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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정하고 제목 달기
여러 번 수정 단계를 거쳐 초고의 최종 원고를 완성한다. 수필 쓰기의 끝 단계에 도달했지만 세심한 교정이 남아 있다. 한 번 더 살피는 마음에서 필요한 절차이다. 교정의 첫 작업은 주술호응에만 주목해서 읽는 일이다. 다음엔 대명사가 지시하는 것과 호응이 일치하는지 검토한다. 이는 문장에서 잠재적 문제를 일으키므로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철자와 구두점을 검토하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알고 있으면서 실수하는 것도 있으므로 특별히 조심한다.
이런 절차가 마무리되면 제목을 단다. 물론 글을 쓰면서 제목(임시)을 달았을 것이나 최종까지 기다려 결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원고가 최종 마무리될 때까지 어떤 내용으로 전개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제목은 요지를 적실하게 표기하지 않아도 주제를 담는다. 이런 제목을 단다면 서두에서 충분히 진술해야 한다. 또는 주제 진술을 그대로 제목으로 쓸 수도 있다.
제목을 결정했다면 명심할 것이 있다. 제목은 독자가 처음 보는 것이다. 그의 주의력에 초점을 맞추고 필자의 글로 유도하는 장치라는 점에 유의한다. 최종 원고를 마련한 뒤에 인쇄상의 오류를 막기 위해 마지막 한 번 더 글을 검토하는 것이 좋다.
수필의 제목은 독자가 보게 되는 처음이고, 그의 주의와 생각에 처음으로 초점을 맞추는 요소다. 그러므로 제목은 중요해 필자나 독자나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이 제목 달기를 다음 5개 정도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다만 수필을 읽고 쓰면서 제목을 생각하고 고심할 때 이것이 무슨 기능을 하고 어떻게 형성되는지 관련하여 숙고하면 좋겠다.
(1) 제목은 수필이 다루는 화제를 가리킨다. “고추 이야기”, “길에서 묻다”, “미녀 사랑 법”의 경우처럼, 수필의 화제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하여 독자가 수필 주제 진술에서 답을 끌어내도록 한다.
(2)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으며 주제를 직접 가리키거나, 주제를 서술하며 이끈 결말을 직접 제시하는 제목이 있다. “샛길이 좋다”는 수필의 주제를 지적한다. 이 제목은 필자가 글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손쉽게 알도록 정돈한다. 이런 제목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3) 독자의 주의를 뺏고 호기심을 부추기는 제목도 있다. “모기 조의弔意”나 “여자여, 바지를”은 일반적인 사고에서 흔하지 않은 것이다. “마누라는 없다”처럼 반어적인 제목도 이에 해당한다.
(4) 비유적이거나 은유나 상징의 제목을 단다. 이런 제목은 수필에서 서술하는 내용이 발전할 수 있게 설정할 수도 있다. 이 제목은 대체로 의미를 단일한 이미지로 집약하여 제시한다. “평생 최고의 점심”은 점심을 먹으러간 식당에서 이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비싼 치료비를 물게 한 이야기다. 제목만으로는 고가의 좋은 음식을 먹은 이야기로 예상하나 실제는 다르니 반어적이고 비유적인 제목이다.
(5) 주제 진술을 제목으로 단다. 이런 제목은 서두를 건너 뛰어 글의 중심인 본문으로 바로 진입하게 한다. 이처럼 주제를 제목으로 다는 것은 확실한 경우에만 유용하고, 서두 쓰기의 문제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능란한 작가만이 가능한 이것은 제목에 주제를 노출하는 것에 통달해야 하는데, 이것은 서두를 통달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예를 들자면 “미녀는 하이힐을 신는다”를 들 수 있겠다.
ㆍ초록손가락(김경희)
고개 숙인 선풍기, 폐품 더미를 싣고 고물가게로 가는 날은 축 처진 근육에 깡마른 몸이 번쩍 들린 손잡이에 다랑귀(두 손으로 붙잡고 매달리는 것) 뛰듯 한다. 무게를 당해내느라 부들부들 떠는 팔뚝이 안쓰럽다. 흙살을 뒤적여 숨구멍을 열어주느라 모종삽을 재바르게 움직일 뿐이다. 공가금 고지서도 읽지 못하면서 꽃 이름은 외래종까지 줄줄 꿰는 아저씨를 동네 사람들은 덜떨어졌다(나이에 비하여 어리고 미숙함)고 수군댄다.
두 칸짜리 방은 미니 식물원이었다. 공책크기만 하게 햇빛이 잠깐 들까 싶은 어둠침침한 방에 보살핌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화초들이 싱싱한지 신기했다. 햇빛 받길 좋아하는 시계 꽃이 핀 것이 놀라웠다. 부부초라 불리는 인시그네는 가난하지만 웃음꽃 지지 않는 아저씨를 똑 닮아 있었다. 대문 밖에 내다 버린 화초도 안아와 초록으로 살려 계단 귀퉁이마다 놓아주시는 마법의 손. 반 지하방 아주머니도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고 나와 곱다고 손뼉 치며 틀니 결쇠가 보이도록 환히 웃는다. “꽃 지랄이여, 꽃 지랄!” 욕쟁이 김씨 할머니가 통박을 놓은다. 꽃이야 예쁘지만 빠듯한 살림에 여차하면 꽃을 사들고 오니 걱정되어 하는 말이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는 어느 시 구절처럼 아저씨는 헛헛함에 별안간 화초를 사는 건지. 죽어가는 식물도 살려낼 만큼 화초를 잘 가꾸는 사람을 ‘초록 손가락’이라 부른다. 신은 아마도 최 씨 아저씨께 아기 대힌 신비의 초록 손가락를 주신 것 같다. 그 초록 손가락 덕에 한 지붕 사람들은 고단해도 웃음 짓는다.
ㆍ④곤충학자들은 기생충을 죽이는 약물을 개발하면 기생충들도 더 빠른 속도로 진화한다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들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법칙의 본때를 녀석들은 먼저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⑤랄프왈드 메머슨은 “감히 기생충을 대적하려는 신은 없다.”라고 말하였을까.
또 ⑥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적어도 한 종류 이상의 기생충을 가지고 있다는 학설도 맞는 말이다. “벼룩 위에 더 작은 벼룩이 피를 빨고, 이 작은 벼룩을 더 작은 벼룩이 물고 있다.”니 참으로 난공불락의 적들이다.(이 글은 필자가 보고 경험한 것과 기생충학자 정진호 선생의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와 인터넷을 통해 모은 자료들을 참고로 하였음을 밝힌다.)(김애자, 『점은 생명이다』, 수필과비평사,2015, 58-61면.)
④⑤⑥은 전문가의 의견, 조사한 내용이다.
ㆍ누구라도 글을 많이 읽으면 그것이 차고 넘쳐서 터져 나오기 마련이고 이것이 적당한 체험과 결합될 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잘 쓰고 제재로 쓰기 위해서라도 독서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독서는 글쓰기의 시작이며 끝이다. 독서가 충분하게 뒷받침 되지 않으면 글을 쓰기도 어렵고 더구나 좋은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ㆍ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가 있겠느냐?” 다시 묻기를 “감히 죽음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하자, 공자께서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라고 답하신다. 이처럼 공자의 철학은 ‘살아있는 사람’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바른 도리와 바른 행실에 중점을 둔다. 공자의 사상은 지극히 현실적·실천적·지성적이다.(후략) (『에세이문학』, 2016년 가을, 166-169면.)
ㆍ주제 잡기의 요건 중
첫째, 제재와 관련한 내용상 요건으로 진선미의 탐구이다.
둘째, 수필가가 유념해야 할 작자 요건으로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을 주제로 잡아야 한다.
셋째, 수필의 범위 요건으로 최대한 주제의 폭을 좁혀야 한다.
넷째, 수필의 독자 요건으로 독자의 관심과 흥미에 부합하는 주제를 찾아야 한다.
ㆍ 매 맞은 제 아이 몸 아픈 것만 분하고, 매를 때리면서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아이 엄마.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이고, 그 중심에 부모가 있는데 그 엄마에게서 아이가 무엇을 배울까. 또 어미가 이미 ‘놈’이라 불러버린 선생님을 믿고 따르며 존경할 수 있을까. 무슨 일로 선생님께 매를 맞았는지 물어는 보았을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화풀이, 주먹다짐을 한 것이 아니라 엄한 훈육을 위해 회초리를 들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읽지 않은 편지 / 장현심>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됐다. 특수전사령부 소속 군인들과 의료봉사단 의사들이 재난 지역의 극한상황 속에서 본분을 지키며 사랑하고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름대로 내 젊은 날을 복기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당시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다. 사랑도 수동적이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상대편 마음의 키워드가 의심스러울 때에도 대답을 피하거나 감정을 눙치는 것으로 일관했다. 나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중략)
연합군의 장기 작전에 투입됐다가 전사한 서 상사가 유서로 남긴 편지를 읽지 않는 윤 중위. 그 장면에서 나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이 뻑뻑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우린 화해도 못했어요. 떠날 때 나쁜 말만 했단 말예요.”
윤 중위의 말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그녀는 내가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서 상사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는 해피엔딩으로 드라마는 끝났지만 그 편지 생각이 나서 나는 재방을 보고 또 보았다.
내게도 읽지 않은 편지 한 통이 있었다. 나도 화해하지 못하고 그를 보냈다. 남편이 시작한 사업은 손봐야 할 곳이 많은 자동차 같았다. 매연과 소음이 심했고, 제동 거리도 길었다. 정비를 하자고 여러 번 권했지만 번번이 내 의견을 무시하더니 결국 차는 멈춰버리고 말았다.
내 인생이 진창길에 처박힌 고장 난 차 같았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이사 간 셋집은 풍뎅이 등딱지만 해서 풀지 못한 짐 더미 사이에 이부자리를 펴야 했다. 그와는 자연스레 별거를 하게 되었다. 정만 있으면 삿갓 밑에서도 산다는데 방이 좁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멀어서였을 것이다.
불행의 원인이 모두 그에게만 있는 것 같았다. 내 주변을 맴도는 걸 알았지만 애써 외면했고 어쩌다 마주치면 베어버릴 듯 눈초리에 날을 세웠다. 이번 기회에 다시는 자기 멋대로 집안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단단히 버릇을 들여야겠다는 각오뿐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팽팽하게 평행선을 유지한 채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꽤 두툼했다. 말 한마디에 천 냥이 오간다는데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도 변명조차 없더니 달랑 편지 한 통이었다. 싫은 소리 듣더라도 남자답게 앞에 나서서 말을 할 일이지 편지 뒤에 숨다니, 천하에 없는 못난이 같았다. 내 위에 군림하려는 알량한 그의 자존심만 크게 느껴졌다. ‘미안하다’는 지극히 쉬운 말을 그는 하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기 싫었다. 편지를 뜯지도 않은 채 돌려보냈다. 그것도 등기로.
이 주 후, 전화 한 통 없던 그가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 구급차 안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어쩌면 그 편지에 미안하다는 말을 썼을 수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포부를 밝혔을 수도, 즐거웠던 기억을 들추며 조금만 참아 달라고 적었을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그를 땅에 묻고 난 뒤에야 들었다. 편지로 우선 내 마음을 누그러뜨려 놓고 다시 잘해보자는 말을 하려는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그 후로 나는 상상력을 동원해 허구한 날 그가 썼을 편지를 썼다 지우곤 한다.
우울한 날이면 편지를 돌려보낸 사실에 그가 충격을 받아 죽었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도 든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단 말을 못했지 싶기도 하다. 말뚝도 무른 땅에 박힌다는데 땅벌처럼 독이 올라있던 내게 말인들 붙일 수 있었을까. 얼마나 매정하다 생각했을까.
솔직히 그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 건강했고, 성격 또한 누구와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쪽을 택하던 사람이었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진작 깨달았었더라면, 아니 그에게도 해당된다는 걸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후회할 짓은 안 했을 것이다. 사과도, 용서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때가 지나면 소용없다는 것을 난 몰랐다.
마음이 오가기를 바라서 다리를 놓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을 텐데 나는 그 다리를 없애버리고 말았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속마음을 표현할 줄 알았더라면 우리의 관계도 칼날 위를 걷듯 위태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힘들어할 때 ‘안아줄까? 술 한잔할까?’ 물었어도 좋았을 테고, 늦게 들어온 날 밤에는 조용히 내 무릎을 내주어도 좋았을 것이다.
‘너무 걱정 말아요.’ 처진 어깨 쓸어주며 꽁냥꽁냥 했더라면, 이렇듯 가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움 없는 고요한 마음이 평화라면 난 가끔 평화를 잃는다. 그 편지가 읽고 싶다. (『에세이문학』,2016년 겨울,30-33면.)
위 글에서 작가의 아쉬움과 후회가 담긴 지난 사연을 읽는다. 좀 더 너그럽지 못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화해하지 못한 것을 드라마에 이입하여 풀어낸다. 진솔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읽지 않은 편지’에 선량한 마음을 담아 인간 본성의 선한 마음을 탐구하였다.
< 알람브라는 나를 꿈꾸게 한다 /정해경>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기타 연주를 듣는다. 음악이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음을 따라간다. 그리고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일까. 작곡가인가. 그도 아니면 혹 나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는 앞을 못 보는 장님이다. 흐르는 음이 그걸 말해준다.
알람브라 궁전, 내가 그곳을 알게 된 건 오래전 일이다. 라디오를 끼고 살기 시작한 무렵이었으니 중학생일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악은 내게 어려운 장르였다. 팝송도 클래식도 그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외국 곡은 제목부터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부연 설명은 더 복잡했다. 곡과 제목을 제대로 연결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단번에 귀에 익숙해지는 것도 더러 있었는데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그랬다. 우선은 제목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아라비안나이트라든가 알리바바, 알라딘 그런 단어들이 주는 서역의 이미지와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쌓인 기억들은 대체 어떤 것일까. 막연한 궁금증이 거품처럼 일곤 했다.
그래서일까. 이 곡은 처음 들을 때부터 어딘가 온전치 못한 이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흐름이 그랬다. 연달아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로 음높이를 정하는 것 같은 트레몰로 기법의 빠른 음 하나와 머뭇머뭇 걸음을 떼듯 느리고 굵직한 음 하나. 마치 두 사람이 하는 합주처럼 들리지만 한 사람의 독주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빠른 음은 마음이고 느린 음은 걸음일까. 빠른 음이 현란하게 변하는 대목은 더듬을 때 느끼는 급한 손길이고 느리고 굵은 음은 주저하는 더딘 발길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상상에 빠져들면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 한 사람이 어딘가를 더듬으며 가고 있는 것이 연상되었다. 아름답다고, 너무 좋다고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내가 듣기에는 볼 수 없는 이의 애달픔이 담긴 기타 연주였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시각은 온전히 배제한 채 청각과 촉각과 육감이랄 수 있는 어떤 느낌, 그것들을 하나로 모은 작곡자의 의도에 온전히 공감하려 했다.
장님이 두리번거리며 오래된 궁궐을 거닐고 있다. 궁 안의 뜰도 하나가 아니어서 문턱을 넘을 때마다 새로운 광경들이 펼쳐졌다. 고운 색과 현란한 무늬의 벽, 만져볼 수 없는 곳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그것들의 조화로움, 그리고 시아라 산맥에서 비롯되는 찬 기운을 머금은 물소리와 사이프러스 나무의 질서정연한 도열. 그 모든 것을 오로지 동행하는 이의 설명과 손과 발로만 느껴야 하는 비애까지 담긴 음악. 그것이 내게 들려오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었다.
어쩌다 거기까지 갔을까. 그러나 한 번 쏠린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어디서든 이 음악이 들려오면 상상 속의 인물이 상상을 하는, 이중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먼저 터번을 두르고 주름진 항아리 바지를 입은 페르시아 왕자가 하인들을 이끌고 분주히 오가는 궁궐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그곳은 그저 옛 궁궐이 되고 여전히 무어인들이 사용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는 천장과 벽들이 이어져 있고 그 어디쯤을 눈을 감은 채 걸어간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탄성과 설명이 간간이 들리고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상상하면서 그 모든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음악을 나는 지금 이 순간 듣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알람브라 궁전이 궁금해졌다. 인터넷은 쉽고 빠르게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실제로 가본 것처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듣고 싶다면 음악도 언제든지 들을 수 있었다. 음악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걸어가듯 들어가 보았다.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게 장면이 펼쳐졌다. 화면으로만 보았으니 눈으로 확인한 것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천장의 문양과 벽면이 기하학무늬로 끝없이 수놓아져 있었다. 잘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들과 사자 분수, 벽으로 이어진 길과 광장, 상상 속의 장님이 그리던 광경이 이랬을까 싶었다.
인터넷은 그 궁전에 얽혀 있는 사연도, 음악을 작곡한 사연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슬픈 이야기였다. 궁전을 지었던 이슬람 왕가는 15세기 말, 힘이 세진 가톨릭 세력에게 궁을 넘기고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고 곡을 쓴 타래가는 콘차 부인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간직한 채 그녀를 추억하며 기타 음만으로 작곡했다. 몇 겹의 상상 속에서 헤매던 나도 한 겹쯤 까풀을 벗은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음악이란 감정까지 전달하는지 듣고 또 들어도 늘 애절함이 흐른다.
스페인 그리고 알람브라 궁전, 가려고 들면 못 갈 곳도 아니다. 그러나 내게는 한없이 아득하고 멀게 느껴진다. 음악을 들으면서 겹겹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 또 눈을 감고 더듬거리며 머뭇거리던 그곳을 나도 가볼 수 있다니. 어떻게든 가고 싶기도 하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는 슬쩍 덮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어쩐지 내가 가면 신비한 기운이 모두 없어져 평범한 물과 흙으로 변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 세상 어디 한 군데쯤은 죽어서야 가야 하는 천국처럼 마음에 품고만 가야 할 곳으로 남겨놓아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김대원 외, 『수사자의 꼬리』, 에세이문학출판부,2015, 251-254면)
위 예문의 주제는 한 마디로 미의 탐구다.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광경을 상상하고 그곳에 가고자하는 마음을 그려낸다.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인간 보편의 주제랄 수 있는 미적 탐구를 주제로 잡은 작품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오랜 동안 그리워하고 들을 때마다 아름다운 정경을 상상하게 하였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작가에겐 마음에 담아두고 늘 동경하는 찬미의 감정 실체인 셈이다.
ㆍ수필에서 주제는 작가가 잘 아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작가만의 개성적인 글을 쓸 수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작가만이 알고 쓸 수 있는 것, 그만이 체험한 것, 그만이 깨달은 것, 누구도 쓸 수 없는 나만의 것을 주제로 선택해야 가장 잘 쓸 수 있다. 내 인생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또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작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걸 주제로 잡아야 개성적인 글을 쓸 수 있다.
<색깔과 편견- 맹광호 >
17층 아파트 거실 창 너머 서쪽 하늘로 해가 지고 있다. 멀리 높은 빌딩들 사이에 걸쳐 있는 산과 그 주변 하늘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도시의 노을이 산 위에서나 바닷가에서 보는 것만은 못해도 하루 종일 빌딩숲에 빼앗겼던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히 화려하다.
노을은 기본적으로 붉은색이다. 그것은 파장이 짧은 저녁 햇빛의 푸른색이 쉽게 산란되어버리는 반면, 파장이 긴 붉은색은 거의 산란되지 않고 우리 눈에 그대로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모양의 구름과 산, 그리고 바다에 반사되는 다양한 노을을 보면 그 속에는 주황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으며, 초록색과 푸른색, 그리고 보라색도 보인다. 노을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운 것은 말하자면, 저녁 햇빛이 그 밝기와 주위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파장의 색을 드러내기 때문인 까닭이다.
이 세상에 이처럼 다양한 색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일 세상이 온통 흰색 아니면 검은색으로 되어있다면 얼마나 살벌할까! 아니 그것이 붉은색이거나 푸른색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색 한 가지만으로는 세상 그 무엇도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색깔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산다. 붉은색을 좋아하는 사람, 푸른색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들 각자가 좋아하는 색을 하나씩 가지고 산다. 게다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가에 따라 사람의 성격도 다르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예컨대, 붉은색을 좋아하면 침착성과 인내심이 부족한 반면에 외향적이면서 적극적인 장점을 갖는다고 하고, 푸른색을 좋아하면 지혜롭고 매사에 사려가 깊지만 사람이 차갑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노란색을 좋아하면 명랑한 대신 우유부단하고, 주황색을 좋아하면 사교적인 대신 허풍을 잘 떨며, 녹색을 좋아하면 다소 유약해 보이지만 안정감과 신뢰감을 준다는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색깔에 대한 이런 의미 부여도 나름대로 심리학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것일 테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 또한 생년월일을 가지고 토정비결을 보는 정도의 ‘믿거나 말거나’식 예측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개인 신상명세서’라는 것을 작성해서 담임선생님께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반 학생들의 신상을 익혀 지도에 참고하기 위한 것일 텐데, 그 신상명세서에는 주로 가정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와 함께 가령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라든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적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는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한다고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부터 나는 분명히 ‘초록색’이라고 적었다. 이런 사실을 내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에서 ‘ever green(상록)’이라는 단어를 보고 그 ‘어감’이 너무 좋아서 이후로 이 단어를 시도 때도 없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책이며 공책 표지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크고 작은 물건들에도 그것이 내 소유라는 표시로 이름 대신 이 단어를 써 넣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초록색을 선택한 것은 내 성향이 초록색의 의미와 비슷하거나 같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이 영어 단어를 좋아해서였다. 이후로 나는 초록색을 다른 어느 색보다 우월한 색으로 인식하고 살았다. 색깔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던 대학 전임강사 시절 어느 날, 이런 나의 색깔에 대한 편견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때 내 연구실에는 주로 의료계 신문기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지금은 의과대학이나 부속병원에 기자실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곳으로 취재를 가지만, 당시는 그런 방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기자들과 안면이 있는 교수 연구실을 들르는 게 보통이었다. 대학 재학 중 대학신문 기자를 했고 졸업 후에는 전문지에 여러 형태의 글을 자주 쓰던 내 연구실이 자연스럽게 이들 기자들의 출입처가 되었다.
그런 기자들 중에 성격이 아주 발랄하고 붙임성이 많은 여기자 한 명이 있었다. 하루는 노크도 없이 불쑥 연구실로 들어와서 한참 의료계 소식으로 너스레를 떨더니 “선생님, 제 외모에서 뭐 이상한 느낌 안 드세요?”라고 질문을 해왔다. 평소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 나는 “글쎄….”라고만 했다. 그랬더니 그 기자는, “제 몸에는 일곱 가지 색깔이 다 있어요. 사람들은 색깔에 대해서조차 어느 한 가지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보라색 목걸이와 노란색 귀걸이를 포함해서 옷 전체에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호불호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갈등하게 하고 분열하게 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워지는 색깔마저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정해 놓고 옷이며 신발, 심지어 가구까지도 온통 그 색만을 애용하는 것이 좋은 예라는 것이다. 그녀의 얘기가 다소 억지 같다는 느낌이 안든 건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후략) (『에세이문학』,2016년 가을,104-107면. )
- 작가가 유독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은 그만이 잘 아는 내용이다. 누구한테 따로 말하거나 드러내지 않은 일종의 개인 비밀에 해당한다. 독자는 이처럼 잘 알 수 없는 작가만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거나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에게서도 듣기 어려운 내밀한 이야기라서 작가만이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만이 아는 주제를 다루는 것 또한 수필에서 요구하는 주제 잡기의 한 요건이다.
3) 범위 조건
글은 범위를 좁혀야 구체화하여 쓰기 용이하다. 글을 처음 쓰는 초심자는 넓은 범위의 큰 주제를 잡는다. ‘어버이 사랑에 감사한다.’는 막연하고 다룰 범위가 넓어서 분량이 제한적(12-15매)인 수필로 다루기는 적당하지 않다. 만약에 이와 관련된 것을 주제로 잡는다면 ‘아버지 눈물에 뭉클하다.’나, ‘어머니 손길은 언제나 따스하였다.’로 조금 더 구체화시켜야 글쓰기가 수월하다. 막연히 쓰는 것은 개성적일 수도 없고 독자의 눈길을 끌 수도 없다. 쓰나마나 한 글을 누가 읽겠는가.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하고 특이한 것을 기대하는데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막연한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 어렵다. 물고기를 잡는데 그물코가 넓어서는 그 사이로 고기들이 빠져나가 잡히지 않는 것과 같다. 잡고자 하는 고기의 크기에 맞게 그물의 크기를 조정해야 하듯 잡고자 하는 고기(수필의 주제)에 알맞게 범위를 좁히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은 수필의 주제를 구체화시키라는 말과 통한다. 구체화시켜야 깊게 들어갈 수 있고 그래야 의미가 큰 것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수필은 대개 2,000자에서 3,000자 정도의 글이다. 이 분량에는 애초에 큰 범위의 주제를 담을 수 없다. 육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을 현미경으로 보아야 하듯 또는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돋보기로 보아서 건져 올리듯 좁혀야 한다.
< 문/ 최장순>
강이 꽝꽝 얼어 있다. 누군가 던져놓은 돌을 껴안은 채 실금도 미동도 없는 저 강은 지금, 두 손을 깍지 낀 단호함이다. 제아무리 문고리를 잡아 흔들어도 기척이 없는 닫힌 문이다.
문은 소통이다. 걸음이 들고 나는 속에서 정이 오가고 말이 통한다. 살짝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는 안과 내다보는 바깥은 은밀하게 통한다. 문이 없다면 벽을 허물거나 월담을 해야 한다. 월담은 불미스런 소문이 담을 넘으니 불법, 문은 정정당당한 통과의례가 아닌가.
문은 신분이다. 걸음이 들고 나는 속에서 정이 오가고 말이 통한다. 살짝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는 안과 내다보는 바깥은 은밀하게 통한다. 문이 없다면 벽을 허물거나 월담을 해야 한다. 월담은 불미스런 소문이 담을 넘으니 불법, 문은 정정당당한 통과의례가 아닌가.
대문은 집 안팎을 구분하지만 방 안팎을 경계 짓는 방문이 있다. 세상과 속세를 구분하는 일주문이 있고 도성의 망루를 겸한 성문이 있다. 나제통문처럼 암벽을 뚫은 동굴도 거적을 달면 문이 된다.
보이는 것만이 문은 아니다. 의식의 문, 통과의례의 문이 그렇다.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등용문이 그것이다. 이때의 문은 목표 지향성이어서 기꺼이 그곳을 통과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 문의 통과 여부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갈리고 기쁨과 슬픔이 일거나 소멸한다. 문은 절대 호락호락 저를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히 닫혀있지도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문이라도 당당히 열 수 있는 자격을 쥔 자에게는 공손해진다.
문이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허공을 날고 싶은 인간은 새를 키워 하늘을 얻는다. 든든히 먹이를 주어 날려 보내고, 다시 그들이 수집해온 먼 곳의 소식을 듣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몸소 날아가고 싶어 한다. 그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주는 것이 비행수단이다. 공항은 공중과 땅을 연결하는 문이다. 지상에서 발을 뗀 비행기가 최대한 오를 수 있는 허공까지를 하늘이라 한다면, 공항은 하늘로 오르거나 지상에 내려오기 위한 관문이다. 시공을 초월한 구원의 세계에서도 마음의 문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의 영역이 아무리 두텁고 단단해도 믿음으로 부단히 두드리고 갈구하지 않는가.
씨앗은 겨우내 얼어있던 딴딴한 흙을 열고 나온다. 땅거죽을 열고 나온 새순이 자라고 수많은 가지가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낸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간다. 이렇듯 땅에는 계절을 관장하는 문이 있기에 봄은 문을 열고 겨울은 문을 닫는다. 인간은 땅속으로 들어가면 죽음이다. 죽음은 닫힌 문이다. 그러나 영적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인간은 사후의 또 다른 문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항구와 포구는 바다와 뭍을 연결하는 문이다. 항해에 지친 배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큰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뭍을 밀어낸 배가 먼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밤새 거친 파도와 싸운 배들을 품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다. 포구는 비릿한 생계를 낚은 이들의 귀환을 반기는 문, 고단한 하루를 씻어내는 왁자한 웃음을 문고리로 달고 있다.
이성과 감성이 한 몸이 될 때에야 열리는 것이 마음의 문이다. 이 문을 열어야 세상이 보인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몸도 말을 듣지 않는다. 고집이 불통을 낳고, 대화단절이 고립을 부른다. 열기보다는 닫기가 더 쉬운 문이다. 쉬운 것이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믿음이 깨어진 자리, 아픈 상처는 커다란 자물쇠를 채운다. 이 문을 여는 첫 열쇠는 입은 닫고 귀를 먼저 여는 것. 입은 하나지만 귀가 두 개인 것은 말에 앞서 먼저 경청하라는 까닭이다.
오래전 어느 영화 포스터의 “통하였느냐”라는 문구가 유독 와 닿았다. 통한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서로 닿았다는 것,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는 것, 냉기가 온기로 바뀌고, 위와 아래, 부와 빈, 좌와 우가 모두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통은 폐쇄된 문이나 다름없다. 그건 분명 죽은 문이다. 죽은 문은 벽이나 다름없다.
빗장을 풀지 않는 강. 그 닫힌 문을 여는 열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풀에 지쳐 스스로 깍지를 풀거나 저 안쪽 얼어붙은 마음이 스르르 풀려야만 하는 것. 그 문이 스스로 열리기까지 저 안에 봄이 스며들어야만 한다.
닫힘의 끝은 열림이다. 저 강처럼 나는 얼마나 나를 단단히 껴안고 있는가. 얼마나 뻑뻑한 마음의 깍지를 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 안쪽을 슬쩍 들여다본다.(최장순, <문>, 수필미학 2016 여름,141-143면)
이 글의 주제는 폭이 아주 좁다. 그런데 ‘문’ 하나만을 탐구하기에 문에 담긴 여러 의미를 깊게 다룰 수 있다. 깊게 다룰 수 있기에 문에 담겨 있는 인생사적 가치와 해석을 오히려 더 폭넓게 열어 보일 수 있다. 수필의 주제 잡기에서 범위를 좁혀야 한다.
4) 독자를 살펴서
모든 글은 필자 개인의 표현이지만 한편으론 독자를 향한 소통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필자와 글을 통한 소통의 한 주체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말하자면 독자를 배제한 글이나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글쓰기의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수필은 필자의 실제 살아가는 삶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만큼 공감의 한 주체인 독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와 달리 시는 독백의 말하기가 본질인 만큼 독자에 대한 고려가 그리 중요하거나 필수적 요소는 아니다. 시의 독자는 시인의 개인적 독백을 엿듣는 것이기에 독자의 역할도 암시적이거나 도외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설은 작가가 가공한 허구이므로 독자를 고려한 글이라기보다 이야기 자체의 서사적 완결성이 보다 중요하다.
수필의 필자가 추구하는 가치와 그 사회나 국가의 독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조화를 이룰 때 공감하고 카타르시스에 이를 수 있다. 서로의 가치가 충돌하고 사회와 국가에 큰 충격을 안기거나 독자에게 고통을 주는 글은 곤란하다. 시와 소설은 이것이 가능하고 오히려 이러한 점을 의도적으로 도발하기도 하지만 수필의 세계는 함께 살아가며 공유하는 필자와 독자의 공동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수필은 결코 사람을 해치는 칼이나 독약이 아니다. 특히 수필은 자아를 세계화하고 세계를 자아화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좋은 수필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나를 낮추어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주제를 잡는 게 바람직하다.
주제는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글은 나의 취향이나 의견보다 독자의 흥미와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 이런 주제 잡기는 내 생각을 우리의 주제로 끌어올리려면 사고 범위를 넓힐수록 좋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소통 관계의 범위를 넓히고자 여행도 하고 책도 읽으며 전문가도 찾는다. 그래서 소통을 잘 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주제도 얻을 수 있다.
<내 마음의 유언장 /윤영전>
살아가면서 누구나 세상과 이별은 너무도 당연하다. 수시로 부음을 받고 고인의 영정 앞에 다가설 때면 유언장을 생각한다. 고인은 하직하기 전에 미리 유언장을 써놓고 유언을 했을까.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언장은커녕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한마디 말이라도 남겼을까. 오래전 주일 미사 중에 신부님 강론에서 “유언장을 써놓은 신자가 계시면 손들라.”고 했다. 생뚱맞은 유언장 말에 모두 손을 들지 못했다.
나는 손을 들려 했지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가. 그러나 오래전에 유언장을 써놓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유언장을 쓴 것은 어언 48년 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마음의 유언장을 써두었다.
그러니까 전선 없는 전쟁터에 홀연히 참전하면서 “나의 육체와 영혼까지 하느님께 맡긴다.”며 용감하게 지원을 하였다. 수도인 사이공이 베트콩의 구정공세로 함락될지도 모른다는 보도도 있어 심각한 곳이었다. 부모와 주변에서 파병을 반대했지만, 참전하여 13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베트콩의 두 차례 기습 공격을 받았지만 죽지 않았다. 허나 나와 함께 참전했던 전우 수십 명과 맹호와 청룡 백마 전우 수천 명은 죽어 유해만이 귀국해야 했다.
전우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유언장을 썼을 것이다. 유언장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운명을 하느님께 맡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 앞에 초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현실에 죽고 사는 일들이 다반사가 아닌가.
(중략)
사실 베트남에 지원하고 뒤늦게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남루한 후회를 하곤 했다. 분단 조국과 베트남 분단에 동병상련을 앓고 있기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베트남은 마침내 남북이 통일되어 평화롭기만 했다. 한반도는 언제나 통일이 올까?
베트남이 통일이 된 후, 참전 36년 만에 찾아간 그곳은 전쟁 없어 평화로웠다. 100년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 좀 더 잘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우리의 양민 학살 원죄를 용서했다. 그러나 어디 실제로 당한 유족들이 진정으로 용서가 되겠는가. 그들은 전쟁 아닌 평화의 나라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중략)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이등박문’을 척살한 후 최후진술에서 “나의 조국이 완전히 통일이 되면 내 유해를 조국의 품에 안장해 달라.”고 유언했다. 안 의사의 기일이 올해가 103주년이 된다. 아직도 통일의 길이 멀어 보이지만 효창공원 애국 묘역에 안 의사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어 유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중략)
나도 유언장에 다시 한 번 쓰고 싶은 “죽음을 두려워말자. 행동하는 양심으로 의인을 닮아가는 삶을 살자.”고 자주 묵상하면서 여생을 보내려 한다. 우리 8천만 동포의 꿈에도 소원인 분단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정진하련다. 내 마음의 유언장은 고종명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이고 싶다.(서성남 외, 『Y의 하루』, 에세이문학출판부,2013, 154-157면)
위 글의 주제는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작가의 염원이다. 이렇게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은 누구라도 인생을 참된 눈으로 바라본다면 품는 생각일 것이다. 어느 독자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 주제라 볼 수 있다. 아직 죽음을 의식하지 않거나 멀리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우리는 도처에서 만난다. 그럴 때마다 과연 어떻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에 대한 생각을 이 작가는 ‘마음의 유언장’에 담는다. 분명 많은 독자가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 화제라 본다면 독자를 배려하는 주제라고 보겠다.
3. 주제문 작성
제재를 고르고 글의 중심 내용을 결정하면 범위를 한정하여 주제를 잡고 주제문을 써야 한다. 주제문을 써야 확실하게 주제를 잡은 셈이다. 암시적 주제라고 해도 주제문을 쓰는 것이 좋다. 명시적 주제는 당연히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제시해야 하는데 주제문은 짧고 간명한 게 좋다. 모호한 문장, 의문문이나 비유적인 문장, 부정문 따위는 주제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어와 서술어가 갖추어진 평서문으로 분명하게 써야 좋다. ‘친구는 잘 지내는가?’와 같은 의문문은 제목으로는 적당하지만 주제문으로는 적당하지 못하다. 또, ‘아버지의 사랑은 위대하다’처럼 분명치 않은 문장도 글쓴이의 메시지를 약화시키므로 좋지 않다. 주제는 암시적이어도 주제문은 구체성을 띠어야 집필하는 데 중심을 잡고 통합성을 획득하기 쉽다.
다음 예를 보면서 주제문을 작성하는 실제를 익혀보자. 다시 유의할 것은 간명한 평서문이고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재를 축약한 것이지만 독자에게 전달하고 소통할 글의 핵심 내용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
① 나는 철수가 껄껄대며 웃는 것이 좋다.
② 나는 철수가 웃는 것이 좋다.
③ 나는 철수가 좋다.
④ 나는 껄껄대며 웃는 철수를 보면 즐거워져 좋다.
③은 개략적 사실만을 ②는 이유를 밝혀서 ①은 더욱 구체적인 이유로 주제문을 썼다. ④는 구체적 이유와 필자의 정서 반응까지 썼다. ④처럼 쓰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 좀 더 분명해져, 개요 작성이나 집필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
2. 간결한 문장
문장은 간결하게 서술해야 좋다. 간결한 문장은 독자에게 필자의 뜻을 잘 전달한다. 간결한 문장은 구조와 수식이 긴밀하고 길이도 대체로 짧다. 구조나 수식이 복잡한 문장은 의미 파악이 어렵다. 간결한 문장은 주술 호응이 분명하고 속도감이 있어 읽기 쉽고 이해하기 좋다. 문장을 간결하게 쓰는 방법을 알아보자(다음은 金昌辰, 『작문의 정석』, 삼영사, 2016, 54-71면의 내용을 발췌하여 수정하고 보완한 것임).
첫째, 단어를 둘로 나누지 않는다. “나는 말을 했다”는 ‘을’을 빼고 “나는 말했다”로 써야 간결하다. 본래 한 단어를 나누지 않아야 한다. ‘이/가’, ‘을/를’을 넣지 않는다.
둘째, 하나의 생각은 한 문장으로 서술한다. 글은 주어와 서술어가 하나씩인 단문單文이 원칙이다. 중문重文과 복문複文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한 문장은 하나의 개념만을 담는 것이 좋다(one sentence, one idea). 문장이 길고 개념이 여럿이면 필자가 의도한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어렵다.
셋째, 형용사와 부사를 알맞게 쓴다. 문장의 줄기는 명사와 동사이다. 수식어는 부수적이다. 줄기는 굵고 곁가지는 작은 나무가 미끈하고 보기 좋다. 불필요한 수식어는 의미 전달을 방해하고 리듬감을 방해한다. 글에서도 수식어를 되도록 쓰지 않아야 좋다.
수식어인 관형사와 관형사형을 쓰기보다 부사로 바꿔 쓰는 게 더 낫다. 문장은 주어보다 서술어, 명사보다 동사가 의미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주어와 명사를 수식하는 관형사보다, 서술어와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를 쓰는 것이 의미가 더 정확하고 표현이 간결하다. “많은 사람이 왔다”보다 “사람이 많이 왔다”로, 부사로 서술어를 수식하기보다 형용사 서술어 표현이 더 낫다. “그녀는 예쁘게 웃는다”보다 “그녀는 웃음이 예쁘다”는 ‘예쁘다’를 더 강조한다.
넷째, 불필요한 주어나 군더더기 말은 생략한다. 수필은 필자 본인의 체험을 위주로 쓰는 글이므로 ‘나’를 안 써도 말이 통하고 더 간결하고 부드럽다. 빼어도 말이 통하는 군더더기 부분은 삭제한다. 한 문장은 20자 내외에서 최대한 50자를 넘어서지 않도록 짧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넘어서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重言復言하기 쉽다.
다섯째, 중복 표현을 피한다. 단어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중복된 표현은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중복 표현은 세 종류이다. ①한자어와 고유어가 겹치며 일어나는 ‘중복어重複語’ ②한 문장에서 동일한 단어나 구절을 반복하는 ‘단어·구절 중복’ ③ 형태는 다르나 의미가 반복되는 ‘의미 중복’ 등인데, 의미를 훼손하지 않을 정도에서 이런 중복 부분을 다른 단어로 교체하거나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것이 간결한 문장을 만든다.
3. 명확한 문장
산문 문장은 뜻이 명확해야 한다.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서술하면 독자는 그 문장을 읽고 뜻을 이해한다. 독자가 이해하고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감정에 공감한다. 동의와 공감이 바르게 이루어진 뒤에 감동이 따라온다. 문장의 뜻이 명확하려면 문장 구성 요소들이 바르게 호응해야 한다. 문장을 명확하게 쓰는 방법을 알아보자(다음은 金昌辰, 『작문의 정석』, 삼영사, 2016, 72-89면의 내용을 발췌하여 수정하고 보완한 것임).
주어에 맞게 서술어를 써야한다. 주술 호응이 안 되는 경우는 문장을 길게 쓰면서 주어와 술어가 멀어져서 실수하기 쉽다. 문장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주어와 술어를 가까이 배열하면 해결하기 좋다.
서술어는 하나인데 목적어가 두 개 이상일 때 문제가 일어나기 쉽다. 각 목적어는 서술어와 호응해야 하는데 하나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목적어와 서술어도 가까운 위치가 좋다. 목적어가 길 경우에는 목적어를 앞에 두고 주어를 목적어 뒤로 보내 ‘목적어+주어+서술어’순으로 서술하는 게 좋다.
수식어는 피수식어와 떨어져 있으면 제대로 역할하기 어렵다. 긴 수식어(관형절과 부사절)는 독립시켜 다른 문장으로 나누는 게 좋다. 수식어 자리도 올바른 자리에 놓아야 한다. ‘대부분 학생’보다 ‘학생 대부분’으로, ‘자동 커피 판매기’보다 ‘커피 자동판매기’가 더 자연스럽다.
관형어와 부사어 등 수식어는 피수식어 앞에 놓아야 한다. 숫자와 날짜는 위치에 따라 뜻이 달라지니 유의해야 한다. 명사 앞에 너무 긴 수식 어구를 두는 것보다 명사를 주어로 삼고 수식 어구를 서술어구로 바꾸는 편이 더 명확하다.
주어를 생략하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하는 문장은 반드시 주어를 제시해 비문(非文)이 되는 걸 피한다. 목적어를 생략하면 모호해 질 수 있으니 유의하자. 문장에서 두 개 이상의 의미를 가진 문장은 모호하다. 이를 피하려면 조사나 어미를 바르게 다듬거나 쉼표를 사용하여 해결한다.
< 제외된다는 것은 / 곽숙자>
지난여름 함양에 있는 친척 언니 배 과수원에 갔다. 배나무들은 가지마다 노란 봉지를 매달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봉지들이 마치 초록 융단에 노란 꽃무늬 같았다. 그것들은 선별에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언니네는 매년 배꽃이 피면 꽃송아리를 드문드문 남기고 주변 꽃들은 따버린다. 얼마 후 배들이 완두콩만 해지면 한 송아리에서 크고 충실한 것 하나만 봉지를 씌워 남기고 나머지는 따버린다. 양분의 소모를 줄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보면 최종까지 남은 배들은 두 번의 구조조정을 거쳐 선택된 것들이다.
내가 갔을 때 봉지 속 배들은 과일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컸는지, 모양과 색깔이 보이지 않으니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푸른 잎 사이에 주먹만 한 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 배가 벌써 이렇게 컸네!”
나는 반가움에 환호했다. 그 말을 듣고 내 곁으로 다가온 언니가 말했다.
“날마다 찾아서 따버려도 남은 게 있구나.”
그러고는 다짜고짜 배를 따서 흙밭에 던져버렸다. 봉지를 씌우지 않은 배는 보이는 대로 따버리는 게 언니의 일과다. 그걸 알면서도 무참히 버려진 싱싱한 배를 보는 순간 나를 보는 듯했다.
배에 봉지를 씌우는 것은 벌레를 막기도 하지만 고운 빛깔을 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만큼 크는 동안 주인의 눈길을 용케도 비껴온 배가 아닌가.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먹음직스럽게 클 수도 있었을 텐데. 나를 기쁘게 했던 배는 한창 자라는 시기에 무리에서 제외된 셈이다. 봉지 안에서 보호를 받은 것도 더러는 썩어 떨어진 것을 보면 햇빛과 바람을 알몸으로 견뎌낸 놈보다 더 충실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을 성싶다.
무리에서 탈락된 배를 보니 소녀 적 생각이 났다. 중학생이 된 친구들이 여수 만성리로 해수욕을 가자고 나를 데리러 왔다. 따라나섰다. 만성리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와 있었다. 우리는 넓은 모래사장과 바다를 놀이터 삼아 마음껏 뛰어놀았다. 놀 때는 친구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한참 후 친구들이 어디론가 몰려갔다. 나도 따라갔다. 그곳에는 그날 학생들을 인솔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모두 호명을 하는데 당연이 내 이름은 없었다. 진학을 못한 나는 선생님과 함께인 줄도 모르고 따라갔던 것이다. 그때 나는 친구들의 집단에서 예외자인 것을 실감했다.
친구들이 고등학생때였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꼭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친구들도 만날 겸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 온 친구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사복을 입은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날의 대화는 학교와 공부, 진로에 대한 것뿐이었다. 가족들 시중과 집안일을 전담하는 나로서는 어색한 자리였다. 그 후로 초등학교 동창 모임은 참석하지 않았다. 스스로 탈락자가 된 것이다.
아들이 대학 시험에 떨어졌을 때였다. 고교 졸업식이 있기 전에는 ‘내년에 가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졸업식이 있던 날 학교에 갔더니 합격한 사람과 불합격한 사람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느껴졌다. 합격한 학생과 부모들은 대학생이라는 새로운 무리에 소속된 기쁨과 설렘으로 활기가 넘쳤다. 합격한 사람들은 세상을 다 얻은 듯 서로 축하하며 하나가 되었다. 반면에 탈락한 자들은 키질에서 밀려난 쭉정이처럼 하릴없이 시나브로 흩어졌다. 탈락자의 학부형인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아들과 쓸쓸하게 집으로 왔다. 그 순간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학교든 합격한 학생과 부모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처음으로 탈락을 경험한 아들이 안쓰러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탈락의 순간에는 출구가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 삶을 돌아보면 그것이 모두 불행의 씨앗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행복의 밑거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난을 모르면 행복도 모른다고 한다. 그것은 고난을 극복할수록 기쁨과 성취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탈락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더라면 삶의 폭도 그만큼 단조로웠을 것이다.
사람이나 과일이나 충실해지기 위해서 탈락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친구들 무리에서 제외된 것은 가난 때문이었고, 배는 주인 마음에 달렸으니 선택받지 못한 것이 본인 의지와 상관이 없었던 점에서 우리는 닮은꼴이다.
그래도 나는 사람이니 탈락되어도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다. 사람에게 탈락은 노력의 채찍이 되기도 하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배는 한번 제외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만회할 여지가 없다. 조금 전까지 실하게 크던 배가 제 가치를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탈락되었다. 싱싱하기 때문인가. 땅에 버려져 있으니 더 쓸쓸해 보였다.(『에세이문학』2016년 봄,204-207면.)
이 글은 과수원의 배와 작가의 지난 인생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구성한다. 친척 언니 과수원에서 품질 좋은 과일을 키우려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따내버린 배를 보면서 자신이 겪었던 유사한 사연과 비교한다. 동창들과 모임에서 배제된 것, 또 아들의 경우까지 또래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대조하며 서술한다. 결국 ‘우리는 닮은 꼴’이란 해석이 비교라면, 작가는 사람이니 다시 살아날 수 있지만 배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을 대조하여 인식하곤 처연한 정감에 잠긴다. 즉 이 수필은 비교와 대조가 구성의 핵심이라 하겠다.
4) 절정 구성
절정 구성은 글의 핵심을 향해 모든 내용이 집중하도록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위해서 극의 모든 요소를 배치하는 방식과 같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점차 중요성이 증대하는 방식의 점층법이 있다. 다만 절정 구성은 수필의 주제를 후반부 또는 결미부로 몰아가는 방식인데 반해, 점층법은 문장 수사의 한 방법일 뿐으로 구성과 다르다.
어떤 사건을 정점에 놓고 그것을 향해서 다른 일들이 그것에 집중하고 모여 최대 효과를 내고자 하는 구성이다. 이것은 서사 수필에 적합하며 소설이나 드라마의 구성을 응용한 방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소설과 드라마는 허구의 사건을 다루는 것이라면, 수필은 필자가 체험한 극적인 사건을 제재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를 적용하여 수필을 구성할 때는 글에서 핵심을 결정하고, 이것과 다른 부분을 순차적으로 정렬하여 독자가 이 진행 방식을 확실하게 알도록 해야 한다. 다른 방식처럼 이 구성도 다른 것과 병합하여 사용할 수 있다. 시공간의 변화로 절정의 순간을 향해 구성할 수도 있고, 비교와 대조를 사용하며 절정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최고조를 공감할 수 있는 적합한 제재를 선택하는 게 필요하다는 점이다.
<절묘한 타이밍 / 김미옥 >
1. 막내딸 예비 시어른들과 상견례를 하는 날이었다. 11월 셋째 일요일, 늦가을인데도 바람 한 점 없이 따뜻했다. 점심식사 두어 시간으로 인사는 끝났다. 큰 숙제를 마친 듯 홀가분해졌다. 오후 시간은 텅 비어있었다.
2.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과 아직 남아있는 고운 단풍은 우리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날따라 메이크업이며 머리 손질에 특별히 신경을 쓴 딸아이와 나는 그대로 집에 들앉아 있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큰딸들도 전화로 계속 부추겼다. 막내와 나는 바람 쐬러 나가기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남편은 내내 못 들은 척 반응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기분 좋게 드라이브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계속 구슬렸다. 일단 집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보자던 그도 마지못해 결국 응했다.
3. 어디로 갈까. 막상 나가려니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낮에는 여의도에서 가을 한강을 내려다봤으니 저녁에는 가볍게 남산에 올라 늦가을 단풍 구경도 하고 오랜만에 서울 야경을 보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4. 케이블카 승강장에 도착하니 주차하기가 마땅찮았다. 주차장은 고작 열댓 대쯤 주차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인근 식당에서는 길에 나와서 호객하느라 야단이었지만 아직 식사할 생각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왕복 2차선 도로 한편에 주차 공간이 몇 개 더 있기는 했지만 그 앞뒤로 이미 차들이 길게 주차되어 있었다. 맨 앞쪽에 이어 대놓고 매표소로 향했다.
5. 매표소 앞부터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탑승 대기 줄은 위층으로 이어져 끝을 알 수 없었다. 언제 탑승할 수 있을지 까마득했다. 다섯 시가 넘었는데도 꼬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윽고 줄을 따라 2층 계단을 오르니 거기도 지그재그 줄지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벽에는 ‘여기서부터 40분 대기’라는 안내문이 크게 붙어있었다. 어이쿠, 남편 눈치가 보였다. 성질이 그리 급하지는 않은데 유난히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잠시 망설였다. 담배를 피우러 몇 번이나 들락날락 말은 없지만 분명 꾹 참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모처럼 나온 걸음인 만큼 그냥 모른 척, 꼬리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 들어서니 ‘30분 대기’라는 노란색 안내문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위층으로 이어진 줄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6. 슬슬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꼭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시끌시끌한 중국 관광객 물결 속에 선 채로 시간을 죽이는 것도 힘든데 올라간들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나들이는 아닐 것이었다. 와글와글 야시장 같을 남산타워를 생각하니 야경을 감상하며 호젓하게 저녁식사나 하려던 우리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들인 시간이 아까워 한동안 주춤거렸다. 그러다 자칫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더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7. 표를 환불하고 나오니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뭔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가까이 가보니 견인차 몇 대가 이마에 불을 밝히고 주차된 차를 두부모 떼어내듯 차례차례 끌어가고 있었다. 아뿔싸,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쪽으로 냅다 뛰었다. 은행잎이 깔린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먹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동물의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헉헉거리며 달려가니 마침 우리 차를 매다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구사일생. 절묘한 타이밍에 웃음도 나고 기막히기도 했다.
8. 매표소에서는 계속 표를 팔고 있는데 견인차는 대목을 만나 듯 부릉부릉 아주 신이 났다. 어쩌자는 것인가. 휴일 저녁, 가볍게 나들이 나온 사람들 좀 봐주면 안 될까. 통행에 크게 방해되지도 않는데. 융통성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기습하는 것 같아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9. 이마에 훈장처럼 딱지 한 장 붙인 차에 오르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밤늦게 야경에 취해 솜사탕 같은 기분으로 내려왔는데 감쪽같이 차가 증발해버렸다면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특별한 날 들떴던 기분을 깡그리 망쳤을 것을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때 돌아서기를 잘했지 싶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결정적인 순간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로운 삶의 한 방법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대롱대롱 매달려 산 위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자꾸 돌아보았다. 그 안에서 불빛 구경에 취해 있을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10. 용산쯤 오다가 저녁으로 먹은 갈비탕이 입에 달았다. 우리는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터졌다. 괜히 나왔다가 딱지만 받았다는 남편의 불평도 오늘은 거슬리지 않았다. 그 말조차 달기만 했다.(『에세이문학』, 2016년 가을, 205-207면.)
이 글은 절정 사연을 중심으로 그에 따른 구성 방식이다. 총 10개 문단인데, 각 문단의 문장은 순차대로 5개-7개-3개-5개-11개-6개-6개-5개-7개-4개인데, 서두와 결미 문단은 비교적 적은 분량으로 외형상 달걀형 형태를 갖춘다. 각 문단의 소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글의 구성을 알아보자. ①상견례를 한 날 오후 시간이 비었다. ②가족끼리 외출하기로 했다. ③남산에서 서울 야경을 보자고 했다. ④길가에 주차했다. ⑤케이블카 승강장은 만원이었다. ⑥갈등하다 돌아섰다. ⑦견인될 순간에 아슬아슬 벗어났다. ⑧견인차 행태에 화도 났다. ⑨돌아서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⑩만사가 좋았다.
9문단이 절정이고 이를 향해서 1-8문단까지 사연이 이어진다. 특별한 날(소주제①)의 가족 외출(소주제②,③)이 여러 곡절(소주제④,⑤,⑥,⑦,⑧)을 겪은 뒤에 해피엔딩(소주제⑩)으로 마무리한 체험이 제재이고, 결정적 순간(소주제⑤)에 포기(소주제⑥)하는 것도 지혜로운 삶의 방법(소주제⑨)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이 주제이다. 이 주제는 체험 제재에서 필자가 발견한 해석이다.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연이 작용한다. 남산에 케이블카로 오르려고 매표한 뒤 순서를 기다리다 환불한 뒤 돌아선다. 길가에 주차한 차가 견인되려는 순간에 구출해 돌아서면서 가려고 했던 케이블카를 본다. 대롱대롱 매달린 케이블카 안의 사람이 부럽지 않다. 이미 서사적 자아는 한 차례 인식의 전환을 이룬 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새로운 깨달음이 글의 절정이고, 9문단의 구성적 의미다.
이 구성 과정을 더 세밀하게 따져 보자. 서두는 특이한 체험이 시작되는 어느 날의 정황(‘텅 빈 오후 시간’)과 심리 상태(‘홀가분해졌다’)를 서술한다. 서두의 평안한 심리가 만족한 결미(‘입에 단 음식’과 ‘불평의 말조차 달았다’)에 상응한다. 물론 서두에서 결미에 이르는 시간 변화에 여러 사건이 일어났고, 새로운 인식의 변화로 평안 상태가 강화되고 고조되었다. 이 서두와 결미의 대응은 본문 문단의 상응과 조화를 이룬다. 2와 3문단은 외출과 장소가 호응하고, 4-5문단은 주차와 케이블카가 호응한다. 6-7문단은 심적 갈등과 물리적 위기에서 내린 결단과 필사적 해결이 호응한다. 8-9문단은 세상의 견고한 현실과 필자의 유연한 상황 대처가 호응의 짝을 이루면서, 전자에는 화가 나고 후자에는 웃음이 나는 대조적 심리 서술은 9문단 절정을 강화하게 이끈다. 이러한 문단의 호응에 따른 짝 구성도 사고의 균형과 안정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보기이다.
5 ) 병렬 구성
이것은 열거식 구성이라고도 부르고 또는 화제별 구성이라고도 부르는 방식이다. 논리적 연관성이나 단계별 순차성 없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된 제재를 화제별로 병렬하거나 열거하며 구성한다. 병렬의 순서나 화제의 순차도 일정한 기준이 없지만 글이나 필자에 따른 내적인 질서는 있어야 한다.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열거한다든지, 내면적인 것에서 외향적인 것으로 진행한다든지, 중심적인 것에서 부차적인 것 등등의 화제 사이의 내적 연결 고리를 갖추는 게 좋다. 자칫하면 산만하여 전체적인 글의 짜임새가 부족하거나 어수선하게 독자에게 비춰질 수 있다.
이 병렬 구성은 정해진 분량에 맞추어 화제의 수를 조절하면서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제와 관련한 내용과 동원 가능한 제재는 얼마든지 열거하면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성에 합당한 논리는 구체적 사례에서 일반론을 찾는 귀납법과 일반론에서 구체 사례로 연결하는 연역법과 조응할 수 있다.
<컷, 말하는 도시 /염귀순 >
#1. 헤어숍에서 행복을 눈치채다
상호 앞자리에 우리 아파트 이름을 새겨 넣은 ‘○○ 헤어 갤러리’. 깔끔한 간판 아래 환한 실내가 들여다보이는 이 숍에서 한 명뿐인 헤어디자이너이자 주인인 그녀에게 파마를 부탁한다.
바로 집 앞인데도 첫걸음이다. 어쩌다 번쩍 눈에 띄어 들렀다가, 그녀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가, 왠지 모를 신뢰감과 분위기에 넙죽 머리를 맡긴 게다. 짜하게 이름난 미용실에서 파마 한번 하려면 전화예약에다 외출 준비며 오가는 시간으로 하루를 날리는 판국 아닌가. 입던 옷 그대로 동네 미용실에 앉아 마음에 드는 파마를 할 수 있다면야 오죽 편하리.
결과부터 말해보라면, 기분 좋게 예감 적중. 우선 모발에 손상을 주지 않은 채 탄력 있게 나온 파마 컬이 만족스럽다. 거울 속에 비춰 본 뒷모습에서 커트 솜씨도 나무랄 데 없음이 확인된다. 젊은 헤어 디자이너들보다 몇 십 년은 더 체득했을 노하우를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거기에다 전에 다니던 미용실보다 몇 만 원이나 저렴한 파마비용이면 일거양득, 일석이조, 대~박.
#2. 백화점에서 행운을 사다
옷이 날개라는 말, 중년 이상의 연령층에겐 더욱 솔깃할 테다. 자유자재한 몸매의 결점을 커버하여 나이 팍 들어보이지 않게, 세련되고 우아하게, 감추고 추슬러 올려줄 한 겹 날개 구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다. 층층을 돌아보던 백화점에서 어쩌다 ‘영에이지’ 매장의 그럴싸한 원피스를 찾아낸 건 행운이랄까. 두껍지 않은 모직천이 상체 쪽을 부드럽게 감싸줄 것 같고, 치마 부분은 풍성하면서 그다지 짧지 않은 것이 ‘올드’층의 내가 입어도 무난할 성싶다. 검정 바탕에 흰색과 붉은색의 체크무늬도 마음에 쏙 들어온다. 티셔츠처럼 안감이 들어 있지 않고 지퍼 대신 단추로 뒤트임을 처리하였지만 코트 안에 입기엔 ‘딱’이다.
“한번 입어보세요~ 잘 어울리시겠어요.”
귀엽게 생긴 판매원 아가씨가 민첩하게 적시타를 날려준다. 어쩜, 사이즈도 맞네. 정가도 엄청 싼 편인데 오늘부터 30프로 할인이란다. 망설일 필요 있으랴. 눈요기쇼핑 끝에 건져올린 옷 하나로 단박 기분이 날아오르는 이 여자, 참 알뜰한 건가 한심한 건가.
#3. 길거리 구두병원에서 낭만에 젖다
길거리에서 일어난 구두의 반란이 실로 난처하다. 멀쩡해 보이던 하이힐의 앞쪽 밑창이 벌어진 위급상황이다. 이런 일도 있다니. 119에 구조 요청을 할 수도 없는지라 어떻게든 구두병원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택시를 불러 타고 곧장 집으로 가는 수밖에. 망연자실 서 있다가 두 눈의 촉수를 한껏 높여 거리를 훑는다. 이쪽저쪽 아래위로 한참 동안의 탐색전에 눈이 시려갈 즈음, 차도 건너편 구두수선 집 하나가 레이더망에 포착된다. 구세주다. 가까스로 구두를 맡기고 방전된 몸을 간이의자에 앉히고 보니 하아! 뜻밖에도 풍광이 기막히다.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며 오가는 사람들과 씽씽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모두 한 컷의 풍경으로 어우러졌다. 길거리 자리치고 이만한 명당이 있으려나. 무릎 위에 펼쳤던 책을 도로 덮은 채, 구두수선을 하러 왔다는 생각도 잠시, 막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의 가을빛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저씨, 이만큼 분위기 있는 구두수선 집은 없겠어요! 나무그늘이 넓어 여름에도 시원할 테죠?”
“남향이라 겨울에도 춥지 않은걸요.”
구두 정형외과 전문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술에 여념이 없으시다. 수술대 위에 놓인 구두에서 퀴퀴하게 풍기는 냄새를 무슨 과일 향인 양 먹고 사는 구두병원 의사, 그의 거룩한 손이 능수능란하다. 수술이 끝나면 내 구두는 전보다 더 튼실한 희망에 차오르겠다. 우울하게 뭉개졌던 발도 다시 충전되겠지. 지금 수술이 한창인, 지하철 ○○역 출구 커다란 가로수 아래의 구두병원은 오늘 내게 감동적인 선물이다. 마음도 쉬고 풍경도 담아보는 낭만까지 안겨줄 줄이야.
#4. 과일 트럭에서 횡재를 낚다
과일 장수가 트럭으로 싣고 온 단감을 파는 중이다.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아놓은 삼천 원, 오천 원인 단감들이 생생하고 때깔도 좋다. 한입 베어 물면 단물이 듬뿍 나올 듯하다. 알이 굵은 것으로 수북한 오천 원짜리 무더기에 눈을 주었더니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 고르란다. 마주보이는 대형마트엔 ‘브랜드파워 14년 연속 1위’란 플래카드가 내걸렸지만 이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단감 열 개에 사천구백 원이었다. 이 정도면 최상급 수준으로 더는 고를 것도 없다.
“그냥 오천 원짜리로 담아주세요.”
과일 장수 아저씨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번진다. 내 수월한 결정이 고마운가 보다.
“자, 보세요. 전부 알이 굵고 좋지요? 우리는 물건 속이지 않아요.”
이럴 땐 가뿐하게 음미하는 거다. 한 소쿠리의 감을 비닐봉투에 거꾸로 털어 부으며 큰 것 한 개를 더 얹어주는 저 기분을, 오천 원어치의 횡재에 마음의 주름살이 좍 펴지는 이 느낌을 말이다. 삶과 행복? 그게 어디 지적이며 고상한 것인가.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고 소소한 것들임을 진즉 눈치 채지 않았던가. 광활한 세상에 한 개의 점에도 못 미칠 우리가 괜한 ‘무게 잡기’와 ‘폼 잡기’에서만 벗어나도….
도시의 하루가 저문다. 풍경속 사람 풍경도 천천히 저물어간다. 어느 순간엔 떠도는 바람이 “흔들려라” 부추기고, 어느 때는 가로수에 앉은 가을이 “물들라” 속삭이는 시간이 또 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제자리로 돌아온 자들이 밝히는 안온한 불빛이 아파트 창마다 새어 나올 것이다. 어제 그저께처럼, 내일 모레처럼.(염귀순, <컷, 말하는 도시>,에세이문학 2015 겨울,275-278면)
이 글은 ‘도시의 하루’를 주요 제재로 삼는다. 작가가 체험하면서 관찰하고 파악한 도시의 하루를 여러 상황(네 컷의 장면)으로 병렬하여 구성한다. 이 병렬한 각 화제는 서로 뚜렷한 논리적 연결을 찾기 어렵다. 주요 화제인 도시의 다채로운 양태에 대한 생각을 병렬로 제시하며 글을 펼친다. 각 화제 사이에도 상하 관계나 종속적인 연관은 없다. 도시에서 하루 동안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별개의 장면이라서 작가가 이처럼 관련지어 엮어내기 전에는 상관성이 없는 각개의 도시 풍경일 뿐이다. 작가는 이 각각 장면의 상관성이 부족한 것을 확실하게 분리하여 번호까지 붙여 별개 상황임을 시각화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도시의 여러 흐름에 따라서 그 안에 사는 사람도 도시의 한 풍경으로 자리 잡고, 함께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일상을 꾸린다는 다소 소박한 심사이다. 이처럼 병렬을 시각적으로 꼭 드러내야 할 필요는 없다. 한 주제로 모아질 수 있는 제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음 예문에서 이 점을 확인한다.
3. 문의 구성 단계
선정한 제재 내용의 진행 단계별로 글을 구성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3단 구성, 4단 구성, 5단 구성이 있다. 3단 구성은 3개의 단계를 거치며 글을 구성하는 것이고, 4단계 구성은 4단계, 5단계 구성은 5단계를 따른다. 각 단계의 성격은 다루는 글과 화제에 따라 다르지만 단계별로 연결하여 발전시키며 진행의 순차를 가진다는 점에서 같다. 글이 단계별 진행을 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단계가 수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 뿐이다. 당연히 글이 다루는 제재의 분량과 내용에 따라 필자가 선택해 활용할 나름이다.
이처럼 단계별로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 체계와 인지 과정과 관련된다. 사물이나 어떠한 일상의 삶과 그보다 광범위한 세상의 만물을 인지하고 그것을 사고하는 데에는 일정한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이다. 자연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상황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이해하고 수용하고 세상을 파악하며 살아간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을 주요 제재로 활용하는 수필에선 그대로 이 단계를 쫓아서 구성하기 마련이다. 이 점은 글도 역시 사람이 인지하는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사고 체계와 상관시키면 3단계 구성은 3단 사고와, 4단계 구성은 4단 사고와 5단계 구성은 5단 사고와 관련한다. 이를 글의 구성과 사고 체계와 관련시켜 알아보면, 글도 결국 인간의 사고를 바탕으로 하며 그것을 정돈하고 문자화하여 인지 가능한 상태로 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고와 구성이 긴밀하게 연결이 되는 셈이다.
한 편의 글을 몇 개 문단으로 구성하느냐는 글쓴이의 사고 전개 방식과 관련이 깊다. 단순하고 일원적인 사고와 심화되고 다차원적인 사유 체계의 차이를 나타낸다. 문의 구성은 일차적으로 필자의 사고 체계에 관련되나 선정한 제재 자체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2단 사고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사고방식으로, 동양이 음양(陰陽)의 대구식(對句式) 사고라면 서양은 ‘yes-no’ 또는 ‘+와 -’의 상반적 사고에 맞는 체계이다. 이 체계에 의한 2단 구성은 사고 진행 단계의 하나이지 완결된 것은 아니다. 문단이나 글의 구성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를 응용하여 문단을 배열할 때 서로 2개 문단씩 호응하는 짝을 지어 글을 구성하면 보다 안정적이어서 좋다.
3단 사고는 하나의 정리된 생각을 완결하는 기본 구성이다. 동양의 태극적(太極的)사고(음양을 포괄하여 하나로 융합하는 사고)와 서양의 ‘정-반-합’으로 완성되는 변증법적 사고에 맞는 구성이다. 이 구성의 최소 문단 수는 3개이다. 어떠한 글도 3문장과 3문단(3개의 독립적인 의미) 이상이 되지 않으면 완결된 글로 볼 수 없다는 논리적 근거이다.
4단 사고는 사고 체계의 발전과 구성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구성의 최소 문단 수는 4개이나 보다 안정을 꾀하려면 6개 이상의 문단 수를 갖춰야 한다. 즉 1-2-2-1(단계별 문단 수)의 배치가 좋다. 제재의 성격과 주제에 따라 이를 기본으로 얼마든지 응용 변화시킬 수 있다.
5단 사고는 대략적으로 사고 체계가 서양은 3단, 동양은 4단인데, 동서양을 아우르는 인도는 5단인데 그 점이 특이하다. 문학 갈래의 종합 양식인 희곡의 보편적 구성인데, 이는 체험한 특수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의 굴곡과 갈등을 내포한 서사 수필과 잘 어울린다. 글의 안정성을 위해서 5단 구성으로 글을 쓴다 해도 문단은 최소한 6개 이상이 바람직하다.
수필 구성에서 명심할 것은 내용과 외형이 안정적이고 균형감을 얻기 위해서는 유선형을 지향해야 하는 점이다. 즉 글의 서두와 결미가 본문보다 분량이 적어야 한다. 코스요리에서 전채와 디저트가 양이 적고 중심 요리가 많은 것과 비견할 만하다. 타원형 계란과 유선형 물고기처럼 내용(사고와 감정)과 형태(문단)를 구성해야 자연스럽다. 글을 구상하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인간의 의도적 사고 작용이고 관련 활동이므로 자연 세계와 여타의 일상과 그 근본 원리는 상통한다.
< 꿈속의 정원 - 함순자>
1. 손바닥 두 개로 가리면 여분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채마밭에서 봄에 심은 강낭콩을 거두고 있다. 제법 작은 자루를 채운다. 밭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심은 백일홍, 봉숭아가 한창 제멋을 내면서 피고 있다.
2. 겨울 밑으로 봄기운이 돌면 서둘러 잠자고 있는 흙을 깨운다. 가운데 토막을 잘라 강낭콩을 심어놓고 담처럼 둘레에는 꽃씨를 뿌렸었다. 작은 이 밭이 나의 목마름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이 되어준다. 정원을 가꾸려던 꿈을 접은 후에 얻은 것이라 갈증을 해소하기엔 어림도 없는 것이지만 흙을 만지고 꽃을 가꾸는 재미 하나로 위로를 삼는다. 내가 무슨 수로 넓은 땅을 차지하겠는가. 꽃처럼 밝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3. 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알프스 몽블랑으로 가는 길에 레만 호수에 들렀을 때다. 일행들은 호숫가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쁠 때 나는 아름다운 정원 앞에 서있었다. 오색의 튤립이 융단처럼 피어있는 성당, 넓은 뜰을 채우고 있는 이름 모를 꽃들에 마음이 팔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 시름을 놓고 꽃들을 보고 있었다.
4. 넓은 화단 뒤편에서 웃음 짓고 서있는 수녀님, 아니 그도 하얀 꽃으로 보였다. 정원을 엿보는 것은 실례가 된 듯하여 “원더풀 플라워!”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찾는 이가 없어 적적했던 시간이었을까 수녀님은 내 곁으로 다가와 어디에서 왔는가 물었다. 한국이라는 대답에 성당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때 수녀님과 찍은 사진 속의 정원은 내가 갖고 싶은 지울 수 없는 꿈의 정원이 되었다.
5. 제네바에 레만 호수가 있으면 나에게도 일산호수가 있었다. 주저함 없이 우리나라 토질에 적합하고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꽃, 그리고 유기농 채소를 가꾸면서 남은 생을 꽃과 자연 속에서 살고 싶었다.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서울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곳 일산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다.
6. 호수가 바라보이는 곳에 눈이 번쩍 뜨이는 반듯하게 사각이 진 터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진 통장의 잔고만으로도 무리 없이 매입할 수 있는 적당한 값이었다. 이사 오던 첫해의 400평 땅은 서울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일산에서는 고액의 투자도 아니고 가진 자들의 눈에는 쇠푼도 안 되는 적은 액수였다. 탐이 나서 눈뜨면 그곳으로 달려가서 판판한 터를 보며 설계도를 그렸고 잠을 설쳐가며 꿈의 정원을 만들었다.
7. 출입구에 들어서면 안쪽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단층집을 짓는다. 집은 크지 않아도 되고 아담할수록 좋다. 방 하나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황토벽을 쌓고 한지로 도배를 하리라. 마루 한편에는 페치카를 만들어 겨울이면 하얀 연기가 지붕 위로 피어오르게 하고, 난로 안에서는 고구마가 익어가고 난로 위에는 구수한 보리차가 끓고 있다. 여름이면 테라스 그늘 밑에 평상을 깔고 대문에는 무지개 아치를 세워 하얀 장미를 올릴 것이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닭장도 만들고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리는 장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리라. 꿈은 혼자만 누리는 자유였고 덧없이 흐르는 바람이었다.
8. 바른편은 화초를 심고 왼편에는 유실수와 채소를 심을 것이고 꽃들도 계절 따라 키대로 배열을 할 것이다. 들꽃 풀꽃 자연에서 얻어온 것들을 앞자리에 앉히고 산내음 들내음을 맡으며 봄이면 목련 철쭉이 피고 여름이면 탐스러운 수국과 찔레꽃, 보랏빛 매발톱 꽃이 얼마나 예쁠까. 봉숭아 채송화 접시꽃이 벌을 불러온다. 가을이면 국화와 백일홍 붉은 샐비어, 겨울이면 눈꽃 속에 핀 붉은 포인세티아로 성탄을 장식하리라. 대문 곁에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적당한 주목 한 그루 심어 오색등을 매달아 놓고 <징글벨> 음악을 듣는다.
9. 대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널찍한 디딤돌을 징검다리처럼 놓아주면 돌과 돌 사이에는 생명력 질긴 민들레와 냉이 홀씨가 날아와 꽃을 피워주겠지. 길 양옆으로 눈을 마주치는 푸새들의 노래, 향기 나는 나무와 꽃들의 대화, 내 손으로 키워낸 식구 같은 분신들을 만지면서 아침이슬에 손을 적시며 살아갈 행복한 날들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허망한 꿈이 아닌 가능한 소망이었다.
10. 집 앞을 지나는 이들이 꽃구경 오면 테라스 그늘에 앉아 차를 마시며 꽃 얘기도 하고 차보다 더 짙은 정을 나누리라. 감이 익으면 항아리에 쟁여두고 찬 겨울에 손님이 오면 대접하리라. 채소가 자라는 대로 이웃과 나누며 어머니가 하던 대로 호박오가리, 무말랭이도 볕이 좋은 날 채반에 담아 말리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게 고맙다는 말도 전하리라. 그 정원의 꿈은 끝없이 이어졌다.
11. 땅을 계약하는 자리에 생각지도 못했는데 남편이 들어섰다. “시기와 질투 오해와 미움, 말도 많은 세상에서 물 위를 걸어오듯 여기까지 온 것을 알고 있다면 이건 아니요. 흠 없이 걸어온 길에 얼룩진 자국을 남길까 두렵다. 이번 일만은 포기하면 안 되겠는가.” 집안일에 간섭하지 않던 남편이 작심하고 하는 말이었다. 뜻을 새겨보니 남의 눈에는 부동산을 투기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내 의견에 박수치고 응원하던 남편의 한 마디는 천근처럼 무거웠다. 내가 계획한 것이 어설픈 잡도리가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남편의 뜻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12.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프다고 하더니 진실로 그렇다. 수없이 많은 날이 지나가고 남의 차지가 되어버린 그 땅을 볼 적마다 목마른 가을 수풀처럼 내 마음은 허우룩하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꿈속의 정원에는 크고 작은 꽃들이 피고 지는가 하면 과일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에세이문학』,2016년 가을, 83-86면.)
예문은 3단계 구성이다. 문단 1,2는 서두부로 1 단계이고, 문단 3~10까지 본문으로 2단계이며, 문단 11,12는 결미부로 3단계로 짜여 있다. 1단계에서 작가는 작은 채마밭에서 채소와 꽃을 가꾸는 재미로 산다. 2단계에서는 한 때 가질 수도 있었던 아름다운 정원을 회상한다. 3단계에서는 꿈으로만 끝난 땅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고 마음을 다독인다.
이 3단 구성은 기-서-결의 과정이든 열고 풀고 맺는 과정이든 3단계의 경로를 지닌다. 수필의 구성으로서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방식이다. 문학 수필이 아닌 경우에 일반 산문에서도 주로 애용하는 구성 방식이다. 그만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서 보편화된 것으로 수필에서도 작가들이 즐겨 이용한다. 이 얼마간 밋밋한 문의 구성은 복잡한 심리 갈등이나 다기한 성격의 사건 서술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이는 모든 글의 기본적 구성 방법이므로 글을 쓰려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익혀두는 게 좋다.
< 가다가 쉰다 –유병근 >
1. 등산길에는 이런저런 널따란 바위도 있다. 산을 타는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허리를 펼 수 있는 곳이다. 너럭바위와 방석처럼 깔린 풀 덩굴은 헐떡거리며 오르는 산길에 쉬어가라는 유혹의 손길처럼 다정하다.
2. 자갈돌을 비집고 호리호리 몸 관리를 잘한 풀잎이 발끝에 솟아 있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풀은 제 몸무게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나 되는 돌을 머리로 떠밀고 당당하게 세상을 찾아 솟아올랐다. 손톱발톱이 뭉개지도록 땅을 파헤친 풀은 채탄광부 같은 삽과 곡괭이를 몸에 차고 있는 것 같다.
3. 그 힘을 보고 있는데 ‘눈뜬 노루귀는 미처 눈뜨지 않는 질경이의 목덜미가 자꾸 어스레하다.’는 문자가 휴대전화에 뜬다. 이 구절이 어디서 났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쓴 구절을 모르고 있다니 나는 내 글에 다소 무심한 편이다. 그걸 깨우치라고 그는 일부러 문자로 보내주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런 구절을 쓴 적이 있기는 있다. 그는 내 졸작을 읽고 있었던 셈이다. 내 기억에서 사라진 구절을 들춘 그에게 날이 맑고 깨끗하다는 문자라도 띄울까 싶다.
4. 조금 전에 떠오른 생각의 갈래를 찾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그런데 자꾸 헷갈린다. 덜 삭은 것을 끄집어내려니 그런 것 같다. 섣불리 끄집어내면 생각의 팔삭둥이가 될지 모른다. 부드럽고 연한 풀줄기가 돌을 머리로 떠밀고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니 생각에도 세계를 떠밀어 꿰차는 힘이 있어야 함을 곰곰 깨닫게 된다. 한갓 풀줄기가 갖는 힘에도 미치지 못하다니, 나는 다시 발아래를 굽어본다.
5. 아무 주변머리도 없는 싱거운 발상에 곱표를 쳐야겠다. 비슷한 것만 생각하고 비슷한 문장만 끼적이고 있으니 참신한 발상을 기대하기는 아주 글렀다. 나는 지나치게 안이하다. 나는 지나치게 술에 술탄 듯 밋밋하다. 좀 그럴싸한 맛보기는 없을까 두리번거린다. 길 저쪽에 누가 앉아 있는 허우대가 보인다. 그도 고갯길이 힘에 부쳤나보다. 가만 보니 사람 덩치를 닮은 바윗덩어리다. 바위를 사람으로 착각하다니 한심한 눈이다. 한심한 눈도 혹 쓸모가 있을 것이라며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비비적거린다.
6. 생각의 목젖에 무엇이 걸린 듯 텁텁한 느낌이 든다. 점심때 먹은 함흥냉면 가닥이 얌전히 걸렸을까, 냉면만 먹고는 숨이 차지 않아 연거푸 먹은 왕만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전혀 아니란 짐작에 끌린다. 그걸 곰곰 찍어내느라 너럭바위로 자리를 옮기는데 저쪽 쪽빛하늘의 깊이가 무서울 만큼 아득해 보인다. 쪽빛 속에 또 다른 쪽빛이 깔려 있다. 눈을 이쪽으로 돌리면 이쪽 하늘 또한 쪽빛이 삼삼하다. 쪽빛에 눈을 팔며 쪽빛과 친하기로 마음먹는다. 몸과 마음이 쪽빛으로 물드는 순간, 야호를 연발하며 고함을 쳐도 좋을 것 같은 쪽빛하늘이 눈부시다.
7. 목에 걸린 것은 아직 풀릴 기미가 없다. 그걸 찾아 골똘히 생각하는데 무엇인지는 모르나 마음을 자꾸 간질이는 것이 있다. 여간 잡히지 않는 정체다. 어떤 이웃은 몸이 나른하게 고달파 병원에서 이런저런 까다로운 검사를 지치도록 받았다. 그러나 무엇이 나른하게 하는지 뚜렷한 증세는 나오지 않았다. 실은 나도 비슷한 증세로 골골 앓는다. 목에 걸린 것은 생각의 가시란 진단을 끌어낸다. 가시 속에는 쓰고자 하는 무엇이 까칠까칠하게 몸을 버석거리고 있지 않겠는가.
8. 계절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눈치 채고 나뭇잎을 물들이거나 사람이 먹기 좋게 열매에 달콤한 맛을 집어넣는다. 가만히 침묵하고 지내던 나무의 침묵은 새 계절에 안성맞춤인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재치를 갖는 나무를 배우는 것이 세상을 참신하게 보고 익히는 일이지 싶다. 그런 점 나무는 때로 의미 깊은 상상력 교과서다. 어릴 때 책상 위에 교과서를 바로 세우고 또박또박 글을 읽었다. 어느새 나는 계절의 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학생이다.
9. 사람들은 대개 스마트폰의 창을 통하여 일찍이 눈뜬 계절 소식을 보고 듣는다. 누가 그걸 찍어 퍼뜨리는 데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소식은 세계를 마구잡이로 휘젓고 관통한다. 빛의 속도를 때려잡을 것 같은 디지털세상은 때로 두렵다.
10. 시퍼런 잎이 어느새 누렇게 물드는 나뭇잎을 본다. 그걸 스마트폰이 보여주고 또 어디론가 부지런히 퍼 나른다. 디지털시대의 대화법은 침묵 속에서 침묵의 틈새를 비집느라 사통팔달 손가락이 바쁘다. 어느 날은 지하철 환승역에서 젊은이들이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환승할 지하철이 막 도착하는 시간이었다. 지하철 도착 시간을 미리 읽은 젊은이들은 그런 점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스마트폰에서 읽는다.
11. 산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여름에서 가을로 환승하려는 계절의 환승 시간을 알아맞히는 일이겠다. 그 지혜를 굴리는 법이나마 익히고자 고개를 여기저기돌리고 있다.
12.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소리가 들린다. 단음절이다. 가파른 산길을 타는 나도 단음절걸음걸이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쉰다.(『에세이문학』 2015 겨울,46-49면.)
이 글의 4단계 구성을 살펴보자. 문단 1과 2는 제1단계의 발단부이고, 문단 3부터 8까지는 제2단계의 전개부이며, 문단 9와 10은 제3단계는 절정부이고 문단 11과 12는 4단계의 결말부이다. 서두인 ‘기’와 ‘전’, ‘결’의 결미는 모두 2문단이고 글의 중심부인 본문 ‘승’은 6개 문단이라 기-승-전-결의 형상이 계란의 유선형을 이루어 이상적인 구성을 보인다.
이를 각 문단의 진행 단계에 따라 구체적 핵심어(밑줄 주목)으로 세밀하게 따져본다. 1-2문단의 소주제는 ‘등산길의 널따란 바위’와 ‘발끝의 풀잎’이다. 작가는 등산길에 나서서 쉬어갈 수 있는 바위와 당당한 생명력의 풀을 만나면서 글을 연다. 이 집필 동기가 1단계의 ‘기’ 부분이다. 글은 3문단에서 ‘휴대전화에 뜨는 문자’로 이어지며 생각을 펼치면서 한 발 한발 산에 오르며 여러 풍경과 만나고, 그와 연관한 생각이 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승’의 과정이 8문단까지 이어진다.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오며 작가는 ‘계절의 갈피를 넘기는 학생’에 도달한다. 이 등산길 사색의 종점에서 ‘사람들’과 ‘디지털 세상’으로 확장하여 전환시킨다. 사고의 범위를 확대하므로 전환이고, 이 글의 핵심 내용이라서 절정이기도 하다. 끝의 두 문단에서 집필 계기였던 ‘산길’로 귀환하여 마무리에 나선다. 그것은 산길에서의 배움인데, 젊은이들의 디지털 대화법과 달리 느리기만한 ‘단음절’이라 힘들어도 ‘가다가 쉰다.’일망정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 글이 앞의 3단계 구성과 다른 점은 3단계의 전환부에 있고, 이것이 중요한 구성상의 차이다. 대체로 이 전환의 3단계에서 작가들은 생각을 확장하고 심화시켜 진전된 결말의 국면으로 이끈다. 이 과정은 설득력을 높이고 변화를 거치면서 공감의 폭 확대와 감동의 질을 상승시키는 기능을 맡는다. 따라서 3단계보다 발전된 구성 방식으로 볼 수 있겠다.
할아버지의 가을 그리고 겨울
김형구
1. 내가 살면서 처음 만난 힘 있는 남자는 할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계셨지만 당시 내 눈에는 할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한 자식일 뿐이었다. 난 할아버지의 인생에서 보자면 여름이 끝날 즈음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봄날은 당연히 볼 수 없었고 여름도 빛바랜 결혼사진 한 장으로 살짝 훔쳐봤을 뿐이다. 결국 내가 주로 본 것은 할아버지의 가을이었고 좀 더 크면서는 겨울도 목격할 수 있었다.
2. 어릴 적 고향집은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사랑채가 붙어있는 ‘ㅁ’자형 한옥이었다. 할아버지는 사랑채의 주인이셨다. 집 안을 들고 나는 사람들은 사랑채 댓돌부터 살피고 볼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면 고양이 걸음에 목소리부터 낮췄다. 시끄러우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른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던 시절이었다.
3. 자그마한 키, 농사일로 검게 탄 얼굴, 짧게 자른 머리에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는 담배를 즐기셨다. 겨울철 사랑방에는 질화로와 놋쇠재떨이 그리고 곰방대와 담배쌈지가 놓여있었다. 화로에는 부젓가락이 있어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요긴하게 쓰였다.
4. 한복 차림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댄 채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셨는데 매운 연기 탓인지 늘 눈을 지그시 감고 계셨다. 물부리를 입에 물고 들숨을 쉬면 대통의 담배가 빨갛게 탔다. 천천히 날숨을 뱉어내면 할아버지의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온갖 근심과 회한을 연기로 날려 보내시는 것 같았다. 명상에 든 사람처럼 반듯한 모습에는 가장의 위엄이 배어있었다.
5. 매미소리가 잦아들자 시끄럽게 우짖던 꾀꼬리는 늘어난 식구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숲은 조용해졌고 가끔 박새가 눈치 없는 소리를 만들 뿐이었다. 산이 가을 기미를 챘나 싶었는데 어느새 나무는 울창했던 이파리를 맥없이 떨어트리고 있었다.
6.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촌에선 땔감을 장만하는 것이 큰 일과였다. 밥을 짓거나 추위를 견디려면 아궁이에 불 때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산은 일찌감치 벌거숭이가 되어서 십여 리나 떨어진 골 깊은 ‘문수산’까지 나무하러 다녀야만 했다. 아침 일찍 낫을 두 자루나 갈아 놓은 할아버지도 동네 분들과 함께 나무하러 가셨다.
7. 해 질 녘이면 멀리 ‘회나무재’에 지게 위에 나무를 가득 지고 돌아오는 나무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보이다가 그 수가 차츰 많아졌다. 출렁출렁 움직이는 나뭇짐은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말 탄 병사처럼 보였다. 가끔 나무꾼들 뒤로 붉은 노을이 드리우기도 했는데 놀다가도 난 이 모습을 보면 집으로 뛰어가 “할아부지 나무해 가지고 오셔요.” 하고 소리쳤다. 할머니께서는 목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마중 보냈다. 하지만 지게를 지고 온 것은 아버지가 아니고 할아버지셨다.
8. 작은 체구였지만 할아버지는 장사소리를 들을 만큼 힘이 좋았다. 남들은 지게에 나무를 세 동이 정도 얹어 오거나 많다 해도 뒤에 한 동이를 덧붙이는 정도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세 동이 뒤에 보통 두 동이를 더 달고 오셨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목수 일을 해서 농사일에 서툴렀던 아버지는 지게를 넘겨받지 못하셨을 게다. 이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의 인생은 여름이었다.
9. 세월이 흘러자식들이 모두 출가를 했다. 일밖에 모르고 배움이 적었던 할아버지는 크고 작은 일에서 할머니에게 밀려나셨다. 이장님이나 동네 어른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이치가 바르고 셈이 빠르신 할머니를 찾았다. 가끔 할아버지가 계시면 예의상 먼저 말씀을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이내 할머니와 상의할 것을 권하곤 하셨다. 그 뒤론 할머니가 집안의 대표가 되셨다.
10. 할아버지는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그나마 체면을 유지하셨다. 논두렁 꼴 베는 실력은 마을에서 으뜸이셨다. 꼴 베어낸 논두렁은 이발한 듯 정갈하고 깔끔해 칭찬이 자자했다. 농사일에서는 아직도 가장의 권위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할아버지의 힘은 약해졌다. 아들, 딸, 며느리들도 할머니에게 의지했다. 모든 문제는 할머니 손에서 해결됐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에게 가을이 오고 있었다.
11. 집에서 조용히 일만 하시던 할아버지는 동네에 잔치가 있거나 초상이 나면 당신 존재의 상실감을 술로 푸셨다. 잔치마당에선 춤을 추곤 하셨는데 좌중을 휘어잡는 춤 솜씨는 일품이셨다. 멈칫 선 듯 싶다가도 이내 이어지는 춤사위는 그 흐름이 여울물처럼 경망스럽지 않고 유장하여 강물 같았다. 어깨를 으쓱하고 태극문처럼 양팔을 상하좌우로 접어 펴며 허공에 툭툭 던지는 몸짓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가끔 신음하는 듯 낮은 소리를 춤사위에 얹곤 하셨는데 속울음을 우는 듯 흐느끼는 듯 슬픔이 배어있었다. 장고며 북장단에 맞춰 이어지던 춤사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술 사발과 함께 무너지고 할아버지는 멍석에 쓰러져 주무셨다. 할아버지의 늦가을은 그렇게 와 있었다.
12. 취한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 일도 점점 힘들어 졌다. 취하시는 정도가 심해 어린 나로서는 감당키 어려웠다. 아버지나 식구들이 나서야 했다. 집에 와서는 주무시지 않고 손자들을 불러 앉혀 놓고 말씀이 많으셨다. 주로 조상님 이야기였다. 조상 이야기로 가장의 힘을 보여주고 싶으셨을까. 할아버지의 말씀은 점점 길어졌다. 하지만 긴 이야기에 진저리를 내던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말씀이 적어지셨다. 그러고는 먼 산을 바라보거나 마당 옆 커다란 참나무를 올려다보며 눈을 훔치곤 하셨는데 어린 나는 눈병이 나신 줄 알았다. 서서히 할아버지의 겨울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식구들이 할아버지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채에 손님이라도 들면 술상도 반듯하게 차려냈고 자식들도 깍듯했다.
13. 참나무도 은행나무도 아까시나무도 모두 알몸이 되었다. 숲은 회갈색 얼굴을 한 채 차갑게 굳어있었다. 전깃줄은 밤이면 기괴한 소리로 울어댔다. 윗마을 저수지는 쩡하고 얼음 터지는 소리를 토해냈다. 잠을 잘 때면 웅크린 몸이 더 오그라들었다. 겨울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잦았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14. 작은아버지는 읍내 정류장에서 가게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장날이면 이발을 할 겸 읍내에 가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술을 자셨다. 대취하면 작은 아들네 가게에서 주무셨다. 그럴 때면 작은아버지는 꼭 동네로 가는 사람에게 ‘아버님이 아들네서 주무시고 간다.’는 기별을 띄웠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날은기별도 없고 늦은 시간인데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낮에 내리던 싸락눈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15.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짧은 해에 날이 저물어 어느새 밤이 되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식구들은 초조했다. 고모와 내가 나가 보았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동구 밖에 멀리 사람이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할아버지 걸음새는 아니었다. 막차에서 내려 동네로 돌아오는 윗마을 아저씨였다. 여쭤보니 기별도 없었고 가게에는 작은아버지 혼자였단다. 그렇다면 술을 드시고 돌아오는 길에 실종되신 게 분명했다. 큰일이었다. 날은 춥고 여전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16. 식구들이 모두 나섰다. 나도 할아버지를 부르며 읍내 길을 되짚어 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 만에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길, 깊은 두렁에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신 것을 아버지가 발견했다. 온통 눈 세상이라 길을 잘못 짚어 빠지신 것이었다. 몇 차례 나오려고 애를 쓰셨겠지만 술기운에 허사였다. 입고 계신 흰 두루마기가 눈처럼 보였다. 길 지나던 사람 눈에 띄지 않은 이유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업고 집으로 내달았다. 사랑채에 이불을 펴고몸을 주무르고 더운 물로 얼굴과 발을 씻겨 드렸다.
17. 이 일이 있고 나서 할아버지는 그나마 남아있던 가장의 권위가 더 손상되고 힘을 잃으셨지 싶다. 수척해진 몸에 더욱 말수가 적어지셨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그해 겨울은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다. 그리고 몇 해 뒤 물꼬를 정리하다 쓰러져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 결국 가장의 마지막 자존심을 농사일로 지키셨던 것이다.
18. 지난번 할아버지 기제사 때였다. 고모를 비롯해 식구들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만 하다 돌아가셨어.”
“참 선하게 사셨는데.”
돌아가신 지 어언 사십여 년, 할아버지의 겨울은 남은 가족에게 그리움을 남겼다. 남자는 일로 가족을 사랑한다. 할아버지는 진정 힘 있는 가장이셨다. 오늘따라 먼 산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 훔치시던 할아버지가 마냥 그립다.(『에세이문학』,2016년 겨울,18-24면.)
이 글은 5단계 구성이다. 1과 2 두 문단은 1단계로 글의 서두이자 사연의 발단이고, 3문단부터 8문단까지가 구체적 사연을 풀어내는 2단계의 전개부이며, 9문단부터 12문단까지는 3단계의 위기 부분으로 이 글의 주 인물에게 닥친 난관의 실체이다. 13문단부터 16문단이 핵심 내용이 가장 고조되는 절정 부분이고 작가에겐 마음에 오랜 동안 담아두었던 아픈 사연이다. 17, 18문단은 5단계로 결말부이자 작가가 이 글을 쓰게 한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다. 특히 마지막 문단에서 소설과 수필의 차이가 드러난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이 5단계 구성은 서사의 대표인 소설에서 흔히 채택하는 방식이다.
각 문단별로 핵심어에 밑줄을 긋고 좀 더 찬찬히 단계별 구성을 훑어본다. 사연의 발단은 할아버지의 가을과 겨울을 목격한 작가 화자에겐 ‘힘 있는 남자’로 판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얼핏 이 시대의 문제일 수도 있는 주제의 설정이 서두(1-2문단)에 등장하는 것은 수필 창작의 기본 문법에 충실한 결과이다. 이어지는 본문의 첫 단계는 앞에 이미 밝혔듯이 할아버지의 가을과 겨울의 사연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살린 이 부분은 할아버지의 여름이라 추정한다(3-8문단).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의 서술, 할아버지의 힘을 목격했던 시간이어서 분량으로도 우위를 차지한다. 힘이 쇠잔해 가는 할아버지의 가을은 주인공이 위기에 봉착하는 기간이다. 장사이던 할아버지이지만 가장의 권한은 할머니에게 전이되어 집 안팎에선 겨우 체면유지만 할 정도로 힘이 빠졌다. 위기인 이유다(9-12문단). ‘ 그해 겨울’ 주인공 힘의 몰락은 이 작품의 절정이다. 눈 내린 날의 취기는 실족과 실종으로 이어지고 돌아와 사랑채에 뉘어진 할아버지(13-16문단)는 힘의 부재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사망과 자손들의 고인에 대한 회상으로 수필 서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수필은 허구 서사와 달리 사실 체험 서사이지만 소설처럼 긴 사연일 경우 이처럼 5단계 구성을 사용할 밖에 없다. 하지만 구성 방식은 동일할지라도 이것을 사용하는 수필가는 접근 양태가 다르다. 즉 수필작가는 5단계로 펼친 사건에 대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회를 반드시 담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글을 집필한 동기이기에 그렇다. 만약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연을 서사로만 마무리하면 바로 소설 구성과 같아진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마냥 그립다’가 빠지고, 그 앞 ‘할아버지는 진정 힘 있는 가장이셨다’에서 글을 맺었다면 이는 소설로 볼 수 있다. 일인칭 화자 시점의 한 인물의 일대기와 그것의 의미 탐색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작가의 개인적 소회를 담아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비로소 수필로 전환한다.
4. 원고 분량과 문단 배열
수필의 일반적 분량은 2,000(200매 10장)자에서 3,000(200매 15장)자 정도이다. 이 분량의 적정 문단 수는 8-12개이다. 문단 수가 적으면 독자가 글을 읽는데 지루하고 지면상 시각적으로 답답하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긴장해야 하고 수용하거나 공감하기 어렵다. 떡을 큰 토막 채 먹어야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또한 문단 수가 지나치게 많다면 이와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씹을 것도 별로 없는데 손과 입만 번잡스럽고 혼란하기만 하다. 따라서 필자는 글의 내용을 적절한 크기로 잘라서 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1,000자 수필은 대학 입시 논술의 일반적 분량인데, 4개에서 최대 6개 정도가 적당한 문단 수이다. 2,000자 수필은 신문 칼럼의 보편적 분량으로, 8개에서 최대 10개가 적정하다. 일반 문학잡지의 수필은 2,500자에서 3,000자 분량을 요구하는데, 10개에서 12개의 문단이 맞춤하다.
분량이 주어진 글에서 문단의 수효와 함께 고려할 게 있다. 그것은 문단의 호응하는 짝을 맞추어 짝수 문단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구성 단계는 3-5단임을 이미 공부했고, 이 단계별 문단이 짝수로 이루어야 글의 안정된 구조를 갖는다고 2단 사고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 이유를 조금 상세하게 알아본다.
글을 계획해서 쓰지 않고 써지는 대로 쓰거나 분량에 이를 때까지 내용을 채우는 식의 구성,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 일정한 토지에 집을 짓는다고 가정해보면 방을 몇 개로 할 것인가를 사전에 계획하듯 문단의 수효를 정해야 한다. 글은 인간의 인위적인 생산물이다. 사고와 감정을 담는 용기와 비슷하지만 그릇과 담길 내용물이 유기적인 관계라는 점이 그릇과 다르다.
짝수 문단 구성은 그 사고와 감정도 짝으로 어울릴 것을 요구한다. 짝수와 사고의 동행은 오래된 문학의 전통적 방식이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발견하는 시의 구성 방식인 병행성(parallelism), 한시의 대구對句형식, 절구와 율시의 4행과 8행 구조, 김소월 ‘山有花산유화’의 4행 4연 구조, 서양 건축물에서 발견하는 대칭구조 역시 모두 짝수 구성인 셈이다. 건물과 수레(자동차)바퀴의 대칭 짝수 구조가 물리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외발 자전거와 삼륜차의 불안정성을 생각하면, 짝수 구조의 문단은 사고와 감정 표현의 안정 역시 보장한다. 물론 그릇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고의 전개와 표현도 짝지을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인위적인 형상물(건물, 수레, 시)은 자연의 구조를 모방한다. 동식물의 생명체는 암수의 2원구조로 짝을 이룬다. 이 2배수의 확장으로 화물차의 바퀴가 늘어나듯 인간의 체험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수필의 문단 구성 역시 짝수 배열이 바람직하다. 다음 예문에서 확인하자.
< 바나나의 추억/한현우> 아내는 바나나를 냉장고에 넣어둔다. 열대 과일인 바나나를 냉장고에 넣어 좋을 것 없다고 하는데도 시원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바나나를 시원하게 먹는다는 게 겨울에 오렌지 주스 데워 먹는 것 같아서 이상한데, 아내도 그렇고 아이도 바나나를 시원하게 먹는 게 좋다고 한다. 시원한 바나나를 먹어보니 나쁘지 않기도 하다.
1980년대만 해도 바나나는 수입 제한 품목이어서 엄청나게 비쌌다. 요즘 물가로 치면 한 개(한 뭉치가 아니다)에 1만원 정도 했던 것 같다. 그때 바나나는 추석 선물 세트 또는 차례상에만 올라갈 만큼 귀했다. 그 당시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집을 내놓은 사람들에게 “거실에 바나나를 놓아두라”고 조언했다는데,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바나나를 보면 ‘이 집에 살면서 돈 많이 벌어서 나가는 모양이다’하고 생각해 거래가 잘 풀린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1980년대 말 외국 배낭여행을 했던 한 선배는 돈을 아끼려고 여행 두 달간 바나나로만 연명했다. 처음에는 그 귀한 바나나를 싼값에 잔뜩 먹을 수 있는 것을 뿌듯하게 여겼으나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지금까지도 바나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해양대에 다녔던 친구는 4학년 때 실습선을 타고 동남아에 갔던 일을 얘기했었다. 길가에 바나나를 잔뜩 쌓아놓고 팔기에 우리 돈 500원 정도를 건넸더니 바나나 나무 반 그루를 줬다고 했다. 그렇게 산 바나나 500원어치를 두 명이 어깨에 메고 갔다는 그의 말은 과장이겠지만, 바나나가 한국에서 푸아그라나 캐비아 같은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30년간 50억병 이상 팔렸다는 바나나맛 우유에는 바나나 과즙이 없다. 바나나향 합성착향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름을 ‘바나나 우유’라고 짓지 못했다. 그때 바나나 과즙을 넣은 우유를 만들기엔 원가가 너무 비쌌을 것이다.
냉장고에 있던 바나나 몇 개를 배낭에 쑤셔넣고 자전거를 타다가 허기질 때 먹었다. 맛도 향도 못 느끼고 그저 탄수화물이라 생각하고 먹었다. 축 늘어진 바나나 껍질이 문득 서글퍼 보였다.(조선일보, 2016,9,10. B3)
예문은 1,000자(원고지 5매)분량의 5개 문단으로 구성했다. 이 글은 6개의 짝수 문단으로 썼지만, 필자가 문단 개념을 피상적으로 인식한 결과, 위처럼 5개다. 6개의 소주제가 있으므로 6개 문단으로 구성해야 옳다. 한 문단에 2 개의 소주제가 있어선 안 된다.
6개 문단으로 재구성하여 수정한 다음 예문을 보자. 각 문단 소주제문은 밑줄로 표시한다. ( ) 표시는 암시적 소주제이므로 추정하여 보충한다. 예문은 1문단 서두와 6문단 결미가 수미쌍관首尾雙關의 짝을 이룬다. 양 문단의 공통적 단어가 ‘바나나, 냉장고, 나, 먹는’ 등이 증거다. 다음 짝은 2문단과 3문단이다. 그 어휘 증거는 ‘1980년대, 바나나, 귀한’ 등이다. 역시 4와 5문단이 짝을 이룬다. 바나나와 관련된 특이한 삽화(동남아 바나나, 바나나맛 우유)로 짝을 맞춘다. 위 예문과 비교하여 어떻게 짝수 문단으로 구성했고, 왜 그러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아내는 바나나를 냉장고에 넣어둔다.열대 과일인 바나나를 냉장고에 넣어 좋을 것 없다고 하는데도 시원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바나나를 시원하게 먹는다는 게 겨울에 오렌지 주스 데워 먹는 것 같아서 이상한데, 아내도 그렇고 아이도 바나나를 시원하게 먹는 게 좋다고 한다. 시원한 바나나를 먹어보니 나쁘지 않기도 하다.
2. 1980년대만 해도 바나나는 수입 제한 품목이어서 엄청나게 비쌌다.요즘 물가로 치면 한 개(한 뭉치가 아니다)에 1만원 정도 했던 것 같다. 그때 바나나는 추석 선물 세트 또는 차례상에만 올라갈 만큼 귀했다. 그 당시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집을 내놓은 사람들에게 “거실에 바나나를 놓아두라”고 조언했다는데,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바나나를 보면 ‘이 집에 살면서 돈 많이 벌어서 나가는 모양이다’하고 생각해 거래가 잘 풀린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3. 1980년대 말 외국 배낭여행을 했던 한 선배는 돈을 아끼려고 여행 두 달간 바나나로만 연명했다. 처음에는 그 귀한 바나나를 싼값에 잔뜩 먹을 수 있는 것을 뿌듯하게 여겼으나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지금까지도 바나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선배는 바나나에 대한 특이한 추억이 있다.)
4. 한국해양대에 다녔던 친구는 4학년 때 실습선을 타고 동남아에 갔던 일을 얘기했었다.길가에 바나나를 잔뜩 쌓아놓고 팔기에 우리 돈 500원 정도를 건넸더니 바나나 나무 반 그루를 줬다고 했다. 그렇게 산 바나나 500원어치를 두 명이 어깨에 메고 갔다는 그의 말은 과장이겠지만, 바나나가 한국에서 푸아그라나 캐비아 같은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5. 지난 30년간 50억병 이상 팔렸다는 바나나맛 우유에는 바나나 과즙이 없다.바나나향 합성착향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름을 ‘바나나 우유’라고 짓지 못했다. 그때 바나나 과즙을 넣은 우유를 만들기엔 원가가 너무 비쌌을 것이다.
6. 냉장고에 있던 바나나 몇 개를 배낭에 쑤셔넣고 자전거를 타다가 허기질 때 먹었다. 맛도 향도 못 느끼고 그저 탄수화물이라 생각하고 먹었다. 축 늘어진 바나나 껍질이 문득 서글퍼 보였다.(지난 세월이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