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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49. [역경의 열매] 박남선 (1-10) 불신자 가정서 선교사로… 50여년 삶은 주님 계획
아들 잔뜩 기대하셨던 집안 어른들 딸 낳자 사내 男에 착할 善으로 작명
사진: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한국에 온 박남선 선교사가 지난 9일 서울 연희동 M.I.(Mission International) 서울센터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한국 사회의 영적 발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진도 바다에서 침몰한 배로/ 꽃다운 영혼들이 뚝뚝 떨어져/ 사라져 간 날/ 절규하는 부모들의 아픈 신음소리를 들으며/ 이국땅에서 기도하나이다. (중략) 그 어떤 인간의 말로도/ 우리는 고통당한 저 가족들을 위로할 수 없지만/ 당신은 슬픔의 질고를 당한 저들을 위로할 수 있나이다./ 저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이 나라 백성들의 혼란된 마음에/ 당신의 뜻과 얼굴을 구하는/ 지혜의 마음이 있게 하소서."
인도 나갈랜드에서 기도와 선교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는 지난 4월 16일 한국으로부터 온 소식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월호 참사였다. 인도 TV에도 실시간으로 비친 광경에는 아픔과 절망이 가득했다. 물에 빠진 꽃다운 고교생 등 승객들의 절규가 이역만리에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 듯했다.
곧바로 인도의 형제자매들과 '한국 땅을 위한 기도'에 들어갔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당한 환난,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앉아 수일 동안 슬피 울며 하나님 앞에 금식 기도한 심정이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우리 백성, 그것도 너무나 순수하고 사랑스런 학생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생각해봤다. 하나님의 깊은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고통당한 희생자 가족을 위한 위로의 기도는 그날 이후 계속 드려왔다.
세월호 참사는 나를 성찰하고 다잡는 계기가 됐다. 세월호가 앞만 보고 달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병든(난파된) 한국 사회와 유사하다고 봤기 때문에 더욱 겸손과 절제 그리고 초기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특히 최근 한국교회에서 기도의 불씨가 조금씩 꺼져가고 있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기로 했다. 매일 진행돼온 새벽예배와 QT(경건의 시간), 기도의 행보를 더욱 가속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날 내가 품어온 신앙의 열정은 그대로인지를 점검하게 됐다.
50여년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뜻과 계획 속에 우리를 이 땅 가운데 불러주신 것 같다.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역경을 거쳐 선교사가 된 나의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인도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1962년 6월 7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태 안에서 발길질을 세게 해서 당연히 아들인 줄 알고 기대했었다고 한다. 그 시절 딸만 둘인 집안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어머니가 후일 들려준 태몽도 예사롭지 않았다. 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붉은 태양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어머니가 양손을 벌리고 힘껏 태양을 가슴에 감싸 안다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는 나를 잉태했다. 어머니의 태몽을 듣다보면 내 이름 끝 자가 영어로 'Sun'인 것이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들을 잔뜩 기대한 가족들은 내가 태어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외할머니에게 "앞으로 여자도 국회의원 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라면서 위로했지만 내가 아들이 아닌 데 대한 아쉬움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름이라도 남자처럼 하자며 사내 남(男)에 착할 선(善)으로 작명했다. 이름만이 아니라 남자처럼 키우기도 했다. 예쁜 옷을 입히기는커녕 옷과 헤어스타일을 남자처럼 해서 동네 사람들은 나를 한참동안 남자아이로 잘못 알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교식 아들 선호사상이 빚어낸 우스운 에피소드다.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남선 (1) 불신자 가정서 선교사로… 50여년 삶은 주님 계획
* [역경의 열매] 박남선 (2) 高 3때 난소 종양 판정 "주님, 새 삶을 주소서"
* [역경의 열매] 박남선 (3) "주님 일꾼 되자" 신학공부 위해 교직 접고 서울로
* [역경의 열매] 박남선 (4) 공산주의 붕괴 러시아인들의 영적 갈급을 보다
* [역경의 열매] 박남선 (5) 30년 중보기도에 온 가족 '예수님 영접' 기적이
* [역경의 열매] 박남선 (6) "날 도와줄 수 있겠니" 음성에 1995년 목사안수
* [역경의 열매] 박남선 (8) 선교 요충지 나갈랜드서의 시험 '뱀·해충·테러…'
* [역경의 열매] 박남선 (9) 해외선교 가장 큰 보람은 불쌍한 영혼 구제·양육
* [역경의 열매] 박남선 (10·끝) 늘 감동·기적 일어나는 인도 M.I. 되게 하소서
◇약력=1962년 대구 출생. 경북대 영문과 졸업. 85년 안동 영문고 교사.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기독교교육학 석·박사. 92년 서울 연희동에서 M.I.(Mission International) 서울 창립. 95년 목사 안수. 2007년 인도 나갈랜드 선교사 파송. 현재 인도 나갈랜드 디마푸르 M.I. 선교센터 운영.
***[역경의 열매] 박남선 (2) 高 3때 난소 종양 판정 "주님, 새 삶을 주소서"
한교연 전 대표회장인 박위근 목사 전도사 시절 새벽기도 중요성 알려줘
사진: 어렸을 적 대구 큰집에서 친척들하고 놀던 나(왼쪽 기둥에 기대선 아이). 내가 딸로 태어나자 서운한 부모님은 머리나 옷맵시를 전부 남자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과 친척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왔다. 우리 집 맞은편에 교회가 있었음에도 집안 분위기상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연히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다.
불도의 기운 속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의식한 것은 우리 집에 세 들어 사시는 전도사 가정 때문이었다. 전도사는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사모님은 알뜰하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전도사 부부가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문을 여는 소리에 종종 깼다. 어릴 적 일임에도 "저분들은 이른 새벽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하시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은 기억이 또렷하다. 전도사 부부 덕분에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이는 지금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하는 새벽기도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때 그 전도사님이 바로 한국교회연합 전 대표회장이신 박위근 서울 염천교회 원로목사님이시다. 한국교회에서 큰일을 많이 하시고 훌륭한 사역을 해오신 박 목사님이 나와 기독교의 첫 연결고리였다는 점은 내 삶에 엄청난 행운이 아닌가 싶다. 몇 년 전 인도 나갈랜드에서 사역한 뒤 여름에 잠시 귀국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박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당시 아련했던 추억을 회상하고 기독교 인연을 처음 만들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전도사와의 만남이 내 신앙을 본격적으로 키우지는 못했다. 교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그분 덕에 처음 싹튼 것은 맞지만 여전히 집안을 휘감고 있던 불교 기운을 어린 내가 쉽게 꺾기는 어려웠다. 교회를 가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은 어느새 교회를 가면 부모님이 엄청 화낼 거라는 두려움에 의해 사그라지곤 했다. 신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은 고교시절 때였다. 추첨을 통해 입학하게 된 곳이 대구 정화여고로 당시에는 미션스쿨이었다. 지금도 미션스쿨에 가게 된 것이 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고2 때인 1979년 여름 채플시간으로 기억한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학교를 방문해 운동장에서 말씀을 전했다. 당시 나는 사춘기여서 "왜 사람은 죽고 헤어질까" 등 '영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선교사가 설교 마지막에 "우리가 지금 만나서 헤어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히 만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선교사가 그 말을 마친 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내 마음에 감동이 와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때 성령의 불이 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에 감전된 듯하면서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게 내게는 주님이 주신 첫 성령의 흔적이 됐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듬해에도 이어진다. 고3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나는 한동안 배가 아프다가 그해 여름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통증이 심해져 병원에 찾아갔다가 난소 종양 판정을 받았다. 결국 종양을 떼 내는 수술을 하기로 했는데 대수술을 앞두고 너무 무서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이동영 의사 선생님이 내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잘 모르지만 믿고 싶다"고 말하자 이 선생님은 수술에 앞서 기도를 해줬다. "사랑의 하나님, 당신의 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죽음에서 건지시며 새 삶을 허락해 주옵소서. 당신 딸이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딸이 되게 해 주옵소서."
6시간 진행된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병실에 혼자 있던 나는 우연히 CBS 채널에서 공감을 주는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말씀 속에 주님이 나를 찾아 위로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주님,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영혼의 치료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외쳤다. 내가 가야 할 신앙의 길은 그날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경의 열매] 박남선 (3) "주님 일꾼 되자" 신학공부 위해 교직 접고 서울로
대학 졸업후 미션스쿨 영어 교사 생활 소외 청소년 돌보기 위해 신대원 입학
사진: 1990년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졸업식을 마친 뒤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3 때 주님을 영접한 뒤 1981년 경북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3학년 때 KABS(캡스·Korean American Bible Study·한미성서연구회)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영어 성경공부에 심취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미국인 선교사님으로부터 영어성경을 배웠고 주일에 대구 YWCA에서 영어예배를 드리곤 했다. 캡스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때는 아무 부담 없이 그야말로 주님의 말씀에 푹 빠진 시기여서 대학기간 가장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경북 안동의 영문고교에 교사직을 지원했다. 내가 사범대 출신이 아니어서 직접 학교를 찾아가 지원한 뒤 시험을 쳤다. 내가 그 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은 우연 반 필연 반이었다. 졸업 후 교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친구와 함께 영문고교 앞을 지나가는데 '멍에를 메고 배우자'라는 교훈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이 교훈이 불신자에서 신앙인이 된 내 삶을 설명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내 신앙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을 것 같아 "이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경북대를 수석 졸업한 내 친구를 비롯해 이화여대 등 유명대 출신들이 이 학교 교사로 지원해 긴장했다. 더구나 나는 당시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 영문고교는 세례를 받은 사람을 주로 뽑았다. 다소 암담했다.
면접 때 학교 이사장 앞에서 종교관 인생관 교육관을 발표했다. 나는 솔직하게 "우리 가정이 불교 집안이지만 나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믿는데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개인적 구주로 영접한다"고 말했다. 영어성경 해석 시험과 5분 티칭(teaching) 실습은 캡스 동아리에서 성경공부와 후배 지도 경험 덕분으로 쉽게 넘어갔다. 학교에서 내 실력과 솔직함을 높이 샀는지 나는 영어교사직에 합격했다.
하지만 영문고교에서의 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경북대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학교 측에서 대학원과 교사 중 택일할 것을 요구했다. 공부 욕심이 있던 나는 대학원을 포기하지 못하고 대학원 근처의 한 공업고로 옮겼다. 공고에서는 오후 3시 이후 시간이 남아 대학원 수업과 병행할 수 있었다.
공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상담실에서 근무했다. 이때 소위 문제아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위해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방과 후에 이들을 모아 영어성경을 가르쳤다. 한 학생이 우연히 미국인하고 펜팔을 하다가 내용이 어렵다며 편지를 내게 갖고 왔는데 상대방이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기독교 교육학·상담학 교수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기독교 교육학이나 상담학을 공부하면 소외된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의 신학 입문은 이처럼 우연히 다가왔다.
알아보니 미국 교수님들이 1년에 두 차례 한 달씩 서울 경희대에서 강의를 했다. 또 테이프 등을 통해 통신강좌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편을 잡으면서 동시에 통신강좌로 공부했다. 신학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결국 90년 교직에서 물러난 뒤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분교가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 있었다. 과제물을 들고 교수님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교정을 받는 등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교수님들이 나의 노력을 가상히 봤는지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조교에 임명했다.
낮에는 캡스 간사로, 신학대학원 조교로 활동하면서 저녁에는 영어학원 강사 일을 했다. 연세대 이대 서강대 홍익대 등 신촌 중심의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영어성경을 가르치던 열정은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때 동행하며 만났던 선후배들은 지금 대부분 목회자가 돼 주님을 섬기고 있다.
***[역경의 열매] 박남선 (4) 공산주의 붕괴 러시아인들의 영적 갈급을 보다
조용기 목사 크렘린궁 부흥집회 수행… 수많은 인파·통성기도에 당국도 놀라
사진: 1997년 가을 서울 국제선교회 사무실에서 필자(왼쪽)가 선교 관련 일을 하고 있다.
1992년 초 어느 전도사의 소개로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역에 지원했다가 '순복음가족' 신문 기자로 뽑혔다.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하는 기자가 되면서 얼마나 감사하고 벅찬 날들을 보냈는지 모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 교수님들을 뵙고 인터뷰하고 뜨거운 기도에 불붙은 성도들을 바라보며 신앙의 위력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92년 4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금식기도 대성회를 개최했을 때 설교자로 만난 멀린 캐로더스 교수는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한 취재원이었다. 그는 'Prison to praise'(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금식기도 대성회를 취재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했다. 그때 어떤 여성이 손수건을 줬는데 알고 보니 캐로더스 교수의 부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캐로더스 교수와 인터뷰를 하게 됐고 그분이 미국으로 돌아가신 뒤 자신의 책들을 내게 보내주기도 했다.
선교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나 '번영신학'의 원조격인 로버트 슐러 목사도 지금은 누렇게 변한 내 취재수첩에서 기억할 수 있는 저명인사들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그레고리 애덤스는 당시 인터뷰를 계기로 내 선교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아직까지 관계를 잇고 있는 소중한 신앙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했다.
그해 6월 나는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한 선교 일행과 모스크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부흥집회 취재차 동행했다. 당시 소련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해체된 시점이라 국민들은 영적 진공상태에 빠져 복음에 갈급해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크렘린궁 안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손잡고 선교 일행 앞에서 울면서 외치는 통성기도는 불신자들에게 성령의 불을 내린 하나님의 역사 현장이었다. 이러한 열기에 놀란 나머지 소련 당국은 집회 3일째 되던 날 집회를 열지 못하게 막았다.
선교 팀들은 집회가 철회되자 급히 모여 의논한 뒤 크렘린궁 바깥에서 옥외집회를 열기로 했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소리에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하나님은 신앙에 갈급하는 많은 허기진 영혼들을 불러 모아 주셨다.
옥외집회가 진행되던 중 어떤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 "어제 내 딸의 사진을 찍었던데 한 장 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녀는 여섯 살짜리 딸이 심장병으로 5∼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며 자기 딸의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기도했다. 어머니가 감동받았는지 자신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날의 경험은 내가 선교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수많은 이들을 죄와 병에서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을 터지게 했다. 그래서인지 성령께서 M.I.(Mission International·국제선교회)를 시작하라는 말씀이 어렴풋이 내 귀에 들린 듯했다.
한국에 돌아와 오산리기도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청했다. "때가 급하니, 바로 시작하라"는 답이 왔다. 순복음교회 측과 상의해 선교에 뜻이 있다고 말씀드린 뒤 아쉽지만 기자직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해 10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성봉회관에서 'M.I. 서울' 사역을 시작했다. M.I. 서울센터에서 영국과 미국의 전문 선교사들을 모시고 선교 세미나를 열었으며 94년에는 영국 피켄햄 선교훈련센터에 3개월마다 단기선교팀을 파송하는 등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하나님 나라 확장과 예수님의 제자 세우기에 혼신의 힘을 바친 기쁨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역경의 열매] 박남선 (5) 30년 중보기도에 온 가족 '예수님 영접' 기적이
거의 대화 단절됐던 불교 믿던 아버지 결국 "우리 딸 큰일 하는구나" 세례를
사진: 2006년 부모님 금혼식 때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뒷줄 왼쪽 네 번째가 필자.
우리 가족의 주님 영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는 내 생애에서 주님이 주신 소중한 기적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된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완고한 아버지 어머니의 기독교 입문은 내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세례를 받으시던 날, 나는 선교현장에서 어떤 영혼도 이끌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미 얘기한 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불교 신자셨다. 기독교는 용납 자체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고 3때 신앙을 가진 뒤 언니의 고자질로 새벽마다 몰래 성경을 읽고 찬양 테이프를 듣는 것을 아버지께 들켰다. 아버지는 "당장 성경을 치우지 않으면 불태우겠다"며 찬양 테이프가 들어 있는 녹음기를 바닥에 던져 박살냈다. 이후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단절하다시피 했다. 신학과 사역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는 거의 집을 찾지 않았다.
변화는 밑에서부터 먼저 왔다. 내가 서울에 온 이후 남동생(박상규)이 뒤따라왔다. 동생 취직자리를 소개해주면서 그를 위해 전도하고 기도했다. 동생이라고 금방 변화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라온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6년 이상 보살피자 동생은 신앙을 갖게 됐다. 어머니에게는 서울에서 편지를 쓰면서 말미에 항상 성경구절을 달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97년 국제선교교회를 개척하자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어머니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딸이 교회를 개척하며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안 도우면 누가 돕겠나"라고 생각했다고 후일 얘기해 줬다. 2001년 어느 날 어머니가 평소에 왕래하던 절에 갔을 때였다. 승려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내 딸도 내가 죽으면 저렇게 슬피 울겠구나. 아무래도 같은 길을 가야 하지 않겠나' 하고 마음먹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승려에게 "이제 절에 그만 다니겠다"고 통보하고 교회로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는 내게 출세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셨다. 자녀 중 공부도 가장 많이 시키고 애정을 쏟은 내가 정작 부모의 뜻과 달리 교회에 다니니까 예수님에게 딸을 빼앗겼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딸이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신다고 한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30년간 중보기도를 끝없이 했다. 신앙이 아닌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헌신을 이해한 뒤로 아버지에 대한 노여움과 두려움을 많이 누그러뜨렸다. 서울에서 종종 전화하고 편지를 드렸다. 그때마다 넌지시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처음에는 소귀에 경 읽기 수준이었다.
선교지에서 귀국한 어느 날 전화로 아버지에게 "언제 방문할 테니 시간 좀 내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전도지를 내밀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영접기도를 했다. 나중에 "아버지, 한국에 오면 같이 가족예배 드려요"라고도 했다. 평소에는 관심도 안 주시던 분이 내 말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셨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 권사님도 전도 초청 잔치에 아버지가 올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인도에 갔다 온 뒤 드린 전도 비디오를 보시더니 "우리 딸이 큰일을 하는 구나" 하며 대견해 하셨다. 기적이 드디어 고개를 내민 것이다. 2010년 6월 대구 가창교회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세례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아버지가 세례식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는 말씀이 실감났다. 세례받으신 아버지는 2년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가셨다. 아버지는 생의 막바지에 주님을 영접하고 이제는 주님의 품안에서 편히 안식하고 계신다.
***[역경의 열매] 박남선 (6) "날 도와줄 수 있겠니" 음성에 1995년 목사안수
지인들 도움으로 만민선교교회 개척 외국인근로자 위한 영어예배도 드려
사진: 1995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기념촬영하고 있는 필자(앞줄 왼쪽 첫 번째).
1993년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민족복음화운동본부'(당시 총재 신현균 목사) 여목연수원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튿날 한 기도 모임에 갔다가 내가 부흥사 연수 과정에 대한 기도 제목을 말했는데 어떤 집사님이 감동 받고 내 학비를 대주셨다.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연수원에 1년간 다니면서 여자 목사님을 많이 만났다. 솔직히 나도 여자지만 '여자 목사들은 좀 무식하고 세련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선입견이 없지 않았는데 연수원에 있으면서 그것이 많이 깨졌다. 청산유수 같은 기도와 당찬 모습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
부흥사 연수원을 졸업한 뒤인 이듬해 어느 날 후배가 내게 '개신교 연합 신학연구원'이라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트리니티신학대학원을 마쳤지만 국내 신대원도 접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던 터에 흔쾌히 수락하고 목회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이때 만난 지금의 영적 어머니인 송금자 목사님과 교무처장 목사님의 권유로 결국 목사 안수를 받게 됐다. 정말 세상 일 하나하나는 우연 같지만 어느 것도 하나님의 구상 속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95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통 교단을 통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 나이 33세였다. 전날 밤 잠을 설치고 있을 무렵 "네가 날 도와줄 수 있겠니"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곧바로 자리에 앉아 "주님이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면 얼마든지 도울게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당시만 해도 신앙을 갖지 않은 어머니와 M. I. 멤버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이 목사안수식에 찾아와 축하했다. 부족한 종을 목사로 기름 부어 주신 하나님의 충성된 심부름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험도 없지 않았다. 선교단체인 국제선교회에서 사역했는데 영어만 배우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또 함께 일하고 싶을 때 자신이 섬기는 교회로 떠나 사역자 양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은연중에 선교센터를 운영하는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리더십에 대해 문제 삼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말씀과 기도로 양들을 직접 양육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도회 모임 중 한 전도사가 자신의 반지를 개척 예물로 내놓으셨다. 결국 주변의 도움을 받아 추위가 기승을 부린 96년 12월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공장 부지였던 건물에 만민선교교회(현 국제선교교회)를 개척했다.
나를 포함한 개척교회 멤버들은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기, 하루 3시간 이상 말씀 읽기, 하루 3명 이상 전도하기'란 표어를 내걸고 기도에 열을 올렸다.
교회가 있는 곳은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는 지역인데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들이 특히 많았다. 국제선교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을 위해 영어 예배를 진행했다. 주일 오전에는 한국인 예배를, 오후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영어 예배를 인도했다. 이방인 신분으로 외롭고 소외돼 마음 둘 곳 없던 필리핀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리면서 주일에 50∼60명이 모였다. 조그만 교회는 주일에 항상 북적댔다. 더구나 교회 식구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대로 월급을 못 받을 경우 공장에 찾아가 해결책을 강구했고 이들이 한국인 사장과 말이 안 통할 때 통역을 해주면서 인간적 소통을 이어갔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정신질환에 걸린 자가 이곳에 와서 낫기도 하고, 운동권에 몸담은 형제가 새벽 기도회에서 방언을 받는 역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잊지 못할 성전이다. 교회 창립 5주년 기념일에 이곳에서 인도 출신의 케니 선교사와 결혼했으며 이는 곧 인도 나갈랜드 선교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박남선 (8) 선교 요충지 나갈랜드서의 시험 '뱀·해충·테러…'
네팔·부탄까지 연결돼 지리적 장점… 온갖 시련에도 5년만에 M.I.센터 세워
사진: 지난해 겨울 인도 나갈랜드 푸체로 두란노 미션스쿨에서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필자.
2003년 첫 단기선교 이후 수차례 인도를 다녀오면서 집회 및 세미나를 통해 인도인들의 영적 메마름을 목격했다. 이곳에서의 선교 필요성을 느끼면서 기도를 통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갈랜드는 힌두교 국가 인도의 한 지역이지만 200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이후 주민 90% 이상이 크리스천일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하다. 신앙적 기반을 고려하면 선교하기가 쉬운 지역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수는 많지만 질적인 영적 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다. 이른바 '나이롱' 신자들이 많다. 일부 젊은 세대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려 알코올 마약 등 나쁜 습관에 물들어 있기도 해 사역의 중요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더욱 중요하게 봤다. 나갈랜드는 뉴델리 방갈로르 콜카타 고하티 오릿사 등 기독신앙이 척박한 지역으로의 왕래가 용이하다. 또 육로로 네팔과 부탄까지 갈 수 있다. 힌두교 신자와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고자 하는 선교사에게는 이곳 나갈랜드가 전략적 신앙의 요충지나 다름없다. 실제로 나갈랜드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보니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한국처럼 세계 선교를 위해 제사장 국가로 선택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서울에서 M.I.(Mission International) 선교 디렉터로 사역 15년, 담임목사로 교회 사역 10년을 정리하고 2007년 12월 5일 나갈랜드 장기 사역자로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는 의지로 출발했지만 타향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보다 열악한 환경을 각오하긴 했지만 정도는 예상을 넘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쥐가 침대 주변에 출몰하는 것은 예사였다. 뱀 도마뱀을 비롯해 각종 곤충까지 득실거려 처음에는 수시로 괴성을 질렀다. 난방시설이 안 된 방에서 지내는 겨울 밤 추위는 그야말로 살을 에는 듯했다. 수도가 없는 이곳에서 물을 끓여 먹어도 수질이 좋지 않아 장티푸스에 걸리기도 했다. 종족 간 갈등으로 들려오는 총소리도 섬뜩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지시한 일에 이 같은 시험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오직 주님'이라는 자세로 기도만을 거듭하며 주변의 환경을 이겨나가기로 했다. 척박한 사역인 만큼 보람도 컸다.
나갈랜드에 온 뒤 형제자매들과 영적 공동체를 이루면서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경건의 시간과 기도, 신학 강의, 제자 훈련을 반복했다. 기도 끝에 영혼의 안식처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근사한 성전은 아니었지만 2008년 2월 하얀 천막 성전을 보내주셨다. 평범한 텐트지만 내가 이곳에 와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화려한 성전은 없어 보인다. 무더위와 뙤약볕 속, 천둥과 폭우가 몰아칠 때도 신앙의 찬양과 기도는 이곳에서 지속됐다.
2008년 11월부터 M.I. 센터 건축을 시작했다. 이 건물을 짓기까지 재정적 어려움도 많았지만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다. 계약이 결렬되기 직전 한국의 선교단체 및 교회,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부지매입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M.I. 센터 1층 공사가 2012년 9월에 끝났다.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건축에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있는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실, 컴퓨터실, 도서관이 이때 처음 들어섰다. 우리는 이제 강의실과 숙소 확충을 위해 2층 건축에 돌입했다. 예산은 역시나 부족하다. 사역자들과 달력을 만들어 집집마다 팔기도 하고 건축헌금을 모으면서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박남선 (9) 해외선교 가장 큰 보람은 불쌍한 영혼 구제·양육
언어·문화·종교가 다른 지역임에도 동역자 얻는 그 순간의 기쁨은 위대
사진: 올해 M.I. 인도 교회에서 여성 펠로십 멤버들과 함께 특송하고 있는 필자(가운데).
해외 선교에서 가장 큰 보람은 뭐니뭐니 해도 불쌍한 영혼 구제와 양육이다. 언어도 피부도 종교도 다른 지역에서 나의 기도와 헌신으로 영혼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우리의 동역자가 되는 순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된다.
19세인 르누 자매는 주일학교 보조교사다. 항상 미소가 그치지 않지만 그의 가정환경은 불우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알코올 중독자였다. 우리는 그의 가정에 종종 심방을 가면서 기도했다. 기도가 통한 덕분인지 어머니는 2009년 부활절 때 맏딸 르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병세가 깊어지면서 그녀는 찬송과 기도를 들은 채 2010년에 천국으로 갔다.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술을 계속 마셨다. 딸 르누에게 막말을 하는 등 증상이 심해졌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 가족을 위해 나무집을 지어줬다. 어느 날 우리가 심방갔을 때 르누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울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는 며칠 후 갑자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내가 죽었던 같은 병원, 같은 병실, 같은 침대에서 그는 아내의 뒤를 따랐다. 선교회는 르누와 남동생 라자를 돌봤으며 라자는 M.I.(Mission International·국제선교회) 인도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란 역시 불우한 가족사를 딛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한 소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돈과 명예에만 관심을 가진 세속적 인물이다. 어느 날 나무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돼 성격은 더욱 비뚤어졌다. 그는 그러나 죽기 전 교회 사역자들에게 아내와 나란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우리 동역자들은 합심해 나란 모자를 위해 집을 지어주고 그들의 생계도 도왔다. 불행은 한번에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에이즈에 감염됐다.
부모의 잇단 아픔은 나란을 오히려 성숙시켰다. 2008년 금식기도를 하며 준비한 가스펠 캠프 때 나란은 세례를 받았다. 2012년쯤 힌두 호스텔(우리나라의 기숙사)에서 중·고교생들을 위한 집회가 있었는데 나란이 간증과 기도를 했다.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처음에는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조차 몰랐는데 나란의 간증을 들은 뒤 갑자기 가슴을 치고 울면서 통회자복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다. 나란은 지금 10대 찬양팀을 구성해 불신자와 영적으로 불안한 사람들 앞이라면 어디든 가고 있다. 올 초 나란은 한국인 단기선교팀과 이웃 네팔에 가서 주님의 구원을 전했고 내가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한국에 나왔을 때인 7월에도 단신으로 다시 네팔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 어머니가 하나님 품안에 들어가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겠다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 갈렙은 돌아온 탕아였다. 2007년 나갈랜드 단기선교 때 처음 만난 갈렙 형제는 믿음이 두터웠지만 결혼을 약속한 자매와 의견차로 헤어진 뒤 방황하기 시작했다. 술과 마약을 접하면서 예수님을 멀리했다. 갈렙의 영혼이 불쌍해 중보기도를 바쳤지만 응답이 쉽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그는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며 영적으로 거듭났다.
금식을 마친 날 갈렙은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를 찾아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며 울었다. 탕자의 귀환을 보는 아버지 심경이 이런 것이구나 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같이 손을 잡고 울었다. 갈렙은 지금 코이마 지역에 가서 알코올 중독 아이들을 위한 재활센터를 차렸다. 그는 이를 M.I.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과거 자기처럼 어둠의 길을 걷고 있는 어린 양들을 인도하겠다는 말과 함께.
***[역경의 열매] 박남선 (10·끝) 늘 감동·기적 일어나는 인도 M.I. 되게 하소서
선교대학원 올해로 3회 졸업식 가져 한국 동역자들의 지원에 주님 역사가
사진: 박남선 선교사가 최근 서울 M.I.(국제선교회)에서 기자에게 선교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졸업식만큼 뜻깊은 날은 없을 것이다. 수년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의 노력·역경에 대한 회고는 인생의 새 출발을 더욱 다지게 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삶 속에서 불신과 무신, 방종 등을 일삼다 주님을 만나 회개와 희망을 서약하는 인도 나갈랜드 M.I. 선교대학원(MIGSM)의 졸업식은 항상 감동과 뿌듯함을 선사하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명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지난 2월 M.I. 선교대학원 3회 졸업식이 열렸다. 30대 초반의 요나단 전도사는 졸업과 동시에 나갈랜드 인근 마니풀주(州) 선교사로 파송됐다. 그는 우리 M.I에 처음 왔을 때 후원자가 없어 제지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튼실한 신앙을 믿고 우리는 무료로 신학 공부를 시켜주고 주택 렌트비, 생활비도 보조해줬다. 그런 요나단 전도사가 이제 다른 양들의 전도를 위해 선교사로 파송 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온 오지영 자매도 이번 졸업 멤버다. 몇 년 전 영어공부 겸 관광차 나갈랜드에 왔다가 보호구역 허가증이 없어 경찰에 붙잡힌 일이 있었다. 주변의 요청으로 내가 가서 보증을 선 뒤 그를 우리 M.I.로 잠시 데려왔다. 오 자매는 이곳 예배를 접하면서 감명받았고 이듬해 이곳에 신학예비생으로 다시 와 MIGSM에 입학했다. 피아노로 교회 반주를 섬겼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신의 학비를 댔다. 너무도 당찬 신세대였다.
부모님이 모두 힌두교 신자인 이삭이라는 형제는 M.I. 교회를 통해 어머니가 치료 받고 나으신 뒤 본격적인 신학생의 길을 걸었다. 그의 학구열과 신앙에 감명받은 한국 목사님이 그의 학비를 지원했다. 물론 최고 후원자는 하나님이셨다.
나갈랜드 사역은 점차 외부에도 많이 알려지고 있다. 지난 2월 17∼19일 2박3일간 이곳에서는 세계전문인 선교 제1회 남아시안대회가 열렸다. 한국 M.I. 대표이신 전동주 목사님이 나갈랜드에 오셔서 세미나를 열었고 나갈랜드 주변 여러 나라의 선교 목회자 150여명이 참석해 해외 사역과 선교의 중요성을 공감했다. 여름휴가를 맞아 한국에 와도 내게는 나갈랜드 사역의 연장선상이다. 나갈랜드에 왔던 목회자들을 만날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나 집회에서 많은 후원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20일 방문한 서울 강서구의 하늘빛사랑교회는 내가 한국에서 교회 사역을 할 때 집사였던 이용안 목사님이 최근 개척하셨다. 이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한 뒤 나를 초청했고 올해부터 선교헌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외에 M.I. 스태프와 제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방문했으며 선교 비전을 제시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22∼24일 방문한 경북 울진의 한 교회에는 M.I.인도에서 한글을 공부한 한 사역자가 선교사로 파송됐다. 나갈랜드에서 훈련한 성도가 선교대국 한국으로 역파송된 것도 크나큰 보람이다. 한국의 신앙인이 외국의 불신자를 주님에게 이끌고 거기서 많은 기적을 목격하노라면 우리 선교가 또 다른 한류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딜 가도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소속 예장진리총회(총회장 송금자 목사) 교단 목사임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 낯선 곳에 와 사역을 하고 있는 선교사로서 오늘의 한국목회 현장을 보면 아쉬움도 없지 않다. 세월호가 성장만을 목표로 질주한 한국을 상징한다면 교회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지금의 한국교회는 기도와 예배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교회가 사치와 향락에 젖어가는 사회를 바로잡아야 함에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은혜와 성령은 공짜로 오지 않는다. 겸손하게 남을 섬기면서 동시에 주님밖에 구원자가 없다는 뜨거운 믿음이 바탕이 돼야 한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희망을 기대하고 기도 제목으로 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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