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교정 22. 낭만의 주인공 전봇대
낭만의 주인공 전봇대
통나무 기둥 전봇대를 한전의 전공 아저씨가 쇠 발갈퀴로 찍으며 올라가셨다. 마치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처럼 아니 표범처럼 기어오르셨다. 우리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목을 제치고 그 정경을 지켜보았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나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서 스릴 있게 작업하는 게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높은 전봇대 꼭대기에 서서 밧줄 하나 허리에 동여매고 전선을 연결하고 또 한줄을 빼내오고 하는 일은 위험해 보인다. 만일 허리에 김은 밧줄띠가 풀린다면, 쇠 발갈퀴가 꺽여 미끄러진다면 하는 가정을, 상상을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에서 올라가 일하는 거다.
학교 담장 모퉁이에 서있는 통나무 기둥 전봇대에서 낡은 전선을 새 것으로 교체하여 교무실로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시장상인들과 지나던 행인들도 모두 목을 제치고 올려다보았다. 예전엔 대전시내 전 지역이 특선이라는 경찰서와 도립병원, 성모 병원선만 빼고 모두 정전이 잦았다. 비가 좀 어찌 오면 그렇고 바람 좀 세다 싶으면 트집 잡듯이 내키는 대로 전기는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
전기는 어디가서 놀다 오는지 몇 시간 만에 들어오는 게 예사였다. 불만이 큰지 뭐가 못마땅한지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들어오고 심지어 외박도 하였다. 저녁에 나간 전기는 다음날 아침에서야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조회시간과 체육시간 등에 마이크와 스피커, 앰프를 사용하는데 전선 불량으로 교장선생님 훈시 중에 차단되면 분명 미점검, 준비 소홀로 담당 선생님은 야단을 맞을 것이었다. 그래서 한전 직원들이 나와 전선을 점검하고 낡은 전선 삐삐선을 미국에서 들어온 최신 전선으로 교체 작업ㄹ 했다. 이참, 손보는 김에 교장선생님 사택에도 새 선으로 바꿔달라고 교무선생님이 공사하는 아저씨에게 부탁하셨다.
통나무 전봇대는 수십년을 철 발갈퀴로 찍고 오르내려서 푹푹 파이고 찍힌 아픈 상처 자국이 많이 났다. 밤낮 오래 서있고 거기다가 무거운 변압기까지 올려놓아 힘들고 많이 아팠을 텐데 인내력이 좋다고 꼬마들이 말했다.
시장 상인도 손님을 맞아 한참 상담하고 거래를 할 때에 불이 나가 캄캄하면 아주 난처하다 했다. 전깃불이 갑자기 꺼저버려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럴 때 쓰려고 준비한 초를 얼른 찾아 촛불을 밝히지만 장사의 맥이 끊기고 흐릿한 불빛에 부자연스러워진다 했다. 그리고 촛불 아래서 긴가민가하고 색깔을 고르는 일은 엄청난 오차가 있어 혼란을 가져왔다. 그러다 전등불이 들어오면 얼마나 반갑던가. 촛불을 훅 불어 끄고 초에서 올라오는 가는 실 같은 연기를 얼마간 바라보지 않았는가. 냄새는 좀 거시기 하지만.
서민들의 그런 애환이 얽힌 많은 사연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통나무 기둥 전봇대들이 어느 날 어느 새 깡그리 사라지고 시멘트 기둥 전봇대로 모두 바뀌었다. 밟고 오르기 좋게 굵은 쇠토막이 박혀 있어 전공 아저씨는 쉽게 밟고 오르셨다. 아울러 통나무기둥 전봇대를 찍어 오르던 쇠 발갈퀴도 함께 사라졌다. 변하지 않은 건 떨어지지 않게 안전하게 일하도록 전봇대에 올라가 걸던 허리선 밧줄은 여전히 껌딱지처럼 남아 붙어다녔다.
전봇대는 빠르게 변신에 변신을 거듭 하였다. 몸매를 몰라보게 한껏 날씬해진 스틸 강관 전봇대로 몸통을 바꾸었다. 이제는 전봇대를 대하고 일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어제까지 전기 공사하는 아저씨들은 예전처럼 조바심에 전봇대를 붙들고 올라가 매달려 체면이 깎이게 사정하고 조심조심 두려워하며 작업하던 걸 이제는 싹 달라졌다.
요즘은 리프트 기계 차에 달린 통 안에 들어가 높이에 맞게 들어 올려져 안전하고 자유롭게 작업을 한다. 따라서 이번에는 당연히 몸을 기둥에 걸어매던 안전 허리 띠 밧줄이 자리만 차지하는 불편한 천덕꾸러기가 되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사라졌다.
세상은 참 뭐 좀 익숙해지기도 전에 많이 변한다. 저 스틸 강관 전봇대마저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땅속으로 매설해버려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럼 맨홀 뚜껑을 열고 작업하는 전화 광케이블처럼 지하 홀 구멍에 들어가 배선 케이블 작업을 해야 할 날도 얼마 안가서 그런 날이 다가오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봇대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차례이다. 왜냐면 이들이 지하 맨홀 케이블 작업을 하려 뚜껑을 열어 제치고 고인 물을 양수기로 퍼 올린 곳에서 머뭇거리며 허리를 구부리고 땅속 지하 홀을 구경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 모를 일이다. 통나무 기둥 전봇대도 가고 시멘트 전봇대도 가고 쇠 발갈퀴도 가고 허리띠 밧줄도 가고 스틸 전봇대마저도 지중화(地中化) 정책으로 갈 게고 리프트 기계차도 차령에 따라 폐차의 운명을 맞이하여 사라질 것이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구경꾼들마져도 각기 알아서 어디론가 갈 것이다. 남는 건 오직 기동력이 없어 자리를 지키는 변함없는 이 땅 뿐이다. 참으로 모든 게 머물지 않고 간다.
그런데 정겨운 풍경화 속에 자리 잡던 전국에 100만 개에 이르는 통나무 기둥 전봇대는 모두 다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을까. 혹시, 모두 땔감으로 쓰인 걸까. 그 통나무를 가공하여 나무주택을 보급했다면 적어도 2만호 정도의 자연주택은 생겨났을 수 있었다. 울타리와 대문도 잘라낸 나무로 해서 더 따뜻한 주거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나마 최신정보 제공에 의하면 땅 주인의 허락없이 설치한 전봇대가 138만개가 넘는단다.
그러고 보니 통나무 100만개를 뽑아내고 잘라낸 한반도의 산은 참 부자였다. 그러면 산을 황폐케 했던 주범은 바로 통나무 전봇대란 말인가? 전깃줄이 멋들어지게 늘어지고 재미난 참새 시리즈 신화를 연이어 만들어내던 통나무 기둥 전봇대는 고향을 그리는 향수(鄕愁)였다. 아, 시골을 가고프게 자극하는 동경(憧憬)의 촉매제이었다.
전봇대는 늦가을에 접어들면 강남으로 갈 제비들이 전선에 올라 앉아 지지배배 떠나는 소감들ㄹ 남기던 아련한 추억이었다. 통나무 전봇대는 어린 날을 떠오르게 하는 낭만의 주인공이었는데 그 마저 어쩔 수 없이 세월 따라 갔구나.
노들강변에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