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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원불교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정의와 평화로 귀결됩니다. 그 근본은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깨달으신 일원상의 진리입니다. 이 일원상의 진리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우리가 걸어야할 길은 정의이며, 그 길의 끝은 평화의 낙원입니다.
신앙과 수행, 무시선법, 솔성요론, 최초법어에서는 정의를 지키고 실천하라고 합니다. <정전> 교의편 사은 중 ‘법률 피은의 강령’에서는 “법률이라 하는 것은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라고 하며, 삼학 중 ‘작업취사의 요지’에서는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를 버림”이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행편 ‘무시선의 강령’에서는 “육근이 무사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하며, ‘솔성요론’에서는 “13.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 14.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초법어’ ‘수신의 요법’에서는 “정신을 수양하여 분수 지키는 데 안정을 얻을 것이며, 희로애락의 경우를 당하여도 정의를 잃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바르게 세우고자 밝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대통령님이 취임연설에서 국민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최근 문재인 대통령님은 “국민들은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반칙과 특권을 일소하고 공정과 정의의 원칙을 확고히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반부패의 국민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정의는 사회의 모든 일과 사건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정의의 역사입니다.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친 인류는 기회와 과정에 대한 제도적인 공평함을 세우기 위해 피눈물 어린 투쟁을 해왔습니다. 공정한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길 민중은 여전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재론의 여지없이 일원상의 진리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인도정의가 근본입니다. 저는 <원불교신문>에서 원불교 정의론을 일심ㆍ상생ㆍ중도의 정의라고 밝혔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가 정의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보아도, 전 인류를 하나로 보는 마음과 또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와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정의라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중도・중용・중정을 통한 시중(時中)의 덕이라야만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전쟁무기 사드의 철폐운동을 계기로 사회의 평화 운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원불교는 정의와 평화의 종교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우리가 가는 길의 궁극적인 정의는 무엇일까.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도심(道心)의 정의, 자비심의 정의, 평화의 정의입니다.
먼저 도심이 정의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법훈편’ 73장에서 “평상심 공부 잘한 이가 참 도인이니, 빈부귀천 고락간에 도심(道心)이 일관하여야 큰 도인”이라고 설하십니다. 즉 어떤 고난 속에서도 분별과 주착심을 버리면 곧 도인인 것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일본 교토의 동쪽에는 히에이산이라는 큰 산이 있습니다. 고대에 여기에 터를 잡은 천태종의 조사 사이초 대사는 기라성 같은 불교의 인재를 길러낸 학당을 만들었습니다. 12년 동안 산에서 나가지 못하는 농산(籠山)이라는 수행을 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일본 종파불교의 거의 모든 종조들이 여기 출신이거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이초 대사는 이 수행과정을 세우며, “국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도심이 보물이다. 그리고 도심이 있는 사람을 이름하여 국보라고 한다”고 설했습니다.
대종사님이 만드신 불법연구회는 도학으로 도인을 길러내어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결사도량이었습니다. 이미 도심이 죽은 기성의 종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선불교를 비판한 것도 종교인들의 도심이 죽었음을, 사회와 국가를 구제할 힘을 잃어버렸음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강산 윤정운 법사님께서는 총부에서 늘 ‘이 비루한 놈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뵌 적은 없지만, 제 자신에게는 이 말씀이 ‘도에는 관심 없고, 늘 삿된 이익만 챙기는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경책’으로 해석이 됩니다. 밑천이 부족한 요사이는 이러한 선진님들로부터 ‘정신 차리라’는 장군죽비를 한 대 얻어맞았으면 하는 바람을 해보기도 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가 싸우는 이유는 이익 때문입니다. 진리의 공명정대함을 애써 가리고 무시하며, 그 틈을 타서 사욕이 개입되면 이 세계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모든 뉴스들이 다 그러한 이야기나 장면 아닙니까. 이 세계의 시비이해를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해결하여 바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힘은 도심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10여 년 전 한 학술대회에서 사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조계종의 새로 나온 <청규>를 조명하는 날이었습니다. 오후에 날이 저물 무렵 학회를 끝내기 위해 저는 이 일을 주도한 전국 선방 수좌회의 의장인 월정사의 의정스님께 마지막 말씀을 부탁드렸습니다. 스님은 단상에 서서 “우리가 처자식을 두지 않고 평생을 골방에 앉아 수행에 전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불조의 혜명을 잇지 못하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날의 결론이기도 했습니다.
왜 수많은 기성종교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원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교가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을 건질, 진리를 등에 업은 파사현정의 도가의 가풍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고 한 비윤리적인 말을 써가면서 수행에 매진한 이유는 한 마디로 임운등등 무애자재(任運騰騰 無碍自在)한 도인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을 매섭게 제어하고, 세상의 불의에 대해 호통 칠 수 있는 힘을 가진 도인을 길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에도 얻은 척하는 구두선(口頭禪)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혜종고 선사는 동아시아 최고의 깨달음 안내서인 <벽암록>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진리는 차고도 넘칩니다. 진리는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를 실천할 힘이 적은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바로 원불교가 나온 이유는 ‘교법의 총설’의 말씀처럼 성현의 가르침을 통합 활용하여 우리가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불교 회상이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살림 가운데에서도 도심 가득한 위대한 우리 선진님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한울안 한 이치에>에서 개인의 특별한 대우나 안일이나 명예를 경계하시면서 “수도인은 좀 고생스러운 듯 하여야 도가 익어 나가는 것이다. 기한에 발도심(飢寒發道心)은 명언이다”고 설하십니다. 제가 출가해서 간사시절에 총부 법회에서 늘 들었던 법문이 이 ‘주리고 추운 때에 도심이 난다’는 ‘기한에 발도심’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세끼 밥은 걱정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도심을 기르는 데에 이처럼 좋은 시절이 어디에 있습니까. 맑고 밝은 불성을 지키는 도심은 이 사회와 세계를 바르게 인도하는 근본적인 정의입니다. 부디 우리 자신과 우리 교단과 우리 사회가 유사 이래 변하지 않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구제할 도심의 정의가 끊어지지 않게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두 번째, 자비심이 정의입니다.
자비심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아시다시피 부처님들의 자비심을 대자대비심이라고 하는 이유는 모은 중생을 남김없이 다 끌어안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온 몸을 내던진 지사・의사・열사들은 이 국가와 민족, 이 세계의 백성들을 위한 자비심을 마음 깊이 간직했습니다. 도심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비심을 발휘합니다.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을 비롯한 제불제성들은 발심-구도-깨달음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제중을 위한 자비심을 발휘했습니다. 그것이 정의로운 길입니다.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히틀러가 죽기 6개월 전에 그의 명령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약 3천 만 명의 희생을 가져온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히틀러를 제거하는 모의에 가담했습니다. 목사님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 거꾸로 간다고 기차가 멈춰지겠는가”, “어떤 미친 사람이 차를 몰고 사람을 치어서 죽이고 있는데 종교가 장례식만을 치루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운전대를 빼앗아야 옳지 않겠는가”라며, 전쟁에 반대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미국의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남아주길 바랐지만,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해 스스로 독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신조는 그가 만든 고백교회의 가르침 중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나를 따르라”입니다.
<성서> ‘마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본회퍼 목사님은 “본문은 제자직의 내용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나를 따르라, 내 뒤를 따라오라!’ 이것이 전부다.”, “부름을 받았으니,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제자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이는 것이다. 곧 제자직은 모든 프로그램, 모든 이상, 모든 율법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 어떤 새로운 내용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 외에는 다른 내용은 전혀 없다. 예수 자신이 곧 내용이다.”라고 설파하십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는 당신의 뜻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지상에서 살았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제자의 직분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제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엄숙하고도 당당하게 교수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본회퍼 목사님 말씀을 빌리자면, 법신불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안에서 확신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길이며, 고독한 개인의 길이 아닌 법열(法悅)의 기쁨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를 섬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우리 9인 선진님들과 같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과 다름이 없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는 대리고(代理苦)의 삶을 살며, 이미 죽은 폭 잡고,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신학의 한 흐름은 예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에서 현실의 구원중심의 신학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모든 종교가 힘을 합쳐 세계를 구제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현장을 사드가 배치된 소성리에서 목격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가톨릭, 원불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드배치의 원인은 남북분단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정산ㆍ주산 두 성자의 고향이자 평화로운 마을은 폐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소성리 마을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게 하는 ‘회복적 정의’를 우리가 구현할 수 있다면, 분단도 그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정부에서는 ‘남북문제가 해결되면, 이 사드문제도 해결된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있습니다. 그 해법은 남북의 분열은 물론 남남의 분열과 우리 자신의 마음의 분열을 어떻게 통합하고 치유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통일에 대한 가장 큰 전략은 종교입니다. 분열된 힘을 뭉치는 데에는 종교야말로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드가 들어가기 2년 전인 2017년 3월 16일 구도길을 열라며 맨바닥에 앉아 농성하던 진밭교 앞에 평화교당을 마련해준 그 광경에서 확인했습니다. 안간힘을 다해 경찰을 제지하며 천막을 쳐준 민중들에게 하염없이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광경을, 이 천막을 왜 우리 교무님들의 머리 위에 쳐주고자 했을까, 라며, 그 이유를 <경향신문>에 실었습니다.
"그들은 원불교야말로 최전방의 보루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힘없는 민초들에겐 원불교야말로 희망의 등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최후의 보루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작은 힘들을 모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불교야말로 자신들의 정의로움을 대변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무님이야말로 자신들의 피눈물을 닦아줄 우리 곁에 온 예수이자 부처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적인 왕의 관이 아닌 법왕의 관을 씌워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가 기억하는 가장 위대한 사람과 종교는 자비심이 가장 많은 사람, 자비심이 가장 깊은 종교입니다.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종교가들이야말로 어떤 사상보다도 자비심이 앞선 분들입니다. 모든 이웃을 생각하는 보살의 화현입니다. 주산종사님이야말로 그 대열에 이미 들어서 계십니다. 주산종사님은 법신불의 진리가 ‘나를 따르라’고 외친 그 현장, 고난 받는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한 전재동포구호현장에서 스러져간 교단 최초의 순교자이십니다. 제가 시간이 나면 차를 몰고 소성리에 가는 이유는 정산종사님과 주산종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성자가 난 땅에서 고통 받는 이웃들, 이들을 지키며 보호하는 재가ㆍ출가와 함께 하기 위해, 그리고 백성의 피와 눈물로 쌓아올린 고난 많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한국사회에 보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구도 과정에서 몰아의 경지에 다다른 ‘강변입정상’에서 대종사님께서는 수많은 중생들의 업장이 해조음처럼 밀려왔다가 밀려오는 억겁의 역사를 보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깊은 입정상태에서 중생들의 하소연을 듣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깊은 자비심이 바로 성불제중ㆍ제생의세의 깃발을 앞세운 우리의 앞길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법의 정의로움입니다.
세 번째, 평화가 정의입니다.
열반은 평화이며, 해탈은 이 평화를 기반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증오와 분열을 벗어나 전쟁을 멈추고 서로 사랑한다면, 사회적 열반과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전쟁은 은혜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정관평 간석지 사업을 하신 것은 문자 그대로 공평하게 쌀을 나누어 먹자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정의가 길이라면, 평화는 그 길의 끝이자 목적입니다.
저는 젊음의 2년 반을 한반도의 비극을 보여주는 전방철책에서 보냈습니다. 소위 DMZ Demilitarization Zone, 즉 비무장지대에서 보낸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함께 훈련받은 동료는 지뢰를 밟고 죽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제가 군대에 있던 80년대만 해도 한 해에 30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자살과 사고로 죽었습니다. 휴전상태이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입니다.
최근 대종사님은 왜 서울이 아닌 익산에 교단을 창립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이 전라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우리가 서있는 곳은 얼마든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남북의 중간선을 확대하여 한반도 전체를 DMZ으로 하자. 먼저 전라북도의 새만금 간척지를 세계의 정치ㆍ경제ㆍ문화ㆍ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자. 세계적인 기관인 UN과 유네스코 본부를 유치하고, 세계적인 금융기관, 기업의 본부, 종교연합 본부, 세계적인 NGO단체 등을 유치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자. 이렇게 하여 새만금을 세계평화의 전초기지로 만들자’는 상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국종교학회에서 발표를 했더니, 어떤 학생이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이 나서주면 좋겠네. 먼저 전라북도 도지사가 되어 나는 오직 이 일만하겠다고 선포하고, 이 일을 성공시킨다면 인류의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는 상상을 하지 못합니까. 비행기도, 잠수함도, 우주선도 다 상상에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한반도가 중립지대가 되어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써야할 어마어마한 군비는 교육과 복지로 다 들어가고, 이 땅은 세계평화의 중재를 위한 수많은 회의가 개최될 것입니다. 그 옆에는 우주를 한 집안 삼는 일원상의 진리와 세계평화를 위한 삼동윤리를 가진 원불교가 있어 모든 정치지도자들은 지혜를 얻기 위해 이곳 익산 총부에 부지런히 들락날락 할 것입니다.
현재 세계가 공인한 영세중립국은 스위스와 라오스뿐입니다. 정산종사님은 <건국론>에서 “조선의 정세를 살필진대 중도주의(中道主義)가 아니고는 도저히 서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고, “과거 경술(庚戌)년(1910년 경술국치인 한일합방) 이전에 친로·친중·친일파 등 세력 투쟁에서 그 결과는 무엇이 있었던가를 왜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여기에 또한 깊이 각성하여야 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서는 남한의 연합제와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한에 합의했습니다.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정상회담으로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만, 우리가 노력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또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영세중립 통일방안을 고려해야 할 시기입니다.
강증산 선생님은 네 신선, 즉 4강이 내기바둑을 두는 데 주인 신선은 내내 바둑판만 공부하며 자리를 지키다가 네 신선이 드디어 자리를 뜰 때, 그 네 신선의 바둑지혜를 모두 다 모아서 제 것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4강의 지혜를 모아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갖춘 바둑꾼이 된다는 예언은 곧 도래할 한반도의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늘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절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 나라가 어변성룡의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된다는 희망을 주신 것은 한반도와 세계를 평화로운 불국토로 만들어가고자 하신 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령한 한 수는 바로 이 새만금 간척지를 통해 전라도를, 그리고 한반도 전체를 영세중립의 비무장지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는 진리가 우리 교단에게 쥐어준 세계사적인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동대학의 우수근 선생님은 미국과 중국의 경쟁 속에서 한국은 어느 한 편에 서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제 원불교인들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저는 우리 교법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집중적으로 관찰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ABC이론입니다. A와 B는 앙숙입니다. 그런데 C는 A와도 친하고 B와도 친합니다. 나아가 A는 C가 B하고 친하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B 또한 C가 A하고도 친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교당에서 설교할 때, 교도님들께 여쭤보면 이러한 사실을 긍정합니다. 이 C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도덕성에 기반한 부처의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교법이 바로 그러한 도인을 길러내는 못자리판입니다. 진정한 세계평화는 이러한 도인들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범타원 김지현 종사님께서 동명훈련원에서 ‘교리도’를 설명하면서 “도인을 길러내는 도판”이라고 하셨습니다. 맨 앞자리에서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뜬금없이 “출가하라”는 낚시에 걸려들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교법이 한반도를 고통에서 건지고, 세계를 평화로 만드는 기획이자 마스터 플랜입니다. 이야말로 평화를 위한 교법인 것입니다. 교법이 사회화 되는 마지막 단계인 평화야말로 참된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함께 이 교법을 등에 업고, 선후배 동지가 신나고 즐겁게 파수공행하며, 평화의 낙원건설을 향해 힘차게 이 사회로, 이 세계로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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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들었습니다.
제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시간을 한 번 만들겠습니다.
새 시대 새 법 대종사님 법에 대한 정의가 밝고 크게 드러나
이 좋은 법이 세상에 크고 빠르게 드러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