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물러 가고 행복이, 자야망갈라가타 독송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우리나라 불자들이 애용하는 생활경전이 천수경이다. 그래서 법회할 때 빠짐 없이 독송되고 있다. 그런 천수경독송에 대하여 ‘천수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천수경에 실려 있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다라니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라 부르는데, 산스크리트어를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로 시작 되는 다라니는 대부분 뜻도 모른 채 외우고 독송하는 것이 보통이다. 짧은 진언이나 긴 다라니의 경우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이 담겨 있어서 중생들의 소견으로는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뜻을 알 수 없기때문이라 한다. 또 해석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자들은 뜻도 모른채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것이 보통이다. 최근 다라니 108독 철야정진 기도가 사찰 마다 대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다라니기도는 수행의 방편으로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뜻과 의미를 모르고 독송하는 다라니에 대하여 해설판을 볼 수 있다. 뜻을 알고 나면 놀라운 사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왜 해석을 하면 안되다고 말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청경(靑頸)’ 에 대한 것이다.
왜 푸른 목을 갖게 되었을까?
청경(靑頸)은 ‘푸른 목’이라는 뜻이다. 다라니에서는 ‘니라간타’라 부른다. 관세음보살은 왜 푸른 목을 갖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중생을 위하여 기꺼이 독을 마신 관세음보살의 자비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인터넷시대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이 푸른 목을 갖게 된 것은 인도 고대신화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 니라간타(n?laka??ha)는 푸른 (N?la) 목(ka??ha)으로 번역 되어 청경(靑頸)이라 한다. 인도신화인 라마야나(R?m?ya?a)와 마하바라타(Mah?bh?rata)에 다음과 같은 신화가 있다.
우유의 반죽(Milky Water)으로부터 처음 생겨난 것은 칼라꾸따(k?lak??a;hal?hala)라 불리우는 검은 독연기로, 누군가 이 독연기를 마실 정도로 강한 사람을 발견할 때까지 작업은 중단되어야 했다. 이때 쉬바(?iva)가 등장하여 초연히 자리에 앉아 선정에 들었으며, 우아한 모습으로 컵에 담긴 <죽음의 기운>을 들이켰다. 그는 요가의 힘으로 그 죽음의 기운을 목 속에 유지케 하였는 바, 그의 목은 푸른 색으로 변했고 그로 인해 그는 닐라깐타(n?laka??ha) 즉, 푸른 목[靑頸]이라 불리우게 된 것이다.”
(마하바라타(Mah?bh?rata의 내용을 토대로 한 - 하인리히 짐머-H. Zimmer-의 설명)
마하바라타에 따르면 시바(?iva)신이 중생을 위하여 기꺼이 독배를 마심으로서 푸른 목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시바신만이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시바신만이 해로운 독을 먹을 수 있는 용기와 자비의 마음을 가진 것으로 묘사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수다라니에 실려 있는 내용은 푸른 목을 가진 니라간타를 기억하면서, 니라간타를 명호 하면서 성관자제에게 귀의하고 피난처로 삼고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 하였다. 가르침의 완성은 믿음으로부터 시작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고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 ‘맹신’이라고 한다. 의미도 모르는 채 진언이나 다라니를 독송하며 복을 바란다면 이를 ‘기복’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을 말한다. 이를 ‘삿다(sadda)’라 한다.
수호경(paritta,護呪)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으로 대표적인 것이 사성제이다.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성제는 출세간의 정견으로서 믿음과 이해와 더불어 실천 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세간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설하신 방편법문을 통하여 바른 믿음을 낸다. 대표적으로 망갈라경(행복경, Sn2.4), 라따나경(보배경, Sn2.1), 멧따경(자애경,Sn1.8) 등이다. 이런 경들은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재가에서도 독송되고 있다. 마치 천수경처럼 생활경이고 동시에 ‘수호경’이다.
수호경으로 또 하나 더 있다. 자야망갈라가타이다. 비록 5부 니까야에 실려있지 않지만, 5부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승리와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게송이다.
자야망갈라가타가 언제부터 불리워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동시에 수호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신묘장구대라니와 같은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야망갈라가타를 알게 된 것은
자야망갈라가타를 알게 된 것은 블로그활동을 하고 나서 부터이다. 2006년 처음 접하였고, 이를 2007년부터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게송에 대한 소개와 음악을 올렸으나 차츰 음악동영상까지 만들어 올렸다. 중국계 말레이시아 불자자수인 황혜음(黃慧音, Imee Ooi)이 부른 노래를 바탕으로 하여 빠알리자막을 넣어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2006년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래를 통하여 듣고 있다. 또 빠알리어로 된 내용을 외웠다. 마치 산스크리트어로 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뜻도 모른채 우격다짐으로 외웠듯이, 자야망갈라가타 역시 막무가내식으로 외웠다.
자야망갈라가타를 매일 듣고 따라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빠알리어로 된 게송에 대한 내용을 대충 알고 있었으나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어 단어의 의미를 찾아 보기로 하였다. 이왕이면 모르고 듣는 것 보다 알고 들으면 더욱 더 신심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야망갈라가타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검색을 하면 국내웹에 도배가 된 듯하다. 아마도 블로그를 통하여 최초로 소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해외웹에서 조차 쉽게 검색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빠알리어에 대하여 배운적이 없지만
초기불교를 접하기 전에 전혀 알지 못하였고 매우 생소한 자야망갈라가타가 이제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시간 날 때 마다 듣고 따라 독송하지만 전혀 질리지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빠알리사전을 이용하여 단어 정리를 하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빠알리 사전(P?li Dictionary)’과 전재성박사가 펴낸 ‘빠알리-한글사전 개정판’을 이용하였다.
자야망갈라가타는 여덟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라, 야차, 코끼리, 앙굴리말라, 찐짜, 삿짜까, 바까 이렇게 여덞가지 주제로 되어 있는데 이들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에 대하여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고 후렴구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마지막 게송인 아홉 번째 게송은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으로 되어 있어서 불자들의 신심을 고취시키는 유통분으로 되어 있다.
빠알리어에 대하여 배운적이 없다. 그래서 문법도 모르고 독해도 가능하지 않다. 다만 빠알리 사전을 찾아 가면서 단어의 뜻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의 뜻만 알아도 독송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고 부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를 나열하면서 여덟 게송에 대하여 의미를 짚어 보았다.
첫 번째 게송, 마라(Mara)
마라(Mara)
첫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자야망갈라가타 첫 번째 게송이다.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려고 할 때 마라의 방해에 대한 것이다. 마라가 수천의 군대를 끌고와 성도하지 못하게 하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마군의 방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Es? namuci te sen? ka?hass?bhippah?ri??, Esa mu?ja? parihare dh?ratthu mama j?vita?,
나무치여, 이것들이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n3.2)
(빠다나경-Padh?nasutta-정진의 경, 숫따니빠따, 전재성님역)
악마 나무치(namuci)와 그의 군대(sen?) 에 대한 부처님의 선전포고이다. 항전의 표시로서 문자풀(mu?ja)을 걸치겠다고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머리둘레나 깃발이나 무기에 문자풀을 묶었다’고 한다. 따라서 문자풀을 머리에 두르는 풍습은 결전을 각오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군에게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Sa?g?me me mata? seyyo ya?ce j?ve par?jito)”고 결전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Samant? dhajini? disv? yutta? m?ra? sav?hini?,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를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빠다나경-Padh?nasutta-정진의 경, 숫따니빠따,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자야망갈라가타에 실려 있는 1번 게송과 유사하다. 코끼리에 올라 탄마라와 각종 무기와 깃발을 가진 수천의 마군에 대하여 묘사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라와 마군에 대하여 결연한 결전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마라와 마군을 어떻게 물리쳤을까. 자야망갈라가타에 따르면, ‘다나디담마위디나(D?n?di-dhamma-vidhin?)’라 하였다. ‘가르침’으로 물리친것이다. 영역에서는 관용과 미덕이(generosity and other virtues)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마군에 대하여 전쟁으로 물리친 것이 아니라 담마의 힘으로 이긴 것이다. 그래서 마라는 다음과 같이 독백하며 부처님 곁을 떠난다.
[악마] ‘우리들은 칠년 동안이나 세존을 발자국마다 따라 다녔다. 그러나 새김을 확립한 올바로 깨달은 님께 다가갈 기회가 없었다.
기름 빛깔을 한 바위를 까마귀가 맴돌며 생각한다. 이곳에서 부드러운 것을 찾을 수 있겠지. 아마도 맛좋은 먹이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어 까마귀는 거기서 날아가 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 본 그 까마귀처럼, 우리는 실망하여 고따마 곁을 떠난다.’
(빠다나경-Padh?nasutta-정진의 경, 숫따니빠따,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담마로서 마라를 굴복시켰다. 그런 부처님의 위대한 힘이 항상 내게도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야망갈라니(jaya-ma?gal?ni)’이다.
두 번째 게송, 알라와까(Alavaka)
두 번째 게송은 야차 알라와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알라와까(Alavaka)
두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알라와까에 대한 이야기 역시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다. 알라와까는 야차이다. 초기경에 등장하는 야차는 어떤 성격일까.
주석에 따르면, 야차는 비안간(非人間)에 속하는 무리로 아귀보다는 약간 높은 단계의 귀신으로 인간과 건달바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영혼이나 유령, 도깨비, 요정, 괴물이 여기에 속한다.
자야망갈라가타 두 번째 게송에 등장하는 야차 알라와까는 주석에 따르면 뱅골 보리수에 살고 있는 식인귀라 한다. 숫따니빠따의 각주에 따르면 알라비 국의 왕은 야차에게 매일 한 사람씩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하고 풀려났다. 그런데 왕은 시장과 대신들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죄인들을 제물로 바쳤고 죄인들이 떨어지자 각 가정에서 한 어린아이를 바쳐왔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부처님은 자비의 눈으로 지켜 보고 야차가 사는 궁전으로 찾아 간다. 이 소식을 듣고 야차 알라와까가 여러가지 신통을 동원하여 부처님에게 싸움을 걸고 괴롭히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이 때 야차 알라와까는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세존께서는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세존께서는 들어오셨다.
두 번째에도 야차 알라와까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다시 세존께서는 다시 나가셨다.
다시 야차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다시 세존께서는 들어오셨다.
세 번째에도 야차 알라와까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또 다시 세존께서는 다시 나가셨다.
또 다시 야차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또 다시 세존께서는 들어오셨다.
(알라와까경-??avakasutta-알라바까의 경, 숫따니빠따 Sn1.10, 전재성님역)
이렇게 야차 알라와까가 싸움을 걸어 올 때 부처님은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이렇게 나갔다가 들어 오기를 세 번 걸쳐 반복하였는데, 네 번째 이르러서 부처님은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야차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야차가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때 마다 부처님은 십선법을 설하고, 거센물결을 어떻게 건넜는가 등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이렇게 부처님의 야차의 도발에 대하여 인내와 자제로서(Khant?-sudanta-vidhin?) 제압한 것이다.
세 번째 게송, 날라기리(Nalagiri)
세 번째 게송은 미친코끼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날라기리(Nalagiri)
세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미친 코끼리 날라기리이야기는 ‘데와닷따’와 관련이 있다. 데와닷따는 부처님과 사촌간이다. 부처님의 누이 바다까짜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데와닷따는 교단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으나 부처님이 열반하기 8년 전에 이익과 명예를 위해 부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승단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악한 마음을 품고 부처님을 해치려 한 것이다.
데와닷따는 궁술사를 매수하여 부처님을 살해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부처님에게 교화 되어 실패로 끝났고, 다음에는 부처님이 깃자꾸따 산 기슭을 지나갈 때 커다란 바위를 굴려 살해 하려 하였으나, 바위 조각 하나에 피가 났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나운 코끼리를 취하게 하여 부처님이 지나는 길에 풀어 놓았다. 이 것이 자야망갈라가타 세 번째 게송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은 미친 코끼리에게 ‘자비의 세례를 베풀어(Mett?mbuseka-vidhin?)’ 교화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비록 축생에 지나지 않은 동물일지라도 부처님의 자비에 저절로 순하게 된 것이다.
네 번째 게송, 앙굴리말라(Angulimala)
네 번째 게송은 연쇄살인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앙굴리말라(Angulimala)
네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앙굴리말라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자이었다. 부처님 당시 꼬살라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경(M86)에 따르면, 앙굴리말라는 사람을 죽이고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화관을 만들어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흉폭한 연쇄살인자가 부처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희생의 제물로 삼고자 달려 들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묘사가 게송에서 “다완띠 요자나 빠탕굴리 마라완땅(Dh?van-ti- yojana-patha?guli-m?lavanta?”이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문구가 앙굴리말라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patha?guli-m?lavanta?’라는 문구에서 앙굴리(a?guli)는 손가락을 의미하고, 말라(m?la)는 화환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글자가 합쳐져서 ‘앙굴리말라(a?guli m?la)’는 이름이 부여 되었는데, 이는 손가락화환이라는 뜻이다.
“다완띠 요자나 빠탕굴리 마라완땅(Dh?van-ti- yojana-patha?guli-m?lavanta?”라는 구문은, 부처님을 살해 하려고 가까이 가지만 손가락으로 만든 화환 길이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신통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문의 구체적은 뜻은 무엇일까. 이 구문을 이해 하기 위하여 맛지마니까야의 앙굴리말라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흉적 앙굴리말라는 칼과 방패를 잡고 활과 화살을 메고 세존의 뒤쪽으로 바싹 쫓아왔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초월적인 힘을 행사하여 흉적 앙굴리말라는 온 힘을 다해 달려도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는 세존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흉적 앙굴리말라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나는 일찍이 질주하는 코끼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일찍이 질주하는 말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일찍이 질주하는 수레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일찍이 질주하는 사슴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온 힘으로 달려도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는 이 수행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앙굴리말라경-A?gulim?la sutta?- To A?gulim?la- 앙굴리말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흉폭한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를 신통으로 오로지 한 뼘 밖에 움직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조복시켰다.
다섯 번째 게송, 찐짜 마나위까(Cinca Manavika)
다섯 번째 게송은 거짓임신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찐짜 마나위까(Cinca Manavika)
다섯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상대방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스캔들을 유포하는 것 만큼이나 효과적인 것이 없는 것 같다. 선거 때만 되면 각종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여자와 관계된 것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로 낙인 찍어 매장 하는 방법이다. 부처님도 그런 수법에 당하였다.
법구경 인연담(Dhp176)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이후 첫 시기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아지고 부처님의 덕성이 널리 퍼지자, 이를 시기하는 이교도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부처님을 치욕스럽게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이교도 중에 요정과 같이 아름다운 ‘찐짜 마네위까’라는 여인을 시켜 거짓 임신녀로 만들었다. 그래서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뱃속의 아이가 부처님의 아이임을 말하면서 모욕을 주었다. 이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게송에 따르면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Santena soma-vidhin?)’으로 제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연담에 따르면 이런 사실을 안 제석천이 네 명의 신들과 함께 장소로 이동한 후, 쥐로 변하여 여인의 몸에 배모양의 나무를 묶은 줄을 끊어 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거짓임신이 들통나게 만든 것이다.
여섯 번째 게송, 삿짜까(Saccaka)
여섯 번째 게송은 자이나교도와 토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삿짜까(Saccaka)
여섯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삿짜까는 자이나교도이다. 토론의 달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삿짜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짜까] “무릇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승가를 이끌고, 대중을 이끌고, 무리의 스승으로, 또한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라고 인정되더라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떨지 않고 전율하지 않고 크게 감동 받지 않고, 겨드랑이에 땀을 흘리지 않는 자를 보지 못했다. 내가 무심한 기둥에다가 말을 걸어 논쟁을 해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기둥도 떨고 전율하고 크게 감동 받을 것인데, 하물며 인간의 존재이랴.”
(쭐라삿짜까경- C??asaccaka Sutta- ?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어떤 상대라도 논파 할 수 있다는 삿짜까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삿짜까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둥도 감동 받아 떨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만만 자이나교도 삿짜까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그를 조복받았을까. 게송에 따르면 ‘지혜의 불밝혀(Pa???-pad?pa-jalito)’ 굴복 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니간타의 교도 ?짜까는 침묵했다.
(쭐라삿짜까경- C??asaccaka Sutta- ?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무아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빤짜왁기야경(S22:59, 무아의 특징경)’에 있다. 오비구가 이 설법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 경이다.
경에서 부처님이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통제 밖에 있음을 이야기하자 토론과 논쟁의 달인 삿짜까는 아무런 반론을 제기 하지 못한다. 두 번째도 침묵하고, 세 번째도 답변을 못하자 부처님은 “악기베싸나여, 자, 해명해 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때 야차 바지라빠니가 나타나 금강저를 지니고 삿짜까 머리위에 공중에서 서서 말하길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했는데 답변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그대의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터지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삿짜까는 두려워하고 전율하고 몸에 털이 곤두서서 세존께 보호를 청하고, 세존께 피난을 청한다.
부처님의 무아의 특징에 대한 설법을 듣고 마침내 삿짜까는 부처님의 모두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만만했던 모습과 달리 침묵하고 얼굴을 붉히고 어깨를 떨구고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대꾸 없이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일곱 번째 게송, 난도빠난다(Nandopananda)
일곱 번째 게송은 용왕에 대한 이야기이다.
난도빠난다(Nandopananda)
일곱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초기불교에서 용이라는 존재는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용이 길상의 존재인 것과 달리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삿된견해를 가진 사악한 존재로 표현 되고 있다. 그런 용왕중의 하나가 자야망갈라가타에 등장하는 용왕 ‘난도빠난다(Nandopananda)’이다.
용왕 난도빠난다이야기는 청정도론에 실려 있다. 신통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신통제일이라 불리우는 목갈라나 존자와의 신통대결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 따르면 신통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서(Iddh?padesa-vidhin?) 조복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직접 신통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제자인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의 의해서 간접적으로 조복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묘사된 것중에 신통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왕은 연기를 뿜었다. 장로도 ‘네 몸에만 연기가 있는 것이 어니라 내 몸에도 있다’고 말하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용왕의 연기는 장로를 괴롭히지 못했지만 장로의 연기는 용왕을 괴롭혔다.
그 다음에 용왕은 불꽃을 내 뿜었다. 장로도 ‘너의 몸에만 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몸에도 역시 불이 있다’고 말하면서 불꽃을 내 뿜었다. 용왕의 불은 장로를 괴롭히지 못했지만 장로의 불은 용왕을 괴롭혔다.
(청정도론, 제12장 신통변화, 대림스님역)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에게 있어서 난도빠난다 용왕길들이기가 신통의 백미라 한다.
삼보에 대한 청정한 믿음이 없고 삿된 견해를 갖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용왕 난도빠난다 이야기는 빠알리니까야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정도론에서 신통을 설명할 때 목갈라나 존자와 신통을 겨루는 대상으로 묘사 되고 있다.
그렇다면 5세기 붓다고사는 왜 청정도론에 용왕이야기를 언급하였을까. 추측이지만 5세기 당시 인도대륙에서의 새로운 사조에 대한 위험성을 느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스리랑카라는 고립된 섬나라이다. 지형적인 이유에서일까 3차 결집 이후 빠알리 삼장이 고스란히 보전 되어 왔다. 그러나 대륙의 상황은 달랐다. 새로운 사조와 사상이 난무 하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도 그런 새로운 사조 중의 하나 이었다.
대승불교 흥기의 중심에 용수(150?-250?)가 있었다. 3세기 용수는 제의 석가모니 또는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웠는데, 이는 용수의 중관사상에 의한 것이다. 그런 용수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나가르주나(N?g?rjuna)’이다.
용이라는 뜻의 ‘나가(N?g?)’는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부정적이다. 따라서 5세기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삿된견해를 가진 용왕 난도빠난다를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존자가 제압한 것을 싣고 있는데, 이는 대륙에서의 새로운 사조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발상이 아니었을까.
여덟 번째 게송, 브라흐마 바까(Brahma Baka)
여덟 번째 게송은 바까 하느님(브라흐마) 이야기이다.
브라흐마 바까(Brahma Baka)
여덟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여덟 번째 이야기는 자야망갈라가타에서 클라이막스라 보여진다. 마라, 야차, 코끼리, 앙굴리말라, 거짓임신녀, 논쟁가, 용왕과 달리 ‘하느님(브라흐마)’을 조복 시켰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에서는 브라흐마(Brahma)를 하느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 브라흐마는 부처님 당시 우주의 창시자이자 최고신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브라흐마 중에서도 망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있다. 자야망갈라가타에 등장하는 바까(bak?)브라흐마가 대표적이다. 어떤 망상을 가진 것일까.
바까 브라흐마는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천상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세존]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또한 그대가 늙고 쇠퇴하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대가 다른 벗어남이 있는데도 다른 보다 높은 벗어남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바까브라흐마경-Bakabrahmasutta-하느님 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6:4(1-4),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던 브라흐마를 조복시켰다. 이를 자야망갈라가타에서는 부처님의 승리로 보아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 (Ta?-tejas? bhavatu te jaya-ma?gal?ni)”라는 후렴구로 맺고 있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는 내용이다.
아홉 번째 게송, 붓다( Buddha)
마지막 아홉 번째 게송은 유통분이다.
붓다( Buddha)
아홉 번째 게송에 대한 빠알리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유통분을 보면 마치 대승경전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 금강경에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 승피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라는 구절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 내용 중에 '사구게'를 읽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명한다면 마음을 밝게 하는 복덕이 보배를 남에게 베푸는 복덕보다 많다 할 것이니라.”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구절과 유사한 것이 자야망갈라가타 9번 게송이다.
게송에서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수지독송공덕에 대한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의 마지막 게송인 유통분을 보면 비록 기복적인 면이 보이긴 하지만, 대승불교에서 생활경전이라 불리우는 천수경의 다라니와 비교해 보았을 때 초기경전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로서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불행이 물러 가고 행복이
자야망갈라가타는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와 축복에 대한 게송이다. 이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고 경전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마라의 군대는 담마로서 조복받고, 야차는 인내로서, 술취한 코끼리는 자애로서, 앙굴리말라는 신통으로, 거짓임신녀는 부드러움으로, 논쟁가는 가르침으로, 용왕은 제자의 신통으로, 그리고 최고신이라 불리우는 하느님은 지혜로서 조복받는다. 이 모두가 위대한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것으로 이 여덟가지를 매일 되새기면 모든 불행이 물러 가고 행복이 찾아 올 것이라 한다.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 G?th?).docx 자야망갈라가타(길상승리게).doc
2012-01-11 진흙속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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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