뿐만 아니라 아동을 집단적으로 돌보는 제도의 한없는 장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소련 사회는 너무 가난하고 문화수준이 낙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국가의 실제 자원은 공산당의 계획이나 의도에 부합하지 못했다. 가족을 ‘철폐’할 수는 없다. 가족은 더 좋은 다른 형태로 대체되어야 한다. 여성의 실제적인 해방은 ‘일반화된 궁핍’의 상황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이미 80년 전에 맑스가 정식화한 이 엄격한 진실을 경험이 곧 증명했을 뿐이었다.(배반165)
상황이 아주 어려운 몇 년 동안 곳곳의 노동자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가족들은 공장이나 다른 공공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적 삶으로 가는 이행기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 식량배급표가 철폐된 1935년부터 상황이 좋은 노동자들은 가정의 식탁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후퇴현상을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이라고 간주한다면 부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체제는 시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사태를 비관적으로 만든 것은 관료집단이 조직한 ‘공공 식단’에 대해서 노동자들과 부인들이 가졌던 판단이었다. 린네르 천이 세탁되는 양보다 찢겨지고 도난당하는 양이 많은 공공 세탁소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배반165)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현재 웅변가들과 언론인들에 의해서 후안무치하게 찬양되고 있는 가정 취사와 세탁은 노동자의 부인들이 다시 자신들^의 그릇과 남비로 돌아간다는 것 즉 옛날의 노예제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 사회주의의 완벽하고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선언한 코민테른의 결의문이 공장지대의 여성들에게 아주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겠는가!(배반165-166)
농촌의 가정은 가내수공업뿐만 아니라 농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의 가정보다 한없이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몇 안 되는 일반적으로 지극히 빈곤한 농촌 공동체가 혁명의 첫 몇 년간 공공 식당과 탁아소를 도입했다. 처음 발표된 담화문들은 농촌의 집단화가 가족제도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조치들을 시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부터 후퇴가 시작되었을 때 현실은 이 허풍스런 말의 그림자로부터 갑자기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농민은 집단농장에서 자기만이 먹을 수 있는 빵과 가축에게 먹일 사료만을 얻을 수 있다. 육류, 유제품, 채소 등은 거의 완전히 집단농장 옆에 위치한 개인소유의 텃밭에서만 나온다. 일단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이 가족의 고립된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는 이상 공공 식당에 대한 말은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따라서 개인소유의 소규모 농장은 개인 가정의 새로운 물질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여성에게 이중의 부담으로 작용하였다.(배반166)
1932년에 일상적으로 운영되는 탁아소 수용인원은 전체 60만 명이었고 들판에서 일할 경우에만 아이를 맡는 탁아소 수용인원은 40만 명에 불과했다. 1935년에 어린이용 침대의 수는 560만 개에 달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침대의 수는 전체 수의 아주 적은 비율에 불과했다. 더욱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일반적인 탁아의 요구들에 대해서도 탁아소 서비스가 대체로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배반166)
아주 최근에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기아들과 고아들이 개인 가정에서 양육되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가장 고위의 기관을 통해서 관료집단은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적 기능을 자신들이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1930년부터 1935년의 5년간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의 수는 37만 명에서 118만 1천 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의 수치는 너무 낮아서 두드러지는데 1935년의 수치는 소련의 가족 수에 비해서 대양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조금만 더 조사를 진행하면 이러한 유치원의 대다수나 심지어 거의 모두가 행정부, 기술요원, 스타하노프 운동원 등의 자녀들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게 될 것이다.(배반167)
수도의 고아원에서는 약 1,500명의 아동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거리로 나앉는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1935년 가을 2개월 동안 “아동을 버린 죄로 7,500명의 부모들이 재판정에 섰다.” 이들을 재판정에 서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몇 천 명의 부모들이 재판정을 모면했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 속에 놓인” 아동 중에서 얼마나 많은 수가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까? 아주 어려운 상황과 그냥 어려운 상황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은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공개되어 있는 집 없는 아이들의 대단히 많은 숫자는 과거의 가정이 너무 빨리 해체되어 새로운 제도들이 이것을 대체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위기의 직접적 결과이다.(배반167)
우연한 신문의 발언이나 형사 사건을 통해 독자들은 돈을 지불하는 남자의 이해에 의해서 여성이 극단적으로 타락하는 현상인 매춘의 존재를 소련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해 가을 이즈베스^챠는 독자들에게 모스크바에서 “프롤레타리아 수도의 거리에서 비밀리에 자신의 몸을 파는 1,0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체포된 여성 중에는 177명의 노동자, 92명의 점원, 5명의 대학생이 있었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는가? 불충분한 임금, 궁핍, “옷이나 신발을 살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한” 필요 등이 원인이었다.(배반167-168)
이들의 존재가 “과거의 잔재”라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젊은 세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이성을 갖추고 있다면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사회악에 대해서 소련 체제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매춘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신문들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한에서 “매춘행위는 감소하고 있다”고 물론 주장하고 있다. 기아와 피폐의 해인 1931년부터 1933년 사이의 상황과 비교하면 이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화폐경제가 회복되고 직접적 배급제도가 철폐되었으므로 집 없는 아동들과 매춘은 불가피하게 새로이 증가할 것이다. 특권층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버림받는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 아닌가!(배반168)
집 없는 아동의 많은 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여성의 어려운 상황을 가장 오류 없이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프라우다가지도 가끔 쓰디쓴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아주 심각한 위협 요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혁명정부는 여성에게 낙태의 권리를 부여하였다. 거세된 남자들과 노처녀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궁핍과 가족의 어려움 속에서 낙태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권리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인 낙태 역시 현재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 체제에서 특권으로 변질되었다.(배반168)
필요한 의학적 도움과 위생시설을 갖춘 낙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이 없음이 밝혀지자 국가는 갑자기 방침을 바꾸어 낙태를 금지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상황의 필요를 강변하고 있다. 소련 대법원의 판사 솔츠(Soltz)는 결혼문제 전문가이다. 앞으로 시행될 낙태금지 정책을 옹호하면서 그는 실업자가 없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엄마가 되는 기쁨”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경찰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의 철학이다. 바로 전에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많은 여성들에게 그리고 아마 절대 다수의 여성들에게 출산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했었다.(배반169)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간수의 손아귀에서 고생할 사람들은 주로 근로여성, 하인, 농민의 부인 등인데 이들은 자신의 어려움들을 숨기기가 힘들다. 고급 향수와 기타 사치품의 수요를 창출하는 고위층의 “우리 여성들”은 관대한 법이 보는 바로 앞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한다. 집 없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한사코 모른 체 하면서 솔츠는 결론 내린다. “우리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아이들을 낳으시지요”라고 수백만 근로여성들이 이 높으신 판사 나으리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배반169)
사회주의란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체제이지 모든 여성들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불한당 같은 경찰을 동원하여 “엄마가 되는 기쁨”을 강요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들 높으신 양반들은 완전히 잊어먹은 것 같다.(배반170)
낙태를 금지하는 법 초안이 소위 광범위한 대중의 논의를 위해 제출되었다. 그러나 소련 언론이라는 가는 체를 통과하기는 했지만 강한 불만과 억눌린 저항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토론은 그것이 개시되었을 때만큼 갑작스럽게 중단되었고 6월 27일에는 당 중안집행위원회에 의해서 치욕스런 초안이 세 배나 더 치욕스러운 법으로 전환되었다. 관료집단의 낙태금지 변명자들도 일부는 낭패의 빛을 보였다. 루이스 피셔는 이 법이 통탄할 정도의 오해가 존재하는 가운데 통과되었다고 선언했다. 고위관료의 부인들을 제외한 여성의 권리를 금지시키는 이 새로운 법은 실제로 테르미도르 반동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배반170)
루블화의 복권과 함께 동시에 가족도 복권되었다. 얼마나 은총이 가득한 우연의 일치인가! 그런데 이 복권은 국가의 물질적⋅문화적 파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공개적으로 “인간 사이에 사회주의적 관계를 창출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우리의 자식들과 손자들은 이 목표를 실현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소련의 지도자들은 깨어진 가족의 외형을 다시 아교로 이어붙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것뿐이 아니다. 극심한 벌칙의 위협을 동원하여 가족을 승리한 사회주의의 성스러운 중핵으로 바라볼 것을 강요하고 있다.(배반170)
공산주의의 기본적 정책들이 “좌익적 노선의 과도함”으로 선언되었다. 문화적 소양이 없는 속물들의 어리석고 썩어빠진 편견이 새로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소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끝없이 광활한 나라의 모든 구석구석에서는 어떤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언론은 오직 미세한 정도로만 가족 내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배반171)
너무 빈번하고 쉽게 발생하는 이혼을 반대하는 캠페인이 지금 시작되고 있다. 소련 입법자들의 창조적인 사고는 이혼을 신고할 때 신고료를 받고 이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신고료를 인상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를 이미 발명했었다. 위에서 이미 가족의 복권이 루블화의 교육적인 역할의 증대를 수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신고료 징수는 돈을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신고를 하기 어렵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 당연하다. 상류층 인사들에게는 아마 이 정도의 세금은 아무런 어려움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고급 아파트, 승용차, 기타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고위 인사들은 자신들의 신상을 필요 없이 알리지 않기 위해서 신고를 하지 않는다. 매춘의 무겁고 모욕적인 성격은 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해진다. 소련 사회의 상류층에서는 권력이 안락함과 결합되는데 여기서 매춘은 소규모 상호 서비스라는 우아한 형태를 갖추거나 심지어는 “사회주의 가족”의 측면을 뒤집어쓴다.(배반171)
서정적이며 학자풍인 서방의 “소련의 친구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지고 있다. 10월 혁명에 의해서 확립된 혼인법과 가족법은 당당한 긍지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부르주아 국가들의 법률창고로부터 대대적인 차용을 하면서 고쳐지고 찢겨졌다. 경멸의 눈빛을 보이면서 배반이라는 도장을 고의로 찍기라도 하듯이 낙태와 이혼의 무조건적인^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제출되었던 주장들 즉 “여성해방”, “개성을 추구할 권리의 옹호”, “모성보호” 등이 이제는 이러한 자유들을 제한하고 완전히 금지하기 위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배반171-172)
이혼 여성에 대한 위자료 지급과 같은 부르주아 법 형식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객관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관료지배층이 부르주아 법을 더욱 많이 도입해야 하는 사회적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다. 현재 관료집단이 가족을 신성시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이들이 사회관계의 위계를 안정적으로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위와 권력을 지지하는 4천만 개의 기관들을 통해 청년들을 현체제가 요구하는 규율로 묶어버리기 위한 필요성도 작용했다.(배반172)
새로운 세대의 교육을 국가의 손에 집중하고자 하는 희망을 소련 지배층은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는 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의 권위를 지지하는 일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을 정체된 생활양식의 전통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조금 전만 해도 학교와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어린이를 이용하여 술주정뱅이 부친과 종료를 가진 모친을 폭로하고 모욕주고 일반적으로 ‘재교육’시켰다. 어쨌든 이 방법은 부모의 권위를 뿌리째 흔들었다. 이 중요한 분야에서도 역시 급격한 정책 전환이 일어났다. 십계명의 제7조와 함께 제5조 “신을 모역하지 말라”도 완전히 권위를 회복했다.(배반172)
그런데 구세대의 권위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이미 종교와 관련된 정책의 전환을 가져왔다. 하느님의 존재, 그의 도움, 그리고 그의 기적에 대한 부정은, 혁명권력이 아동과 부모 사이에 박은 가장 예리한 쐐기였다. 그러나 문화의 발전, 진지한 선전, 과학에 입각한 교육보다 훨씬 앞^서서 진행되는 종교에 대한 투쟁은 야로슬라브스키와 같은 인물의 지도 아래 종종 익살과 장난기로 타락했다. 이제 가족에 대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대한 공격도 갑자기 멈추었다. 품위에 대한 평판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관료집단은 젊은 ‘무신론자들’에게 종교에 대한 싸움을 멈추고 독서를 하기 위해서 책상에 앉을 것을 명령했다. 종교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중립 정책이 이제 확립되었다.(배반172-173)
그러나 이것은 아직 제1단계에 불과하다. 사건의 진전이 관료집단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제2단계와 제3단계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배층의 견해가 드러내는 위선은 모든 곳에서 그리고 언제나 사회적 모순의 확대판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대체로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법칙이다. 사회주의가 이름에 값하려면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 인간관계, 시기와 술책이 없는 우정, 저속한 계산이 없는 사랑이 실현되어야 한다.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이상적인 규범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이 이 선언에 대해 더 크게 항의할수록 더 힘주어 강변한다.(배반173)
권력과 돈이 이성관계에 미치는 악행은 소련 관료집단 내에서 아주 흔하게 퍼져 있다. 마치 이들이 이 점에 대해서 서방의 부르주아지들을 능가하겠다는 목표를 정한 것 같다.(배반173)
‘정략 결혼’은^ 소련 언론이 우연하게 또는 피할 수 없이 정직함을 드러낼 때 자백하듯이 이제 완전히 부활했다. 자격요건, 임금, 고용, 계급 등이 점점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신발, 모피 외투, 아파트, 욕실 그리고 최종적 꿈인 승용차 구입 등의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칸방을 구하고자 하는 투쟁이 매년 모스크바에서 적지 않은 수의 부부들을 결합하고 헤어지게 한다. 그리고 친척관계가 결혼에 있어서 예외적인 중요성을 획득했다.(배반173-174)
소련에 대한 두꺼운 단행본의 가장 극적인 장들 중의 하나는 소련 가정의 해체와 붕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남편은 당원, 노동조합 간부, 군 사령관, 행정가를 역임하면서 새로운 취향을 개발한다. 그러나 부인은 가족이라는 굴레에 묶여 과거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소련 관료집단의 두 세대가 걸어온 길은 부인들이 남편에 의해서 거부되고 뒤쳐진 비극으로 가득하다. 같은 현상이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커다란 잔학 행위는 아마 관료집단 상층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 많은 비율은 교양이 거의 없는 벼락출세파들이고 모든 것이 자신들에게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고문서 보관소에 비치된 비밀문서나 회고록이 공개되면서 이들의 부인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한 추악한 범죄들이 드러날 것이다.(배반174)
소련 여성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법 앞에서의 완전한 평등은 노동자 여성이나 농촌 여성보다는 상류층 여성, 기술⋅관료⋅교육 등 일반적으로 지식 분야를 대표하는 여성 등에게 한없이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사회가 가족의 물질적 걱정을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주부는 희 옷을 입은 노예 즉 보모, 하인, 요리사 등을 부릴 수 있을 때에만 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 소련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4천만 가구들 중에서 5퍼센트 또는 10퍼센트만이 가정 노예의 노동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의존한다.(배반174-175)
소련에 존재하는 하인에 대한 정확한 인구조사 통계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소련의 법률체계만큼이나 소련 여성의 지위에 대한 사회주의적 평가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련의 통계는 ‘근로 여성’ 또는 ‘기타 다른 사람들’이란 이름하에 하인의 존재를 숨긴다! 저명한 공산주의자의 부인이 요리사를 구비하고 상점에 주문할 수 있는 전화를 가지고 있으며 심부름을 보낼 승용차 등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상점에 뛰어 가야 하고 저녁을 준비해야 하고 유치원이 있을 경우 거기까지 걸어가서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야 하는 근로 여성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사회주의라는 명찰이 이 사회적 격차를 은폐시킬 수는 없다. 이 격차는 서방의 부르주아 여성과 노동자 여성간의 격차만큼이나 크다.(배반175)
테르미도르 반동의 법률은 이제 부르주아 법 모델로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이 후퇴는 ‘새로운’ 가족의 성스러움에 대한 거짓 연설로 가려져 있다. 이 문제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의 실패자인 소련 지배층은 위선적인 품위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배반175)
특히 아동문제에 대한 높은 원칙과 추악한 현실 사이의 격차에 의해 충격을 받은 진지한 관찰자들이 있다. 집 없는 아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채택된 가혹한 형법적 조치들은 여성과 아동을 옹호하는 사회주의 법률이 조야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법률과 행정기구의 형태로 거짓 치장한 사상들의 광범위함과 관대함에 의해 속아버린 정반대 종류의 관찰자들도 있다. 궁핍한 주부, 창녀, 집 없는 아동들을 보면서 이들 낙관주의자들은 물질적 부가 좀 더 증대하면 사회^주의 법률에 피와 살이 붙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다.(배반175-176)
소련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의 증대에 눈을 감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관료집단에게 존경스럽게 미래의 열쇠를 맡기는 부류들이 있다. 이들은 불평등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안하는 수동적이고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낙관론자에 불과하다.(배반176)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노예로 만들었는가, 착취자가 이 양자를 어떻게 모두 지배했는가, 근로인민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상태에서 자신을 해방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떻게 해서 하나의 쇠사슬이 다른 쇠사슬로 바뀌었을 뿐인가−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준다. (…) 과거의 모든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은 대중이 통제하지 않는 억압체제의 수호자들과 모든 특권층에 대해서 근로인민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불신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한다.(배반176)
2. 청년에 대한 관료집단의 억압
모든 혁명정당은 상승하는 계급의 젊은 세대로부터 가장 주요한 지지를 획득한다. 부패한 정치세력은 청년을 자신의 깃발 아래로 결집시킬 능력을 상실한다. 정치의 전선에서 차례로 후퇴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들은 청년층을 혁명이나 파시즘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 지하에서 활동할 당시 볼셰비키당은 항상 청년 노동자의 당이었다. 그러나 멘셰비키당은 속물적 품위를 지키려는 노동자계급 상층부에지지 기반을 두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볼셰비키당을 경멸하였다. 혁명은 이들의 오류를 가차 없이 드러내었다. 혁명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청년들은 성숙한 연령층 그리고 심지어는 노년층을 이끌었다.(배반177)
10월 혁명은 소련의 새로운 세대에게 역사적 진보를 향한 충동을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혁명은 청년들이 단번에 보수적인 생활양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인간 사회 역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커다란 비밀 즉 변증법의 첫 비밀을 이들에게 보여주었다.(배반177)
청년세대는 현재 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며 이중 많은 수가 아주 열정적으로 탐구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체육 분야에서도 이들은 경제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고공 낙하, 사격술 등 가장 대담하고 호전적인 영역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진취적이며 대담한 청년들은 모든 종류의 위험한 원정에 나서고 있다. (…)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혁명 이후 세대들은 아직도 구세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들은 작업대상, 작업방식 등과 관련하여 상부의 명령을 받고 있다. 명령의 가장 높은 형태인 정치는 전적으로 소위 ‘고참세대’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그리고 청년들에 대한 열정적인 자화자찬성 연설을 통해 이들 고참세대는 경계심을 풀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독점권을 지키고 있다.(배반178)
엥겔스는 국가의 사멸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구상한 적이 없다. 국가의 사멸이란 경찰을 동원한 모든 종류의 억압을 교육받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치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과업을 젊은 세대들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엥겔스와 레닌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전망을 대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국가권력을 정복한 ‘고참’ 세대는 국가를 일소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고 다음 세대는 이 작업을 완료할 것이다.(배반178)
소련 정부는 관료지배층을 위대한 혁명세대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끊임없이 증가시키고 있는 억압 속에서 청년들은 숨 쉬고 있다. 공장, 집단농장, 군대 막사, 대학, 교실 그리고 탁아소는 아니더라도 유치원에서마저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충성과 무조건적인 복종이 소련 인민의 영광이라고 선언되고 있다. 최근 발명된 교육 관련 격언들과 경구들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로부터 모방한 것처럼 들린다. 아니면 괴벨스 자신이 스탈린의 조수들로부터 이것들을 대다수 모방했는지도 모른다.(배반179)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수없이 많은 죽도록 따분한 모임들, 피할 수 없는 명예회장님의 훈화, 경애하는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구호 제창, 어른들과 똑같이 속생각과 전혀 다른 발언을 남발하는 미리 짜여진 목청 높은 토론회 등을 아동들은 참아내야 한다. 극소수의 순수한 아동들은 엄하게 다스려진다. 비밀경찰은 소위 ‘사회주의적 학교’에 끄나풀들을 들여보내 배움의 장에 배신과 밀고의 구역질나는 부패를 도입하고 있다. 당국이 강요하는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을 짓누르는 억압, 거짓, 지루함 속에서 생각이 깊은 교사들과 아동들은 글을 통해 몰래 자신들이 겪는 일상적인 공포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배반179)
계급투쟁과 혁명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은 소비에트 민주주의 속에서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교훈들을 의식적으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이들은 사회생활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성숙할 것이다. 독립적인 사고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성격은 비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고를 교환하고 오류를 범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오류를 교정하는 초보적인 기회를 현재 박탈당하고 있다. 자신들의 문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문제들은 이들 대신 어디선가 미리 결정되어진다.(배반179)
결정된 사항들을 실행에 옮기고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칭송하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이다. 모든 비판적인 언사는 관료집단에^ 의해 질식된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체계적으로 제거되거나 억압된다. 수백만의 청년들 중에서 단 한 명의 거물급도 탄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배반179-180)
공학, 과학, 문학, 스포츠, 체스게임 등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청년들은 미래에 전개될 거대한 행동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전혀 준비가 안 된 구세대와 경쟁하면서 이들을 필적하거나 압도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서는 구세대에게 짓눌리면서 지낸다. 따라서 이들의 미래는 세 가지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 관료집단에 들어가 출세를 도모하는 것이 한 가지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말 한마디 없이 억압을 감내하면서 경제, 과학, 또는 좁은 개인적 관심의 영역에 몰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하활동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면서 자아를 단련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의 길은 극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극소수만이 저항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간층은 아주 다양하고 이질적인 구성을 나타낸다.(배반180)
내전의 시기는 금욕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신경제정책을 거치면서 탐욕은 아닐지라도 쾌락을 추구하는 시기로 이행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또다시 금욕주의가 강요되었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는 청년과 대중에게만 강요되었다. 이미 지배층은 개인적인 번영을 누릴 지위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금욕주의에 대한 급작스러운 거부반응이 의심할 여지없이 나타났다. 개인주의적 출세욕이 대중들 특히 청년들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나 개인적인 복지와 번영은 대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지배층에 굽신거리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배반180)
사회주의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정반대로 기독교의 금욕주의와는 아주 적대적이다. 즉 현세에 집착하는 점에서만 사회주의는 모든 종교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현세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단계들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번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관심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어떤 세대도 자신의 처지를 비약할 수는 없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현재 ‘저열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배반181)
시장관계의 부활은 개인적인 번영의 기회를 당연히 열어놓고 있다. 공학에 대한 소련 청년들의 많은 관심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공학자들이 의사나 교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이 지적인 억압, 사상적 반동, 상부의 출세주의 의식 장려와 결합할 경우에는 소위 ‘사회주의적 문화’가 가장 극단적인 반사회적 이기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배반181)
그러나 청년들을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조야한 비방이 될 것이다.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관대하며, 동정심이 있으며, 진취적이다. 출세주의는 상부에서 이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지나지 않는다.(배반181)
한편으로 수십만의 청년 ‘백위군’과 ‘기회주의자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청년동맹과 당에서 축출당하고 체포되고 유형에 처해지는 현상은 의식적인 정치적 저항의 샘이 좌우익을 막론하고 아직 고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이 샘물은 새로운 위력을 보이면서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참을성이 없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불안정한 부류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감정이 피해를 입자 테러를 통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다.(배반182)
최근 테러행위의 폭발은 구지배계급이나 쿨락이 아니라 전적으로 청년, 공산주의 청년동맹, 당의 대오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빈번히 지배층의 자식들도 테러행위에 가담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완전히 무력하기 그지없지만 개인적인 테러행위는 아주 중요한 징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관료집단과 대중 특히 청년 사이에 존재하는 날카로운 모순이 이것을 통해 특징적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배반182)
경제적 난관, 고공 낙하, 북극 탐험, 과시하는 듯한 무관심, ‘낭만적인 불량배적 행동’, 테러주의 분위기, 개인적인 테러행위 등은 모두 구세대^의 참을 수 없는 억압에 대한 젊은 세대의 폭발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증대되고 있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안전판의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 안전판도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배반182-183)
1936년 4월 크레믈린 궁에서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제10차 대회가 열렸다. (…) 이 단체의 총비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는 …산업과 재정에 대한 계획, 생산비 감소, 경제회계, 농산물 파종, 그리고 다른 중요한 국가적 문제들을 마치 우리가 결정하는 것처럼 수다떠는 행위를 종식시켜야 한다.”(배반183)
이 단체의 마지막 대회가 된 대회는 두 개의 개혁안을 동시에 채택했다. 첫째, 나이 제한의 규제 완화로 23세 이상의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둘째, 일반적 정치사안뿐만 아니라 현안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단체가 개입할 권한을 박탈당했다. (…) 이러한 조치의 주요한 이유는 이 단체를 이미 숙청이 적절히 진행된 당의 명령에 노예처럼 복종하게 하는 데 있다. 이 조치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였다. 젊은 세대에 대한 관료집단의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배반184)
토론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하기 위해 자신들이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를 수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공개했던 대회의 연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직하게 개혁의 목적을 설명했다. “우리에게 제2의 당은 필요 없다.”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확실히 질식되지 않으면 제2의 당이 될 위험이 있다고 지배층이 보고 있음이 이 주장을 통해 드러났다. 이 위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내비치기 위해서 또 다른 연사가 경고조로 선언하였다. “바로 트로츠키가 당시 반레닌주의적 반볼셰키적 제2당의 창설을 청년들에게 참주선동하였다 등등.” 이 연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케케묵었다. 실제로 필자는 ‘당시’ 정부의 관료화가 심화될 경우 청년층과의^ 단절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것이고 제2당이 탄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를 했을 뿐이었다.(배반184-185)
타락해가는 당은 출세주의자들에게만 매력이 있었다. 정직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청년들은 비잔틴제국 스타일의 노예근성, 허풍, 특권과 변덕에 대한 은폐, 별로 능력도 없는 관료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는 행위 등에 대해서 구역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 관료들은 능력부족으로 하늘의 별을 딸 수 없어서 몸의 이곳저곳에 별을 달고 다닌다.(배반185)
결국 주요 대중들의 동맹관계는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서 판가름 날 것이다. 즉 전쟁, 파시즘의 새로운 성공, 또는 이와 반대로 서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등이 사태를 결정할 것이다. 어쨌든 모든 권리들을 박탈당한 청년들이 거대한 폭발력을 가진 역사적 물결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관료집단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배반185)
3. 민족과 문화
민족문제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정책은 10월 혁명의 승리를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국내의 분열적 경향과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에서도 소련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국가의 관료주의적 퇴보는 민족문제에 맷돌처럼 짓누르는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레닌이 1923년 봄에 열리기로 예정된 제12차 당 대회에서 관료집단과 특히 스탈린에 대해서 첫 투쟁을 시작할 구상을 한 것도 바로 이 민족문제에서 비롯되었다.(배반186)
혁명으로 떨쳐 일어난 민족들의 문화적 요구들은 이들에게 가장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동시에 산업은 소련의 모든 구성부분들을 일반적으로 중앙집중적 계획에 복종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와 문화는 장벽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문화적 자치의 경향과 경제적 중앙집중주의 경향은 자연히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모순이 화해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다.(배반186)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통치과정에 대중들이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경제적 중앙집중주의의 올바른 요구와 민족문화의 살아 있는 중력 사이에 필요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각 민족의 의자가 관료집단의 의지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관료집단은 경제와 문화를 행정적 편의와 자신의 구체적 이해를 도모하는 방향에서 접근한다.(배반186-187)
경제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 정책의 영역에서도 소련의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진보적인 과업을 일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비용을 낭비하면서 이 과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소련의 후진 민족들에 대한 사업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 후진 민족들은 현존하는 타민족들의 우수한 문화적 성과들을 필요에 의해서 흡수, 모방, 동화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관료집단은 이들 후진 민족들을 위해 부르주아 그리고 심지어는 프티부르주아 문화의 기본적인 혜택들을 누리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많은 영역들과 민족들에 대해서 소련의 정권은 상당한 정도로 과거 피터 대제와 그의 동료들이 이룩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배반187)
소련의 각급 학교에서 수업은 현재 80개 이상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 다수를 위해서 새로운 알파베트를 개발하거나 지극히 귀족적인 아시아의 알파베트를 좀더 민주적인 라틴 알파베트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했다. 신문도 같은 숫자의 언어로 각각 발행되고 있다. 신문은 사상 처음으로 농민과 유목민에게 인간 문화의 기본 개념을 전달해 주고 있다. 차르 제국이 보유하고 있었던 광대한 영토 내에서 이제 토착산업이 등장하고 있다. 오래된 반(半)부족적 문화는 트랙터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다. 문자해독이 가능해지면서 과학적인 영농과 의학이 발달하고 있다. 새로운 인간집단을 육성하는 이 작업의 의의는 진실로 크다고 할 것이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고 맑스가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옳았다.(배반187)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관차조차 기적을 이룩할 수는 없다. 공간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다만 운동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을 뿐이다.(배반187)
잠시 법과 제도 등을 제쳐두고 기본대중들의 일상생활을 살펴보자. 그리고 의도적으로 스스로는 물론 타인들을 속이지 않기로 하자. 그렇다면 관습이나 문화에 있어서 차르시대 그리고 부르주아 러시아의 유산이 맹아적인 사회주의의 성장을 압도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대중 자신들인데 이들은 생활수준이 조금만 높아지면 서방의 모델을 모방하려고 모든 수를 쓴다. 소련의 젊은 점원 그리고 종종 노동자 역시 옷과 행동거지에서 공장에서 우연^히 접촉하는 미국의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제조업과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도 외국 여자 관광객을 뚫어지게 관찰하여 그녀의 양식이나 예절 등을 배우려고 애쓴다. 이 일에서 성공하는 운좋은 소녀는 완전히 모방의 대상이 된다. 처지가 괜찮은 여성 노동자는 구식 단발머리보다는 ‘파마’를 좋아한다. 청소년들은 ‘서양댄스 서클’에 열성적으로 가입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진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이 아니라 프티부르주아 문화가 가부장적 삶을, 도시가 농촌을, 중심지가 벽촌을, 서방이 동방을 압도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배반188-189)
한편 소련의 특권층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류층을 모방한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자들은 외교관, 복합기업의 책임자, 엔지니어 등이다. (…) 그러나 슬프게도 소련에서 취향이 가장 고상한 대사들도 자본주의 문명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독자적인 특징들을 조금이라도 선보일 수 없었다. 이들은 외적인 화려함을 경멸하고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내적인 안정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의 주요한 야망은 가능하면 가장 완벽한 부르주아지의 속물을 닮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대다수의 경우 새로운 세계의 대표자가 아니며 단지 벼락부자처럼 느끼고 행동한다.(배반189)
그러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 전에 수행했던 문화적 과업을 소련이 이제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의 반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부적절한 것은 결코 아니다. (…)^ 부르주아 선구자들은 기술을 발명하고 이것을^ 경제와 문화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반면 소련은 이것들을 이미 완성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 덕분에 이 성과들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그리고 대규모로 도입한다.(배반189-190)
과거에는 사병들과 하사관들이 혁명운동 특히 농민운동에서 대개 봉기의 선두에 섰다. 소련 정부는 군대뿐만 아니라 국가기구 전체와 당, 공산주의 청년동맹, 노동조합 등을 통해서 인민의 일상적인 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가지고 있다. 기술, 위생, 예술, 스포츠 등의 기존 모델들이 원산지에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한없이 짧은 시간 내에 소련에서 이용되는 이유는 국가적 소유형태, 정치적 독재, 계획적 행정 방식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배반190)
현재 노동자계급은 아무리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수는 여전히 공산주의 강령을 버리지 않았고 강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규모의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관료집단은 노동자계급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채의 방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배반190)
소련 언론에서 그렇게도 많이 얘기되는 ‘인간 개조’는 현재 극에 달해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인간이 발전해야 사회주의적 개조가 되는가? 러시아인들은 독일의 거대한 종교개혁이나 프랑스의 대혁명을 경험한 적이 없다. 17세기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의 개혁과 혁명에 대해서 잠시 젖혀둔다고 하더라도, 앞의 이 두 용광로들로부터 부르주아적 개성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인간성 일반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일보 진전이었다. 1905년과 1917년 혁명을 통해 러시아 대중의 개성은 처음으로 눈떴으며 낙후된 환경 속에서나마 응결되었다. 즉 러시아는 압축된 형태와 가속화된 템포로 서방 부르주아 종교개혁과 혁명에 버금가는 인성교육을 거쳤다.(배반191)
그러나 이 작업이 채 끝나기도 훨씬 전에 러시아 자본주의의 태동기에 성립되었던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의 길로 도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소련 문화의 모순들은 이러한 도약이 잉태한 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을 반영하고 굴절할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깨어난 개성은 경제뿐만 아니라 가족생활과 서정시에서도 어느 정도 프티부르주아적 특성을 띨 수밖에 없다.(배반191)
관료집단 자신은 가장 극단적이고 때때로 통제되지 않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담지자가 되었다. 도급제, 토지의 개인적 소유, 생산 장려금, 훈장수여 등을 통해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전을 허용하고 권장하면서 이와 동시에 관료집단은 정신문화의 영역에 존재하는 개인주의의 진보적인 측면들을 가차 없이 억압하고 있다. 비판적 안목, 개인적 견해의 발전, 개인적 존엄의 배양 등은 개인주의의 진보적인 측면임에 틀림없는데 이것들을 관료집단은 여지없이 질식시키고 있다.(배반191)
특정 민족집단의 문화발전 수준이 상당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 집단이 사회와 개인의 문제들을 좀 더 밀접하게 다루면 다룰수록 이것들에 대한^ 관료집단의 억압은 더 무겁게 느껴지고 더 참을 수 없게 된다. 색깔과 규격이 똑같은 곤봉이 소련 내 모든 민족의 지적인 활동을 통제할 경우 민족문화의 고유성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게 된다.(배반191-192)
대중적 창조성의 모델이라는 이름 아래 모스크바 언론은 매일 러시아 언어로 관료집단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타민족 관변시인들의 송가를 출판하고 있다. 물론 이런 류의 시들은 노예근성과 재능의 빈곤이라는 척도 내에서만 차이가 있는 형편없는 시들이다.(배반192)
따라서 문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경찰기구가 대러시아 민족을 비롯해 모든 민족들을 억압하는 것에 있다.(배반192)
대러시아 출판사들의 과도하게 높은 비율은 대러시아인들이 다른 민족들을 희생시키면서 전제적인 특권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많다.(배반192)
소련 당국의 문화정책은 경제정책의 좌충우돌과 행정적 편의에 의해서 멋대로 바뀐다. 그러나 하나의 특징은 변하지 않고 있다. 즉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과 동시에 이전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프롤레타리아 문화’ 이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이론의 반대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는 엄격한 의미에서 영구적 체제가 아니라 이행기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장기간의 역사적 시기를 통해 사회를 지배할 의도가 전혀 없다; 새로운 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의 현세대는 부르주아 문화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동화하는 과업에 자신의 임무를 주로 한정한다;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으로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즉 노동자계급이 과거 억압의 흔적들을 짊어지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이 계급은 과거의 역사적 전통을 뚫고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 새로운 창조력이 발현할 가능성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사회 내에 용해되어 사라지는 한에서만 활짝 열린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르주아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아니라 사회주의 문화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배반193)
실험실의 방법을 통해 창조된 ‘프롤레타리아 예술’ 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문화는 산업의 성과를 먹으면서 자란다. 따라서 문화가 성장하고 세련되고 복잡성을 띠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기반이 넘쳐흘러야 한다.” 기본적인 경제문제들의 가장 성공적인 해결조차도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원리의 완전한 승리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전 민족적 기반 하에 과학적인 사상이 전진하고 새로운 예술이 발전할 때에만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씨앗은 줄기를 생성시킬 뿐만 아니라 꽃도 피룬 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발전은 모든 시^대의 생존능력과 의의를 확증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시금석이다.” 이 관점은 당시 지배적인 견해였는데 당국의 담화문에서 갑자기 이것이 “적대 계급에 투항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창조력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로써 스탈린과 부하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배반193-194)
후자는 오래지 않아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복음 선교자로 등장했는데 전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은 어쨌든 사회주의로의 길은 ‘거북이걸음’으로 발전할 것이고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할 시간을 수십 년 동안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문화의 성격에 대한 이들의 사상은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별로 영감을 불어넣어 주지도 못했다.(배반194)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의 폭풍우는 거북이 걸음이라는 전망을 뒤집어엎어 버렸다. 1931년의 끔찍한 기근이 닥쳐오기 바로 전에 이 나라는 이미 “사회주의로 진입했다”. 그래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작가와 미술가들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창조할 수 있기도 전에 또는 이 문화의 의미 있는 모델을 처음으로 수립하기도 전에 당국은 노동자계급이 무계급 사회에 용해되어 사라졌다고 선언했다.(배반194)
정신적 창조성은 자유를 요구한다. 자연을 기술에 그리고 기술을 계획에 복종시켜 자연자원이 인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두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보다 훨씬 높은 목적이 있다. 즉 인류의 창조적 힘을 모든 억압, 한계, 굴욕적인 의존으로부터 즉시 해방시키는 것이 인류 최고의 목적이다. 이 목적이 실현될 경우 개인간의 관계, 과학과 예술 등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어떠한 ‘계획’이나 강제의 그림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정신적인 창조성이 어느 정도 개인적이고 어느 정도 집단적인가는 전적으로 예술의 창조주체인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될 것이다.(배반194)
그러나 이행기 체제는 이와 전혀 다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는 미래의 문화가 아니라 과거의 야만상태를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신적 창조활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활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 혁명의 강령은 애초부터 이러한 한계들을 일시적인 악이라고 간주했을 뿐이었다. 새로운 체제가 강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모든 제한들이 차례로 제거되어 자유에 길을 내줄 의무를 지고 있었다. 어쨌든 내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해에 혁명 지도부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 창조적 자유에 대해서 제한을 가할 수는 있어도 어떤 경우에도 과학, 문학, 예술 분야에서 사령관 역할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배반195)
레닌은 ‘보수적인’ 예술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술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아주 조심스러워 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적극적으로 자백했다. 당시 예술 및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는 모든 종류의 모더니즘을 장려했는데 그의 행위는 레닌에게 종종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는 사적인 대화를 통해 톡톡 쏘는 발언들을 했을 뿐 자신의 예술 취향을 법으로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배반195)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는 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힌 대중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던 실험, 모색, 투쟁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들을 통해서만 새로운 문화 시대가 준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 년의 역사 동안 처음으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활기를 띠고 있었으며 자유롭고 대담하^게 사고하고 있었다. 예술의 모든 젊은 힘은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첫 몇 년 동안 희망과 용기가 충천하면서 사회주의 입법의 완벽한 모델들이 수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문학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이와 동시에 기술수단이 빈약했지만 소련의 영화는 현실에 대한 접근방식의 신선함과 활력으로 전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배반195-196)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문학학교들은 하나하나 목졸라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문학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거세 과정이 진행되었으며 반 이상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더 심각했다. 현지배층은 정신적 창조행위뿐만 아니라 이것의 발전과정마저 정치적 차원에서 금지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명령을 내리되 동의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이 방식은 강제수용소, 과학 영농, 음악 분야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철학, 자연과학,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건축, 문학, 극예술, 발레 등에도 군대의 명령처럼 당 중앙기관의 지시사항들이 익명으로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배반196)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적접적으로 봉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료집단은 미신과 같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자연과학과 생산영역을 연결시킬 것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크게 보아서 틀린 것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 단기적인 실용성에만 주목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실용성이 있는 발견을 포함하여 발명의 가장 귀중한 원천을 행정적 위협으로 봉쇄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모든 발명과 발견은 예상하지 못한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 수학자, 문헌학자, 군사이론가 등은 관료집단의 명령행정을 통해 쓰디쓴 경험을 체득하였다.(배반196)
그러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한없이 더 해악스러운 결과가 나타난다. 언론인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학자, 역사학자, 심지어는 통계학자까지도 자신의 작업이 당 노선의 일시적인 좌충우돌과 간접적으로라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머리를 싸맨다. 소련의 경제, 국내 및 국제 정책에 대해서는 ‘지도자’의 연설문으로부터 인용한 뻔한 말들로 모든 논지를 방어하고 난 후에야 글을 쓸 수 있다. 특히 글을 쓰기 전에 글의 모든 부분이 아무 문제가 없으며 당국이 좋다고 판단하도록 증명하는 일을 먼저 착수해야 한다. 당국의 견해에 100퍼센트 동조할 경우 이후에 발생한 불쾌한 사건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한다: 글의 독창성이 거세되고 무미건조함이 글 전체를 지배한다.(배반197)
소위 맑스주의 저작이라는 것들이 미리 승인을 받은 케케묵은 생각들을 반복하고 현재의 통치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오래된 인용구들을 여기저기에 옮겨 놓은 형식적인 집적물에 불과하다. 이런 류의 책들이 수백만 권 국가기구를 통해서 배포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교와 아첨과 기타 끈적거리는 물질로 제작된 책자들일 뿐이다. 뭔가 가치 있거나 독창적인 것을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거나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한편 소련의 모든 사회 분야가 발전하면서 거대한 과학적 문제들이 속속 제기되어 창조적인 노력을 목마르게 찾고 있다!(배반197)
이론 작업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양심은 더럽혀지고 짓밟히고 있다. 심지어 레닌 전집의 주석까지도 수석 편집인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판이 바뀔 때마다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도자들’의 이름은 확대되고 반대파의 이름은 비방받으며 이들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은 은폐된다. 당과 혁명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왜곡되고 중요 문서는 은폐되거나 위조되며 명성은 창조되거나 파괴된다.(배반197)
이에 못지않은 재앙이 예술 분야의 서적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유파들의 투쟁은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왔다. 이들 유파들에게 일종의 강제수용소가 생겨났다. 세라피모비치나 글라드코프와 같이 재능은 없으면서도 “올바르게 사상이 박힌” 작가들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와 있다. 예술적 양심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만큼의 흠집을 낼 수 없는 재능 있는 작가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도자들의 인용구들을 외우고 있는 관변 교수나 강사들의 사냥감이 되고 있다. 가장 출중한 화가들은 자살하거나 아주 먼 옛날의 사건에서 소재를 찾거나 아예 침묵을 지킨다. 진실되고 매우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은 밀수품 신세가 되어 책방 카운터 밑에서 불쑥 튀어나와 마치 우연하게 세상에 나온 것처럼 느껴진다.(배반198)
소련 예술의 일대기는 일종의 순교자 열전이다. 프라우다 사설에서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교시가 실린 이후 작가, 미술가, 무대감독, 심지어는 오페라 가수들이 줄줄이 굴욕적인 참회를 마치 전염병이 돈 것처럼 해댔다. 차례차례 이들은 자신의 과거 죄를 참회하고 철회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이 ‘형식주의’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피했다. 스탈린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에 대해서 몇 마디 찬사를 늘어놓자 그의 문학적 평가가 몇 주 내로 바뀌었으며 교과서가 개정되고 거리의 이름이 바뀌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새로운 오페라에 대해 고위 청중이 소감을 말하자 이것이 즉시 작곡가들을 위한 지시사항으로 돌변했다. 어느 작가회의에서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비서는 다음과 말했다: “스탈린 동지의 암시들은 모두에게 법과 같다.” 그리고 참석자 모두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물론 이중의 몇몇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문학에 대한 조롱을 완성하기라도 하듯이 러시아어 작문도 제대로 못하는 스탈린이 문체^의 고전이라고 선언되었다.(배반198-199)
당국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문화는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지고 있되 민족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문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행복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불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예술은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 과학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어쨌든 “미래의 건설상을 묘사하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지적하다”, “인류를 교정하라”는 등 당국의 주문은 철물점의 가격표나 기차시간표와 같은 정도로만 창조적인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을 뿐이다.(배반199)
관료집단은 자신이 선택하여 책을 출판하면서 독자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결국 관료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고 이들이 인민대중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비치게 만드는 예술 형태를 찾아내는 문제로 모든 것이 귀착된다.(배반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