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대접주 붙잡혀
전봉준이 기포할 수 있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손화중 대접주는 동학혁명 내내 전봉준과 함께 뜻을 같이 했다. 손화중은 9월의 재기포 이후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상륙할 것에 대비해 전봉준과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과 함께 전라남도 나주와 광주 지역을 지켰다. 공주공방전에서 호서와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패하자 그는 나주를 점령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공주 공방전 이후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민보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연이어 패해 전세가 기울어졌고, 전봉준은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는 소식을 접한 손화중은 당시 광주를 다시 점령하고 있었다. 전봉준의 패배로 혁명이 실패해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손화중은 12월 1일 오전 10시경 휘하의 동학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손화중과 함께 광주에 머물던 최경선은 귀화한다는 방문(榜文)을 내걸고 사라졌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자 광주목사는 곧바로 동학농민군 탄압에 들어갔다. 동학접주 주윤철(朱允哲) 등 5명은 체포돼 곤장을 받아 물고(物故)를 당했다. 광주접주 박사집(朴士執), 나주접주 전유창(全由昌)은 체포돼 초토영으로 압송됐다.
광주를 벗어난 손화중은 발길을 돌려 예전에 자신과 연고가 있는 흥덕의 수강산 산당 이씨 재실(고창군 부안면 안현리)로 숨어들었다. 손화중은 1894년 12월 11일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돼 일본군에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은 이봉우에게 그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을 고발해 상금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손화중과 함께 있던 부하 2명은 포살됐고, 손화중을 잡기 위해 인근의 민보군이 동원됐던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이런 일화는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손화중 대접주가 마지막까지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만든 상징적 표현이다. 백성들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앞장섰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숭고한 업적을 기렸다.
▲ 전주 덕진공원의 손화중 대접주 추모비. 무장의 대접주로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전개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9월의 재기포 이후 일본군의 남해안 침입을 막기 위해 광주와 나주 일대를 장악했으나 전봉준이 태인에서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자 휘하의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고 흥덕의 이씨 재실로 숨어들었다가 체포됐다. |
최경선, 김덕명 대접주도 체포돼
최경선은 손화중보다 먼저 체포됐다. 12월 1일 손화중과 헤어진 최경선은 광주를 떠나 남평에 들러 식량 등을 거두어 가지고 약 2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복으로 내려갔다. 최경선 일행이 12월 3일 새벽 외남면 벽송(碧松, 현 화순군 남면 벽송리)과 사평(沙坪)에 이르러 유숙했다. 동학농민군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마을의 오윤술(吳潤述)은 오위장을 지낸 인물로 이교(吏校)와 민보군 300여 명을 동원해 12월 4일 최경선의 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최경선은 동학농민군을 재규합하려고 했지만 200여 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체포됐다. 민보군은 동학농민군 157명을 사살했으며 주동자들만 남겨뒀다. 최경선은 순창에 수감됐다가 일본군에게 인도돼 7일 나주로 압송됐다.
▲ 최경선 대접주의 피체지인 화순군 남면 벽송리. 동학혁명의 영솔장으로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최경선은 손화중과 함께 광주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전봉준이 태인 전투에 패한 후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자 자신의 동학농민군도 해산시켰다. 그 후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다가 민보군인 오윤술 등에 의해 체포됐다. |
전봉준의 든든한 지원을 맡았던 김덕명 대접주도 원평 전투에서 패전하자 어려움에 처했다. 김덕명은 자신의 근거지였던 금구 원평이 쑥대밭이 되자 참담함에 빠진 채 태인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이 태인 전투 패배 후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자 김덕명은 전봉준과 헤어져 몸을 숨겼다. 그가 숨은 곳은 집안의 재실이 있는 금산면 장흥리의 안정 절골이었다. 당시 폐사가 됐던 안정사에 살던 재실의 산지기는 이곳의 토호인 김씨 문중에게 김덕명의 구명을 호소했는데 오히려 김씨 문중에서는 김덕명을 역적이라고 관가에 고발했다. 고발을 받은 태인 관아에서 1895년 정월 초하루, 즉 설날에 이곳에 들이닥쳐 김덕명을 체포했다. 김덕명은 상투와 양쪽 팔이 묶인 채 짚둥우리에 씌워져 끌려갔다. 설 차례를 준비하던 이곳 주민들은 김덕명 대접주의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했다고 전해진다. 김덕명 대접주 역시 나주의 일본군에게 이송됐다.
▲ 김덕명 대접주의 체포지인 절골 입구. 김덕명 대접주가 재실이 있는 이곳으로 피신하자 재실의 산지기가 김씨 문중에 김덕명의 구명을 요청했지만 문중에서는 김덕명을 역적이라고 고발해 1895년 설날인 1월 1일 체포됐다. |
▲ 김제 금산면 쌍용리 용계마을 김덕명 대접주의 납골당과 묘비. 김덕명 대접주의 무덤은 안골에 있었으나 집안에서 2007년에 무덤을 없애고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고 무덤에 있던 묘비도 이곳으로 옮겼다. 필자는 1988년 여름에 안골의 김덕명 대접주의 묘소를 찾아 무덤 주변을 정리했다. |
호남의 동학농민군 장흥으로 집결
1894년 11월 25일 태인 전투 패배 후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해산됐으나 전국에서 벌어진 동학혁명은 이듬해 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그중 하나가 석대벌 전투로 유명한 전라남도 장흥의 동학혁명이다. 장흥은 고부 기포 당시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부사로 재임하던 곳이기도 했다. 장흥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시기는 1860년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동학이 들어온 시기는 1890년대 들어와서였다. 동학혁명 당시 장흥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이방언, 이인환 접주는 1891년 입도했고 주변의 강진에도 동학이 전파됐다. 동학혁명기 장흥에는 대덕 대접주 이인환, 남면 대접주 이방언, 부산 대접주 이사경, 웅치 대접주 구교철, 유치 대접주 문남택 등이 있었고, 강진에는 김병태가 대접주로 있을 정도로 동학이 왕성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를 만들어 이두황의 경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는데, 장태를 만든 장흥의 대접주 이방언을 장태대접주라고 불렀다.
7월 30일 이용태에 이어 장흥에 부임한 박헌양(朴憲陽)은 유림들과 동학농민군 토벌을 모의했다. 그는 수성군을 편성하고 10월에 들어와서는 수성소를 설치해 동학농민군 탄압을 위한 대비를 갖췄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커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한 채 민보군을 훈련시켰다. 나주부사 민종렬이 동학농민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은 박헌양이 동학농민군을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해 장흥 읍내의 동학도 일부가 체포돼 곤욕을 당했다. 10월 19일 벽사역 찰방과 장흥부사, 강진현감, 전라병사에서는 일제히 동학농민군 소탕에 들어갔다. 이렇게 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였다.
재기포 이후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11월에 이르면 수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여전히 장흥부 외곽 지대에 웅거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11월 25일에 대흥에서 이인환(李仁煥) 대접주도 기포해 세력을 더 확장시켰다. 전봉준의 부대가 연패하고 나주의 손화중, 최경선의 부대가 패해도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굳건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태인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잔류병과 광주, 나주의 동학농민군도 장흥으로 집결했다. 이방언 대접주도 전봉준 부대와 합류했다가 연패하자 장흥으로 돌아왔다. 금구의 김방서, 화순의 김수근, 능주의 조종순 대접주 등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장흥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남평, 보성, 능주, 화순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은 모두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장흥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최소 1만, 많게는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장흥 동학농민군 벽사, 장흥, 강진 점령
장흥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12월 초에 들어와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은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강진병영을 차례로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이 공세를 편 이유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먼저 장흥 일대를 점령해 근거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다.
12월 1일 사창에 집결한 농민군들은 12월 3일 벽사역과 장흥부 인근까지 진출했다. 동학농민군은 4일 새벽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벽사관역으로 진격했다. 이미 역졸들은 도망치고 없어 동학농민군은 단숨에 벽사역을 차지했다. 벽사역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헌양은 장흥부를 사수하기 위해 수성군을 다독였으나 사기는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다음날인 5일 새벽 동학농민군은 어둠을 헤치고 장흥읍성인 장녕성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동학농민군은 장녕성으로 진격해 북문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수성군은 달아나기 바빴고 전투를 지휘하던 박헌양은 동헌으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은 1시간도 안 돼 장녕성을 장악했다. 부사 박헌양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에 의해 희생된 수성군의 수는 96명이었다.
장흥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12월 7일 새벽 강진현을 공략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동학농민군이 아침 8시경 안개를 이용해 성 밑까지 다가가자 관군 측은 소리를 지르며 동학농민군에 대항했다. 그러나 잠시 후 동학농민군이 포를 쏘아 대면서 “죄 없는 백성과 병졸들은 모두 성 밖으로 나와라. 만일 이속과 별포에 뒤섞이면 죽을지 모른다.”고 소리치자 병졸과 백성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은 강진읍의 동문과 남문을 무너뜨리고 강진읍성을 차지했다. 이렇게 강진읍성은 1시간 만에 동학농민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다음 목표인 전라 병마절도사가 있는 강진병영으로 이동했다. 병영 공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력도 많았고 병사의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장흥과 강진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병영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병영을 이끌던 수성장 방관숙과 도통장 윤권중은 제 살길만 찾는 무능하고 교사한 인물들이었다. 군무에 무지한 병사 서병무(徐丙懋)도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뒷전에 물러나 있을 정도로 병영은 무질서했다.
동학농민군은 12월 10일 새벽 2시에 사방에서 진격해 병영성 동쪽의 세 봉우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병영을 향해 포격을 했고 병영에서도 밖을 향해 포를 쏘아 사방은 화염과 포연으로 뒤덮였다. 그러자 병영에서 피난민들이 일제히 밀려 나와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병사 서병무는 피난민 틈에 섞어 병영을 빠져나와 영암으로 도망쳤다. <오하기문>에 병사 서병무의 도피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서병무가 크게 놀라 소매 좁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해 가리개를 쓰고 옥로(玉鷺, 갓 머리의 옥 장식)는 떼어 감추었으며, 인부(印符)를 가슴에 품고 짚신 신발로 피난민과 섞여 성을 빠져나와 영암으로 달아났다.
비록 병사는 도망쳤지만 우후 정규찬 등 남은 장교들이 독려하고 앞장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저항은 이어졌다. 오전 10시경에 동학농민군은 목책에 불을 질러 병영을 불바다로 만들고 세 방향에서 함성을 지르며 병영을 공격해 들어갔다. 병사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접한 병사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대부분 도망쳤다. 동학농민군은 강진병영을 장악하고 화약고를 차지하려 했지만 감관 김두흡이 화로를 안고 화약더미로 들어가 폭사했다. 이로 인해 화약고가 폭발해 관군과 동학농민군 모두 피해를 입었다.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정오경에 동학농민군은 완전히 강진병영까지 차지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