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모으다 / 임정자
일상의 글쓰기 글감이 <독서>이다.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 떠올랐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정신분석 강의>를 교보 책방 장바구니에 넣어둔 지 석 달이 지났다는 것을. 교보 책방에 들어가 보았다. <오십에 읽는 논어> 등 다섯 권의 책이 장바구니에 들어있다. 한 권씩 주문하기 번거로워 모아 놓은 것을 깜박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책을 주문했다.
고등학교 입학 전 나는 엄마와 목포 외가댁에 간 적이 있다. 외 삼촌 댁은 2층 단독주택이었다. 3대가 살기에 적절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부부는 1층에서 외사촌들은 2층, 생활공간을 분리했다. 식구들이 많다고 해도 사촌 언니 두 명과 오빠는 서울에 살고 세 명의 외사촌이 살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외가댁에서 학교 다니길 원했다. 또래 사촌도 있고 혼자 생활하는 것보다 밥이라도 잘 먹고 학교 다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외숙모에게 딸을 부탁하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눈치 빠른 외숙모가 둘째 영희가 서울에서 내려온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거실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화장실을 찾았다. 집안 여기저기 문을 열고 다녔다. 방 안 가득 책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하나에 책이 꽂힌 책장이 여러 개 있었다. 마치 작은 도서관 같았다. 한참 넋을 잃고 방 안을 둘러 보고 있는데 외숙모가 나를 찾는다. 화장실을 여쭤보니 어딘지 알려주셨다. 나중에 아는 사실이지만 외삼촌은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시인이었다.
우리 집에는 위인전기나 그 흔한 만화책도 없었다. 집 주변에 영화관이나 서점도 없었다. 해남읍 내에 가서 찾아봐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어쩌면 책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맞다. 노는 게 더 좋았으니까. 시골에서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는 산이나 강, 대자연이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던 장소는 동네 우물가다. 빨래하고 나서 머리를 감다가 우물에 빠진 적도 있다. 산에 올라가 땔감을 하는 친구들 따라 맹감도 따먹고 개구리도 잡고 고사리도 꺾었다.
자취방에서 외가댁은 버스로 20분쯤 가야했다. 목포에 아는 사람도 없고 심심해서 외가댁에 가곤했다. 내 또래 사촌 은희는 영화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책 이야기 등 모르는 게 없었다. 도시에서 살아서인지 표현력도 좋았다. 책을 읽어도 소설 속 주인공이 된듯내게 이야기해 준다. 마치 <서울 쥐와 시골 쥐> 이야기처럼 나는 초라함을 느꼈다.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도시에서 학교 다녔던 언니 오빠는 내게 책 읽으라는 잔소리도 하지 않았고 사 주지도 않았다. 내가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이 괜한 언니 오빠 탓 같았다.
내가 책에 욕심을 부리게 된 것은 외삼촌 서재를 본 이후다. 햇살이 잘 드는 작은 서재를 꿈꾸었다. 보석으로 몸치장을 하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사는 게 더 좋았다. 그렇다고 그 책을 완독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점에 가면 마트에서 시장 보듯 다양한 책을 사 모았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림 있는 동화책을 읽게 되었다. 아이들과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한때는 동화책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한 장르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책을 구입한 덕분에 내게도 책이 있는 방이 생겼다. 바람도 잘 통하고 창문이 있어 밖의 풍경도 보인다. 이 방에 앉아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외삼촌 서재처럼은 아니지만 책이 있고 책상이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 내 안에 글쓰기가 있다.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연속 들려 올 때가 참 좋다.
첫댓글 선생님 글을 읽다 보니 주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 진리네요.
그래요. 책이 책꽂이에 가득 채워져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몇 권씩 내다 버리고 있답니다.
책 욕심이 많으시네요. 남편이 책을 좋아해 저는 구경만 한답니다. 저는 좋은 생각을 10년도 넘게 구독해서 읽는데 보통사람들의 살아가는 얘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줍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열심히 읽고 쓰다 보면 선생님 안의 글쓰기가 튀어나오겠지요.
저랑 비슷한 유년기를 보내셨어요.
저도 책이 없는 집에서 자랐지요.
외갓집에 가면 동기나 후배들이 많았는데도 저는 골방에서 책을 읽었지요.
교수님이 소개해 주신 <정신분석입문>은 저도 사 두고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고 있답니다.
하하!
저도 서재를 꾸미는 게 꿈 중에 하나였는데, 전자책을 사고 나서 사라졌습니다. 전자책이 환경에도 좋다고 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