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 『리영희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강준만, 개마고원)
많은 청년들은 그의 책을 읽고 ‘반공’ ’고마운 나라 미국’ ’충효’ ’애국’같은 기존의 가치 체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충격을 고백했다. 그 책들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이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며 사회운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리영희 선생은 권력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
[역사/문화]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 창작과비평사 2006.03.02 (초판 1999년01월) |
|
[인문] 우상과 이성 리영희 | 한길사 2006.08.30 |
계속되는 고초 속에 80년대를 건너다
리영희 선생은 『전환시대의 논리』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후 1980년 1월, 2년의 형을 살고 출옥한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또 다른 고난을 강요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완벽한 권력 장악을 위해 ‘김대중내란 음모사건’과 광주 학살을 계획하며 그 전 단계로 5월 17일 김대중을 포함하여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고은, 리영희 등 수많은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을 사회혼란을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이다.
그는 두 달만에 풀려났지만, 대학에서는 해직된 상태였다. 이후 1984년 복직될 때까지 번역과 저술에 몰두한다. 『중국백서』(82), 『10억 인의 나라』(83),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84), 『분단을 넘어서』(84), 『베트남 전쟁』(85), 『역설의 변증』(85) 등이 이 시기 쓰여진 책들이다.
87년부터는 임재경(창작과비평 편집고문), 이병주(동아투위 위원장), 정태기(전 조선투위 위원장)등과 함께 자본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언론에 대해 구상하여 1988년 5월 15일 국민주 방식의 언론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다. 그는 『한겨레 신문』 창간 후 이사 겸 논설고문으로 취임하여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그런 리영희 선생이 무늬만 민정이었던 권력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1989년 4월에는 『한겨레 신문』 창간 1주년 기념으로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구속된다. 북한의 입국허가 가능성 등을 일본을 통해 타진했었던 것이 반국가단체 지역으로 탈출하려 했다는 죄목이 된 것이다.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2년으로 구속160일 만에 석방되었다.
|
[인문] 역설의 변증 리영희 | 한길사 2006.08.30 |
지독한 정직성, 지독한 책임감
그가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것은 권력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권력에 기생한 언론과 언론인,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에 대해서도 가차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 행위 하나하나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지독하게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기자 생활을 하던 60년대엔 언론사의 월급 자체가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칠 만큼 형편없던 때다. 대신에 많은 기자들이 출입처에서 챙기는 수입과 그들이 제공하는 향응으로 흥청거렸다. 대놓고 부정부패로 먹고 살라는 식인 것이었다.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은 리영희 선생은 번역 등의 아르바이트를 두 개, 세 개 하며 애를 썼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1년 2개월 된 아이와 아버지를 연이어 떠나 보내야 했다. 돈이 없어서 아버지 회갑을 차려드리지 못한 것 또한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다. 사적인 삶, 가족들에게는 무능에 가까운 정직함이었다.
자신의 글과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는 지독하게 정직했고 지독하게 책임감을 느꼈다. 비록 자신은 한 번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과 그의 사상이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점에 대해서 리영희 선생은 항상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섣부른 우상이 되고자 했거나, 우상처럼 행세했거나, 그런 것은 전혀 없어요. 다만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게 받아짐으로 말미암아 후배나 후학들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면, 법률용어로 말하며,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요.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에 대해 한 선배 지식으로서 가슴 아픈 자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미안하다고 할까, 이런 것을 다 합친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요.”
- 『사회평론』91년 6월호 인터뷰 중에서
“나는 1970년대 초부터, 즉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을 통해 지적, 사상적 영향을 받은 후배, 후학, 독자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독재, 자유, 인권, 통일운동의 긴 세월의 어느 단계인가에서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쫓기고, 투옥되고, 불구자가 되고, 죽임을 당한 분들과 그 가족들과 영혼에 대해서 나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일정한 도의적 인간적 빚을 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산다.”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머리말에서
게다가 리영희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수정한다면 많은 후배들이 실망감 또는 배신감을 느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을 고수하기 위해 자신이 느끼는 혼란과 고민을 숨기는 일은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호랑이는 죽지 않는다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후 그는 “내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며 절필을 선언하고 집필 활동을 중단한다. 그리고 2000년, 리영희 선생은 뇌출혈로 쓰러진다. 뇌중추신경에 큰 손상을 입어 오른쪽 손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지적 활동과 글쓰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을 아직도 선생의 목소리, 선생의 시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과 함께 자신의 삶과 사상의 궤적을 써내려간 자서전 『대화』를 펴낸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초인적인 인내와 끈기로 구술을 녹취해 원고지 2,700매 분량의 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단순한 구술이 아니었다.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수십 번씩 자료와 육필 원고, 사진 등을 찾아내 확인하고, 수십 년 전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인명 하나까지 거짓없이 전달하려고 한 노학자의 꼬장꼬장한 열정,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꼭 잡고 한자 한자 교정한 감동의 드라마였다.
|
[정치/사회] 대화 리영희 | 한길사 2005.03.10 |
|
[인문] 희망 리영희 | 한길사 2011.01.14 |
첫댓글 가을이라 독서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는군요....대한민국 남자로는 보기드문...남자인거 같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