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 둘째 날, 아침 열린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스리랑카까마귀 모닝콜 소리에 잠을 깨고 건물과 나무 사이를 오가는 엄청난 수효의 까마귀 떼를 확인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함께 하던 법우가 아침식사를 하려고 호텔식당을 찾았을 때 내게 먼저 물어옴에 이미 나처럼 스리랑카까마귀와 만국공통어로 소통했음에 또다시 놀랐다.
콜롬보 시내를 모두 평정하고 점령을 했음인지 건물과 나무는 이미 엄청난 수효의 스리랑카까마귀 떼로 뒤덮였고 짖어대는 소리조차 만만하지가 않음은 옛날 어린 시절 겨울 너른 벌판 보리밭 위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던 까마귀 떼와 해후했다는 착각과 반가움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이른 시각, 국적을 달리 하는 승려 두 분, 법우 세 가족, 그리고 그 분(A) 동생이 운전하는 미니버스에는 체격이 당당한 차장까지 탑승하고는 불과 세 시간 정도나 묵었을 호텔을 뒤로 하고 스리랑카 북동쪽 고대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신성도시를 향해 거의 종일 내닫는다.
좌우가 뒤바뀐 운전대와 찻길을 역주행하는 미니버스는 우리나라 기업 대우에서 시공을 했다는 포장도로를 고속으로 거침없이 내달음도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해서인지 내 심보가 뒤틀리거나 그다지 어색하게 느끼질 않는다.
영국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모험소설 보물섬의 배경이라고 했던 것처럼 불교나라 스리랑카는 풍광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이색적이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이색적인 풍광이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4세기 반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는 내 기존 생각과는 다르게 처음 보고 만나는 우리 일행에게도 미소와 친절을 보낼 수 있는 스리랑카 따뜻한 사람들 속으로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아누라다푸라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둘러 13세기 동안 싱할라 왕조의 정치·종교의 수도였으나 인도 타밀족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800년대 초에 발굴되었다는 유적들을 찾았는데, 우리 민족에게 수많은 핍박을 가해온 가깝고도 먼 나라인 중국과 일본처럼 스리랑카와 인도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곳곳에서 심하게 파괴해버린 유적들을 보면서 인도 타밀족의 잔학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70m 높이 불탑인 제타바나라마 다고마, 돌기둥만 남은 로하 프라시다, 인도 아소카 왕의 딸인 상가미타가 부다가야에서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는 나이 2000살의 스리마하 보리수 둘레를 음력 섣달 열엿새 날 교교한 달밤이 깊도록 돌아보면서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까닭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55m 높이 엄청나 규모의 흰색 루완웰리세야 대탑과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바닥 곳곳에 많은 선명하게 움푹 파인 자국은 오랜 세월동안 이 곳을 찾은 스리랑카 불자들이 꿇어앉아 기도를 하면서 닳고 닳아서 생긴 흔적이라는데, 얼마나 많은 불자들이 오랫동안 찾았을까를 내 두뇌로는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가늠조차 할 수도 없지만, 오직 불자들의 깊고 깊은 불심을 감명 깊게 내 가슴 속에 새길 수는 있었다.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우리들의 익숙하지 않은 맨발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습이 측은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소복 차림의 스리랑카 사람들은 먼저 미소를 보내거나 말을 걸어오기까지 하는데 우리 조상님처럼 흰색을 선호하고 있음이 일치한다.
특히 루완웰리세야 대탑에서 만난 스리랑카 불자가족은 우리와 함께 사진까지 찍었으나 그들의 주소를 적어 준 종이를 여행 도중에 잃어버려서 영원히 전할 도리가 없음이 아쉽지만, 또다시 인연이 닿기를 기대하며 사진은 오래토록 보관하련다.
2000년 초여름, 아내가 스리랑카 첫 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만났던 스리랑카 어린 소녀는 10대의 나이임에도 4년 사이에 평생의 짝을 만나 이미 유부녀가 되었다고 함에 재회를 크게 기대했던 우리 부부는 아쉬운 마음으로 재회를 포기해야만 했다.
밤이 깊은 시각, 여행을 종료하고 호텔이라고는 어제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거의 모텔 수준의 호텔(Randiya)에 여장을 푸니, 내일 아침에는 누가 나의 단잠을 아름다운 소리로 깨울 것인가를 기대할 여유도 없이 여행의 피곤함에 겨워 깊은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