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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찾는 공원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250여 년쯤 된단다. 사람도 늙으면 그러하듯 이 나무 또한 지지대를 받친 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고목만 있는 게 아니다. 여러 관공서에도 나이 어린 회화나무 한 그루쯤은 다 있다. 이 도시가 생긴 지 고작 30여 년쯤이니 관공서의 회화나무는 고목일 리 없다.
회화나무는 원산지가 중국이다. 콩과식물로서 짙은 회갈색의 나무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모습이 같은 콩과식물인 아까시나무와 흡사하다. 하나의 잎자루에 깃털 모양의 잎들이 겹겹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 또한 매우 닮았다.
여느 나무들이 그러하듯 회화나무도 당연히 꽃을 피운다. 다만 개화시기가 다른 나무에 비해 좀 늦다. 무더위가 한창인 7월에서 8월 사이 입추(立秋) 무렵에, 작은 나비 모양의 꽃들이 올망졸망 모여 예쁜 꽃차례를 만들어낸다. 노르스름한 것이, 마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바나나우유’ 색깔 같다.
개화가 늦는 만큼, 곧 날이 추워질 새라 열매도 서둘러 맺는다. 꽃이 다 지기도 전에 먼저 피었다 시든 꽃 자리에 콩깍지 모양의 꼬투리가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한다. 열매에 각종 효능이 있다고 하는데, 대체로 여러 한약재가 그러하듯 워낙 효과가 광범위하여 믿을 게 못된다.
회화나무는 ‘선비나무’ 또는 ‘학자수(學者樹)’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 연유를 자세히 알려면, 중국의 고대국가 주(周)나라를 소환해야 한다. 중국에서 주나라는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주나라 때 비로소 중국역사상 제대로 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다운 국가로 만든 주역은,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 주공(周公)이란 사람이다. 그는 주나라만 아니라, 중국 역대 왕조의 토대가 되는 제도적·정신적 기반시설을 완벽하게 구축한 장본인이다. 주공이 판을 짜 놓은 봉건제도는 그대로 후대 중국 제왕들의 전형적인 통치방식이 되었으며, 주공이 제정한 《주례(周禮)》는 나라 경영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공자는 주공에게 흠뻑 빠지고 만다. 공자는 주공이야말로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갖추고 밖으로는 제왕의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훗날 공자가 흠모했다는 이유만으로, 유학의 ‘유’자도 언급하지 않았던 주공은 자연스레 유가(儒家)에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주공이 저술했다는 『주례』 또한 유학(儒學)에서 중요한 이념서 중 하나가 되고.
서론이 길었다. 이제부터 회화나무가 어찌하여 ‘선비나무’ 또는 ‘학자수’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는지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주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외조(外朝-궁궐 밖 관료들이 근무하는 관청이 배치는 구역)의 양 옆쪽에 가시나무 아홉 그루를 심은 다음, 경(卿)과 대부를 왼편에, 공·후·백·자·남 등 귀족과 제후들은 오른편에, 정면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三公-조선조 때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격)을 배치한다.’
이 기록이 회화나무에 대한 최초의 유교적 언급이었지만, 뭐, 그렇다고 하여 회화나무가 학자수란 별칭에 대해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역시 이번에도 결정타는 공자가 날린다. 공자는 《예기(禮記)》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천자의 무덤에는 소나무, 제후의 무덤에는 측백나무, 사(士)의 무덤에는 회화나무를 심어서 나중에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회화나무를 학자수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5백여 년이 지난 송대(宋代)에 와서야 비로소 학자수란 별칭을 얻게 된다.
송대에 유학의 발전된 형태인 성리학(性理學)이 등장하여 나라의 근본이념이 되었는데, 공자시대보다 훨씬 더 유교적인 삶을 강조했다. 그러니 성리학의 도그마(dogma)에 함몰된 고급관리들이 뿌리인 그 옛날 공자 말씀을 잊었을 리가 있겠는가? 기어이 찾아내어 회화나무 꽃이 피는 입추 무렵에 괴추(槐秋-槐는 회화나무의 한자어)라 하여 진사(進士) 시험을 보게 했으니, 비로소 ‘학자수’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다.
‘회화나무 꽃이 노랗게 피어나니 과거 보는 이들 분주하고, 귀뚜라미 울어대니 베 짜는 게으른 여인네가 (가을걷이할 때가 되었다고) 화들짝 놀라는구나[槐花黃擧子忙 促織鳴懶婦驚].’
남송(南宋)시대의 문장가 섭몽득(葉夢得)의 시구다. 송대에 본격적으로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회화나무를 ‘학자수’라 부르던 것과 본격적으로 회화나무를 성리학자의 상징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도 송나라 때부터라고 보면 된다.
성리학을 나라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에서도 당연히 회화나무를 ‘학자수’ 또는 우리 식으로 ‘선비나무’라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 그 결과, 성균관 문묘에서부터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에는 물론, 힘깨나 쓰던 유력가문의 집성촌에서도 경쟁적으로 심어 가꾸게 된다. 지금 고목으로 남아 있는 회화나무들은 대부분 그런 곳에 있다.
그렇다면 ‘선비’는 무엇이며, ‘학자’는 또 무엇인가. 선비란 학문(성리학)을 숭상하고 인품을 갖춘 사람으로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사람, 학자란 성리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학자가 곧 선비일 수는 없지만 선비는 당연히 학자에 속한다. 또 과거시험 주과목이 성리학이었던 만큼, 급제하여 관리가 된 이들에게도 어김없이 선비 또는 학자란 타이틀이 붙었던 것은 당연지사.
16세기 조선조 중기에 이르면, 선비나무의 현실적인 뜻은 노골적으로 ‘과거나무’로 전락하고 만다. 회화나무는 오로지 과거에 합격하여 입신양명하는 상징물이 되고, 인품이나 학문의 성취도는 묻지 않고, 오로지 정승, 판서가 여럿 나왔다는 것만으로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곤 했다.
비판할 것도 없다. 다 오래 전 그것도 봉건사회 때의 일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게 뭔 의미가 있나? 그런데 21세기인 지금, 관공서마다 예외 없이 봉건시대의 상징인 회화나무를 학자수라 하여 심어 가꾸고 있다. 실제로 학자이거나 선비다운 덕성을 가진 공무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 시대의 공무원은 전문가 집단에 속해야 하지, 학자 또는 선비 집단의 일원이어서는 곤란하다.
혹 고시 출신 공무원들이 입신양명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회화나무를 심었다면, 그것은 뉴 노멀(new normal) 시대를 역행하는 처사다. 조경업자들의 달콤한 농간에 으쓱하여 회화나무를 심었다면, 어리석고도 천박한 일이다.
조경 산업에 종사하는 내 친구 아들의 말이 참으로 그럴 듯하다. 관공서에 새로 양산한 묘목을 납품하려면, 어떻게 하든 그 나무에서 긍정적이고도 그럴듯한 상징성을 찾아내어 부각시켜주어야 한단다.
그런데 관공서 조경 납품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았나보다. 언제부턴가 우리 마을 골목 가로수가 회화나무로 바뀌었다. 쉽게 보기 힘들었던 느릅나무와 이팝나무도 새로이 가로수로 자리잡고 있다. 그 많던 플라타너스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지만 불만 없다. 그 덕분에 키 작은 회화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 맺는 모습까지 쉽게 볼 수 있으니 기쁘고 행복하다. …그러하다.
첫댓글 요즘시대에 공무원이 학자나 선비가 아니고 전문가라야 된다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대학교수들이 갑자기 장관이 되고 TV 전문 논설자가 되는걸 보면 참으로 웃긴다! 한국 정치가 망해 있는 것은 이런 우스운 전문가(?)들이 언론이서 흥행하고 있기때문이라고 본다.
오래전에 읽은 책에서 나무들도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은 못하지만 땅속에서 뿌리들이 일종의 효소를 내면서 소통한다고했다. 참으로 자연의 이치가 신비스럽다.
국회 정치판들도 나무가 소통하는걸 뵈어야 될것 같구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