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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변의 억새
2013년 경남소설가협회(회장 하아무)의 연간집 <경남소설>(제8호)에
소설가 김현우가
단편소설 <봉오재 무위거사>를 발표했다.
단편소설
봉오재 무위거사
김현우
봉오재 마을에서 유명한 한량 한 사람이 드디어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올해 여든 세 살. 그의 집 문기둥에는 <6․25참전용사>란 패가 붙어 있었다. 나이가 그 정도 되었으니 6.25때 총을 쏠 수 없는 병신이 아닌 장정이라면 거의 다 피난민수용소에서 붙들려 강제입대를 당했던 시절을 보낸 사람이니 그 문패가 조금도 이상할리 없을 것이다. 한량 김진득은 사지육신 멀쩡하고 키가 크고 힘깨나 쓸 만한 덩치가 아주 좋은 사내였으니 6.25 참전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는 한평생 봉오재에서 건들거리며 살았다. 그런 그를 마을사람들은 대접한답시고 무위거사(無爲居士)라고도 불렀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는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건달이라는 얘기였다.
무위거사는 젊어서 얻은 별호가 아니었다. 쉰을 넘긴 나이에 삼청교육대를 다녀온 이후 훈장처럼 달게 된 것이었다.
젊어서는 주태백, 조금 지나서는 바람 잽이, 건달, 세월이 흘러서는 봉오재 한량, 그러다 사십 줄에는 그의 이름 진득과 같은 소 뱃가죽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 가분나리, 빈대, 오십 줄에 들고서는 거렁뱅이로 불리다가 육십이 되고 보니 대접을 한다고 걸객(乞客), 건달이 아니라 거사로 불리게 되었는데 김진득 스스로 그 앞에다 무위라 붙이니 무위거사로 봉오재 일대에서 통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거한(巨漢)이라 불릴 만큼 키도 크고 몸집이 우람한 사나이였다. 주먹도 남다르게 컸다. 그러니 완력이 보통이 아니어서 마을이나 시장바닥에서 난동을 부리는 젊은이 한 둘 쯤은 쉽게 제압했다. 누구나 그가 유도나 태권도 같은 운동을 했으리라 짐작을 했고 그가 나다니는 다방에서,
“내가 이래봬도 유도가 3단에 태권도가 3단 합 6단이란 말이야!”
하고 뻥을 쳤어도 모두들 그대로 믿을 정도였다.
그는 마흔 살 이전에는 그래도 직장이랍시고 이곳저곳 취직을 했는데 주로 경비원으로 수출자유지역이나 한일합섭, 아니면 아파트 건설 같은 주택공사현장이 대부분이었다. 그 1960~70년대 그 시절 회사에서 나오는 봉급은 봉투째 술집 이곳저곳에 내맡기면 그만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경비원 월급이 몇 푼 되지도 않았을 것이 뻔 한데 그마저 아예 술집에다 내맡겼으니 그의 가정형편이 어찌 되었겠는지? 누구나 그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처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듯하다.
봉오재 그의 집은 아버지가 물려준 4칸 기와집이었다. 그러니 결코 부자소리는 못 들어도 중농쯤은 되는 조금은 넉넉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김진득은 공부가 싫었다. 농사짓기도 싫었다. 공부만 게으름을 덜 피웠더라면 대학까지는 무난히 다녔을 터인데도 노는데 재미를 붙여서 중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정학에다 나중에는 퇴학을 당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6.25가 터지고 피난민수용소에서 붙잡혀 입대를 해서 전장을 누비다가 휴전 후 제대를 하기까지 몇 년이 흐르고 나니 반거충이 어중잽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농사도 지어보고 취직도 해 보았지만 이것저것 모두 시들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저 동리 청년들과 어울려 술이나 먹고 노름이나 하면 만사 시름을 깨끗이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그가 사는 봉오재나 북마산 뿐 만 아니라 잠시 잠시 다녔던 회사 인근까지 술집마다 외상값이 깔리고 그 때문에 옷도 벗기고 심지어 신발까지 뺏기고 다녔으니 경제적 생활이란 엉망진창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돌말(石洞) 논밭을 야금야금 팔아먹어 결국은 집 한 칸만 남았다. 그러니 고생을 몽땅하게 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가 부실한 남편 대신 집안을 꾸려 나가야했다. 그래도 4칸 기와집이라 방이 여러 개여서 마침 개발과 수출바람이 부는 시절 공장에 취직하러 온 처녀들에게 방세를 놓아 수입이 제법 되어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진득의 부인 내서댁은 내서면 두척쪽에서 제법 부자로 소문난 박씨집 셋째 딸로 그때로 치자면 부잣집 딸이 아니면 다니기 힘들었던 여고를 졸업한 여자였다. 내서면에서 마산 시내를 오가자면 꼭 봉오재를 지나가야하니 동글동글한 얼굴에 반들반들한 피부나 몽실몽실한 몸매의 처녀가 자연히 김진득의 눈에 뜨였고 둘은 연애를 시작했고 곧 혼담이 오고갔다. 군에서 제대를 한지 4, 5년이 지난 때였고 내서댁은 여고를 나온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던 이른 시기였다. 키도 훤칠하겠다, 이목구비도 반듯하겠다, 외모로서는 하나도 빠짐이 없는 김진득을 마땅한 사윗감으로 본 내서댁 아버지 박씨가 그들의 혼사를 당연히 찬성했고 그래서 쉽게 결혼을 했다.
그런데 김진득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이니 좀 좋은 취직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좀 가방끈이 긴 실력만 있었더라도 공무원이나 경찰직 같은 것을 도전해 볼 수 있었으련만. 장인이 이곳저곳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얼마를 버티지 못했다. 김진득의 천성이 느리고 낙천적이라 매사에 매듭이 잘 지어지지 않았다. 일을 하나 맡거나 담당하면 사장이 시키든 안시키든 지시한 시일 안에 깔끔하게 처리하거나 완결지어야 하는데 그는 통 그러지를 못했다. 어중간하게 미완인 채로 일이 처리되니 꼭 똥 누고 밑구멍 안 닦은 듯했다. 그러니 일을 시키고 월급을 주는 고용주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잘 버티고 지내면 입사 6, 7개월, 어쩌다 술 먹고 사고라도 치면 한 달을 견디지 못했고 그럭저럭 일을 감당하면 3달이 고작이었다. 자연히 경비원 자리가 제격이란 판단에서 장인은 곧잘 경비원 자리만 물색해 주었다.
김진득의 장인 박씨는 그래도 사위를 믿었다. 정말 엉뚱하고도 근거가 전연 없는 바램이었다.
“저 놈이 저래도 대한민국을 주무를 만큼 배포는 큰 놈이데이! 두고 보라모. 국회의원 한 자리는 꼭 해 묵을 끼구마는.”
하고 사위의 처지를 비난하지 않고 안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박씨는 사위가 주변 사람과 잘 어울리고 언변이 좋아 사람을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만드는 재주가 남다르다고 늘 자랑했다. 재산만 좀 많아 정치판에 나서기만 하면 시의원은 물론 시장이나 국회의원쯤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정치란 오로지 돈이 기본인데 돈이 없으니 김 서방이 옴짝달싹 못한다고 한탄을 하기도 했다.
장인의 소망대로 그는 한일합섭 경비원을 끝으로 정치판에 끼어들었다. 대한민국이 선거 자주하기로 진작 소문이 났듯이 그가 선거판에 뛰어드니 쉴 날이 없이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비록 가방끈이 짧았지만 어느 동리에는 어느 성씨가 많고 저쪽 동리에는 유지 아무개를 포섭하기만 하면 몰표가 나올 것이란 판세 읽기를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또 안면(顔面)이란 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시절이기도하여 김진득이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며 유권자들과 악수를 몇 번 하기만 하면 모두들 포섭되었으므로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후보자들은 서로 그를 선거참모로 모셔가고자 노력했고 그는 그만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곤 하였다. 기실 선거라는 게 앞날을 점칠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막상 투표함을 열고 보면 예상이 빗나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술 사고 밥 사고 고무신 뿌리고 돈다발 갖다 바치고 하지만 유권자는 냉정하게 한 표 뿐이라 이 후보자 아니면 저 후보자를 선택해야하니 결국 당선자는 한 명이고 나머지는 물 먹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김진득이 밀었던 후보가 당선되면 그건 대박이지만 죽어라 땀 흘리며 뛰었지만 낙선이라면 그 자신도 나락에 빠지기 일 수였다. 다만 선거철 한때 메뚜기처럼 죽을 둥 살 둥 뛰면서 술 잘 먹고 남의 돈 푹푹 쓰는 재미야 있었지만.
그런데 그가 폭삭 망하게 된 것은 바로 국회의원 선거 때문이었다. 그의 사칸 기와집이 허공에 날아가 버린 것이.
분명 당선될 후보임에 틀림없는 인물이라 김진득은 강희창을 점찍어 앞장 서 선거운동에 가담했었다. 한창 선거분위기가 달아올라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이 벌어졌는데 강희창에게 총알이 달리게 되었다.
“이거 우짜믄 좋노? 저 놈들은 돈을 막 뿌린다 카는데? 우리는 빈손이라니!”
김진득만 아우성을 친 것이 아니라 함께 하던 선거운동원들도 강희창 후보를 다그쳤다. 자금을 어디서든 구해와 뿌려야 선거 분위기를 유리하게 전환시킬 수 있다고 강박했다. 유리한 고지점령을 눈앞에 두고 자금이 없어 패전이라니!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야단쳤다. 강희창이 조용히 김진득을 사무실 한 구석 소파에 불러 앉혔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보이소, 김 참모! 내가 구할 수 있는 자금은 다 구해냈소. 이제는 나도 무일푼이란 말이요. 집도 팔고 공장, 논밭전지도 저당 잡혀 돈을 만들었거든. 손을 벌리고 어쩌고 할 친구도 후원자도 이제는 없소. 우짜겄소?”
“우짜기는 우째요? 투표 날 며칠 앞두고는 콩을 심지 않으면 우째 되는지 강 후보도 빤히 알지 않소? 마느래 빤스를 팔든 코 묵은 아아들 돈을 훔쳐오든 구해야지! 돈 없으면 선거운동 못한다는 거 더 잘 알면서!”
“그러니까 김 참모를 붙들고 의논 아니오? 어디 자금 돌려올 데가 없어요?”
“허어! 내사 집 한 칸 뿐인데, 무슨 재주가 있겠소?”
김진득의 말에 강희창은 크게 낙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그렇게 낙망하는 강희창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용단을 내렸다. 앞뒤 정황을 재 보지도 않고서.
“그래! 내 집 잡혀서 돈 만들어 보소! 사 칸 두 줄 배기 기와집이니 제법 값이 나가겠지.”
“뭐? 뭐라꼬요?”
강희창도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못미더워 했다. 이왕 내친김이라 그는 더 큰소리를 쳤다.
“어차피 한 배를 탄 것 아니겄소? 강 후보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지. 나도 사내대장부이니 통 크게 한번 놀아 봅시다.”
감격에 겨운 강희창은 그를 얼싸안고 “형님!” 하면서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그를 비서로 채용해서 서울구경을 시켜주겠노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그 뿐이었다. 투표함을 열고 보니 낙선이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저당 잡힌 집은 선거 끝난 지 한 달도 안 돼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그의 식구들은 겨우 방 한 칸 달세 방으로 보기 좋게 밀려 나앉게 되어버렸다. 그 일이 1970년대 나이 마흔이 넘어서 겪은 일이었다.
드디어 건달이 되고만 그에게 우연찮게 그럴 듯한 직업이 생겼는데 바로 신문보급 일이었다. 사람 좋다고 소문난 그가 빈대, 진드기란 소리를 듣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지음 중앙이고 지방이고 가리지 않고 일간신문이 전국적으로 여러 수 십 종류나 발행되던 시절이었다. 낙선해서 빌빌거리던 강희창이 우연히 봉오재 수련다방에 들렸다가 그를 만나서 권했던 일이 바로 신문지국이었다.
“형님! 선들선들한 형님 성격에 딱 맞을 거요. 신문보급 부수확보는 발과 안면에 달렸어요. 열심히 부탁하면 신문을 봐 주지 않을 장사가 없지요. 한번 해 보이소.”
“신문기자증도 주나? 나도 그런 거면 한번 해 보지 뭐! 큰 밑천 들지 않겠지?”
“지국 사무실을 내고 간판이야 달아야지요. 내가 소개하는 신문사는 서울에 있는데 최근 설립을 해서 중요도시마다 지국이나 지사를 모집하고 있거든요.”
“동생이 소개해 주는 건데 어찌 거절하겠나? 간판을 내달 사무실이야 이 일대 천지만지지. 이발소도 있고 다방도 있고 복덕방도 있고…….”
그래서 시작된 일이었다. 신문사는 그리 큰 회사나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곳이 아니라서 지국장이 신문 팔고 회사나 업소 돌아다니며 취재를 한다면서 적당하게 공갈도 치고 회유해서 생활비라도 벌어먹으라고 노골적으로 말해 주었다. 신문사지국이니 취재권한도 없고 주재기자를 둘 수도 없는데 버젓이 기자증이 발급돼 나왔고 지국이 아니라 <민주자유신문 00시 총국장>이란 명함을 찍어서 사용해도 눈감아 줄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까지 주어서 그는 얼씨구 좋구나 하고 총국장 명함에 기자증을 내휘두르며 기세 좋게 다녔다.
사실 그 당시 기자란 월급이 없는 신세라 본사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잘 팔리지도 인기도 없는 신문지 뿐이었다. 동아 조선 중앙 한국일보 같은 중앙지가 인기 있었지 그가 취급하는 신문은 독자의 안중에는 통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뛰었다. 밥술깨나 먹을 동리 유지라는 사람의 집은 물론 그가 가서 커피 한잔이라도 마셨던 적이 있는 다방이나 술 한 잔 먹었던 술집이라면 어김없이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신문을 넣었다. 배달하는 아이가,
“신문 넣지 말래요.”
하고 신문을 배달하다 거절당한 얘기를 했어도 그는 우격다짐으로 배달을 하라고 호통 쳤다.
“넌 모르는 척 하고 귀 틀어막고 신문 넣어! 책임은 다 내가 질 테니!”
억지로 돌리는 신문이니 구독료 수금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기자증은 이 술집 저 술집 외상술 먹는데 주로 사용되었고 구독부수나 수입되는 대금도 점점 세월이 가니 처음보다 줄어들었다.
“에에! 신문지국 하기도 힘드네!”
어느 날 그는 석전복덕방에 걸었던 <민주자유신문 00시총국>이란 간판을 떼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신문기자증만은 버리지 않았고 걸핏하면 <총국장> 명함을 사람들에게 들이밀었다. 동가식서가숙한다더니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든 사내가 술 취해 눕는 곳이 제 안방이요 밥 한 술 얻어먹는 곳이 제 집이 되어 버렸다. 아침에 다방에 들러 커피 한잔 하고 손가락으로 튕기기만 하면 그만 이었다. 술집에 들러 아무 자리나 끼어 앉아 술을 얻어 마시면 그만이었다. 우람한 체구에 유창한 언변이니 봉오재 일대에서 그를 거스르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다가 외지인이 그 꼴을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가는 정작 본인은 허허 웃고 있는데 옆에 있던 토박이 어깨들이 편들고 나섰다.
“뭐야? ×같은 놈이 우리 성님께 우째?”
하고 성깔을 부리면 그 사람은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니 봉오재 일대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고 깔보는 사람도 없었다. 비방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친한 척도 않았다. 여하간 시내에서 행패를 부리는 깡패나 건달 부류들조차 그를 깍듯이 형님으로 떠받들었다.
1977년인가 마산역이 석전동에 새로 생겼다. 그 전에는 신마산역이니 구마산, 북마산이니 불리는 역이 3개가 있었는데 세 곳이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봉오재와 돌말에도 변화가 있었으니 철로가 동리 한복판을 지나가고 서마산시장이란 상설시장이 그 옆에 생겼다. 어시장에서 채소장수를 하던 내서댁이 서마산시장 한 귀퉁이에 전을 얻어 집 가까이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내서댁은 놀고먹는 남편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래도 신문총국장이라 으스대며 출입을 하니 그에 걸맞게 흰 와이셔츠에 양복 차림을 하여야 한다니 다림질한 옷을 대령해야 했다. 저녁이면 술에 곤죽이 되어 돌아오니 아침에 입고 나간 옷이 주름 잡히고 후줄근해 지고 말았지만 그녀는 장사하는 틈틈이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해 깔끔하게 대령했다. 그런 그녀가 한 마디 했다.
“새로 생긴 철길 있잖아요? 거기 빈터가 많던데……”
“빈터가 많으면 많았지. 무슨 상관이야?”
“우리 집이 없잖아요? 또 그 땅에 채소농사라도 지으면 돈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뭐야? 철도부지에 내가 농사를 지으란 말이야?”
“땅만 당신이 나서서 잡아준다면 농사는 애들과 제가 짓지요. 누가 그 공터를 잡기 전에 손 좀 써요. 북마산으로 나가는 철도다리 밑에는 집을 지어도 좋고요, 함안으로 나가는 다리 밑에도 공터가 있고요. 세 갈래 갈라지는 둑 아래 공터에 정말 밭을 만들면 딱 좋겠던데……”
“알았어! 내가 한번 둘러보지 뭐!”
사내로서 가장으로서 아들 딸 셋의 아비로서 그깟 공터쯤 확보는 문제없었다. 누가 먼저 그 터를 잡았다면 싸움을 해서라도 빼앗아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나섰다. 아내가 점찍어 말했던 세 곳을 휙 한 바퀴 돌아보니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말뚝을 박은 흔적이 없었다. 그는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목재소로 달려가 기둥감이 될 만한 나무토막을 수 십 개 얻었다.
“양복을 입은 신사 체면에 리어카를 끌 수 없고 일꾼을 시켜 보내줘. 박 사장.”
“아이고! 총국장님 부탁인데 그러지요 뭐. 그런데 어디다 쓸려고요?”
“쓸모가 있어서 그래요. 앞으로 집도 한 칸 지었으면 하니 그때는 목재 값을 확실하게 치를 테니 좀 주시오?”
“아아, 총국장님 부탁인데 얼마든지 가져가셔야지. 대금이야 천천히 주셔도 되고 말입니다.”
그는 나무토막을 얻게 되자 철물점에 가서 망치를 빌려다 목재소 일꾼 더러 이곳저곳 박아 달라 하고는 막대기에 새끼를 매 둘러쳐서 경계 표시를 했다. 3곳 다 널찍하게 새끼줄을 쳐 표시를 해 놓고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누구랄 것 없이 건공중에 엄포를 놓았다.
“이 공터는 내 것이란 말이야! 어느 놈이든 탐을 낸다면 내 그 놈의 멱을 따 뿌릴끼데이! 알았소?”
동네방네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니 봉오재 사람들 사이에 ‘대동강 물 팔아먹을 놈이 우리 동네에도 있네.’ 하고 혀를 내휘둘렀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내친 김에 집을 지을 궁리를 했다. 북마산 나가는 철길 교각 한 칸 사이가 제법 널찍했는데 그는 인근에 사는 황목수를 불러 판자집이든 천막집이든 2, 3일내에 후딱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황목수는 그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적어 서로 형 동생으로 부르며 절친한 사이였다.
“아이구! 형님 명령인데 당장 뚝딱 지어내야지요.”
“동생! 일삯은 없데이. 건축자재도 동생이 우선 마련하면 수일 내 처리를 해 줄게.”
“아따! 형님 형편이 어떤지 제가 다 아는데 무슨 돈을 받아요? 내 알아서 재료도 구해와서 집도 지을 테니 형님은 구경만 하이소.”
정말 고마운 황목수였다. 목재소에서 외상으로 사온 목재로 얼기설기 집을 지었다. 함석이나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이을 형편이 안 되어 천막을 외상으로 사와서 둘러쳤다. 벽도 헌 판자나 헌 합판을 황목수가 구해 와서 막았다. 그는 단칸 셋방에서 그곳으로 당장 이사했다.
“고대광실(高臺廣室)이 따로 없구먼. 마누라 덕에 집이 생겼군. 당신이 뭐라 힌트를 주지 않았다면 이런 집이 생길리가 없어. 정말 배운 사람이 달라!”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안쪽으로 나가는 철도교각 아래 집다운 집을 지었다. 물론 황목수가 일을 공짜로 해 주었다. 그리고는 북마산쪽 집은 창고로 개조해 가구공장을 하는 사람에게 세를 놓았다. 또 그 옆 공터를 장독을 파는 할머니에게 난전을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즈음 장가를 간 큰아들 놈이 교각 아래 집에서 부모와 함께 살기 싫다면서 번듯한 방을 얻어 달라고 성화를 부려 내서댁이 창고 전세금을 받아 해결해 주어 한시름 들었다. 그런데 맹랑하게도 새 며느리가 교각 아래 판잣집이 창피하다면서 통 발걸음을 하지 않기 시작했는데 끝내 손자들까지 발걸음 끊게 만들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외면하게 했다.
집이 한꺼번에 두 채나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호사마다란 게 그런 것일까? 아니면 복 없는 놈이 핫바지가 두벌이면 죽는다더니. 세월이 조금 흘러 그에게 난데없는 불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빌어묵을! 씨비씨비 사태인가 시비시비(12. 12) 뭔가 때문에 내 신세가 담박에 조져졌지! 나이 오십 넘은 넘이 삼청교육대가 뭐꼬? 나는 전두환이 한테 유감이 많은 사람이데이.”
술에 잔뜩 취하면 그는 곧잘 삼청교육대를 들먹이고 훈련이 어떻고 저떠고 혹독하게 당했던 일 그 얘기를 꺼내 놓으면 사람들이 그만 주눅이 들곤 했다. 그 고되기로 이름난 공수훈련, 유격훈련, 피티체조, 깍지껴기, 머리박기 등등 훈련장면들을 얘기하면 어느새 그는 악전고투를 거뜬하게 이겨낸 영웅이 되어 있었다.
1980년인가 그 해 8월, 사회악일소를 내세우며 계엄포고령에 의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를 영장 없이 6만 명이나 검거하여 20여 군부대에서 순화교육을 시킨 일이 바로 삼청교육대란 재난 폭탄이었다. 폭력배, 갈취협박을 일삼는 깡패, 상습도박자, 사기꾼, 강, 절도나 밀수범…… 거기에 나이 오십 줄에 든 김진득이도 엮이어 들어간 것이었다.
런닝 빤스도 입지 않고 활딱 벗은 알몸으로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영문도 모르고 경찰에 붙들려 차를 탔고 새벽에 차에서 내렸는데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술이 과해서 아직도 비몽사몽이라 이거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군 막사로 끌려들어 가 2, 3일 지나서야 몇 명씩 조사실 같은 곳으로 불려가 새파랗게 젊은 군인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그를 조사하던 군인은 흘낏 그와 함께 경찰에서 넘어 온 서류들을 대충 읽는 듯하더니,
“당신, 저쪽으로 가 서있어!”
하고 명령하더니 다른 사람들을 조사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붙잡혀 온 사람을 혐의의 경중에 따라 4주 순화교육을 시키거나 아니면 훈방 조치하는 분류작업을 그곳에서 하고 있었다. 연행자들의 조사가 대충 마무리 되었는지 아까 그를 조사했던 군인이, “따라 오시오.” 하고 사뭇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를 따라 갔더니 군부대 매점이었다. 군인은 사이다를 시켜 그에게 권하더니,
“절 모르겠습니까? 봉오재가 제 고향입니다. 아저씨.”했다. 순간 김진득은 ‘옳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군인은 간단히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더니 뭔가 서류봉투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걱정 마시고 가시이소. 이거 훈방 증명서입니다. 그런데 봉오재 집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당분간 한 두어 달 다른 곳에 가서 숨죽이고 지내시다가 교육훈련이 다 끝나고 조용해지면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저씨가 공갈 협박에 무전취식, 난동을 부리는 깡패 대장이라고 고발되었어요. 사기 혐의도 있다네요. 그러니 지금 돌아가셨다간 또 고발당해 도로 붙잡혀 올 겁니다.”
“허어! 무전취식이야 간혹 하지만 난동에 사기꾼이라니…… 동민들이 그런 고발을 하다니!”
“경찰에서 할당된 목표량을 채우다보니 아저씨 같은 분이 생기지요.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되니 잠잠해지고 난 다음에 봉오재로 가셔야 합니다.”
“아, 알았네. 정말 고맙네. 뭐로 대접해야지? 이거……”
“절 만나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화교육 4주 받고 또 근로봉사 노역을 하게 됩니다.”
“허어!”
“나중에 고향 돌아가셔서 보복한다고 난리를 부리시면 정대 안 됩니다. 조용히 사십시오.”
“알겠네…….”
재빠르게 사태파악을 하게 된 그는 군부대에서 나오는 길로 부산으로 갔다. 부산역에 내리니 갈 곳이 어디인지 아득했다. 친분이 두터운 고향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여러 명 부산에 살고 있지만 막상 연락을 하려니 그를 받아줄지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참이나 궁리를 하다가 그 중 선거 때마다 손발을 맞춰 운동을 함께 했던 동창생 정일도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정일도는 ‘어쩐 일로 진드기가 부산까지 행차하셨냐?’고 반가워하면서 만날 다방을 지목해 주었다. 아마 정일도는 그가 삼청교육대에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듯 했다. 김진득은 부산역전에 있는 약속된 다방을 찾아 들어갔다,
참, 인연이란 묘한 것이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신문을 가져달라고 하니 쪼르르 달려온 한복을 잘 차려 입은 다방 마담이 한 눈에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아이! 총국장님 아니세요? 무슨 바람이 불어 부산나들이를 하셨나요? 설마? 나를 찾아오셨나?”
그가 자주 다녔던 수림다방 정마담이었다. 물론 공짜 커피를 자주 마셨기 때문에 눈총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반가워했다. 아마 그녀도 흘러흘러 부산역전까지 온 모양이었다.
“꼴이 이게 뭐예요? 항상 깔끔하고 점잖은 분이?”
“일이 그렇게 되었어. 재수 없는 놈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진다고 하잖아? 내가 지금 그래.”
그는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여자이다 싶어, 또 삼청교육대에 갈 뻔한 얘기를 하지 않고는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어 어제 오늘 당한 일을 털어놓고 말았다. 정마담은 한참이나 생각을 하더니 결심이 선 듯 말했다.
“당장 일어나세요.”
“어어! 날 쫓아 낼 작정이야? 동창생과 만나기로 했어. 여기서!”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란 말예요. 요 뒤에 가면 목욕탕이 있으니까 목욕부터 하고 오세요. 옷도 그게 뭐예요? 내가 옷 한 벌 사다 놓을 테니 갈아입고요. 아무리 동창 친구분이라지만 지금 국장님 몰골이 말이 아닌걸요.”
정말 고마웠다. 눈물 나게. 정마담은 속옷은 물론 양복도 새 것으로 준비해 놓았다가 목욕을 하고 돌아온 그에게 내밀었다. 한 두어 달은 봉오재로 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정을 알게 된 정마담은 다방 다락방에 임시로 거처하라고 권했다.
“제가 자는 방이지만 어때요? 우리 한 두어 달 동거하면 좀 좋아요?”
“같이 있을 아가씨들도 있을 텐데?”
“국장님 답지 않게 눈치를 보기는……. 아이들 숙소는 옆 건물 여인숙에 있어요.”
그는 그만 정마담의 유혹에 넘어갔다. 아니 정마담이 그를 물구덩이에서 구해준 것이었다. 그는 낮이면 용두산 공원이나 자갈치시장에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고향사람을 만날까봐 검정 안경에 밀짚모자까지 덮어쓰고서……. 밤이면 그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젊은 여인을 안고 자는 재미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고생을 많이 해 기름기가 빠져버린 아내에 비하면 정마담의 몸은 탱글탱글하고 싱싱한 데다 잠자리에서는 남자의 혼을 쏙 빼놓을 만치 요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꿈같은 두어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세상이 잠잠해졌다 싶어 봉오재로 돌아갔다.
항상 비어있던 호주머니였는데 매일 용돈을 얼마씩 아내가 챙겨 주었기 때문에 무전취식은 하지 않게 되었다. 점점 그의 형편도 조금 나아지기도 했다.
국회의원 출마를 여러 번 도전했던 강희창은 드디어 국회의원이 되었고 예전에 그가 저당 잡혀 먹었던 사 칸 두 줄 배기 기와집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집을 한 채 사서 김진득에게 넘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귀향을 할 때면 꼭 찾거나 불러서 두툼한 봉투를 그에게 찔러 넣어주곤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정마담이 정말 열녀였다. 부산에서 남모르게 통한 정분을 딱 끊지 않고 이어오는 것이었다. 그간 정마담은 다방 일에 손을 떼고 양품점 장사를 했다. 한 2주를 가지 않으면 전화가 왔다. 어서 오라고. 둘 사이에 딸이 생겼다. 정마담이 그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적었으니 임신은 정상이었다. 김진득은 내서댁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고백하고 애를 호적에 올렸다. 건축 일을 해 오던 황목수는 그간 집장사를 크게 해서 성공했다. 넓은 대지를 사서 여러 필지로 분할한 다음 단독주택을 여러 채 지어 팔아 큰돈을 거머쥐었다. 부자가 된 황목수는 250cc 오토바이를 사서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좁은 봉오재 골목들을 휘젓고 다녔다. 영원한 해병, 아니라 영원한 형제라면서 ‘형님! 용돈 하이소.’ 하고 만나면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내밀었다.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환갑인가 진갑인가 지내고나니 어느새 칠십이라 그러고 그러다 팔십 고개를 바라보게 되었다. 상전벽해라지만 김진득에게는 그냥 그런 세월이었다. 조금 달라졌다면 빈대란 소리를 듣지 않을 만 해 졌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그는 강의원이 사 준 집을 큰아들 내외에게 물려주었는데 며느리가 통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아버지를 무슨 바퀴벌레처럼 여기고 싫어하는 눈치라 한 집에 살기에 마뜩찮았다. 함안 쪽 철도교량 아래 비워두고 있었던 집은 그 옆 교회에서 주차장을 한다면서 사겠다고 여러 번 사정을 하기에 보상금을 조금 받고 팔아버렸다. 그는 며느리와 살기 싫어서 전에 텃밭으로 쓰던 철도부지 언덕아래에 또 집을 지어 별장이라면서 자주 거기에 머물렀다. 그러니 그가 철도부지에 집을 세 번째 지은 것이었다.
3년 전 내서댁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저 세상 사람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처량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 즈음 경전선 철로 복선화 공사가 시작되었다. 새로 개설되는 철로에 걸리는 주택 수 십채를 철거하고 봉오재로 직통하는 터널을 뚫는 공사를 하더니 예전 철도가 지나가던 높은 둑과 교량은 철거한다면서 드디어 그에게도 사람이 왔다. 그가 살고 있는 움막도 철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철도부지위에 지은 집이니 보상은 한 푼도 없다고 했다. 단 이사비용 몇 십만원 정도는 줄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이, 이거 눈에 안보이나? 한번 읽어 보거라.”
김진득은 직원을 끌고나가 대문간에 달린 문패를 가리켰다. 직원은 흘낏 <六二五參戰勇士의 집 金眞得> 새겨진 것을 읽다가 코웃음을 쳤다.
“어르신! 저것은 저것이고요, 이 집은 철거해야 됩니다.”
“야, 요새 젊은 놈들 인정사정없네!”
밀고 당기고 한 달여 시비를 벌이다가 결국 낙찰된 것은 “공사용 컨테이너 박스를 공사장 밖 적당한 공간에 내줄 터이니 임시로 기거를 하시라.”는 협상안이었다. 그는 그 조건을 받아 들였다. 큰아들은 그만 집으로 들어오시라고 강권했지만 미운 며느리 밥은 못 얻어먹겠다고 버티었다. 아내가 없는 집에 들어가 지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컨테이너 박스는 완전히 냉동창고나 다름없었다.
봉오재 무위거사 김진득 영감이 그 지경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정마담이 그를 부산으로 데려가기 위해 승용차를 끌고 왔다. 그녀가 컨테이너 문을 열고 보니 방안에는 소주병이 수십 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였고 김 영감은 빳빳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동사(凍死)였다.
소설가 김현우
소설이 실린 <경남소설>(2013. 8호)
첫댓글 한평생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말년이 편안해야 하는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