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덩어리 경(M18) Madhupiṇḍika-sutta
- 대림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1권 479-496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의 까비라왓투의 니그로다 원림에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까삘라왓투로 탁발을 가셨다.
까빌라왓투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의 머무심을 위해서 큰 숲[(大林]으로 가셨다.
큰 숲에 들어가셔서는 어린 벨루와 나무 아래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 앉으셨다.
3. 삭까 사람 단다빠니도 산책을 나와서 이리저리 포행하며 다니다가 큰 숲으로 갔다.
큰 숲에 들어가서 어린 벨루와 나무 아래 계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지팡이를 짚고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삭까 사람 단다빠니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사문께서는 무엇을 설하시는 분이며 무엇을 말씀하시는 분입니까?"(*1)
4. "도반이여, 나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 가운데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고 머무는(*2) 그런 가르침을 설합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3)에서 벗어나 머물고 의심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이런저런 존재[諸有]에서 갈애가 사라진 그 바라문에게는
어떻게 해서 인식들이(*4) 더 이상 잠복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5. 이렇게 말씀하시자 삭까 사람 단다빠니는 머리를 흔들고 혀를 축 늘어뜨리고
이마를 찌푸려 세 줄의 주름살을 짓고는 지팡이를 짚고 떠나버렸다.
6. 그러자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셔서 니그로다 원림으로 가셨다.
가셔서는 마련해 드린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신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나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까삘라왓투로 탁발을 갔다. 까삣라왓투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을 머물기 위해 큰 숲으로 갔다.
큰 숲에 들어가서는 어린 벨루와 나무 아래 낮 동안의 머묾을 위해 앉았다.
그때 삭까 사람 단다빠니도 산책을 나와서 이리저리 포행하며 다니다가 큰 숲으로 왔다.
큰 숲에 들어와서 어린 벨루와 나무 아래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와서는 나와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지팡이를 짚고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삭까 사람 단다빠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문께서는 무엇을 설하시는 분이며 무엇을 말씀하시는 분입니까?’
비구들이여,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삭까 사람 단다빠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이여, 나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 가운데에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고 머무는 그런 가르침을 설합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머물고 의심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이런저런 존재에서 갈애가 사라진 그 바라문에게는
어떻게 해서 인식들이 더 이상 잠복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삭까 사람 단다빠니는 머리를 흔들고 혀를 축 늘어뜨리고
이마를 찌푸려 세 줄의 주름살을 짓고는 지팡이를 짚고 떠나버렸다."
7.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슨 가르침을 설하시기에
그것으로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 가운데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고 머물게 됩니까?
세존이시여, 그리고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머물고 의심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이런저런 존재에서 갈애가 사라진 그 바라문들에게는
어떻게 해서 인식들이 더 이상 잠복하지 못합니까?”
8. "비구여, 어떤 것을 원인으로 사람에게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5)가 일어나는데,
그것에 대해 즐거움과 환영과 집착이 없으면(*6)
그것이 바로 바로 탐욕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적의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견해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의심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교만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존재[有]의 탐욕에 대한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무명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그것은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논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의 끝이니,
여기서(*7) 이런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한다."(*8)
9.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 선서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다.
(*1) “‘무엇을 설하시는 분(kim-vādi)이며, 무엇을 말씀하시는 분(kim-akkhāyi)입니까?’라는 것은
어떤 견해를 가졌으며(kim-diṭṭhika) 무엇을 말씀하시는지(kim katheti)를 여쭙는 말이다.”(MA.ⅱ.73)
(*2)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고 머무는’이라고 하셨다.
여래는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지만 세상은 여래와 더불어 다툰다.
여래가 ‘세상은 무상하다.’라고 말하면 무상하지 않다고 말하고,
‘괴로움이다, 무아다, 부정하다.’라고 설하면
즐거움이라고, 자아가 있다고, 깨끗하다고 말하면서 다툰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
그와 마찬가지로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S22:94)라고”(MA.ⅱ.74)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설하시는 분이냐.’는 단다빠니의 공격적인 질문에 대한 세존의 첫 번째 대답이다.
(*3) “’감각적 욕망(kāma)’이란 대상으로써의 감각적 욕망(vatthu-kāma)과
오염원으로써의 감각적 욕망(kilesa-kāma)을 말한다.”(MA.ⅱ.74)
결론적으로 말해서 감각적 욕망(kāma)은
탐욕(lobha)의 하나로서 감각적이거나 향락적이거나 관능적인 것을 나타내지만
느낌[受]은 아니다.
(*4) “여기서 ‘인식들(saññā)’이란 오염원의 인식을 말한다.
혹은 오직 오염원을 여기서는 인식(산냐)이라는 이름으로 말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머물고 의심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이런 저런 존재[諸有]에서 갈애가 사라진 그 바라문에게
인식들이 더 이상 잠복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내가 설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세존께서는 자신의 번뇌가 다 한 상태를 드러내신다.(MA.ⅱ.74)
(*5)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papañca-saññā-saṅkhā)’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saṅkhā는 더미(koṭṭhāsa)를 뜻하고
papañca-saññā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에 의한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
(tanha-māna-diṭṭhi-papañca-sampayutta saññā)의 뜻이다.
혹은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오직 사량 분별을 말했다.
그러므로 사량 분별의 더미(papañca-koṭṭhāsa)가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MA.ⅱ.75)
(*6) “‘즐김과 환영과 집착이 없으면’이라고 하셨다.
열두 가지 감각장소라 불리는 이유(kāraṇa)가 있을 때 사량 분별의 부분(papañca-koṭṭhāsa)이 일어난다.
거기서 어떤 하나의 감각장소에 대해서도 즐거움과 환영과 집착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즐기고 환영한다는 것은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즐기고 환영한다는 말이다.”(MA.ⅱ.75)
(*7) “‘여기서(ettha)’란 열두 가지 감각장소[十二處]를 말한다.
왜냐하면 오염원들(kilesā)은 일어날 때도 열두 가지 감각장소를 의지하여 일어나고
소멸할 때도 반드시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서 소멸한다.
이와 같이 반드시 일어난 그곳에서 소멸한다.
이 뜻은 일어남의 진리에 대한 질문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면서 일어나고, 어디서 소멸하면서 소멸하는가?” 라고 말하고 나서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그 갈애가 일어나면서 일어나고, 소멸하면서 소멸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무엇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D22 §20)라는 방법으로
오로지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서 그것의 일어남(uppatti)과 소멸(nirodha)을 설했다.
그와 같이 이런 나쁘고 해로운 법들도 감각장소에서 소멸한다고 알아야 한다.”(MA.ⅱ.75~76)
(*8) “즐거움(abhinandana) 등이 없는 것이
바로 탐욕의 잠재성향 등의 끝이라는 이름을 얻은 열반에 들면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그곳에 없는 것을 소멸됨(niruddha)이라 한다.
이 뜻은 소멸의 진리의 질문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두 번째 禪을 증득한 자에게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사유가 가라앉고,
말의 의도적 행위(vacī-saṅkhārā)가 편안해진다.“(Ps.ⅰ.99)라고”(MA.ⅱ.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