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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 이훈
1. 늘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중요하다. 사회가 합리적으로 갈수록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기준보다는 말을 가지고 평가하게 된다. 개인 주체의 합리적인 판단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한마디로 글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니 교육 현장에서는 글쓰기가 어느 공부보다 우선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공부와 글쓰기를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같이 읽힐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글쓰기 자체가 진짜 공부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자면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공부가 아니고 뭔가! 당장 글쓰기를 독립 교과목으로, 그렇지 못하면 국어 과목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대접해야 마땅하다. 단단한 내면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세상을 보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교육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외면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유행에 민감하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들로 자랐다. 이런 부정적인 현상이 전적으로 글을 안 쓰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하면 물론 폭력적인 단순화이지만 교육 현장을 놓고 조금이라도 고민해 봤다면 그 누구도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즐겁게 글을 쓰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되풀이하여 쓰는 것, 이게 답이다. 쓰다 보면 생각이 생긴다. 이미 생각한 것만으로는 절대로 좋은 글을 짓지 못한다. 글감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따지면 따질수록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떠오른다. 좀 과장하면 글이 글을 부르는 일도 생긴다. 이른바 영감도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얼른 보기에는 뜻하지 않게 얻은 것처럼 보이는 행복한 표현은 평소에 많이 생각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글도 농사와 똑 마찬가지로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해야 옳다. 글을 의식적으로 쓰게 되면 그냥 지나치던 것도 주의 깊게 돌아보고 책도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읽게 된다.
되풀이하여 글을 쓰는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 과정이 힘든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글을 쓰면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심지어는 부정해야 하므로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마음의 넓이와 깊이에는 한계가 없다. 빈 항아리는 물이 가득 차면 더 담을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채울수록 빈 데가 늘어난다.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자면 어렸을 때부터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부모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로 대접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롭게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낼 수 있다.
2. 좋은 글은?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지만 필자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의도가 뻔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깊이와 보편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평생에 걸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읽고 쓰고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좋은 글 못 쓴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읽고 생각하고 써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의와 노력이다.
깊이나 독창성, 보편성을 갖추는 일은 위에서 말한 대로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이니까 여러분의 노력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좋은 글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구체성이다. 여기 내 앞에 꽃이 있다고 하자. 내가 아름답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여러분은 감각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공감을 얻으려면 꽃의 모양이나 향기를 마치 눈앞에서 그 꽃을 보고 냄새 맡듯이 보여 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루는 대상을 독자의 눈이나 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주게끔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성이다.
글의 교훈적인 성격은 이 구체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하자.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 대신에 그런 모습과 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독자들은 ‘아! 이러니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구체성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게 되면 대상을 관찰하는 능력은 물론이고 독자를 배려하는 상상력도 더 커진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구체성은 독자의 김각으로 대상을 살피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건, 내가 이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에서 나를 객관화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더 넓고 깊어진다. 나와 세상을 더 잘 알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좋은 글의 또 다른 조건은 복잡성이다. 복잡성은 대상을 이루는 여러 측면을 고려한다는 뜻이다. 대상을 단순하게 어떤 하나의 성질만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든지 긍정적인 요소만을 일방적으로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특히 주장을 내세우는 글에서는 이 성질을 고려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다. 내 주장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반대되는 측면을 무시하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굴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복잡성을 존중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실을 존중하는 겸허한 태도를 길러야 한다. 내 신념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갖추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자존심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하면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 있어야만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답이나 결론을 바로 제시하는 것보다 그것에 이르기 위한 논의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답보다는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더 많은 점수가 매겨지는 것은 수학 문제 풀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글에서도 꼭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글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쉽게 이르는 길도 나 있지 않다. 앞에서 말한 대로 쉬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게 겨우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을, 읽고 생각하고 쓸 때마다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읽을 만한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참고 자료
어떤 중학생의 자기소개서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일반적인 학교들과는 달리 폭 넓고 자유로우며 깊이 있는 공부가 가능한 학교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에서 대단히 뛰어난 학생들이 응시한다고도 들었습니다. 현재 저의 실력은 그런 학생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성적을 소개해야 함). 그러나 제가 학교에 합격하기만 한다면 누구보다도 즐겁게, 열심히 공부할 자신이 있습니다(평소에 어떻게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소개해야 함). 수학과 과학을 정말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그 방면에서 최고의 학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들을 우리나라와 인류를 위하여 베풀고 싶습니다.
저는 머리가 특별히 좋은 아이는 아닙니다. 지금 대단한 능력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내 이루어내는 끈기는 있습니다(어떤 일을 그렇게 했나요?) 저는 부족한 것을 빨리 파악하고 보완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합니다.(이렇게 주장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예를 들 것) 과학과 수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이것도 막연하게 영어 공부라고만 하지 말고 어떤 내용과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지 제시할 것) 공부만 하면 정서가 메마른다는 엄마의 말씀에 따라, 성악과 플루트 연주를 배우고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중요하게 여기려 하고 있습니다.
3.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1) 늘 질문하자―고정 관념, 상식, 권위, 관습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 참고 자료 1
‘왜?’는 이치를 따짐이다. 곧 합리성의 추구이다. 힘의 논리를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합리성이다. ‘왜?’의 발생은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내가 들은 풍월에 의하면,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엄마(maman)’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왜?(pourquoi?)’로서 '아빠(papa)'보다 더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실제 어린이들은 세상과 만나면서 끊임없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손가락은 왜 다섯 개이며 입은 하나인데 귀는 왜 두 개인가? 호기심에 가득 찬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말을 배우면서부터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점에는 한국의 어린이들과 프랑스의 어린이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 차이는 엄마에게서 비롯된다. 프랑스의 엄마들―아빠도 마찬가지인데―은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물음에 성실하게 답해준다. 순진한 물음에는 순진하게 엉뚱한 물음에는 엉뚱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참을성있게 끝까지 답해 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건 몰라도 돼”라든가 “귀찮게 왜 자꾸 그러니”나 “크면 다 알아”와 같은 대꾸를 들어본 적이 없다. 왜? 시간 여유가 충분해서?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이를 가족의 한 성원으로 보고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준다는 점이 더 크다고 본다. 습속이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프랑스 엄마들에 비해 한국의 엄마들은 어떤가? 또 아빠들은 어떤가? 아이를 끔찍이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부모들이 더 열성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줄 용의도 있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왜?’에 성의있게 대답하는 엄마와 아빠는 아주 드물다. 왜?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대화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내 것’ 즉, 소유물로 보는 타성과 그 자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습속 등 사회습속이 더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넌 그런 거 몰라도 돼”나 “귀찮게 왜 그러니”나 “크면 다 알아”를 몇 차례 들은 아이는 ‘왜?’라는 물음을 스스로 접게 된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거부된 ‘왜?’라는 질문을 던질 곳은 더 이상 없다. ‘왜?’라는 질문이 일찍부터 실종되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이 습속의 차이는 대단한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다. 아이들의 사회에서부터 대화가 통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 글을 읽는 부모에게, 또 장래의 부모에게 아이들의 ‘왜?’라는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자 한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는 간단하게, 황당한 질문에는 더욱 황당하게 답변하시라. 아이는 꿈과 상상의 날개를 마냥 펼쳐 나갈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졸라대는’ 아이를 보기 어렵다. 간혹 졸라대는 아이가 있긴 하지만 엄마가 설득하면 금방 그친다. 그동안 대화를 해왔기 때문에 대화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아이가 조르는 행위는 자신을 금쪽같이 아껴주는 부모에 대한 반사적 행위로서 ‘힘의 시위’로 나타난다. 대화로 풀리지 않고 목적이 달성되거나 아니면 엄마의 ‘힘에 의한’ 묵살로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은 ‘힘의 논리’의 관철은 그 아이가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과연 그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 포기했던 ‘왜?’라는 물음을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되찾을 수 있는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거부되었는데? 사회 곳곳에서 힘의 논리, 서열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커서 힘을 무조건 따르고 권위에 경배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대중은 이미 ‘힘의 논리’에 무감각하기까지 하다.
그 위에 오늘도 각종 정보를 쏟아내는 대중 매체의 작용이 보태진다. 현대인들은 앎과 정보를 혼동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을 되찾지 못한 채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의 논리는 계속 관철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되뇌어야 할 것이다. 어렴풋이 아는 것이 아예 모르니만 못하기 때문이다.(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 2002, 48-51쪽.)
* 참고 자료 2
질문의 힘 / 이훈
먼저, 질문부터 해 보자. 프랑스 아이들이 ‘엄마’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 ‘왜?’라고 한다. 하기야 사람은 원래 호기심 덩어리로 태어나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삶은 주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제대로 살자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개별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차이가 많아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겠으나, 우리가 프랑스 부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귀찮아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부모는 심지어 그런 거 알 필요 없다고 윽박지르기조차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차츰차층 질문을 거둔다. 교육열에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부모는 겉보기와는 정반대로 반교육적인 태도를 실천하며 산다.
프랑스 부모들은 언뜻 보기에 엉뚱한 질문에도 꼭 대답을 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질문은 없다. 허구를 특징으로 삼는 문학은 이런 유형의 질문에 기대지 않고는 아예 나올 수가 없다. 문학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현실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을 그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디 문학뿐이랴! 감성을 중시하는 문학과는 달리 냉철한 이성의 작용을 바탕으로 삼는 과학의 발전에도 엉뚱한 발상이 꼭 필요하다. 기존의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의심의 눈으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 교육도 사실은 우리 부모의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질문해서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선생의 말이나 책에 나와 있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도록 길들인다. 우리 학생들이 질문을 꺼리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정답을 찾는 것을 위주로 하는 공부 방식 탓이다. 이른바 객관식 문제가 이런 태도를 갖도록 세뇌시킨다. 내 생각은 필요 없다. 정답으로 제시된 것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 정답만 필요하므로 학생 스스로도 질문하는 동료에게 시간 뺏는다고 눈을 흘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암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제 웬만한 정보는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들어 있다. 그런 걸 학교에서 외우고 시험까지 봐야 할까? 기계가 다 해결해 주는 세상에서 이런 일에 힘과 시간을 바치는 것은 괜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암기가 강조될수록 정답이 중요해지고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따지는 능력을 상실해 간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말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질문이 없다, 자기 생각이 없다, 토론할 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어와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저럴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보건대 터무니없는 악담은 아닌 것 같다. 수업하면서 질문하라고 수없이 요구하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보를 많이 모아 놓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니까 알려고 묻게 된다.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책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모른다고 의식한 덕분에 받은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반대로 책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니까 다 아는 것처럼 굴게 된다. 그래서 책도 질문도 필요 없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뭐 하러 눈과 머리 아프게 책을 읽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질문하지도 않거니와 질문 받는 것도 싫어한다.
제대로 알려면 물어야 한다. 정답을 아는 것은 쉽다.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을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질문은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존 답의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억압적인 사회에서일수록 정답은 힘이 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금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창조적인 질문은 쉽지 않다. 해 오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그래서 상투적인 대답과 삶이 나온다. 일상의 늪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이렇게 금지와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묻지도 않은 채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에도 가고 전공도 정한다. 결국 고정관념과 관습, 유행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이 된다. 여기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질문하지 않으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자꾸 물어야 개인적인 성숙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낸 것만 참다운 지식이 된다. 질문 없이 그냥 얻은 답은 시험 보고 나면 다 잊힌다. 아마 다들 공감할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이유가 있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호기심을 품고 열심히 물으면 저절로 공부가 즐거워진다. 공부가 지겹게 된 것은 질문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몰아가는 우리 교육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2) 자기중심주의(지역주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사실 앞에 겸허하라, 차이를 인정하라, ‘틀리다’고 하지 말고 ‘다르다’고 말하자
* 참고 자료 1
호메로스는 그레시아인이었으나 그레시아군 지도자들의 치기 어린 다툼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적군의 대장 헥톨의 영웅됨을 아낌없이 칭찬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민족적 감정을 애써 억누른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사실 앞에 겸허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한 떼의 그레시아군이 불의의 습격을 당해 많은 동료를 잃고 도망하다가 안전한 곳에 이르러 우선 먹을 것을 실컷 먹고 쉬고 난 다음에야 죽은 동료들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덤덤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적 선택주의의 전형인 감상주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상벽이 있는 아류는 아마도 “먹을 것도 있고 오래 굶주리기도 하였지만 죽은 동료들 생각에 울음만 나올 뿐 입맛이 통 없었다”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감상적 허위>이다. 호메로스의 이런 대목들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식적 통념―스스로 세련된 교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을 파괴하는 준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해대면서도 호메로스는 무척이나 덤덤하다.」(이상섭, 「사실의 준열함과 문학」, <<말의 힘>>, 민음사, 1976, 20-1쪽.)
* 참고 자료 2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
3) 복잡성을 존중하기―세상은 복잡하다, 일면적으로 보지 말자
공평하게 그리고 꼼꼼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은 아주 복잡하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두고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평가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요소로 이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참고 자료
내 방 벽에는 일본의
악귀(惡鬼) 탈이 걸려 있다.
노랑칠을 한 것이다.
고약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마에 삐져나온 힘줄을
나는 알 듯한 기분으로 바라다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의 탈」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 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땅에 드러누워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걸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문정희, 「늙은 코미디언」
4) 열정이야말로 으뜸가는 사고력이다
위에서 생각하는 첫째 방법으로서 “늘 질문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묻자면 뭐가 있어야 할까? 그 답은 열정이거나 이 낱말과 연관된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열정을 지니면 세상은 온통 의문투성이가 된다. 그러니 호기심과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열정이야말로 으뜸가는 사고력이라고 해야 한다.
* 참고 자료
‘사고력’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사고력을 단지 사고의 기능, 생각의 도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사고력 관련 책들을 보면, ‘관찰, 추론, 분류, 비교, 사실과 의견 구분하기, 공통점 찾기 등’을 훈련시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고력’을 단지 ‘논리적 사고력’ 또는 ‘이성적 사고력’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 이 세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과 관심,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애정과 친절함, 지속적인 변화와 창조에 대한 갈망 등은 과연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과연 이러한 삶의 요소들은 사고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까요?
모든 사고력을 인도하고 이끄는 것은 관심, 호기심, 신기함, 궁금함입니다. 이것은 ‘당당한 시선’ 즉 이 세계에 대한 응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사고 능력인 것입니다. 호기심과 세계에 대한 궁금함이 부족한 아이들은 동기가 형성되지 않으며 무기력합니다.
행복함과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감사함’을 느낍니다. 성취할 때마다 자신이 성장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취는 자신감, 자신에 대한 긍정심, 자아 존중감을 넓혀줍니다. ‘감사’와 ‘성취’는 항상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라는 사고의 능력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행위 또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볼로흐는 ‘사유는 초월하는 행위이다’라고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의 하나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바라는 것,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희망입니다. 나 혼자만의 희망, 친구와 함께 이루고자 하는 희망, 지역사회의 희망, 자연과 함께 이루고자 하는 희망, 세계의 희망, 그리고 우주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이토록 다양한 겹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력은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희망하는 것 또한 사고의 능력입니다. 희망은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합니다. 모든 희망은 변화에 대한 지향입니다. 새로운 실현에 대한 설렘입니다. 희망하는 능력에 비례해서 동기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행위를 지도합니다. 희망의 크기만큼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이들의 본능입니다. 아이들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열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가 희망이며 새로운 시대, 열정적 성취의 주도자들입니다. 사고력 교육이 추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열정적 성취의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차오름, 「열정ㆍ호기심ㆍ희망은 사고력의 또 다른 이름」, <<한겨레>>, 2006. 8. 20.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50455.html)
열정과 호기심은 물론이고 현실을 넘어서고자(초월ㆍ부정하고자) 하는 비판 정신으로 무장하여 끊임없이 묻자!
사족 하나. 위에서 밑줄을 그은 문장은 거슬린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의 하나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글쓰기 지도를 하다 보면 “삶을 살면서”라는 투의 문장을 흔하게 만난다. 이런 상투적인 어구는 아예 빼거나 꼭 있어야 한다면 간단히 ‘살면서’나 ‘삶에서’라고 하면 된다. “하는 데 있어”도 아주 어색하다. “하는 데(서)”라고 바꾸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라거나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라고 하면 아주 자연스럽다.
한비야의 글쓰기 비결/ 이훈
한비야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그의 최근 산문집인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의 구절을 빌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무모하리만치 크고 높은 꿈 그리고 거기에 온몸을 던져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152쪽)의 사람이라고 설명해 드리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그의 책을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는 아주 소중하고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될 것이다.
그의 책은 많이 읽힌다. 인기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먼저 꿈과 열정을 가득 담고 있는 내용이 주는 감동에 있다. 잘 읽히는 문체의 힘도 한몫한다. 책을 들면 한꺼번에 다 읽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그런데 이렇게 술술 잘 넘어가니까 글도 쉽게 쓸 것이라고 짐작하기 쉬운데 그의 말을 따르면 밤을 새워 가며 몸부림친 결과이다. 좋은 것치고 그냥 나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우연도 성의를 편드는 법이다.
마침 이 책에 「내 글쓰기의 비밀」이라는 글이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좋은 글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자, 한비야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들어 보기로 하자.
우선 좋은 글을 향한 기본적인 몸부림은 다들 알고 있는 다독, 다작, 다상량이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중략) 이 '삼다'와 더불어 나는 다록(多錄)을 추가하고 싶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잘 기록해놓는 일 말이다. 나는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중략) 기억은 지나고 나면 사건의 골자, 즉 뼈대만 남기지만 기록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는다.(111쪽)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삼다’야 글쓴이가 말한 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어서 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기록해 두는 일의 중요성은 의외로 소홀히 여기기 쉽다. 요즘에는 사진기가 일반화되어서 더 그렇다. 그런데 기억을 도와주는 도구가 많고 발전할수록 잘 잊기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손전화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니까 이제는 가족의 번호도 확인해야 알게끔 되어 버렸다. 기억 자체가 망각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겨 놓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과거를 멋대로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아야 한다. 몇 해 전의 여행을 떠올려 보자. 기록해 놓지 않으면 어느 나라에 간 것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고 구체적인 대목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을 믿지 않는 데서 글쓰기는 시작된다.
두 번째 몸부림은 몰두다. 내 글이 술술 읽히니까 쓸 때도 일필휘지로 쓰는 줄 안다. 아니다. (중략) 날밤을 새우고 또 새운다. 밤을 새워서 좋은 글이 나온다면 한 달이라도 새우겠다. 밤을 새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이렇게밖에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나섰느냐며 자학까지 한다. (중략)
그러니 백 퍼센트 몰두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소위 총동원령이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내가 가진 경험과 에너지와 시간을 글에만 몰아주어야 한다. 힘도 없는 주제에 어찌 감히 있는 힘과 시간을 아낀단 말인가? 그래서 원고 마감 전날에는 어김없이 밤을 새운다. (중략) 소파에서 토끼잠을 자다가 주기적으로 벌떡 일어나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고는 고치고 또 고친다. 신문이든 잡지든 어딘가에서 내 글을 보았다면 아, 이 사람, 이 글 쓰느라 전날 밤 밤 새웠겠군, 생각하면 ‘백 프로’다.(113-4쪽)
글쓰기에는 이력이 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전문가인데도 이렇게 글마다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어떤가? 글 못 쓴다고 엄살 피우기 전에 원고지를 붙들고 밤을 새워 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저런 말을 들으면 글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글에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데 다른 일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게 글은 사람의 됨됨이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글이 사람을 만든다. 옛날에 글을 쓰게 하여 관리를 뽑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몸부림은 글 쓰기 전에 먼저 말로 해보기다. (중략)
일단 글을 쓴 후에는 전문을 큰 소리로 읽고 또 읽는다. 글이란 결국 운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문장 안에 고저와 장단이 있어야 자연스럽고 전달이 잘 된다. 소리 내서 읽으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서 껄끄럽거나 어색한 부분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문장뿐 아니라 내용 점검도 말로 풀어서 하면 훨씬 쉽다.
혼자 읽으며 다듬는 것이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되면 그 다음 순서는 시도 때도 없이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다 쓴 글을 읽어준다. 읽은 후 “어때?”라고 물을 때 바로 “좋은데”라고 하면 난리가 난다.(114-5쪽)
난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는데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특히 친구에게 내 글을 들려주는 것은 내 생각을 객관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야 좋은 글이 된다. 그래서 글이 되든 안 되든 쓰고 나면 발표해야 한다. 채 완성이 안 된 글도 좋다. 시작이 반이라고 손을 대면 끝은 나게 되어 있다.
네 번째 몸부림은 마감 시간 딱 맞추기와 퇴고다. 나는 마감 시간 직전까지 글을 쓰거나 고친다. (중략)
단행본을 낼 때는 더욱 그렇다. 초교지, 재교지는 물론 인쇄 직전의 오케이 교정지에도 붉은 펜으로 수없이 고쳐서 딸기밭을 만들어 놓는다. (중략) 그것도 모자라 인쇄기가 돌아가기 직전 인쇄소에 가서 고친 적이 있고, 이미 나온 책을 20쇄가 넘도록 고치다가 편집자에게 사실이 틀렸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쓴 적이 있다.(115-6쪽)
퇴고에 대해서는 글쓴이가 하지 않은 말을 좀 보태자. 완성된 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손을 보는 것은 기본―끝없이 다듬고 다듬어야 한다―이고 시간이 흘러서 내 글을 남의 글 보듯 할 수 있을 때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글도, 자기 체험이나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글쓴이에게는 잘 들어오지만 내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은 오로지 글에만 의지해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겨 내 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상처를 입으면 처음에는 오로지 내 것만 보여서 다른 사람도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짐진 것처럼 아픔을 과장하게 된다. 이 자기중심주의의 가장 강력한 치료약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 잘못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자기반성이 내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데 이 과정에서 어느덧 내 상처는 아물게 된다.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한비야가 생각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들어 보자.
나는 글쓰기는 철공을 갈아서 바늘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칠 정도로 너무나 더디지만 애를 쓰는 만큼 반드시 좋아진다는 거다. 내 첫 책 '바람의 딸' 시리즈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비교해보라. 내가 보아도 글이 좋아졌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치고, 가족과 친구들을 괴롭히고 기자와 편집자들에게 비굴했던 지난 10년간의 결과다. 앞으로 10년 후면 지금의 철공이 훨씬 더 바늘에 가까운 모습이 될 것을 굳게 믿으며 오늘도 미련하게, 그러나 기꺼이 철공을 갈고 있다.(116쪽)
글은 철공을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일이다. 이 무시무시한 진리에다 무슨 말을 덧붙이랴. 연습이 완벽하게 만든다. 바보가 산을 옮긴다. 사는 것과 글쓰기는 같이간다.
써 보는 게 중요하다 / 이훈
글을 써 보고는 싶은데 잘 안 되는 분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글을 옮긴다.
원고지 5장을 쓰는 힘을 길러라 / 김창석
말하기가 걷기라면 글쓰기는 달리기에 견줄 만하다. 말하기는 걷기처럼 자연스럽다. 특별한 훈련이나 연습이 필요 없다. 모국어를 쓰는 환경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말하기는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옹알이로 시작해서 결국엔 ‘엄마’를 외치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달리기는 어떤가. 무작정 달린다고 잘 뛰게 되는 건 아니다. 출발선에서의 동작을 익혀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결승선에서는 마지막 전력질주 방법을 익혀야 1등을 차지할 수 있다. 오래달리기의 경우에는 페이스 조절의 노하우를 따로 익혀야 한다. 섣불리 덤볐다가는 낭패를 본다는 얘기다.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글쓰기도 당연히 잘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체계적인 연습이나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글쓰기를 잘하기 힘들다. 말하기에 쓰이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듯이 쓰면 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구어체’를 주로 쓰는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글쓰기가 주로 ‘문어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글쓰기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단 쓰기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근육을 길러야 달리기를 잘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생각만 해보는 것과 일단 쓰기 시작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써봐야 구성력과 표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구성력은 글을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의 문제다. 문단의 배치와 흐름,분량 조절 등을 통해 글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능력이다. 표현력을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가장 적합한 단어와 문장, 문단으로 보여주는 능력이다. 풍부한 어휘력과 막힘없는 문장력이 필수다. 그런데 이런 능력들은 글을 쓰기 전에는 길러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써봐야 부족한 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보는 것도 좋다. 200자 원고지 5장 정도를 쓸 수 있다면 어떤 긴 글도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초등학생이라면 좀 어렵겠지만, 중학생 이상이라면 그렇게 비현실적인 목표는 아니다. 매일 하루에 쓸 목표량을 원고지 5장으로 정해놓고 꾸준히 쓰면 되는 것이다. 쓸 거리가 없으면 책을 읽게 되기 때문에 글쓰기라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서 독서와 생각을 덤으로 하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너무 부담스러우면 안 된다는 점이다. 글을 술술 풀어 써나갈 수 있는 있는 분야나 주제로 시작해야 한다. 형식도 될 수 있는 대로 자유롭게 해야 한다. 자신이 읽은 책의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일기를 조금 공식적인 느낌으로 쓴다거나, 15분~20분 정도의 만화를 본 뒤에 그것에 관한 글을 쓰는 식으로 시작하면 좋다. (<<아하! 한겨레>>, 119호, 2010. 2. 8-14, 21쪽.)
맞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일단 쓰기 시작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머리로 생각한다고 알기 쉬운데 천만의 말씀이다. 글로 생각한다. 쓰지 않고 하는 생각은 그냥 생각의 씨앗일 뿐이다. 생각은 나는데 글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하소연을 흔히 하는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 생각이라는 것은 아주 막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막연한 생각의 씨앗을 튼튼한 나무로 키우는 일을 글쓰기가 맡는다. 그리고 글을 써야 책도 읽게 된다. 읽고 나서 쓰는 게 아니라 써야 적극적으로 읽게 된다는 말이다. 쓰다 보면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을 이어 나가자면 필연적으로 책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써 보자. 시작이 반이다.
글을 쓰자고 하면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남에게 보일 만한 가치도 없는데 그런 걸 굳이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내 대답은 이렇다. 남이 들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남이 알아줘야만 우리가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글도 꼭 마찬가지다. 그냥 쓰다 보면 어쩌다가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도 나오게 된다. 글이 주는 선물이다.
정말 중요한 대답은 지금부터다. 내 글이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가치가 있다는 점이야말로 글을 써야 되는 결정적인 이유다. 글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나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아플 때 글을 쓰는 것이 치유의 시작을 이룬다는 점은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다.
첫댓글 이훈 선생님!
실제 사례를 들어서 글쓰기 공부를 하게 되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조금터 글쓰기 방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일 하느라 관심을 덜 두었던것
같습니다.
순간, '다른일을 구쳬적으로 기술하라 '
하실거죠?. 출근하면 유치원 업무 보랴! 교실에 있는 아이들 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이고, 어렵기만 하는 컴퓨터 관련
연수 들으랴! 하루 일들이 빽빽하답니다.
이제 나이도 들고 하였으니, 욕심을 줄여야지 하면서도, 보이지도 않는
눈 부비며 스스로 힘들게 하면서도
알차게 보내고 있다고 토닥거린답니다.
교수님께서 편지글 지도해 주셔서
원안은 수정했으나 탑재된 내용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아무 데서나 줄 바꾸지 말고 같은 단락을 이루는 문장은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계속 이어서 쓰세요. 그래야 잘 읽힌답니다. 쓰는 쪽에서는 논리적으로 생각을 펼칠 수 있고요. 중간에서 줄을 바꿔 버리면 생각도 마찬가지로 끊겨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