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91)
2부(41)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얼마의 시간(時間)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遂安宅)이 보이지 않았다.
"응?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김삿갓은 방안을 두루 살폈으나
마누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異常)하게도 장지문 너머 윗방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豫感)이 심상(尋常)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엿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수안댁(遂安宅)이 바람벽에
산신(山神) 탱화(幀畵)를 걸어 놓고
그 앞에 단정(端正)히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반(小盤) 위에 정안수[井華水(정화수)]와
촛불까지 밝혀 놓고,두 손을 허공(虛空)에 벌렸다가 합장(合掌)하며 큰절을
올리며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주문(呪文)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괴상(怪狀)한 광경(光景)을 보는 순간(瞬間),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해 왔다.
물어보나 마나 마누라는 지금(只今)
"男便(남편)을 죽지 않게 해달라"고 무언가에게 축원(祝願)을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分明)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내가 죽을까 봐
저렇게도 겁이 나는 것일까?)
다리가 부러진 정도로 죽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도 저렇게까지 겁을 내는 것은,
"재혼(再婚)을 하면 남편(男便)이 죽는다." 고 말한 무당의 예언(豫言)이 강박(强迫)
관념(觀念)이 되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성싶었다.
(사람이 미신(迷信)에 빠지면
저렇게도 어리석게 되는 것일까?)
김삿갓은 그런 망령(亡靈)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언제 흉악(凶惡)한 사태(事態)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豫感)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當場) 뭐라고 말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기도 하여,
못 본 것처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수안댁(遂安宅)은 축원(祝願)을 연방 올려대며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는데,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니
그 가운데는 이런 말도 있었다.
"기사생(己巳生) 김삿갓은 아무 죄(罪)도 없는 선량(善良)한 사람이오니,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천제(天帝)께서는 특별(特別)히 헤아리시어서,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죄(罪) 많은
이 사람을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 몸은 본디 청상살(靑孀煞)을 타고난
죄(罪) 많은 몸이옵니다.
그런데도 자신(自身)의 분수(分數)를 넘어
선량(善良)한 남자(男子)를 유혹(誘惑)한 것은 오로지 이 몸의 죄(罪)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제님께서는 이 몸을 처벌(處罰)하시고, 김삿갓이
환생(還生)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김삿갓은 그와 같은 주문(呪文)을
듣는 순간(瞬間) 등골이 오싹해 왔다.
(혹시 마누라가 정신(精神)이
돌아 버린 것은 아닌가?)
이 세상(世上)에서 어떤 것이 소중
(所重)하다고 한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所重)한 것이 있겠나?
그런데도 수안댁(遂安宅)은 지금(只今)
"남편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祝願)을 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김삿갓은 가슴이 메어 오는 고뇌감
(苦惱感)을 느꼈다.
(저 여인(女人)과는 오다가다 만난 부부(夫婦)이건만, 이렇게까지도 나를 소중(所重)하게 생각하고 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형용(形容)하기 어려운 감동(感動)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무당이 함부로 지껄인 허튼 수작(酬酌)이 수안댁(遂安宅)에게 미친 영향(影響)이 너무도 크게 파급(波及)된 것을
직접(直接) 자신(自身)의 눈으로 보고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리고 수안댁(遂安宅)에게 오랜 세월(歲月)을 두고 뿌리 깊이 자라온 망상(妄想)을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불식(拂拭)시켜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라는 판단
(判斷)을 하였다.
(그렇다! 이런 일이란 시급(時急)히
바로 잡으려다가는 오히려 역효과
(逆效果)가 나기 쉬운 법(法)이니,
오랜 세월(歲月)을 두고
서서히 고쳐 주기로 하자!)
김삿갓은 내심(內心),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만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수안댁(遂安宅)은 오랫동안 축원(祝願)을
올리다가 시치미를 떼고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어떠세요? 간밤에는 상처(傷處)가
아프셔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죠?"
김삿갓은 그제야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간간이 아프기는 했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程度)는 아니었어. 당신(當身)은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
"옆집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침을 곧 지어 올 테니
그동안 한잠 더 주무시도록 하세요."
수안(遂安宅)댁은 제단(祭壇)을 모아 놓고
축원(祝願)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은밀(隱密)한 일이 알려지면
효과(效果)가 없어지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김삿갓 역시(亦是) 그 일에는 일체 (一切)의 언급(言及)을 회피(回避)하며,
"하룻밤 자고 나니까,
아프기가 훨씬 덜 하군.
이대로 가면 의원(醫員)의 말대로
석 달 안에 틀림없이 완쾌할 거야"
일부러 수안댁(遂安宅)이 듣기 좋아할 소리만 했다.
그러나 남편(男便)이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수안댁(遂安宅)은 김삿갓이 매일
잠든 때마다 비밀리(祕密裏)에 정안수[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축원(祝願)을 올리는 일은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매일 남편(男便)이 잠든 오밤중부터
축원(祝願)을 올리다가 새벽닭이 울면
부랴부랴 아랫방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이러기를 두어 달 지나는 동안에
김삿갓의 부러진 다리는 거의 다 붙어서,
스스로 변소(便所) 출입(出入)을 비롯해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느 날
마누라에게 이런 농담(弄談)을 하였다.
"그동안 자네는 내가 죽을까 봐
무척 겁을 냈던 모양(模樣)인데,
이것 보라고, 내가 죽기는 왜 죽는가?"
김삿갓이 입바른 농담(弄談)을 지껄인 것은
마누라를 기쁘게 해주려는 의도(意圖)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수안댁(遂安宅)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말했다.
"에그머니나! 천제(天帝)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런 방정맞은 말씀을 하고 계세요?
상처(傷處)가 아무리 좋아졌기로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천제(天帝)께서 노여움을 타시면
무슨 앙화(殃禍)를 받게 될지 모르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금(只今)
그 말씀은 당장(當場) 취소(取消)하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瞬間),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우리나라 풍속(風俗)으로는
병자(病者)가 자기 입으로 "병(病)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지 않게 되어있다.
왜냐면 천제(天帝)께서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타 병(病)을
또다시 나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신(迷信)이나 다름없는 민속(民俗) 신앙(信仰)인지 모른다.
김삿갓도 그런 풍속(風俗)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뱉어 놓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왕(已往) 말이 난 김에 마누라의 미신적(迷信的)인 망상(妄想)을
조금이라도 고쳐 주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미신(迷信)에 불과한 것이야. 한번 좋아진 상처(傷處)가 그런 말을 했다고 다시 나빠질 리는 없지 않은가.
당신(當身)은 무당의 말을 과신(過信)하는
모양(模樣)인데 그렇지 않은 게 좋아요.
세상(世上)에 무당처럼 무식(無識)한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무당의 허튼수작(-酬酌)을 신주(神主)처럼 떠받드냐 말이야."
김삿갓은 마누라의 생각을 고쳐 주려고
무당을 의식적(意識的)으로 깎아내렸다.
그러나 수안댁(遂安宅)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남편(男便)을 나무라는데,
"당신은 어쩌려고 오늘따라
그런 무서운 말씀만 함부로 하세요.
무당처럼 무식(無識)한 사람이 없다지만,
무당은 학식(學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유식(有識)하더라도 천제 (天帝)께서 신(神)을 내려주지 않으시면 절대(絶對)로 무당이 될 수 없어요.
무당은 학식(學識)이 없더라도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천제(天帝) 로부터 특별(特別)히 점지(點指)받고,
인간세계(人間世界)와 하늘을
연결 (連結)하는
"하느님의 사자(使者)"라는 걸 아셔야 해요.
당신(當身)은 그런 것도 모르시면서
어쩌면 무당을 그렇게도 업신여기세요."
김삿갓은 무심중에 반발심(反撥心)이
솟구쳐 올라 대번에 마누라를 공박
(攻駁)했다.
"뭐? 무당이 하느님의 사자(使者)라고?
자네가 무당을 그렇게까지 신봉(信奉)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는걸.
무당은 어디까지나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는 속물(俗物)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무당 따위가 무슨 빌어먹을
"하느님의 사자(使者)"란 말인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깨끗이 청산(淸算)해 버려요."
김삿갓은 정면(正面)으로 공격(攻擊)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참고 참아오던 불만(不滿)이 무심중에 폭발(暴發)한 것이었다.
이런 저변(底邊)에는 마누라인 수안댁
(遂安宅)에 대한 애정(愛情)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질책(叱責)으로 무서운 결과(結果)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수안댁(遂安宅)은 책망(責望)을 받고 나자
두려움으로 몸을 벌벌 떨더니
"다 당신(當身)은 천~ 천제(天帝)님한테
무슨 앙화(殃禍)를 못 받으셔서 그 그런
저주(咀呪)의 말씀을 하~ 함부로!"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원인(原因) 불명(不明)의 공포감
(恐怖感)에 질려 졸도(卒倒)를 한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 왜 이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