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인물 | 다니구치 케이] “나는 자연을 만나기 위해 산에 간다”
글·사진 염동우 기자 일본의 세계적인 여성 산악인 인수봉 등반
등반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니구치 케이(42)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미 황금피켈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산악 스타가 되었고, 이후로도 새로운 대상지를 찾아나서며 더욱 완벽한 등반을 보여 주고 있는 산악인이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여성 등반가란 타이틀 뒤 가려진 진짜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보기보다 파악하기가 꽤 까다로운 수수께끼 같은 여자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상쾌한 아침, 인수봉 기슭 우이동 버스종점에는 클라이머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함문식, 신인섭, 김성용, 기형희씨였다. 서로 무엇에 끌렸을까? 다니구치 케이가 온다는 소식에 등반장비를 챙겨 한걸음에 달려왔으니.
함문식씨와는 2002년 설악의 토왕폭 빙벽에서 만났다. 신인섭씨 또한 이듬해 토왕폭 빙벽 등반 중 만났다. 김성용씨는 JMA(일본산악연맹) 초대로 참가한, 극한고산등반을 추구하는 알파인 클라이머들의 모임인 윈터 클라이머스 미팅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여성산악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기형희씨는 일본어에 능숙해 통역을 하며 알게 된 사이다.
세계는 그런 다니구치 케이를 알아 줬다. 인도 가르왈히말라야 제2 고봉인 카멧 남동벽 알파인스타일 초등은 무엇보다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받게 했다. 무려 1,800m 길이에 난이도 M5의 거벽을 파트너 카주야 히라이데와 2인 혼성으로 등반해 냈다. 벽상에 매달린 채 6일을 비박하며 8박9일이라는 실로 엄청난 등반이었다. 미지의 벽에서 경량 속공등반의 진수를 보이더니 그는 그해 최고의 등반을 펼친 등반가에게 주어지는 제17회 황금피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클라이머로 거듭났다.
앞으로 세계적으로 뛰어난 클라이머들이 어떤 방향과 스타일의 등반을 펼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그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미지의 벽을 대상지로 소수인원으로 속공등반을 위한 경량 장비와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부여한 등반, 포터나 셰르파가 없는 등반, 등반 도중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있는 알파인 스타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역동적 첨예의 등반을 펼치는 고산거벽 클라이머가 황금피켈상의 후보에 오르는 조건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알파인 등반은 무수히 많은 변수를 지닌, 그야말로 난이도가 없기 때문에 더 어렵다. 알파인 등반은 그 어떤 등반보다 뛰어난 능력을 요구하고, 더욱이 리더는 다른 사람의 안전까지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다니구치 케이는 “일본에 20명 정도의 여성 알파인 클라이머가 있지만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수준의 클라이머도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알파인 등반은 쉽게 다가갈 수 없다”고 한다.
다니구치 케이는 우리나라에 오기 전인 7월, 파키스탄에서 미등벽으로 남아 있던 시스파르(7,611m) 남서 스퍼를 알파인스타일로 등반했다. 두 달간의 원정기간 동안 등반하느라 많이 지쳤는지 밥을 찾았다. 우이동 종점 부근 식당으로 들어간 일행은 청국장과 묵사발을 시켰다. 아무래도 구수한 우리 음식을 대접하는 게 좋겠다는 기형희씨의 배려였다.
음식 맛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밥이 정말 그리웠어요. 산에서 행동식으로 먹던 초콜릿과 비스킷에 질렸었거든요. 집 밥이라서 좋아요”라며 음식을 깨끗하게 비웠다.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는다. 그저 담담할 뿐…”
일행들은 식사를 마치고 인수봉을 오르기 위해 숲속을 걷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걷고 있는 신인섭씨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한국 사람들과 만나면 어때요?”
“해외에서 등반을 하면 한국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바로 옆 나라이기도 하고 동양의 정서가 비슷해서일까 친숙해요.”
“그럼 암벽등반은 어떤가요?”
“일본 바위는 석회암, 사암, 현무암이 많아요. 잡으면 흔들리고 뽑히기도 해서 위험하죠. 때문에 루트 파인딩이 중요합니다. 반면 한국 바위는 정말 깔끔해서 등반할 맛이 나요. 하지만 위험요소는 떨어져 긴장을 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한국 클라이머들은 등반에만 집중하고 내려오는 데에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는 2년 전의 알프스 등반 중 일본인이 등반 도중 추락한 얘기를 들려준다.
“절벽에 매달려 있던 일본 등산인이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일본 말로 소리를 질렀는데 지나던 한국인이 그의 말을 이해 못 했나 봐요. 반가운 인사말로 알았던지 위급한 상황임에도 한국말로 ‘네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 가버려 난감했대요. 그만큼 한국인들은 어디 가든지 많이 만나요.”
그는 지금 일본의 산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일본에서는 ‘야마 보이’나 ‘야마 걸’이 유행이에요. 이들은 전문등반을 하는 저보다 더 좋은 장비와 옷을 갖고 다니고 물이 부족한 산장에서도 씻고 화장을 해요. 일본인은 과거 산신을 숭배하기 위해 등산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경건하고 깨끗하게 자연을 보호한다는 마음이 컸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어요. 산을 찾고는 있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없어져 정말 아쉬워요.”
다니구치 케이는 사람들로 붐비는 등반지를 싫어한다. 그래서 주말을 피해 등반을 즐긴다. 프리랜서로 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름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샤모니를 ‘일본의 동경’이라고 표현하며 “나는 산을 가는 게 아니라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간다”고 했다.
인수봉 아래 대슬랩에 도착한 일행들은 장비를 착용하고 등반에 나섰다. 그의 인수봉 등반은 10년 만이다. 이전에 취나드B와 우정B 루트를 올랐다. 함문식씨가 의대길 옆에 있는 양지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헌데 인수봉 오아시스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람들이 서둘러 하산하는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 구조대가 들것을 들고 올라와 구조를 펼친다. 다니구치 케이의 얼굴이 잠시 떨렸다. 이유가 있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 한국 방문인데 그중 네 차례나 사고를 겪었던 것이다. 김성용씨가 그에게 기분이 괜찮냐고 묻자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는다. 그저 담담할 뿐이다”고 했다.
그가 근심을 멈추고 인연의 끈을 묶었다. 오아시스를 지나 양지길로 접어들더니 양다리 쭉 벌리는 과감한 동작의 연속이다. 등반에 임하는 모습이 세련되고 깔끔했다. 알파인 클라이머는 암벽등반을 잘 못하리란 편견, 그가 여성이라는 편견을 사라지게 해줬다.
일본의 세계적 등산가 다니구치 케이(43·사진)씨가 등반 도중 숨졌다. 그는 세계 최고 산악인에게 주는 '황금피켈상(賞)'을 여성 최초로 받았던 인물이다.
마이니치(每日)신문·지지(時事)통신 등에 따르면, 다니구치씨는 지난 21일 홋카이도의 해발 1984m 구로다케(黑岳)산 정상에 오른 직후 내려가다 정상 부근에서 추락했고, 이튿날 정상에서 700m 아래 부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다니구치씨는 비교적 완만한 루트 대신, 다른 등반대원 4명과 함께 북쪽의 가파른 절벽 루트에 도전했다가 사고를 당했다.
유명 산악인이지만 업체 협찬 없이 등반했다. 협찬받으면 후원업체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자유로운 등반을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다.
그는 또 "산의 작은 것 하나라도 훼손하지 않는 게 좋다"며 철저히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소수 인원으로 빠르게, 포터(짐꾼)·셰르파(길 안내인) 없이, 도중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등반 방식이었다.
답글
인산
15.12.28 10:21
아직까지 내 기억속에 그녀보다 훌륭한 산악인은 없었다. 그녀보다 후에 황금픽켈상을 받은 카자흐스탄 산악인 데니스 우르콥(암빙벽 직등루트를 알파인스타일로 14봉을 오른 첫산악인) 이라는 훌륭한 산악인이 생존하지만 그녀보다는 청소년부터 자신의 인생을 산을 사랑하며 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산을 오르기위하여 대학을 가서 대학산악부에 들어가 산악인의 길을 걷기 위하여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말하던 그 눈빛이 아직 내머리속에 생생하다. 토왕폭에서 등반중 부상을 당하여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른 등빈자들이 등반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소리쳐서 등반을 포기하고 구조하고 내려오다 낙빙에 맞아 어깨에 큰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그녀의 어깨에 파스를 발라주겠다고 하니 브라자만 남기고 상의를 훌쩍 벗으며 몸을 맡기며 웃으며 '한국등반가들은 실력은 좋으나 너무 배려가 없네요. 하지만 함상은 예외로 따듯하다'고 말하며 상처부위에 약을 문지르던 나를 아픔을 참으며 바라보던 눈길을 아직 잊을수 없네요. 그녀는 일본산악인들이 산에 가기위하여 가이드등반을 직업으로 했다. 원정등반을 가기위하여 후원자들을 찾다보면 거지로 취급당하고, 그들의 노예가 되고, 돈을 벌기 위한 상업산악인라는 명칭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게 한국에서는 통하다 보니 히말라야 노말루트원정이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왕성하게 된 계기가
된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녀는 히말라야 노말루트 원정파 한국인들의 열정을 대단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과는 다른길을 가는 모양만 비슷해서 산악인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고 씁씁해 했었다. 일본은 그런 등반을 추구하는 산악인은 없고 오로지 암빙벽기술로 직등루트를 알파인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산악인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셀파는 꿈도 못꿔요. 요. 장비사들의 후원도 없어요. 오로지 나의 돈으로 가려니 돈 적게 드는 직등루트를 올라요. 어쩌다 등반 사진을 요구하는 장비사가 있으면 돈으 박도 팔아서 등반경비에 충당해요. 자연에서 자유를 만끽하려 등반을 하러 가는데 정치산악인과 장비사
들의 노예가 되어 약장수 돈벌어 주는 원숭이가 되어서 되겠어요? 제가 산악인으로서 실수 한게 있다면 황금픽켈상을 받으러 유럽에 갔던거예요. 솔직히 상을 받고자 간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알프스등반을 하러 못갔거든요. 알프스 냄새도 맡고 산악인들의 모습도 보고 싶었거든요. 산악인으로서 잡지사가 만든 상을 받았다는 것은 후회되요." (그녀는 이후 사람과 산 잡지사가 주는 아시아 황금픽켈상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등반중 죽음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자신은 등반과 자연이 주는 환경을 즐길뿐이예요. 등반전에 보통 3일 굶는 연습을 해요. 그래야 올라갈 식량만 가지고 가서
하강할때 몇일걸릴지도 모르는 등반에서 살아 돌아 올 수 있어요. 그게 알파인 등반이고 자연의 악천후 익스트림을 즐기는 산악인 아닌가요? 그녀는 여자로서도 작은 체구였지만 도전에 물러서지도 않고 죽음과 삶과도 타협하지도 않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밝게 미소짓는 부드러운 소녀와 같았다.(눈물이 나네요) 그녀의 만남은 2013년 10월 불암산 한성대암장에서 등반까지 와서 끝났다. 그녀는 몇차례 나를 찾아와서 빙벽을 배우고 함께 등반을 하고 텐트에서 떡꾹과 만두국을 끓여 먹으면서 등반과 산악인의 인성에 대하여 대화를 아주 많이 하였다. 함상, 존경하고 사랑한다며 수줍은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던 그 모습이 생생하다. 그녀는 포근한 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산야신이 되었다고 믿는다. 자연을 사랑하고 등반을 즐기던 자연인이자 진정하고 훌륭한 산악인이다. 그녀에게 최고의 산악인이라고 준 황금픽켈상은 모욕적이었고 쓰레기를 좋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악취일 뿐이었다. 잘 가시오. 다니쿠치 케이. 나는 이로소 몇년전 하강중 추락한 산악가이드 모리나까 일본 본 산악인과 함께 두 일본 산악인 친구를 잃었다. 그들의 삶은 산악인의 최선을 다하였고 충실했다. 다음 생은 산야신으로 환생하여 모든 산악인들의 안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