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계간『시인정신』가을호 신인문학상 당선작] 노수옥 손영
늙은 장제사 외 4편 / 노수옥
미승리마 소피아
속력을 놓친 것은 신발 탓이다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경주마
헌신을 벗기고 발굽에 낀 모래와 불편한 심기까지 털어내는 노인
아들의 다리를 주무르듯 무뎌진 뒤꿈치를 사포로 쓱쓱 문지른다
갈고 닦기를 수차례
이제 삭제된 편자를 장제할 시간
사내를 믿고 그의 무릎에 몸을 맡기는 경주마
이 오래된 교감
서로의 눈빛을 읽고 있다
늙은 사내의 손목 아대에 편자와 발굽을 교정시킬 못이 달려 있다
모양새를 갖춘 편자
살에 대니 살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꽝꽝 내려치자 사방으로 불꽃이 튄다
못이 발굽을 뚫는 불안은 그가 감내할 고통
발목을 타고 오르는 망치의 진동을 견뎌야 한다
소피아의 충혈 된 눈망울이 가슴으로 들어오고
앞다리를 들어 올린 사내의 손에 힘이 빠진다
자식의 신발을 짓듯 편자를 짓는 노인
발에 신발을 맞춘다
앞코가 살짝 들린 편자가
끝나지 않는 트랙을 돌고 또 돈다
----------------------
책장冊葬
수시로 해가 지는 곳
대여한 목숨들이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
제목 출판년도 페이지와 저자의 이름을 매달고
침대마다 널브러진 여러 권의 책
갈피마다 빼곡한 병력이 구구절절 두툼한 전집은
이제 마지막 장을 남겨 놓았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함부로 굴린 중편소설 책갈피에서 마지막 징후가 피어올랐다
미세먼지 자욱한 세상과 단절한 젊음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홀로 소통중이다
Book쪽 하늘에 길이 있다고 파피루스에 적힌
피타고라스 정리를 풀어가던 형광펜
덧칠한 교과서가 옥상에서 떨어져 펼쳐져있다
질서를 무시한 속도는 파본이 나오는 법
뒤죽박죽 찢겨진 한 무더기의 책이 응급실에서 올라왔다
빨리 빨리 속독으로 읽어야 한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밭은 호흡으로 들린다
민첩하게 페이지를 넘겨도
해석할 수 없어 난해한 마지막 장을 덮는다
신간 한 권, 흰 시트에 덮였다
쪽수가 찢어진 파본이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간다
------------------------
인저리 타임
1
온힘을 다해 달린다
입구는 하나지만 출구는 많다
‘혹여나’가 뛰어들면 밀려나는 순서
‘누군가’에 의해 대오는 흩어진다
모처럼 주어진 짧은 시간
헐렁한 오늘은 대충 넘어가고 똑같은 내일이 복사되어 달려왔다
겨울 같은 여름
봄과 겨울의 간격은 아슬해서 그 누구도 잣대를 들이대지 못한다
완생이 아닌 미생
결코 물려받고 싶지 않은 유전자가 있다
먼지 같은 시간, 싱싱한 젊음이 통째로 편집된다
비정규직
2
경기가 끝날 무렵
대기심판이 남은 시간을 표시한 숫자판을 남자에게 들이민다
로스타임이 주어졌다 그에게 주어진 3개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뚝 잘린 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숨을 고르며
돌아가야 할 저편을 밀어낸다
날은 저물어가고
턱 버티고 서 있는 출구 놓친 골대
타임아웃,
온몸이 촛농처럼 녹아내린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심장을 찌른다
폐암 말기
--------------------------
노량진 고등어
노량진으로 등 푸른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우월한 DNA를 가진 고등동물
그들이 배워야 할 필수과목은
높은 파도를 넘어 바다를 완주하고
사나운 물고기를 피해
살아남는 법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려도
원뿔형 머리로 책 속을 헤집고
균형을 잡으려고 부레에
공기를 빵빵하게 불어넣었다
재수, 삼수, 사수
치열한 경쟁 속을 헤엄치던
비늘 없는 몸뚱이에 가시가 돋았다
상처 입은 한 무리 고등어 떼가
물살이 거친 노량진해협을 빠져나갔다
수평선을 넘지 못한 고등어들
다시 완주를 시작하려고
출발선에 서 있지만 결승점은 까마득하다
남아있는 고등어들 소금으로 간한 컵밥이 무리였는지
허기를 이기지 못한 부레에
서서히 바람이 빠지기 시작했다
비상식량으로 저장한 DHA가 다 소진되어
한물간 눈동자가 빛을 잃어간다
등에 새겨진 파도의 무늬도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
그들도 한때는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펄펄 뛰던 시절이 있었다
넓고 푸른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던
토막 난 꿈이 고시원 쪽방에 누웠다
-------------------------------------
엄마는 바리스타
아버지와 나를 볶는 일에 이골이 났지요
맛과 향을 골고루 갖춘
양질의 원두였던 아버지
한때는 엄마의 입안에서 혀끝을 유혹하는 휘발성의 남자였대요
이제는 탱글탱글 잘 익은 콩에 밀려
자루에 방치된 채 점점 산화되고 있어요
나른함과 나태를 일으켜 세우던 카페인은
탄닌의 쓴맛만 남아 엄마를 짜증나게 하지요
어쩌면 폐기처분 될지도 몰라요
지금 엄마의 관심사는
나를 최상의 맛과 향으로 볶아내는 일
나 더러 고양이 몸을 통과하라고 하네요
사향고양이 뱃속 같은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견딘 요나처럼 기도했어요
엄마의 맘에 쏙 드는 양질의 콩이 되겠다고
하지만 달달 볶아대는 엄마, 두 손 두 발 들었죠
자꾸만 세상과 믹스되는 나를 수없이 걸러내지요
오늘은 나를 최상의 루왁으로 로스팅 할 거예요
내 혀끝은 시나몬 향이 나는 고양이 맛을 느껴요
나를 영글게 했던 뜨거운 열대의 햇살과
미로 같던 고양이 뱃속을 통과한 기억을 지우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소프트한 맛으로
엄마 아닌 다른 여자를 유혹할래요
바라스타 엄마의 멋진 작품이 되어
(노수옥)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당선소감
남아있는 많은 날들
노수옥
늘 짝사랑이었습니다.
입김이라도 스치는 날은 여지없이 마음에 물집이 생겼습니다.
당선소식에 왼쪽 가슴이 아픕니다.
물집이 아문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른 오늘입니다.
만나지 못한 날이 많았지만
이제는 시를 만나 시의 표정을 읽고 싶습니다.
진정한 문학의 길을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
시와 동행할 수 있게 해주신 마경덕 선생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곁에서 힘이 되어준 중앙대 잉걸회 문우들
안양시학, 글향 문우들 고맙습니다.
내게 최고의 선물인 윤정 영진이,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부족한 글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 정대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깨어있는 감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겠습니다.
시와 동행해야 할 많은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내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심사평
문단에 시인 노수옥을 내보내며
정대구(시인)
오늘날 우리는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답답한 시대 혹은 ‘입구는 하나지만 출구가 많은’ 불안한 시대, 가치상실의 불확정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시는 시대를 반영한다. 현대시는 어쩔 수 없이 현대를 반영한다. 노수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촘촘히 투시하고 감각한다. 노수옥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몸 떨리게 체감한다. 노수옥의 시를 구성하는 시어와 시구들이 ‘구구절절’ 현대의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여여如如하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허나 노수옥은 결코 현실에 굴복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긍정의 마인드로 현실을 극복하는 그의 성실한 시정신을 높이 샀다. 오랜만에 진지한 자세로 현대를 고민하고 질문하는 의식과 감각이 깨어있는 현대시의 젊은 도전자를 만나 반갑다.
응모작 10편 모두 현대감각과 현실인식이 강하게 배어 있고 보폭이 크고 활달하게 미끄러지는 거침없는 문장력과 연결고리가 튼튼한 상상력 그리고 적절한 비유와 표현으로 무리가 없이 읽히는 시의 결구結構가 단단하여 노수옥의 오랜 문장수련을 보여준다.
이제 다음 다섯 편을 무작위로 찍어 간단한 독후감을 적으며 축하와 아울러 좀 모자라는 독창성을 보강하여 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늙은 장제사; 두시를 읽는 듯, 간곡한 생활인 장제사裝蹄士의 간난懇難한 모습을 읽는다.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경주마 소피아’를 맞아 ‘불편한 심기까지 털어내는 노인’ 짐승의 다리를 ‘아들의 다리를 주무르듯’ ‘못이 발굽을 뚫는’ 짐승이 당하는 ‘불안한 고통’을 함께 나누며 ‘자식의 신발을 짓듯 편자를 짓는 노인’ 짐승을 자식같이 여기는 아름다운 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인 노수옥의 휴머니티를 읽는다.
책장冊葬; ‘수시로 해가 지는’‘난해한’ 시대, 물질적 가치가 우선하는 현대는 정신적 가치기준인 종이책들의 수난시대, 책장冊欌이 책장冊葬으로 둔갑 ‘중환자’처럼 ‘흰 시트에 덮여’ 죽음의 ‘Book쪽 하늘’로 ‘침대에 실려 간다’니 우울 속에 맛보는 펀(pun)이 오히려 재미있지 않은가.
노량진 고등어; 수산시장으로 유명한 서울 노량진에 언제부턴가 ‘재수 삼수 사수/ 치열한 경쟁 속을 헤엄치’는 ‘고등동물’ ‘등 푸른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물살이 거친 노량진 해협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끝내 ‘수평선을 넘지 못한 고등어들’ ‘토막 난 꿈이 고시원 쪽방에 누웠단’다.
엄마는 바리스타; 맹모삼천지교를 뺨치는 ‘엄마의 관심사’는 화자인 ‘나를 최상의 맛과 향으로 볶아내는 일’// ‘나더러 고양이 몸을 통과하라’고 강요한다. 엄마는‘아버지와 나를 볶는 일에 이골이 나 있다’ 엄마 등살에 역으로 잘 못 나가는 자식, ‘엄마의 멋진 작품이 되어/ 엄마 아닌 다른 여자를 유혹’하겠단다.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저리 타임; ‘완생이 아닌 미생’ ‘헐렁한 오늘은 대충 넘어가고 똑같은 내일이 반복되어 달려온’ ‘비정규직’ ‘그에게 주어진 3개월’간의 ‘로스타임’ 벌써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출구를 놓친 골대’ ‘타임아웃’을 당한 ‘폐암 말기’의 막막한 살길.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일몰의 교대식 외 4편 / 손영
낮과 밤의 교대식이 열린다
지평선 끝없이 펼쳐진 산언덕에서
산등성이에 걸린 해가 순식간에 들판 아래로 떨어지고
서쪽하늘은 노을을 켜고 있다
먼 바다를 건너온 저녁의 발소리에
주춤주춤 낮이 물러가는 소리
야근을 서두르는 저녁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루의 노동을 마감한 낮이 앞치마를 풀고 있다
집집마다 설거지를 마치고
TV 뉴스에 한눈을 파는 동안
낮과 밤이 섞이는 소리
이제
장엄한 의식이 끝났다
빈틈없이 사방이 캄캄해졌다
----------------------
봉인된 기억
끝없이 줄지어 선 복숭아나무 사이로
봄이 오고 바람과 햇살이 드나들었다
가지마다 단물이 흘러내리는 이곳은
내 기억의 중심
늘 그곳에서 과육의 향기가 날아온다
그 기억의 끝자락에는
포클레인의 굉음이 매달려있다 계절이 제 입을 떼기도 전
꽃을 버리고 건물을 선택한 도시는
신도시 대열에 합류했다
복사꽃빛의 땅은 모두 빌딩 속으로 사라졌다
꽃들이 매장된 거리
콘크리트로 포장을 끝낸 도시는 낯선 얼굴로 다가왔다
봄의 푸른 무릎으로 일어서던 마을에
분양을 알리는 전단지들이 꽃잎처럼 날아다녔다
고열로 펄펄 끓던 동생에게 떠먹이던 달콤한 황도복숭아
침이 고이던 물컹한 기억도 이제 딱딱해졌다
마트에 즐비한 복숭아통조림, 이 많은 복숭아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곳에서
문득, 사라진 복사꽃밭을 보았다
----------------------------
단명의 간판들
이 거리는 자주 분위기를 바꾼다
화려하거나 먹음직스럽거나,
새로운 이름이 들어서고 떠들썩하게 전단지를 뿌리지만
얼마 못가 폐업이 나붙고 임대가 새 주인을 찾고 있다
부활을 꿈꾸는 간판들은
모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늘 비슷하다
개업식에 몰려든 축하객들은
리본을 단 행운을 줄지어 문 앞에 장식한다
울긋불긋 레이스가 화려한 행운들
퇴직금을 털고 융자를 담아 올린 간판은 당당하다
언제부턴가 익숙한 표정으로 거리는 고개를 떨구고
리본에 묶인 행운은 어디론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추위와 목마름을 견디지 못한 돈나무는
지전을 떨어뜨리듯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조류독감이 다녀가고,
광우병이 다녀가고
몇 달째 밀린 임대료에 간판의 불빛이 흐려졌다
옆 가게 설렁탕집
행복부동산이 몇 차례 들락거리더니
새로운 간판이 허공을 밀고 올라갔다
환한 간판 뒤편에 서성이던 어둠이 한발 물러섰다
저 벽을 붙잡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짧은 생을 예감한 불안한 간판
공중에서 휘청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준다
--------------------------
폐선
거침없는 질주에 기꺼이 몸을 열어 준 바다
꽁무니를 쫓아오던 갈매기 떼가
세상을 이어주고 꿈을 실어 나를 때
세상은 모두 그의 편이었다
파도에 치어
세상 끝자락까지 떠밀려온 폐선
갯벌에 누운 지 몇 해가 지났다
바람에 휩쓸릴 때마다
삐걱삐걱 금가는 소리, 살점 떨어지는 소리
높은 파도자락이 다녀간 흔적을 붙잡고
폐선의 이마 위로
갯강구 떼가 몰려다닌다
한때 몇 개의 회사를 거느렸던 그의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완성한 퍼즐은 어느 날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경호를 받았던 환호나 찬사의 목소리도 모두 떠났다
이제는 요양원에 안착한 저 폐선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큰 바다로 날아가는 재기의 꿈
어느 모래밭에 묻었는지
요양원 침대에 두 손 묶인 채 기약 없이 누워있다
----------------------------------
왕고들빼기 일지
잡초들이 모두 뽑혀나간 꽃밭
홀로 살아남은 왕고들빼기
꽃들에 끼어 짐짓 꽃인 척 뿌리 내려 튼실히 차올랐다
지친 폭우와 장마에도
질기게 여름을 붙들고 살아남았다
성장일지 기록할 사이도 없이
키를 늘리고 가슴을 세우더니
머리에 화관을 쓴 듯 꽃대를 주렁주렁 피워 올렸다
백일홍 맨드라미 연신 제 매무새 만지느라 바쁜 틈에
쉬지 않고 꽃술 하늘거리며
허공으로 씨를 날려 보낸다
멀리멀리 날아가 부디 터를 잡아라
지나가는 바람의 품에 슬쩍 밀어 넣는다
바람의 등을 타고 멀어지는 씨앗들
노심초사 자식걱정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제 몸 물기를 말려 수척한 왕고들빼기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고
추신을 덧붙인다
내년 꽃밭 주변에는
어미 닮은 잡초들 푸르게 돋아날 것이다
(손영)
진해 출생.
마산교육대학 졸업. 2015년『시인정신』으로 등단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당선 소감
詩가 준 기쁨
손영
칠월의 끝자락 그악스레 울어대던 매미도 목청을 내려놓은 고요한 시간, 정적을 깨며 당선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교단에 서던 첫날처럼.
어릴 때 틈만 나면 책을 보는 나에게 엄마는 활자귀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책을 잔뜩 쌓아두고 질릴 때까지 책 속에 빠져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바람은 책을 가까이 하는 교직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활자 속에 빠졌던 많은 시간이 시를 쓰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칼날을 밀어내는 단호박, 그 작은 체구에 숨은 당찬 오기를 보았다. 퇴근길 샐러리맨의 가방에서 좌절과 피로도 읽었다. 이것들을 끌고 와 침대에 누워서도 쓰다만 시의 꼬리를 잡고 잠을 설친다.
사물을 날카롭게 보는 눈이 생기고 대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고 해부하게 되었다.
신선한 충격, 시가 내게 준 기쁨이다.
좌절할 때마다 용기로 다시 일어서게 해주신 마경덕 선생님, 내 시를 인정해 주신 시인정신 주간님과 심사위원님께도 엎드려 절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제 내 외로움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심사평
정일남 시인
한 시인을 문단에 등단시킨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몇 편의 시가 마음에 든다고 추천한다는 것이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6,70년대엔 신인추천을 일회에 한해서 등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2회 내지는 3회를 거친 후에 문단에 등단시켰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신인을 등단시켰기 때문에 시인의 위상이 높았고 독자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시인이 양산되었고 시인의 가치가 추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문예지를 통해 시가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시와 가까워지기보다는 시와 독자와의 틈이 더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그 원인이 시인에게도 있고 독자에게도 있다고 본다. 시와 독자가 가까워지려면 시인과 독자가 서로 노력해야 하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손영 씨의 시를 읽어보았다. 모든 시가 수준이 고르다는 것, 시를 허술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모호한 수사나 기교나 상상에 치우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시를 찾아낸다는 것이 믿음이 갔다. 시를 먼 곳에서 찾는 게 아니고 내 주변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시를 더 압축하고 불필요한 것을 가위로 잘라내야 할 숙제는 남아있다.
“봉인된 기억”은 과수원이 포클레인에 의해 해체되면서 그 자리에 신도시가 이뤄지는 문명사회의 아픔을 보여준다. 과수원은 사라졌지만 <늘 그곳에서 과육의 향기가 날아온다>라고 한 표현이나 <복사꽃의 땅이 모두 빌딩 속으로 사라졌다>는 시구가 매우 인상적이다. “단명의 간판들”의 시는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명예퇴직으로 받은 퇴직금과 융자를 받아 전세를 내어 새 간판을 달고 영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생활비 조달이 안 되어 폐업하는 서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일몰의 교대식”은 하루가 끝나고 노동 현장에서 돌아온 노역자가 피로한 몸을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TV 앞에서 뉴스를 듣는 일상을 그렸다. 저녁이 밤으로 옮겨가는 시간이 노동자에겐 휴식을 취하는 가장 편안한 시간일 것이다. “왕고들빼기 일지”는 왕고들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일년생 식물이며 씀바귀와 더불어 식탁에 오르는 식품이다. 백일홍이나 맨드라미처럼 자랑스러운 꽃을 피우지는 않지만 꽃이 없는 게 아니다. 별 볼품은 없지만 그 꽃씨가 멀리 날아가 다시 종족을 번식시키는 생명력이 이 시의 힘이다. <멀리 날아가 부디 터를 잡아라> 이런 구절이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다. 마지막으로 ”폐선“은 한 인간이 살아온 과정을 폐선으로 상징한 것이다. 젊을 때는 거칠게 없던 질주였다. 이 시의 화자가 몇 개의 회사를 거느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노령에 접어든 화자 앞에 <폐선의 이마 위로 / 갯강구 떼가 몰려다니는> 것이고 생은 폐선처럼 요양원에 갇힌 몸이 된다.
늘 얘기하는 말이지만 시가 먼저냐 생활이 먼저냐. 생활을 포기하고 시만 쓸 수는 없다. 열심히 생업에 집착하는 것이 시를 밀고 가는 힘이라 생각한다. 마음이 가난해야 시를 쓸 수 있다. 부를 누리고 여유가 생기면 시를 쓰기 어려워진다. 손영 씨께 주고 싶은 말은 등단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시를 발표하느냐에 따라 살아남느냐 도태되고 마느냐, 의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중도 하차하면 등단시킨 잡지사를 배신하는 일이 된다. 추천하는 당사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손영 씨의 등단을 축하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