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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정 유적비
* 부산시 수영구 망미2동 17번지
정과정
️ 그 확실한 장소와 모양은 알길이 없다. 물론 최근에 현대적 상징적으로 세웠다.
정과정
️고려가요 정과정곡 원문비
뜻을 새겨 풀어보면
▪️우리 님을 그리워하여 늘상 울고 있는 나는
저 접동새(두견새)와 비슷도 합니다.
▪️참이 아니고 거짓으로 꾸민 것인 줄을
아! 저 새벽하늘에 비쳐주는 조각달과 샛별만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우리 님이 계시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 우기시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지나친 일도 허물도 나에게는 털끝만도 없습니다.
뭇사람이 시기하여 남을 참소하는 말인데 슬픕니다.
▪️아! 우리 님이 나를 이미 잊으셨습니까?
아 우리 님이시여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들어 주셔서
제발 나를 전과 같이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정과정비 유적 해설
정과정비 유적 해설
정과정비 유적 해설
정과정비 유적 해설
정과정비 유적 해설
수령 400년 팽나무
경암
️경암.
️사람 얼굴이다.
️수영강변 이편한세상 아파트옆으로 정과정 유적비로 올라가는 길
️수영강변 <이편한세상 아파트> 옆으로 정과정 유적비로 올라가는 길
️정과정노래비가 있는 정과정유적비 공원은 뒷쪽으로 도시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앞에도 도로가 있어서 공간이 협소해졌으며, 도로의 소음도 있어서 쾌적하지는 않다.
️그러나 작은 공간이나마 고려 의종조에 귀양온 정서로 인하여 의종조 무심의난 전후 역사를 회고할 수 있으며, 작자를 아는 귀중한 고려가요 <정과정곡> 의 발상지를 유추할 수있는 소중한 곳이다.
🟫 이재익 시인은 망미동~연산동에 걸쳐있는 작은 산 배산에 오르며 정서의 고려가요 <정과정곡>과 배산이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 <봄날 배산에 오르다>를 지었다.
봄날 배산에 오르다
이재익 (2001.05)
과정로(瓜亭路) 지나서
배산(盃山)에 오르다
거칠산국(居漆山國) 허물어진 토성지(土城地)
우물터 물은 말랐지만
겸효대(兼孝臺) 선경은 의구하구나.
정과정곡(鄭瓜亭曲) 예서 지었세라
산접동새 소리는 사라지고
북향 망미인(望美人)하여
망미동(望美洞) 이름만 남았어라.
햇송순이 뼘을 웃자란 어린 소나무
가지 친 덩그런 윗둥과
망해정(望海亭) 띠 지붕에 어린
취로인부들 아린 손길에
아카시아 향기로운 봄날이 사윈다
바라보니 광안대교 웅장한 주탑
배산의 한(恨)도 저다리가 실어가네
▣ 배산과 정과정곡 역사·문화 산책
이재익 (전 부산남일고 교사,역사과, 시인)
️망미1동 부산남일고 뒤에 술잔을 엎어놓은 모양을 한 배산(盃山 ; 255m, 일명 잔뫼산)은 수영구 연제구의 경계가 되는 조그만 산이지만 이 산에 오르면 사방에 동래구, 금정구, 부산진구, 연제구, 해운대구, 수영구, 남구 등 부산의 16개 구 중에 7개구를 조망할 수 있으며 광안리 앞바다는 잡힐 듯이 가깝고, 해운대 동백섬이 보이는 전망 좋은 천혜의 산이다. 등산객은 무심코 오르지만 이 작은 산에도 적지 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산 중턱에서부터 정상까지 나선형으로 쌓은 테뫼식 토성은 허물어졌으나 옛 그릇과 기와조각들로 보아서 신라이전에 있었던 이 지방 거칠산국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1972년 부산광역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 거칠산(居漆山)국은 부산 동래구와 경남 양산군 일부 지방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장산국 또 는 내산국(萊山國)이라 하여 한 나라를 이룬 것을 신라가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거도열전(居道列傳)"에는 신라 제4대 탈해왕때 거도(居道)라는 장수가 거칠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하고 거칠산군을 두었다고 하였다. 거칠산군은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
️배산은 고려조에는 선인 김겸효(金兼孝)가 기거했다는 겸효대(兼孝臺)가 있었다고 하나 역시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겸효대는 해운대, 태종대, 오륜대, 몰운대(다대포), 의상대(범어사), 강선대(사상), 신선대(용호동)와 함께 부산 8대로 꼽힌다. 산 정상에 서면 바다가 바라보이는 강구연월((康衢煙月 ; 사통팔달로 뻗은 거리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 시가지에 분주히 살아가는 모습이 사방에 들어오는 수려한 경치는 여기가 바로 겸효대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중기 문벌귀족 사회도 기울어져 갈 무렵 의종의 이모부인 정서(鄭敍)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고 의종 5년(1151년)에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 동래 유배 시에 그가 거처하던 곳이 바로 이 배산 기슭 과정로였다. 수영교차로~연산9동 토곡 사거리 일대의 도로를 과정로(瓜亭路)라고 이름 지은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의종은 정서에게 '그대 무죄한 줄 알지만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니 잠시 가 있으라' 하였지만 영영 다시 부르지 않았다. 20년이 지나서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즉위(1170년)한 후에야 정서는 복권되었다.
️정서(鄭敍)의 유배지인 정과정(鄭瓜亭) 옛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동래현 남쪽 10리 지점으로 현재 연제구 연산9동~ 수영구 망미동 지역내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배산과는 2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이므로 정서가 전망이 좋은 이 산에 올라서 먼 서울(개성)을 바라보고 임금을 그리워하며 정과정곡을 구상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어차피 '정과정 옛터'라고 한 곳도 '동래현 남쪽1 0리' 라는 애매한 표현에 의거하여 추정한 지점일 뿐이다.
️망미동은 정서가 북향망미인(北向望美人, 미인=의종임금)하였다는데서 명명된 것 같다. 망미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용주면(龍州面), 남상면 등으로 불렸고 1914년 동래군 남면(南面) 망미리(望美里)라고 명명되었는데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세 가지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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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고려 충신 정서가 귀양살이를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을 향하여 망배를 들이고 임금을 사모하였다는 뜻의 望美人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
▪️둘째 망미동은 옛날 동래부의 고읍성이 있던 자리이고, 수영성의 북문 밖에 있어 좌수영의 수사(水使)가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향해 망배(望排)를 올린데서 왔다는 설.
▪️세째 망산(望山,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의 산)의 '망' 자와 배미산(배산의 다른 이름)의 '미' 자가 합쳐서 望美가 되었다는 설.
️그런데 수사가 망배를 하였다면 임금을 미인으로까지 사모하는 용어를 썼다는 것은 어색하다. 그런 전통이 있었다면 아마도 정서의 애절한 望美人의 전통이 내려온 것일 게다. 망산과 미산에서 온 이름이라는 것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의미가 다 함축되어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망미동에는 정서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 망미2동 4-7번지 일원의 수영강변을 예전에는 '오옹건니' 라고 불렸는데 정서가 정과정 모래톱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오이할아버지(정서)라는 별칭에서 또는 정서를 수영강을 자주 건네준 오씨 어부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이곳(수영자동차학원 부근, [e편한 세상] 이라는 아파트 단지와 도시고속도로 사이 언덕)에 1985년도에 정과정비 건립추진 위원회에서 화강암으로 된 시비를 세웠다.
️정서(鄭敍/?~?)는 음보(蔭補=음서 ; 5품 이상 고관자제 특별등용)로 벼슬에 나아가서 후에 정5품 내시낭중(內侍郞中)에 이르렀다. 인종의 동서(인종비 공예태후 여동생의 남편)로 문장과 묵죽화(墨竹畵)에 뛰어나서 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정과정곡 또한 뛰어난 노래이다. 정과정곡은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로 읊었는데 이를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삼진작(三眞勺, 속악에서 가장 빠른 템포)이라 하였고 후세인들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불렀다.
️10구체 향가 형식으로 지은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이다. 형식과 내용으로 보아 광의의 향가로 처리하는 학자도 있어 향가의 시대적 하한선이 12세기까지도 내려올 수 있다고 하는 논란이 되는 작품이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漢譯詩)가 실려 전한다.
🟫 내 님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그츠르신 달 아으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르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데 녀져라 아으 벼기시더니 뉘러시니잇가
과(過)도 허물도 천만(千萬)업소이다. 말 힛마러신뎌 슬읏븐뎌 아으
니미 나를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서.
뜻을 새겨 풀어보면
🟫 우리 님을 그리워하여 늘상 울고 있는 나는
저 접동새(두견새)와 비슷도 합니다.
참이 아니고 거짓으로 꾸민 것인 줄을
아! 저 새벽하늘에 비쳐주는 조각달과 샛별만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우리 님이 계시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 우기시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지나친 일도 허물도 나에게는 털끝만도 없습니다.
뭇사람이 시기하여 남을 참소하는 말이신데 슬픕니다.
아! 우리 님이 나를 이미 잊으셨습니까?
아 우리 님이시여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들어 주셔서
제발 나를 전과 같이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이 산을 시민의 휴식공원으로 가꾸고자 연제구 수영구 양개 구청에서 노력을 많이 들인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원된 인력은 IMF구제금융시기에 실업자 임시구제 근로노동으로 그들이 가지치기한 어린 소나무는 단박하고 간결하게 윗둥만 덩그랗다. 마치 그들의 울분을 나무에게나 풀려는 듯 한 모습이다. 지난해 정자가 4개 만들어졌는데 이 산에 지천인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서 만드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이 정자의 소박한 지붕모습이나 윗둥만 덩그런 소나무가 흡사하다. 햇순이 가지런하게 쑥쑥 자라고 향긋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동하는 호젓한 봄날이지만 느끼는 자에게는 그들의 아픈 마음의 상처가 찬 기운이 되어 이 봄날도 사위어(식어) 가는 듯이 느껴져서 필자는 자작시 <봄날 배산에 오른다> 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