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추수감사주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교단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설교자의 일이란 척박한 일상 속에 변함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포착해내고, 절망의 진흙 너머 희망의 별빛을 응시하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추수감사주일 설교를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넓은 들에 황금 물결 향기 진동하도다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왔다. 교회마다 사정에 따라 조금 다른 주일날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교단은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다. 추수감사주일은 본시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절기이지만, 올해는 예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듯하다. 추수감사절을 기다리는 교회나 성도들의 마음이 예전만큼 밝고 가볍지만 않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분위기도, 교회적 분위기도 감사를 말하기에는 다소 생경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추수감사절 절기를 주신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함일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성경의 명령처럼 참된 감사는 환경과 상황을 넘어선다.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감사를 실천할 때다. 그렇다면 오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감사의 의미를 새롭게 전할 것인가? 추수 감사절 설교를 위해 우리는 세 가지 중 하나의 주제를 기둥 삼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감사의 때다
추수할 곡식이 많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가득하고 성도들의 사업이 번성하고 좋은 일들이 많을 때 감사절 설교는 쉽다. 눈에 보이는 감사의 조건들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물가가 오르고 경제가 어렵고 사업이 주춤하며 교회도 교인의 삶도 가라앉아 있는 이 때에 감사라는 주제의 설교란 선뜩 생기를 잃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감사, 추수감사절이 시작된 원래적 의미의 감사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이다. 주지하다시피 추수감사절은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1621년 11월 가을 첫 수확을 거둔 것을 감사함으로 유래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념했던 첫 추수감사절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넘치는 수확의 풍요로움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시시한 일이었다. 사실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정착한 첫 해 겨울, 혹독하고 잔인한 시간을 견디어야 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온 정착자들의 절반이 혹독한 추위와 영양실조, 각종 질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한 고통의 겨울 이후 맞이한 첫 가을 추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고통과 슬픔을 딛고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변함없는 감사를 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코로나의 질병으로 인해 시리고 척박한 이 가을이야말로 추수감사절의 본래적 정신에 충실할 수 있는 영적인 기회이다.
어려움 속에 맞이하는 추수감사절 설교를 위해, 우리는 깊은 고통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0)고 고백했던 욥의 제로(0) 감사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신약으로 가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오히려 찬양과 기도를 올렸던 사도행전 16장의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를 메시지로 삼을 수 있다. 또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즐거워했던 하박국의 고백 또한 함께 상고할 수 있는 복된 말씀이다.
해와 달과 생명의 바람으로 인해 감사하라
설교자의 일이란 분주하고 척박한 일상 속에 변함없이 움직이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포착해내고 회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향해 시선을 돌리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추수감사절의 감사란 가시적인 수확물을 넘어 그러한 소출을 주시기까지 해와 달을 운행하시고 하늘과 땅을 돌보신 하나님의 창조역사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이 계절의 움직임을 보라. 우리의 영적 눈이 열린다면 우리는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을 기억하며 생명의 영께 감사할 수 있다. 여름날 뜨거운 햇살 속에 곡식을 영글게 하신 그 분의 열심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다. 가을날 물드는 나뭇잎 속에서 생명과 소멸을 주관하시는 대주재(大主宰)이신 창조주를 찬양할 수 있다. 추운 겨울, 꽁꽁 얼어붙은 땅에 봄같은 당신의 자녀를 주신 다함없는 사랑을 감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할 수 있다. 피곤한 저녁 무렵, 아름답게 물든 석양을 바라보며 한 날의 수고를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로 감사할 수 있다. 출렁이는 동해 물결에 우리를 위해 기르신 물고기들과 가을 들녘을 오곡들로 채우신 하나님의 햇살과 바람으로 인해 찬양할 수 있다. 또한 긴 날 천둥과 먹구름, 밤의 무서리가 내리고 마침내 노란 국화잎을 피우신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을 찬양할 수 있다. 19세기, 스펄전과 더불어 설교의 왕자라고 평가받던 알렉산더 맥클라렌(A. MacLaren)은 이렇게 말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를 포착하는 경쾌하고 즐거운 감각을 기르라.”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우리의 일상 속,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의 조건은 충만하다. 숨쉬는 순간순간, 생명의 바람을 느낄 때마다 설교자는 자신이 포착한 충만한 감사를 청중 가운데로 흘려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감사란 보다 본질적이며 근원적이다. 참된 감사는 환경과 상황을 넘어 티끌이요, 먼지같이 연약하고 하찮은 인간 본질과 그러한 우리를 이유없이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신 그 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을 우리는 특히 시편의 많은 본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추수감사절의 감사는 추수감사절에 이어지는 대강절과 연관하여 구원론적 감사로 자연스럽게 발전될 수 있다.
입체적으로, 행함으로 감사를 설교하라
추수감사절은 무엇보다 축제의 절기이다. 이 절기가 되면 하나님이 주신 오곡과 갖은 과일로 강단을 장식한다. 하여, 할 수 있다면 설교 또한 그것에 걸맞게 보다 축제적인 설교로 준비하는 것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추수감사주일은 단순한 구두설교를 탈피하여 다양한 형식의 설교를 시도해 볼만하다. 이를 위해 감사절을 주제로 하는 짧은 스킷 드라마를 설교의 서두에 삽입할 수 있으며, 연극설교, 방송중계식 설교, 편지 설교를 통해 감사의 의미를 생생히 되새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인교 교수께서 저술한 『특수설교』를 참고하라. 이 책에는 청중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다양한 형식의 설교들과 재료들이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다.
또한 참된 감사는 참여하고 표현하는 것에 있으니 교회에서 감사 트리(tree of thanks)를 만들어, 교인들로 올 한 해 감사 제목들을 카드로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아 감사의 유대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코로나의 기승으로 ‘디지털 감사’로 SNS나 문자를 통해 어려운 시간을 함께 견뎌낸 교우 간에 감사와 격려의 마음 나누기 운동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첫 추수감사절 때, 수확에 도움을 주었던 인디언 마사소이드 추장과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눴던 것처럼, 이웃들과 함께, 어느 때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아원과 양로원에 감사절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감탄하고 감사하라
비록 코로나의 힘든 습격에도 그것이 우리의 모든 감사를 쓸어간 것은 아니다. 강단은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들에게로 시선을 돌림으로 감사의 메시지를 나누어야 한다. 그리하여 절망의 진흙 너머 희망의 별빛을 응시하도록 도와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설교의 왕자, 스펄전(C. H. Spurgeon)은 감사에 관해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감사하는 자에게는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천국의 영광의 빛을 주신다.”
코로나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별빛은 여전히 밝고 충만하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의 교회가 있으며, 좋은 교우가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은 변함없으시다.(애 3:22~23) 그것으로 감사의 조건은 충분하지 않은가.
손동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