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1
울릴 리 없던 전화기가 울렸다. 어두운 반지하에 구겨진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켰다.
“선배 잘 지내세요?”
그녀였다. 1년 만에 온 그녀의 문자였다. 서울에 동생 만나러 올 일이 있어 올라가니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이야기였다. 12월의 차가운 서울바람이 잊힐 만큼 반가운 연락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편할 때 언제나 연락하라는 답장을 보내고 바로 옷장부터 열어보았다. 두툼한 패딩을 입어야 할 추운 날씨였지만, 패딩 따위는 입고 싶지 않았다. 코트를 꺼내 무슨 냄새라도 나지 않을까 살펴보니 쾌쾌한 냄새가 나 한달음에 세탁소로 달려갔다. 3일 뒤에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 맡기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여름 내 반지하에 곰팡이로 고생하던 코트였으니 이정도 호사는 누려도 될거라고 생각했다. 두 끼 밥값인 8000원을 내고 코트세탁을 맡기고 잠시 산책을 하며 잠시 옛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그녀와의 만남에 무슨 특별한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졸업한 지도 2년이나 되었고, 졸업하고도 그녀가 살고 있던 창원으로 찾아가기도 했으나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같이 밥이나 먹고 커피나 마시고 산책이나 하다 밤이 늦어지면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일상이었다. 작년 마지막 만남도 그랬다. 용지호수 음악분수가 굉장히 아름다우니 한번 보러 오라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가 9월경 연락을 해 창원으로 찾아갔다. 어둠이 드리워진 호수에 불빛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오며 물이 솟구치는 장면은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새파란 달과 어우러진 음악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저 음악도 분수도 그치듯이 나도 이제 그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어쩐지 밥을 해먹기가 싫어 김밥 두 줄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방은 오후 5시였지만 캄캄한 어둠이었다. 불을 켜고 들어가 말없이 책상에 앉았다. 김밥을 집어먹으며 인강을 틀었지만 도저히 강사의 말이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김밥 다 먹을 때까지도 집중력이 돌아오지 않아, 강의를 끄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그녀가 만나자고 했던 곳이 광화문 근처였으니 그쪽 어디서 밥을 먹고 주위를 돌아보면 될지 찾아나 보자 싶었다. 인사동 데이트 코스라고 인터넷창에 쳐보았다가 부끄러워 인사동 맛집이라고 고쳐 검색했다. 몇몇 식당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주변을 검색해보았다. 돌담길이라던가 광화문광장 야경 등등이 나왔다. 언제가도 아름다운 곳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갈만한 장소 몇 곳 더 기억해 두기로 하고, 내일 아침 수업을 위해 조금 일찍 잠을 청했다.
2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일어났다. 오늘 9시 수업이라 7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내가 사는 곳은 노량진에서 조금 떨어진 대방동이라 조금은 일찍 준비를 해야 했다.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두 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였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으나, 지금까지 공부한게 아깝지 않느냐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겨 서울행 버스를 탔다. 처음에는 고시원으로 가려고 했으나, 우리 집 화장실보다도 작았던 고시원 방 크기에 놀라 원룸을 찾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햇빛이 잘 드는 2층에 깨끗한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월세를 보며 점차점차 밀려 대방동까지 오게 된 것이다. 게다가 2층은 가격이 10만원이 더 비싸 조금이나마 더 아끼자 싶어 들어간 곳이 반지하 방이었다. 여름엔 곰팡이 때문에 고생하고 햇빛이 들지 않아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지만, 용돈 타쓰는 주제에 무슨 불평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부엌이 있어 밥해먹는데는 지장이 없어서 1~2주에 한번 장만 보면 밥이 해결된다는 점이 좋았다. 또 조용하기도 했고, 책상 화장실 등은 잘 있어서 공부를 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래도 가장 불편한 건 학원 직강 들으러 갈 때였다. 2블럭이라 걷기에도 애매하고 버스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였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일어났으니 천천히 걸어가자고 생각하며 길을 걷기로 했다.
그녀도 걷는 것을 참 좋아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같이 밥을 먹고 난 후 천천히 거리를 걷다 보면 괜스레 마음이 편해졌다. 조그마한 체구로 어찌도 그리 잘 걷는지. 1년 선후배 사이로 알고지낸 지 꽤 되었으나 고백해야겠다고 느꼈던 것도 바로 그런 편안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졸업하고 내가 4학년 때,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고 창원으로 찾아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만나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그녀의 집 앞까지 와서야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의 횡설수설하는 고백을 들은 그녀는 말없이 한참동안 미소만 띄고 있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선배도 졸업하기 전에 시험 합격해야 하지 않느냐고. 자기도 공부하느라 서로 힘든 상황이니 사귀어도 아마 서로 힘들기만 할 거라고. 그러니 이렇게 가끔 연락이나 하고 지내자고.
20분 정도 걸으니 노량진에 도착했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자기 갈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남아 근처 포장마차 컵밥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9시부터 수업을 들으면 12시 넘어서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니 아침이라도 먹고가야지 싶었다. 왕복 차비를 아끼면 이 컵밥 2500원 값이 나오니 오늘은 사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컵밥을 주문해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책을 들고 가는 사람, 예쁘게 화장을 하고 가는 사람, 방금 자다 깬 사람. 이 수많은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이 수많은 사람 중 나만 어쩐지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3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사실 학원 직강이 있긴 했으나 그녀에겐 그냥 오늘은 수업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가기로 했다. 혹시 그녀가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학원얘기 꺼냈다가 나랑 만나지도 않고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오후 4시까지 탑골공원 앞으로 오라고 했다. 선배는 1호선 타고 올거고 자긴 3호선 타고 올거니 그쪽이 괜찮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아무 반대도 하지 않고 옷을 챙겨 입고 역 쪽으로 나갔다. 4시에 만나면 만나는 시간이 얼마 안 되니 아쉽긴 했으나, 이렇게 날 잊지 않고 연락해준 것만 해도 정말 고마웠다.
사실 처음에도 그랬다. 신입생으로 들어와 대면식날 먼저 전화번호를 얻어간 것도 그녀였다. 밥사달라고 해서 밥 사주며 친해진 사이였다, 다른 후배에게 들이대다 차여 조용히 군대나 가야지 싶어 동기들이랑 술이나 퍼먹으며 입대 날만 기다리던 나에게 연락해 선배 그동안 고마웠다며 잘 다녀오라고 말하며 커피라도 사겠다고 말해준 사람도 내가 밥이랑 술 사준 많은 후배 중 그녀뿐이었다. 전역하고 복학해서 정신 못차리고 있을 때 선배 저랑 같은 과목 듣는다며 이젠 자기가 학년이 더 높으니 도와줄 수 있겠다며 말없이 필기노트를 건넨 것도 그녀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옛날 생각을 해보니, 난 어쩜 이리 모든게 늦나 싶었다.
공원 앞에 그녀가 보였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녀의 모습은 1년 전 모습과 똑같았다. 선배는 왜 이리 살이 빠졌냐는 그녀의 물음에 난 웃으며 반지하가 다이어트에 좋다며, 너도 살 빼고 싶으면 반지하 한번 살아보라는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길을 걸었다. 인사동 거리는 날씨가 추웠서 그런지 평일 오후라 그런지는 몰라도 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만나기 전엔 하고싶었던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머릿속이 깨끗하게 지워져 정신차리고 보니 실없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실없는 소리에 웃어주는 그녀가 고맙기도 했다. 인사동에서 차를 한잔 하고, 주위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먹었다. 난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고 말재주도 부족해, 서울에 올라와서 있었던 재미있었던 이야기나 들려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 서울에서의 즐거웠던 일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챗바퀴 돌 듯 학원 집 독서실만 반복해서 다녔고, 정말 공부 안될때면 지하철 1호선 타고 종점까지 그냥 앉아있었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그녀는 그래도 자긴 집에서 공부하는데 이 멀리까지 혼자 공부하러 왔냐고, 정말 대단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밥을 먹고 나니 자긴 8시 즈음에 다시 동생집으로 가봐야 한다고 했다. 선배도 걷는 거 좋아하니 옆에 광화문 쪽으로 한번 가 보자고 했다. 그쪽 주변 골목길도 그렇고 걷기도 좋고, 자긴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되니 선배도 공부하러 바로 가야되는 거 아니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도 서울 1년 가량을 살면서 광화문 구경 한번도 안해봤다고, 야간개장은 안하지만 그 앞에만 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오늘 같은 날은 공부 조금 쉬어도 된다고 횡설수설하며 그녀를 따라나갔다. 12월이라 해가 빨리도 져서 밖으로 나가니 벌써 어둑어둑했다. 그래도 서울이라 주변 불빛이 환해 걷기에는 추운 날씨 빼고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인사동 거리, 북촌한옥마을 거리, 경복궁 옆 미술관 옆을 나도 그녀도 별다른 말 없이 그냥 걸었다. 아름다운 야경과 옆에 있는 그녀는 어쩐지 내가 누리면 안되는 사치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냥 좋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냥 여기 참 예쁘게 꾸며놓았네요 정도의 이야기만 했다.
4
1시간 가량 주위를 걸으며 구경하니 광화문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녀가 서울에 올라와서 1년 동안 여기 한번 안와보고 뭐했냐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공부해서 합격이나 해야지 죄인 같은 몸인데 어찌 이런 곳에 놀러오겠냐며, 덕분에 좋은 구경 했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선배도 건강 조심하시고, 날씨도 추운데 이제 들어가시라고 자기도 여기서 지하철 타면 바로 갈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선배 잘 지내세요.”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지하철 역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손을 흔들며 너도 잘 지내라고, 다음에 또 보자고 말하며 그녀를 보냈다.
집으로 가기위해 광화문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광화문역은 광화문광장을 질러 가면 바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역 쪽으로 향했다. 주위엔 정말 서울에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높은 빌딩들이 있었다. 무슨무슨 신문사에 무슨무슨 방송사에 대사관에, 저녁이 깊었지만 불 꺼진 빌딩은 하나도 없었다. 서울을 밝히고 대한민국을 밝히는 불빛이라고 했던가. 새까만 하늘에 박혀있는 별빛보다 더 많은 그 불빛들을 보고 있자니, 다들 자기 몫의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그 환한 불빛들을 바라보니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다 났다.
첫댓글 짠~ 하네요ㅜ 주인공이 처한 상황때문에 응원도 못하겠어요
가끔은 모노톤이 큰 울림을 줄 때가 있습니다. 잔잔하지만 그리고 뒤에 극적인 변화도 없지만 읽고난 우리의 마음은 읽기 전보다 많이 달라지게하는 글입니다.
에잇, 요즘 왜 이리 감성이.... 돌아오세요. 사랑사랑 감성글로..... 가을에 이러시면 안됩니다!!!너무 마음이 아프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