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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원형(原型)을 찾아서>
고독하고 쓸쓸한 우주 떠돌이 / 정성수(丁成秀)
이 유정(有情)한 지구별 대한민국 땅에서 시를 쓰는 정성수(丁成秀), 내 쓸쓸하고 가난한 문학의 원형, 혹은 문학의 뿌리는 무엇일까? 왜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 하고 많은 일 중에서 한평생 <문학>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하나의 우주적 운명일까? 무료한 신의 장난일까? 아니면 문학에 대한 나의 터무니없는 짝사랑일까...?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전문적으로 <문학>을 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이 지구별 위에서 가장 차가운 고독의 촉수 아래 온전한 벌거숭이로 노출된 가장 쓸쓸한 사람들이 아닐까? 낮이나 밤이나 보이지 않는 허공 속으로 선홍의 핏물이 뚝뚝 지는 그들 쓰라린 고독의 몸부림이 바로 이 지상에 번져나가는 아름다운 시의 파도가 아닐까?
다른 대부분의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이 조그마한 떠돌이별 지상에서 늘 ‘고독’하였다. 이 아름다운 초록 혹성 위로 어느 날 나는 홀연히 우주 나그네처럼 홀로 내려왔고 지금까지 정처없이 낯선 지구 땅을 이리저리 무수히 떠돌고 헤매고 찾아다니는 중이다.
기원 후 1945년 8.15해방의 해 초겨울, 서울 안암동 개울가 한옥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아주 어린 유년시절을 신설동으로 돈암동으로 떠돌다가 여섯 살 때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6.25사변을 맞았다.
돌아보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이곳저곳 떠도는 게 나의 생애였다. 다만 정처없이 떠돌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으로 착각이 될 정도다. 마치 지구별 위를 떠도는 것 자체가 내 생애의 지고지순한 목표처럼 보일 지경이다.
나는 늘 대책없이 쓸쓸한 한 사람의 허망한 몽상가이고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바람에 날리는 먼지조각처럼 이리저리 하염없이 떠돈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자체가 하나의 고통이고 하나의 갈등이고 하나의 슬픔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을 가고 어느 직업을 가져도 그곳에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자의반 타의반 너무 자주 생활환경이 바뀌고 아는 사람이 바뀌고 삶의 사이클이 바뀌면서 나는 그 무상한 유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늘 홀로 불안하고 쓸쓸하고 고독하였다. 어찌보면 나는 길바닥 자갈 위에 내동댕이쳐진 우울한 ‘단독자(單’獨者)’였다.
내 생의 장면 1.
6.25사변 피란 중.
뜨거운 여름날, 아버지는 짐을 실은 자전거를 타고 내 앞쪽 구불구불한 산길 저 아래로 아득히 멀어져가고 만삭인 어머니는 내 뒤쪽 저만치에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지고 하얀 흙길 위를 부르튼 맨발로 힘겹게 걸어오고 계셨다.
그 중간에서 나는 아버지쪽과 어머니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머니(나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 기억이 없다), 빨리 와요!” 소리치며, 때까치와 풀무치를 쫓아다니며 왠지 하염없이 쓸쓸하였다.
장면 2.
역시 6.25사변, 1.4후퇴 피란 중.
서울의 동쪽 한강 광나루. 칼바람이 매서운 겨울 저녁 어스름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거나 지게에 지고 혹은 짐수레를 끌고 아이들 손을 잡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서로 부르는 소리. 악 쓰는 소리.
내 곁의 얼음장이 깨지면서 덩치 큰 소 한 마리가 짐을 잔뜩 실은 수레와 함께 강물 속으로 미끄러지듯 빨려들어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아버지가 끄는 짐수레는 바퀴가 짝짝이었다.짐이 자주 한 쪽으로 기울어 조금 가다가는 수레를 멈추고 다시 짐을 바로 세우고 떠나야만 했다.
어머니가 먼저 한강을 건너가 얼음이 깨지지 않은 쪽으로 우리 일행(할머니, 아버지, 이모, 이모부, 이모의 딸, 나)을 인도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가 사방에서 뒤엉켜 어머니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 귓바퀴가 골라서 채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의 그 막막함. 숨가쁨. 불안과 초조. 공포.
피난길 주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시체. 고장난 탱크. 지구를 뒤흔드는 대포 소리. 논바닥에 버려진 아기의 울음소리. 모닥불 피워놓고 아무 데서나 1월의 깡추위 속에서 새우잠 자는 수많은 피란민들...! 그 당시의 대한민국은 한 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장면 3.
다시 6.25사변 피란 중.
경기도 용인 국도변 어느 개울가 ‘쉰배미’라고 부르는 산자락 작은 마을.
가까운 곳에서 전투기(일명 쌕새기)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마당에서 놀던 옆집 아이들이 한꺼번에 집안으로 우르르 뛰어들어갔다.
그 순간 날카롭게 지붕 위로 내리꽂히는 사나운 기총소사 소리.
옆집에 마을갔던 어머니는 한쪽 엉덩이 살점이 어디론가 뭉텅 잘려 나갔다. 무섭다고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내 외사촌 누나(당시 17세?)는 전투기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차디찬 총알이 꽃다운 처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관통하였다. 총탄이 이불솜을 뚫지 못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두 살 짜리 내 누이동생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울지도 못했다.
나와 그밖의 식구들도 집 벽을 뚫고 들어온 수많은 총탄 때문에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 그야말로 어떻게 손도 써볼 수 없는 순간적인 돌발상황,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극한상항이었다.
거적대기에 싸인 채 내 외사촌 누나가 이모부의 지게에 실려 산으로 간 얼마 뒤 저녁, 내 누이동생 역시 거적대기에 싸인 채 이모부의 지게에 실려 아버지와 함께 아무 말 없이 어두운 마당을 빠져나갔다.
누이동생으로부터 버림받은 나는 캄캄한 방안에 기대서서 소리없이 울었다.
장면 4.
‘쉰배미’ 마을 앞 비포장 국도 위로 흙먼지를 뽀얗게 뿜어올리며 미군 스리쿼터가 달려간다.
동네 아이들이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가며 손을 내두르며 쉬지 않고 악을 쓴다.
“찡감(껌), 쪼꼬렛(초콜릿), 쪼꼬렛...!”
그러면 스리쿼터에 탄 백인이나 흑인병사들이 웃으며 차 밖으로 껌이나 초콜릿을 던져준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길바닥에 떨어진 껌이나 초콜릿을 줍느라고 아우성이다. 그들을 바라볼 때의 그 표현하기 힘든 수치감, 상처, 슬픔 같은 것.
나는 ‘고독’했다.
장면 5.
경기도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양초등(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죽은 누이동생이 보고 싶으면 담임선생님에게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조퇴했다. 공부하기가 싫었다. 공부? 그까짓 게 뭔가...? (나는 내 딸과 아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의학이나 과학 등 몇 가지만 빼고 전세계의 모든 대학을 없애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데 중학교 과정이면 충분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요한 산길을 걸으면서 나는 홀로 누이동생이 마냥 그립고 쓸쓸하였다.
장면 6.
화장실에서 노래 부르기.
나는 어린 시절, 쓸쓸하면 화장실(변소)에 웅크리고 앉아 자주 노래를 불렀다.
서탄초등학교, 금각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노량진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막내숙부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2층 양옥집 깨끗한 화장실 안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학교에서 배운 노래, 귀동냥으로 안 유행가 몇 소절씩 연속곡으로 계속해서 불러댔다.
고요한 집안.
화장실에 들어간 지 한참 뒤에 나오는 나를 보고 막내숙모는 웃었다.
“아니, 용수(내 아명)야. 너는 어떻게 변소에서 노래를 부르니...?”
장면 7.
나는 내 ‘고독’과 ‘쓸쓸’함을 주로 만화로 풀었다. 학교 공부는 아무 재미도 없었고 교과서는 어린 나에게 사기를 치는 것 같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만화책을 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가 직접 창작을 했다. 네 칸짜리 만화도 그렸지만 주로 삽화 같은 그림에다 소설처럼 긴 글이 들어가는 장편만화를 책으로 만들어서 반 아이들에게 돌렸다.
그것이 고독하고 쓸쓸한 나의 유일한 자위책이자 즐거움이었다.
그 무렵, 6학년 시절.
나는 작은 내 방에서 어린 둘째 남동생 일수를 봐주고 있었다.
갑자기 부엌 너머 안방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섯 살 짜리 첫째 남동생 헌수가 머리 아픈 병으로 한 달 동안 누워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그 순간 고요히 지구별을 떠났다. (대단히 예민하고 감성적인 아버지는 그 뒤 우수한 ‘술꾼’이 되셨다)
헌수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먼 곳에서부터 “형, 혀엉~!” 소리치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었다. 땅을 내려다보지 않고 내 얼굴만 바라보며 뛰어오기 때문에 수없이 아무렇게나 지구 위로 고꾸라지곤 했다.
나는 막내동생 일수를 끌어안고 내 방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피눈물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 두 동생을 잃고 만 것이다. 나는 이 낯선 혹성에서 한없이 슬프고 끝없이 고독했다.
장면 8.
남동생 헌수가 멀리 떨어진 아랫마을 객사리 근처 공동묘지에 묻힌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흰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날 저녁.
갑자기 우리 집 개 ‘해피(내가 지어준 이름)’가 집 안팎에서 이리 뛰고 저리 뒤더니 이웃집 근처 텃밭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죽었다. 아랫집 아저씨가 놓은 쥐약(쥐약 먹은 쥐?)을 먹고 죽은 것.
여기저기 정신없이 날뛰는 해피를 정신없이 쫓아다니던 나는 개가 쓰러져 죽자 그만 그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두 동생이 죽었을 때 나는 소리없이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었다.
우리 집 개 ‘해피’는 동생 헌수가 죽은 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헌수 대신 멀리서부터 정신없이 나에게 달려왔었다.
일수는 아직 너무 어리고, 이제 누가 학교갔다 돌아오는 나를 향해 정신없이 반갑게 뛰어와 줄 것인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차디찬 달빛 아래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그 동안에 쌓인 슬픔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내 작은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치유하기 힘든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장면 9.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부용초등학교 6학년 때 나에게 슬픈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단 앞으로 불러내었다.
“정성수, 넌 천재다. ...열심히 잘 해봐라.”
담임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반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쑥스럽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가끔 교단 앞으로 불려나가 내가 쓴 글(시나 수필)을 읽었고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자주 읽었고(내가 책을 너무 빨리 읽어서 반 아이들이 내가 읽는 곳을 잘 따라오지 못했다) 학예회 때 연극을 하거나 덩치 큰 아이들을 순전히 말로 제압하거나 시나 소설책을 많이 읽거나 장편만화를 자주 창작한 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다.
장면 10.
경기도 평택중학교 1학년 후반기. 반 아이 중에 김상욱(작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고 고아원에서 살다가 나중에 어머니를 만난 아이였다. 꽤 조숙했다(나는 나중에 중3때 서울 덕수중학교에서 전학 온 안동진과 함께 학교 뒷동산에서 그로부터 술과 담배를 배웠다).
어느 날 나는 김상욱에게 내가 그린 장편만화를 빌려주었다. 그러자 다음 날 그는 나에게 자기가 쓴 시와 수필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문학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얘기했다.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동지’를 만난 것이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미술반>에서 <문예반>으로 특별활동반을 바꾸고 ‘가을’을 비롯한 수많은 시를 쓰고 추리소설 <복수 뒤의 복수>를 비롯한 여섯 편의 중편소설(500장~600장씩)을 썼다.
당시 조선일보 지방주재 기자였던 아버지는 문학을 하면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가 쓴 소설공책들을 북북 찢어서 아궁이 속으로 내던졌다. 나는 아버지가 화를 내고 집밖으로 나가신 사이, 아궁이에서 찢어진 소설공책을 주섬주섬 들고 나와 바늘과 실로 꿰매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내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셨다. 나의 어머니는 바다처럼 깊고 넓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종교였고 나는 어머니의 종교였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던 그 가난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나에게 후회는 없다. 아니, 나는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너무 행복하다. 다만 눈부신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게 늘 나 자신에게 부끄러울 뿐...
언젠가 내가 이 쓸쓸한 떠돌이의 생애를 마치고 지구별을 떠났을 때, 나는 다시 내 고향인 저 우주 속으로 날아가 낯선 혹성에서의 고독한 타향살이에 대한 서정시를 밤새워 쓸 것이다.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고독할까...?
- <계절문학> (2008)
*서울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1965년 『시문학』, 1979년『월간문학』신인상 등으로 작품활동.
시집으로 중3때 낸 첫 시집『개척자』를 비롯하여『술집 이카로스』『우리들의 기억력』『살아남기 위하여』 『가족여행』 『별날리기』 『사랑이여, 오늘도 나는 잠들지 못한다』『사람의 향내』『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누드 크로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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