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제자(12) - 가룟 유다 / 요 13:21-30
사람들은 그때라고, 지나버린 후회스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때 참았더라면, 그때 잘했더라면,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조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며, 지금은 아무렇게나 보내면서도, 어리석게 오늘도 자꾸 그때만을 찾고 있습니다. 중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는 자기의 거작 ‘신곡’의 지옥 편에서, 놀라운 장면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지옥의 맨 밑바닥에 교황과 더불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가룟 유다가, 이렇게 비극적으로 묘사된 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것입니다. 행 1:25절에 “유다는 사도의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라고 증언함으로써, 그의 비참한 최후를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룟 유다는 무서운 범죄의 댓가로, 그후 수세기를 통하여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난도질을 당하였고, 심지어 그의 이름은 악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오늘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삼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위치와 직분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버림 받고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가지 사건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잘 한 것을 보고 배웁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성공했구나.’ 둘째는 잘못한 것을 보고서도 배웁니다. ‘저러면 안 되는구나.’ 누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공과 실패의 두가지 면을, 모두 배우는 자가 성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성공자가 있고 실패자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 하면 듣기도 싫은 이름이지요. 그런데 성공자에게는 성공한 것을 보고 본을 받아 유익이 있지만, 실패한 사람에 대해서는 왜 실패했는가 하고 이것을 우리가 교훈을 삼으면, 실패 없는 성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열두제자 강해 마지막 시간을 맞았습니다. A팀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B팀인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까지는, 그나마 성경에서 활동 기록을 찾을 수 있지만, C팀인 작은 야고보, 유다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등은 거의 찾을 수 없었기에, 설교준비 하는데 여간 애로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고비고비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제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제자입니다. 눅 6: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그 이름도 유명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베드로와 함께 가장 유명한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첫 번째 제자이고, 가룟 유다는 뒤에서 첫 번째 제자입니다. 물론 유명하다고 좋은 제자인 것은 아닙니다. 널리 이름이 나 있다고 훌륭한 제자인 것은 아닙니다. 같은 그룹에 속한 작은 야고보나, 다대오, 시몬 등은 무명에 가까웠지만, 살아 있을 동안 복음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서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상대적으로 유명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가룟 유다는 중도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에서 가룟은 지명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이었기에,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구별했습니다. 열두제자 중에 다른 유다가 있었습니다. 다대오인데, 그의 본명은 유다였습니다. 요한은 그를 가룟 유다와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요 14: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그런 거 보면, 열두제자에는 형제 제자 세 쌍으로 여섯 명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 형제입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제자가 세 쌍입니다. 시몬 한 쌍 : 시몬 베드로와 가나나인 시몬, 야고보 한 쌍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유다 한 쌍 : 유다 다대오와 가룟 유다입니다. 제자들의 출신지역을 놓고 보면, 갈릴리에 치우쳐 있습니다. 가룟 유다만 유일하게 유대 출신이고, 나머지 열한제자는 갈릴리 출신입니다. 이 점에서, 가룟 유다가 지역 차별을 받았을지, 반대로 귀한 몸 대접을 받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거리감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까지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그곳에서 머문 기간은 한 달 남짓에 불과합니다. 잠깐의 애굽 피난 생활을 제외하고는, 줄곧 나사렛에서 살아오셨기에 나사렛 예수라고 불렸습니다. 남 유대 출신인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는지, 여간 궁금하기는 합니다. 다 갈릴리 출신만 있으니, 지역 배려 차원에서 한 명을 끼워 넣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 또는 여론 눈치보고, 지역 안배를 했을 거 같아보이지는 않아서입니다. 막 3: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원하셨습니다. 절대적인 제자 선발권을 가졌던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열둘에 포함시키길 원하셨습니다. 유다가 원해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원해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찬양,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실지라.’ 이런 뜻입니다. 뜻이 좋을 뿐만 아니라, 부르기도 좋고, 더구나 열두지파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지파의 조상이기도 해서, 유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그 좋은 이름을 버려놓았습니다. 유다가 찬양의 대명사가 아닌, 저주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름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이름을 더럽혀 놓았습니다. 더 이상 유다라는 이름을 쓰기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아마 가룟이란 동네에서는, 유다가 금기어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룟에서 누가 유다 이름표를 달고 싶어 하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자기 이름값만 못한 게 아닙니다. 자기 아버지 이름도 욕되게 했습니다. 요한은 가룟 유다의 아버지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 6:71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 13: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대개의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아버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아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시몬이란 것을 모릅니다. 가룟 유다가 아버지 시몬이 생존해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거 같습니다. 만일 3년 후,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선사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가룟이란 단어가 붙어 다닙니다. 자기가 자라난 동네 명예까지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고향의 명예를 드높인 사람도 있는데,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고향이 유명해진 경우도 있는데, 가룟은 배신자 유다를 배출한 동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욕구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빡빡한 살림을 맡고 있었으니, 재정에 민감했을 수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해야, 인심도 쓰고, 선심도 쓸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돈 나올 구멍은 별로 없고, 들어갈 곳만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계를 맡고 있었으니, 가룟 유다는 돈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요한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그는 돈 욕심이 지나쳤습니다. 요 12:4-8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베다니 나사로 집에 있을 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로 인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장례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하지만 유독 가룟 유다만은 분을 내었습니다.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을 텐데, 그 정도 큰돈이면 가난한 자들을 많이 도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꼭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를 도둑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꺼내 쓰곤 했다는 것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요한한테, 아마 몇 번 들켰던 모양입니다.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기 것을 챙기지 못해 아쉬워한 것입니다. 돈주머니에서 훔쳐낸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모릅니다. 나름 좋은 일에 썼을 수도 있습니다. 혹 그가 열심당원이었다면 독립자금 대는데 보탰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공동체의 재정에 손을 댄 것은, 엄연한 도둑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돈 버는 일이 우선이라면, 제자직 내려놓고 그 일 하는 게 옳습니다. 물욕의 지배를 받으면, 이처럼 사람이 추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은 30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요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폭탄 발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많이 어두워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예수님이 우리 중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실까 고심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한테 머릿짓을 하며, “어이 요한,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물어봐”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예수님한테 물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말을 돌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그리고 떡 한 조각을 적셔다,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가룟 유다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 13:29절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열두제자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자기관리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룟 유다에게 접근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제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지만, 실상은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습니다. 모두로부터 신뢰받으면 뭐합니까? 예수님은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통해, 제자 공동체에서 신뢰를 받아도,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신뢰를 받아도,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 13:8-11절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교회 안에 거듭난 사람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때문에 상처를 받곤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밭에 곡식 뿐 아니라, 가라지가 섞여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씻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로서, 온 몸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그의 발만 씻겨주신 것입니다.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발은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매순간 회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은 거듭나지 않았는데, 발만 씻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목욕인데, 발만 씻고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이신칭의를 강조했던,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 13: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5절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인가?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내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가?”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던질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런 과정을 생략했던 거 같습니다. 엄격한 자기 검증을 거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긴 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아서, 공동체의 살림을 꾸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비쳐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위선이었습니다. 요 12: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자신의 겉과 속이 달랐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가난한 자를 팔아서, 자기 호주머니를 불리곤 했습니다.
그의 위선적인 모습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눅 22:47-48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군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 맞추는 자가 예수니 그를 잡으라.” 그는 군인들 앞장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그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위선의 입맞춤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가룟 유다는 속마음을 들키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도 회개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요한의 질문에,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떡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요 13: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가 마음관리를 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전에도 성공한 사람은, 자기 관리가 철저했습니다. 자기 관리 중에서도, 마음 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요즘은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관리를 받곤합니다. 하지만 마음까지 관리받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은 자기만 관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누구에게 열어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들어오든지, 그가 내 주인이 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나를 차지하여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마음을 열어주었습니다. 마귀는 그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아무 힘들이지 않고, 무혈입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그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마음의 고지를 점령당한 그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충실한 부역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포로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 26:14-16절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그는 단 돈 은 30에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요한도 가룟 유다가 마음 관리를 잘하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요 13:26-27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회개의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는 순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회개와 마음관리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벧전 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단순히 시위하고 겁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삼킬 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가룟 유다는 후회했으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 27:3-5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후회했다는 말입니다. “후회”의 사전적 정의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이다.’입니다. 그가 이전의 잘못을 깨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은 은 30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도로 갖다 주고, 거래를 무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그는 죄책감과 괴로움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행 1:16-18절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단순히 목매어 죽은 것이 아닌,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자살로 죽은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성경학자 매튜헨리에 의하면, 창자가 흘러나오는 것은 반역자에 대한 벌이라고 합니다. 그는 죽어서 반역자의 최후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은 30으로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후회만 얻었습니다. 배신자의 딱지만 얻었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배신자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배신자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배신자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는 2천년인 긴 세월이 지나고도, 가장 욕된 이름의 사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막 14:21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살면서, 사람들에게 절대 들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 스스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축하받아야 할 생일파티에서 이런 노래를 들었다고 해봅시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 듣기 좋습니까? 아니지요?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아들(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나?” “너를 우리 집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런 말을 해주고, 이런 말을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한테 들은 말입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에게 충격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때는 안 들렸지만, 들려도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예수님이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칠 때, 이 말씀에 몸서리가 쳐졌을 것입니다. 반면 그와 대조되는 제자가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여, 예수님한테 극찬을 들었던 그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걱정이 되어, 그에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 일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긴장하기보다 호언장담했습니다. 깨어 기도하기보다, 곤히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을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단순히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날 최고의 사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 이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이 거였습니다. ‘후회와 회개’ 한자로 보면, 후회는 뒤 후(後), 뉘우칠 회(悔)자를 씁니다. 회개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자를 씁니다. 후회는 뉘우침으로 끝납니다. 회개는 뉘우치고 나서 고칩니다. 가룟 유다는 후회했습니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나 같은 놈은 죽어도 싸다, 나 같은 놈은 살 가치도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베드로보다 더 양심적인 거 같아 보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 역시 후회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갔습니다. 예전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고향으로 가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양을 치는 목자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요 21: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가룟 유다도 죽었습니다. 마 27: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행 1:18절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스스로 목매어 죽은 후,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습니다. 회개한 베드로의 죽음과, 후회에 그친 가룟 유다의 죽음이, 얼마나 상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종합해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는 합니다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돈궤를 메고 다니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 왔는데, 예수께서 유다 나라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은 다 갈릴리 출신인데 자기만 비갈릴리 가룟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이, 다른 제자들을 향한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스승까지 파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이런 지협적이고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나타나더랍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든단 말이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로 자기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이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잘 믿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인 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을 더듬어 보십시오. 정말 나의 신앙생활 속에 신앙과 정직이 담겨져 있습니까? 이 땅에 교회를 떠난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구세주로 만난 사건과 경험이 없는 비신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여 오늘 아침에 참석했다고 하면, 제로(O) 출발점부터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요 6:64절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 말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지적하는 성경적인 증언 아니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갈보리 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산상교훈을 비롯하여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셨고, 교훈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데에, 가룟 유다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팔 자는 비롯 가룟 유다 뿐만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우리 주님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제자로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원히 가룟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교회 속에서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을 때,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알이 차지 못한 겁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조금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다의 얼굴’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누가 가룟 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입니다. 수많은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가룟 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극의 마지막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지게 됩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룟유다가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파는 일에, 앞장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섭섭한 일이 들어오는 순간, 사탄이 들어올 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우리는 불신앙의 늪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 이 이름은 언제든지 우리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열두제자 강해를 마치면서 종합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시간입니다. 그것은 ‘잘 살다가 잘 죽자.’는 것입니다. 웰빙, 웰다잉, 여러분 들어보셨지요? 웰빙은 잘 살자는 것이고, 웰다잉은 잘 죽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고, 잘 죽어야 하나님 앞에 잘 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거고,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입니까?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예수를 위해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예수를 위해 잘 살다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 잘 죽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대낮보다 더 밝은 빛 천성을 향해 가는 길, 때로는 고난이 시련이 아픔이 내 앞을 가로 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낮의 길, 천성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근신하여 깨어서 믿음을 굳게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하는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불행한 인생이 되지 말고, 참으로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바른 소리를 하면 듣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미워하던 내 마음의 잘못된 근성을, 이 완악함을 산산히 깨트려버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연약하여 죄인이지만, 그러나 회개 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서, 가롯 유다의 길로 가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없게 하옵소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서, 행동으로는 ‘내 뜻대로’를 고집하던, 자기 모순을 철저히 떨쳐버리게 하옵소서.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던, 이중성을 깨트려 버리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이 돈을 따라가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