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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이야기95(왕하14:1~22, 대하25:1~28))
유다 왕 아마샤
유다 왕 아마샤의 아버지 요아스는 어려서 부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였으나 그의 통치 후반기에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무리들과 어울리면서 우상을 숭배하며 쾌락과 음란한 생활을 즐겼다. 그 아들 아마샤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으나 에돔에 가서 에돔의 화려한 신상을 보고 반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성전 주랑에 모셔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드리며 섬겼다. 아마샤 처럼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신의 특별한 이적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마샤는 화려한 우상의 모습에 현혹되었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이스라엘 왕들은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바알이나 아세라나 그모스 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승리를 안겨줄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경건을 필요로 했지만 이방의 제사에서는 쾌락과 성적인 욕망을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왕과 백성들이 쉽게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어떤 이적을 따라서 하나님을 찾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범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세상의 행복을 위해 은혜를 베푸시고 이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 안에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이시며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바르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14:1~4)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 37 년에 왕위에 올랐다. 유다 왕 요아스는 40 년간 통치를 하였으므로(왕하13:10) 유다왕 요아스가 죽은 때가 이스라엘 왕 요아스 4 년에 죽었으므로 아마샤가 왕위에 오른 때가 이스라엘 왕 요아스 4 년이 되어야 맞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년대기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가 유다 왕 37 년 12 월경이었고, 아마샤가 왕위에 오를 때가 1 월경이라면 요아스 2 년에 아마샤가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어느 정도 성립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 2 년에 아마샤가 25 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 29 년간 유다를 다스렸다. 성경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게 행하였다고 칭찬을 받은 왕은 아사 왕 뿐이다.(왕상15:11) 아마샤의 부친 요아스와 아마샤의 공통점이 있다. 아마샤의 부친 요아스는 처음에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있었으나 그의 통치 후반기에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이다. 아마샤도 그의 부친 요아스 처럼 처음에는 열심이 있었으나 후에 우상숭배를 했다는 점이다.
요아스와 아마샤의 공통점
1. 즉위 초임에서 중반까지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
2. 통치 후반기에 접어 들면서 우상숭배에 빠졌다.
3. 둘 다 선지자의 경고를 거부하였다.(대하24:18, 25:14)
4. 둘 다 부하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왕하12:21, 14:19)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왕하14:5~8)
아마샤가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부친 요아스의 정책을 싫어하며 요아스를 죽인 사람들이 여러 의견을 제시하며 방해를 했으므로 아마샤는 여러가지로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아마샤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신실하게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마샤를 도우셨다. 아마샤가 군사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기강이 바로섰을 때 아마샤는 부왕 요아스를 죽인 자들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으므로 신명기의 율법대로 그의 아들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
아마샤가 유다군 삼십만 명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0,000 명을 죽이고 에돔 땅을 정복하였다. 아마샤가 싸워서 이긴 소금 골짜기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오늘날의 나할마타로서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아랏 남쪽 지역이라는 설과 2) 사해 남쪽지역으로 페트라 서쪽 30km 지점에 있는 아일밀흐라는 견해 등이 있다.
아마샤가 셀라를 점령하여 그 곳 이름을 '하나님에 의해 정복된 곳'이라는 뜻으로 욕드엘이라 불렀다.
아마샤가 에돔을 쳐서 승리를 한 후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유다는 아합 왕 이후 이스라엘 보다 군사면에서 열세에 있었으므로 그의 부친도 이스라엘과 유화정책을 펴왔다. 아마샤와 함께 에돔에 출전하기로 했다가 돌려보낸 이스라엘 군대가 유다를 침략하여 3,000 명을 죽이고 백성들로 부터 물건을 탈취하였다. 이에 화가난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예후의 손자 요아스에게 사신을 보내 선전포고를 했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의 왕 아마샤에게 사람을 보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그와 유다의 왕 아마샤가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왕하14:9~12)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비유로 한 말은 가시나무는 유다이고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의미하여 표현을 하였다. 가시나무의 비유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나무를 뜻하며 백향목은 귀하고 비싼 나무를 뜻한다. 결혼은 신분이 비등해야 가능한데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유다가 교만해져서 이스라엘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비하적인 비유를 들어서 충고를 하였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아마샤에게 에돔을 정복한 것으로 영광을 삼고 화를 자초하여 유다와 함께 아마샤가 망하지 말고 겸손하게 돌아가라고 경고를 하였으나 아마샤가 듣지를 않았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예루살렘을 먼저 공격을 하지 않고 유다 땅 벧세메스로 향하였다. 벧세메스는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다가 되돌려 받은 장소로서 그곳 지도자들이 법궤를 들여다 보다가 70 명이 화를 당하여 죽은 곳이다.(삼상6:12~19) 벧세메스란 태양의 성이란 뜻이다. 아마 가나안의 태양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벧세메스 전투에서 유다는 이스라엘에 패하여 백성들이 도주를 하였다. 유다가 이스라엘에 패한 원인을 대하25:20에서는 아마샤가 이스라엘과 싸우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에돔의 우상에게 기도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승리를 주셨는데 아마샤는 에돔에 가서 에돔의 화려한 신상을 보고 현혹되어 에돔의 신상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으며 번제단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셨으나 아마샤가 듣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마샤를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손에 넘기셨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의 업적과 또 유다의 왕 아마샤와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14:13~16)
벧세메스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죽인 유다 백성들의 시체를 보고 놀라서 싸움을 하다가 유다 군사들이 도주하였으므로 아마샤는 쉽게 요아스의 포로가 되었다. 요아스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베냐민 문이라고도 불리는(렘37:13, 38:7, 슥14:10) 에브라임 문에서 부터 성 모퉁이 까지 약 400 규빗(약 182m)을 정복의 표시로 헐었다. 요아스에 의해 파괴된 성벽은 훗날 히스기야 왕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대하32:5) 요아스는 아마샤를 풀어 주는 대신 유다 고관들과 젊고 유능한 청년들을 포로로 붙잡아 사마리아로 데려갔다. 요아스는 왕궁과 성전의 곳간에 있는 금과 은을 모두 빼앗아갔으며 예루살렘 성에 있는 무기들을 탈취해서 가져갔다.
유다 왕 아마샤가 죽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왕하14:17~22)
아마샤는 이스라엘 요아스 왕 2 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29 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다. 요아스는 이스라엘을 16 년 동안 다스렸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죽은 후 아마샤는 15 년을 더 살았다. 아마샤의 신복들이 아마샤를 배신한 행위에 대하여 성경상 언급은 없으나 제사장들이 아마샤의 우상숭배로 모반을 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다. 대하25:27에 의하면 아마샤가 하나님을 배반한 후로 부터 무리가 그를 반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들이 칼을 들고 왕과 대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하25:27에 의거하여 추론을 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하들이 아마샤가 우상숭배를 하며 이스라엘에게 패하였고 자녀들을 볼모로 빼앗겼으므로 아마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반란을 일으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통치 후반기에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반역이 있었으므로 아마샤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예루살렘 남서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 라기스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 지냈다. 그러나 라기스 성읍 사람들이 아마샤를 보호해 주지 않았으므로 반역한 무리들이 라기스로 군대를 보내어 라기스에서 아마샤를 죽인 후 예루살렘으로 시체를 실어다가 다윗 성에 장사하였다. 아마샤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16 세된 아사랴를 반역군들이 왕으로 삼았다.
엘랏은 에돔 땅(왕상9;26) 에시온게벨 아카만 항구 근처에 있는 성읍이다. 다윗이 에돔을 정복했을 때 이스라엘에 귀속되었으며(삼하8:14), 솔로몬이 배를 건조하여 무역항으로 사용을 하였다.(왕상9:26(대하17~18) 유다 왕 여호람 때 에돔에 빼앗긴 것으로 여겨지며(왕하8:20~22) 아마샤가 다시 빼앗은 것을 그 아들 아사랴가 건축을 하고 유다의 항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첫댓글 아멘
아멘
선교사님~~^^
좋은 말씀으로 배움을 얻고 은혜로움이 충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