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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말씀(65) :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 20:17 - 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단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은퇴하시는 성도님이 어떤 일을 상의하고자 저랑 문자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문자를 주고 받으면서 일이 잘 처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화가 끝나고 곧 바로 문자를 또 하나 보내주셨습니다.
이모티콘 이미지를 하나 보내주셨는데 꽃 그림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미지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면 감사합니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모티콘을 보내주신 것이 어버이날 이모티콘을 제게 보내주신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안돼서 이 성도님한테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고마워서 감사합니다 꽃 그림을 보냈는데, 그게 어버이날 이모티콘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서로 웃으면서 아 저는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웃으면서 통화했는데, 고난 주간에 웃으면서 이렇게 웃어도 되나 할 정도로 웃었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이제 부활 주일 설교가 되면 뭔가 즐겁고 기쁜 이야기를 설교 서두에 해야 되는데 뭘 해야 될까 고민을 하는데 고난 주간에 너무 진지하다 보니까 그런 예화들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님이 성도님이 보내 주신 이모티콘 예화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지요.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 안 보내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좌중 웃음).
그래도 밝게 한번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절 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절 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가 좀 부족해서 성가대 찬양대 자리에도 앉으셨는데 거기서 영상보시면 집에서 보시는 거와 똑같으니까 살짝 몸을 틀으셔서 저를 보셔도 괜찮습니다 (좌중 웃음).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의 말씀 65 번째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라는 제목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며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고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성경 어디에 나올까요? (응답이 없음) 성경 보신 분이 아무도 안 계시네요. 예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성경에 나올법 하지만 성경에 있는 얘기가 아니지요. 묵자 라고 하는 동양의 제자백가 가운데 사상가의 주장입니다.
제자백가 여러분 아시죠?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곳곳에 뛰어난 사상가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사상 철학 정치 이념을 가지고 곳곳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보려고 했던 그 때 그 제자백가의 사람들을 제자백가 시대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백가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들이 많지요. 유가는 인의예지를 주장하는 공자 맹자 순자가 있는데요, 유교로 발전하는 유가입니다.
도가가 있는데요, 무위 자연을 주장하는 그들은 노자와 장자가 있습니다. 법가는 공유와 법칙을 가지고 나가는 그런 사상을 가진 바로 관중과 한비자가 그 법가에 속합니다.
그 가운데 묵가의 사상은 특별한 학파였습니다 이 묵가는 묵자라는 사상가가 묵가라는 것을 창시했습니다. 묵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잠시 전에 읽어드렸던 그 이야기들입니다. 그 내용을 잘 보면 예수님의 말씀 성경에 있는 말씀과 굉장히 유사하죠.
실제로 묵자는요 겸애설을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동양철학의 예수라고도 불렸구요 이 겸애설은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사랑의 사상을 얘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백가의 주류였던 유가의 형식주의, 계급주의 또는 법가의 법치주의를 타파하면서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된다.
사랑으로 사람을 대해야 된다 라는 주장을 펼친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묵자는 다른 제자백가들보다 하늘 신적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사상이 묵자의 사상과 매우 일치하는 부분이 많지요. 하늘에 대한 사상도 그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는 이야기도 굉장히 비슷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상은 종교가 됐고요, 그 종교에서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는 종교 이상의 세계관이 됩니다. 그런데 왜 이 묵자의 사상은 종교도 되지 못하고 그 시대에서만 그 주장하는 사상에 머물고 끝이 납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다른 여러 종교 사회학적인 측면과 학문적인 평가가 있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사랑이나 묵자가 주장하는 그 사랑이 삶의 마지막까지 가서 완성되었는 가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 죽음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고 보여주었는가 라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얘기는 곧 사랑은 외쳤지만 자기가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기의 죽음까지 자신의 철저한 희생으로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느냐 라는 물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더불어 그 사랑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부활을 통해 사랑이 허무하고 공허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묵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구분되는 점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묵가만 그렇습니까? 예수의 가르침보다 더 논리적이고 더 철학적인 사상들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 더 많았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다른 우상을 믿는 그 백성들 그 민족들이 더 힘세고 더 강대국이 많았습니다.
문명적으로 더 발전한 나라들이 많았고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그 주변에 있는 그런 나라들에게 굉장한 큰 공격을 받고 박해를 받고 때로는 패망하기도 했었습니다. 전쟁만 나가면 여호와 이름으로 전쟁만 나가면 우리 성경에 기록된 다윗, 솔로몬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했는 지 모르지만 그 외에 다른 역사를 보십시오.
전쟁만 하면 지는 경우가 많았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로 살았던 적도 많았습니다. 도리어 그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이 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패배한 하나님이다.
전쟁에서 항상 지는 패망의 하나님이다. 노예의 하나님이다 라고 부를 정도로 그런 굴욕을 당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그렇게 대단했던 나라들 대단했던 제국들 그 대단했던 세상을 호령한 왕들과 수많은 우상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묵자의 그렇게 대단한 정말 아름다운 사상과 철학이었는데 왜 지금은 그 누구도 관심이 없고 오늘 처음 들으신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아무도 알지 못한 사상과 학문으로 전락했을가?
예수와 묵자는 똑같은 사랑을 얘기했는데 한 쪽은 동양철학 중에 하나로만 생각하고 끝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이 기독교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인성이 뒤바뀌고 있고 한 나라의 운명까지도 바꾸고 있습니다.
저는 그 차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전쟁에서 실패한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때 당시 사람들이 이해했겠습니까? 지금 너희 나라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어 그런데 왜 자꾸 여호와 하나님을 얘기하는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와 같은 식민지 나라 이스라엘이 섬기는 과거에 실패했고 전쟁만 나가면 패배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을 얘기하는가? 그런데 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곳곳에서 얘기하는 그 예수 나사렛 예수를 얘기하는가?
세상이 두려워하는 강대국 힘센 나라들 역사에 기록될까 말까 할텐데 아무런 힘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저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했던 그래서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그 갈릴리 나사렛 예수를 여러분 이 예수를 누가 기억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책하나 쓴 적이 없습니다. 글 하나 남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이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외치며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다 라고 외치면서 버젓이 로마황제가 있는데 버젓이 유대 땅에 수많은 분봉왕들이 있는데 그들 대신에 그 예수가 팔레스타인의 그 청년 예수가 나의 주인이요 나의 왕입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날로 날로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시점이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얼마 안된 시점에서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읍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거이고 역사적 기록에서도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이후 예수의 부활의 소문 이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늘어났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궁금해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로마 황제가 점령한 곳곳에 그 유럽 땅에 예수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는 나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인들이 날로 늘어났을까?
분명히 그렇게 얘기하면 로마제국의 창과 칼이 그들의 목을 베어냈을 텐데 그들의 목숨을 겨눴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가 나의 주 나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났고 동시에 그들이 모여 교회가 하나 둘씩 세워지게 됩니다.
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리 설명하고 학문적으로 주장하고 논문에 써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 사실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 기록된 예수 제자들의 기록들, 성령의 체험들, 초대교회가 개척해 나가는 그 교회들의 이야기들, 그 기록들은 부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었을 때 예수를 부인하고 부정했던 사람들이지요. 제자들이었던 사람들이니까 사람들이 두려워서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이후에 자기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꽁꽁 숨어가지고 덜덜 떨었던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를 그렇게 쫓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제대로 새겨지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난 것도 아닙니다. 몇 주가 지나서 성령을 받고 밖에 나가서 외칩니다.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주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라고 외치더라는 것이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식한 자들이라고 그런데 그 무식한 자들이 어느 시점에 갑자기 세상에 뛰쳐나와 예수가 우리의 왕입니다. 로마황제가 왕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의 왕입니다.
유다의 왕들이 우리를 구원할 자가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 입니다 라고 외치기 시작하니 성경은 3000명 5000명 7000명 사람들이 개종하고 회심하더라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과장된 기록이라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한번 얘기를 해보지요. 그렇게 허황되고 과장된 얘기였다면 벌써 들통나지 않았을까요?
세상에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종교에 대해서 특별히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별히 요즘 코로나 상황 가운데 어떻게 하면 예배 못드리게 할려고 교회 끌어내리기 할려고 하는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 우리 찬양대가 서야 되지요. 저희들 준비했습니다. 부활절 날 정말 기쁨으로 우리 찬양대에게 부탁해서 짧지만 두 곡을 함께 정말 은혜롭게 부활주일 찬양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구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찬양대 서지 말라 솔로만 마스크 쓰고 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은 음악 목사님께 말씀 드렸더니 지난 주에 정말 화를 내시더라고요. 부활 주일인데 찬양으로 영광 돌려야 되는데 아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그러면 지금 세상 사람들요 모니터 하나 보고 교회가 어떻게 예배 드리는지 그거 다 지금 찾아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공격하고 문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 가지고 우리 기독교를 흔들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2000년 동안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가 부활하셨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다 예수가 우리 하나님이다 라는 그 진리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공격하고 비난하고 피곤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서 그 진리를 지켜냈죠. 지켜내기만 했습니까? 그 소식을 가지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지금 우리에게까지 127년 전에 제임스 게일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복음을 전했고 우리가 지금 그 부활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어느 누구도 묵자의 사랑을 목숨을 걸고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목숨을 걸고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그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고요, 더불어서 죽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18절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남겨짐에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수난 예고와 부활 예고를 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려고 하는 주님의 의도가 있었지요. 그러나 바로 그 당시 이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제자들을 그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수난 예고와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그 의도를 그들이 잘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이유, 예수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하는 그럴 일 없습니다.
주님 예루살엠에 입성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왕이 되셔야죠. 세상을 바꾸셔야죠. 자 이제 저와 우리를 장관으로 세우시고 행동대장으로 세우셔서 새로운 세상으로 좀 바꿉시다. 자꾸 죽는단 얘기 하지마십시오. 제자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예수님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당시 제자들에게 전해준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특별히 오늘 본문은 3차 수난 예고로 끝나는 말씀이 아니라는 거죠. 바로 오늘처럼 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 주님의 부활을 상상해 왔습니다.
더불어 그 주님의 부활 이제 곧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 내 가정과 내 교회에 부활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아 왔다 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말씀을 2000년 전 십자가를 앞두고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으로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부활을 예고하는 주님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 우리 연동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비난하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더 이상 못하게 하려고 늘 비판하고 우리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조차 문제를 삼는 시대를 살게 될때, 언론을 통해 정치를 통해 사람들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 한복판에 보이지 않는 그 십자가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를 그 정죄의 십자가에 매달으려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근심하지 말라 반드시 3일 안에 다시 일어설 것이다 다시 살아날 것이다 다시 부활 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코로나로 쓰러져있는 저와 여러분의 그 심령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부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육신의 질병으로 마음의 병 많은 문제를 가지고 죽기까지 고통에 빠져있는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포기하지 마라 3일 만에 부활했던 내 모습이 너에게 투영될 것이다 라고 하시는 부활의 확신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의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은 이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 부활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코로나로 죽어가는 다 죽어가는 우리 한국 교회를 향한 부활의 말씀이고요 코로나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우리 소상공인 성도님들을 위한 다시 일어서라는 말씀이고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환우들 우리 어르신들을 위해 그리고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일상의 부활이 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진짜 부활은 예언? 신학? 과학적 증명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고 그 가운데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일상의 부활 삶의 부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한 집사님이 군대 가셔서 예수 믿게 된 간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이 군대 갔는데 최전방에 제일 추운 곳에 가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울에 그곳에 가게 돼서 그곳은 내무반에 빨래를 제일 졸병이 하게 돼있다고 합니다.
너무 추워 가지고 그 물만 떠놓으면 바로 살얼음이 어는 그 물을 가지고 빨래를 하는데 그 손이 점점점 얼어가고 동상에 걸려가지고 너무 아프니까 빨래가 끝나면 손이 붓고 간지럽고 이 동상이 걸려가는 죽어가는 손처럼 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군의관을 찾아갔더니, 따뜻한 물로 빨래 하라고 그냥 그렇게만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약도 처방을 안해주더라는 겁니다. 소대장에게 찾아갔더니 소대장은 취사반에 가서 따뜻한 물로 따뜻한 물을 떠가지고 빨래 하라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취사반에 갔더니 취소반의 병장이 어디서 쫄병이 따뜻한 물로 빨래하냐고 빳다를 때리고 얼차려를 줘서 다시는 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냥 따뜻한 물로 빨래하는 것은 포기하고 눈물을 흘리며 동상이 걸려가는 죽어가는 손을 가지고 빨래를 하는데 하루는 그 부대 아버지와 같은 원사님이 그 광경을 보더니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김이병, 취사반에 가서 내가 따뜻한 물을 좀 쓰겠다고 하면서 따뜻한 물 한 솥을 나한테 가져와.
그래서 그 집사님은 나도 따뜻한 물을 못쓰는데 내 손이 그래서 이렇게 죽어가는데 다른 사람 원사님 따뜻한 물 쓰려고 그렇게 물뜨러 가는구나. 내 처지가 이렇구나 마음으로 속상해 하면서 취사반에 가서 따뜻한 물 떠가지고 원사가 있는 그 사무실로 가져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원사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그 물 가지고 빨래해라. 손 상하기 전에 말이야. 그리고 이제 빨래할 때가 되면 내가 시켰다고 원사님이 시켰다고 하면서 취사반에 가서 따뜻한 물 가져와서 빨래해.
그 얘기를 듣고 그 집사님이 울면서 빨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원사님이 부활절 전 주에 집사님 김이병이었던 집사님을 만나더니 하루는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김이병, 다음 주가 부활 주일인데 나랑 교회 갈래?
그 얘기를 듣자 마자 이 집사님이 이 원사님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이 원사님처럼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교회라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거 없다. 당장 가야겠다.
그래서 그 주에 함께 부활주일 예배드리고 예수 믿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다 라고 하는 간증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부활의 신앙은 과학적인 증명, 대단한 신학적 철학적 설명을 여러분 꼭 해야되는 것입니까? 아니죠!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가 정말 부활했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전에 역사 속에서 완성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이 예언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나타날까요?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가 언제 어떻게 올까요? 늘 그때를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읽으셔야 하는 겁니다.
제 3일에 살아나리라 그것은 2000년전 예수님의 부활 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매일 매 순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부활의 신앙 그 부활의 모습이 진정한 부활의 예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교회 없었습니다.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 인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나서야 그리스도 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예수님이 부활하고 나서야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부활은 예고와 예언, 역사와 기록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 인의 삶에서 확인되어야 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로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부활절 말씀들었다 하며 여기서 끝나시면 안됩니다. 그 말씀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실천할 때 진정한 부활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사실이고 역사입니다. 부활은 진리이고 신앙 그 자체입니다.
그 예수의 부활을 이제 저와 여러분의 부활이 되어 우리의 삶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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