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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별과시 천거인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경외관동천인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참봉 유맹달(柳孟達)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천성이 순정(淳正)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고 효행이 두드러졌으며 재능이 있었다.
이상 두 참봉은 유일(遺逸)로서 벼슬을 받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유학 박계효(朴繼孝)는 본관이 삼가(三嘉)로 학행과 재질이 있었고 기개와 도량이 강정했다. 예의를 다하여 상례를 모셨다.
생원 송석현(宋錫賢)은 본관이 영광(靈光)으로 마음이 투철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재행(才行)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다.
생원 임말손(林末孫)은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조행이 있고 언행이 청렴하였으며 남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였다.
생원 변벽(卞碧)은 본관이 거창(居昌)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본관이 거창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유학 유자방(柳子房)은 본관이 거창으로 조행과 기식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우에게 믿음이 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좌랑 정경(鄭瓊)은 효행이 드러났으며 학문이 두루 통하였다. 이하는 모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다.
판관 박찬(朴璨)은 재행과 효렴이 있었다. 이상 두 사람은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생원 이종경(李宗慶)은 학행과 기식이 있었는데, 연경(延慶)의 아우이다.
생원 신겸(愼謙)은 조행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진사 정세경(鄭世卿)은 재행과 효행이 있었다.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참봉 김석홍(金錫弘)은 학행과 조행이 있었다.
진사 홍등(洪縢)은 선을 좋아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잘 고쳤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일찍이 유일(遺逸)로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생원 신광록(申匡祿)은 학행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지성으로 사귀어 자상하게 인정을 다하였다.
유학 이후(李煦)는 재식이 있어 집에 있으면서 고요히 심성을 길러 옛사람의 학풍이 있었다.
진사 여희단(呂希端)은 학행과 재행이 있었다.
사부(師傅) 목희증(睦希曾)은 조행이 있었으며 성질이 질박하고 유순하였다.
진사 이문건(李文楗)은 침중(沈重) 숙성(夙成)하였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충건의 아우가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을사년에 집안에 화를 당하여 귀양갔다가 죽었다.
사부 여희림(呂希臨)은 효심이 많았다.
진사 김안도(金安道)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檢行)하였다. 영상 김령(金鈴)의 아들로 음직을 받아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순후하고 삼가며 효행이 있었다.
생원 김인손(金麟孫)은 경학에 밝고 지조가 있었다. 후에 이름을 단(亶)이라 고치고 임오과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생원 허금(許䃢)은 결백하고 조심스러웠는데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만억(金萬億)은 언행을 삼가고 학문을 좋아했다.
도사(都事) 홍사부(洪士俯)는 결백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창(金琩)은 언행을 아주 조심했다.
유학 김진종(金振宗)은 향하는 바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무자년에 급제하여 을사년에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다가 귀양가 죽었다.
진사 원계채(元繼蔡)는 지조가 있는데 을묘년 식년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생원 박세훈(朴世勳)은 재주와 식견이 있는데 세희(世熹)의 형이다.
군수 이은(李誾)은 지조가 있고 결백하였으며 학식이 있었다.
전 도사 이세번(李世蕃)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이선장(李善長)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우순필(禹舜弼)은 학행이 있었다.
전 현감 최상(崔祥)은 조행이 있었다.
진사 이세웅(李世雄)은 뜻이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치부를 하지 않았다.
유학 박두남(朴斗南)은 몸가짐을 잘하여 조행이 특이하였다.
생원 송미창(宋彌昌)은 재행이 있었다.
유학 윤거신(尹居莘)은 학행이 있었다.
참봉 이광식(李光植)은 효행과 일을 잘 처리하는 국량이 있었다.
생원 박번(朴蕃)은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문준(文濬)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다.
유학 문회지(文繪地)는 뜻을 돈독하게 행하였다.
유학 한계유(韓繼愈)는 뜻이 돈독 견실하였으며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유학 김인범(金仁範)은 기절(氣節)과 재능이 있었다.
유학 진건(陳騫)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재주와 문식이 있었다.
유학 허초(許礎)는 지조가 떳떳하였으며 재기(才氣)가 있었다.
진사 허자(許磁)는 재행이 있어 계미년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을사년 위공원훈(僞功元勳)으로 삭탈되었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학행이 있었다.
생원 박훈(朴薰)은 근실하여 실행력이 있었다.
생원 이영우(李永祐)는 마음씀이 거침없었으며 뜻을 세우는 데 지조가 있었다.
유학 유여주(兪如舟)
생원 신세경(申世卿)
유학 김윤종(金尹宗)은 김식(金湜)의 문인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가 풀려 상주(尙州)의 집에서 죽었다.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본관이 개성(開城)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유학 윤환(尹瓛)은 본관이 여주(驪州)로 지절(志節)이 방정하고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정소(鄭韶)는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랐다.
유학 이윤문(李允文)은 본관이 충주(忠州)다.
유학 김증(金增)은 본관이 청주(淸州)다.
생원 상진(尙震)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유학 김극양(金克讓)은 본관이 보령(保寧)으로 문음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극성(克成)의 아우다.
생원 김숭종(金嵩宗)은 본관이 음성(陰城)이다.
진사 이난손(李蘭孫)은 본관이 온양(溫陽)으로 갑신년 별시에 올라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상 일곱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해(李蟹)는 본관이 나주(羅州)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여 실천력이 독실하였으며, 경(經)에 밝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생원 박이홍(朴以洪)은 본관이 창평(昌平)으로 마음씀이 순박하고 독실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생원 장응두(張應斗)는 본관이 장수(長水)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진사 최필성(崔弼成)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문ㆍ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며 빈한하면서도 구차하게 취함이 없었다.
유학 어득한(魚得漢)은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학식이 있었다.
진사 김응청(金應淸)은 본관이 영덕(盈德)으로 학식이 있었고 몸가짐이 성실했으며, 착한 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빈곤하면서도 잘 사는 것을 도모치 않았다.
생원 김세보(金世寶)는 본관이 청도(淸道)로 거상(居喪)에는 죽을 마시었으며 또한 재예(才藝)가 있었다.
진사 김상(金湘)은 본관이 문경(聞慶)이며 말이 적었고 벼슬에 나아가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손계돈(孫季暾)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식이 있다.
진사 이인견(李仁堅)은 본관이 영천(榮川)으로 마음 가짐이 청렴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감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정(李涏)은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
생원 박덕손(朴德孫)은 본관이 함안(咸安)으로 문학을 좋아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고향에서 공순하였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은 본관이 봉화(奉化)며,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미란시 인물
난리 이전 정부의 육조ㆍ대간ㆍ시종ㆍ팔도 방백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우의정 안당(安瑭)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우찬성
좌참찬 이자(李耔)
우참찬 이유청(李惟淸)
좌사인(左舍人) 이청(李淸)
우사인(右舍人)
검상(撿祥) 장옥(張玉)
이조 판서 신상(申鏛)
참판 윤은보(尹殷輔)
참의 정충량(鄭忠樑)
정랑 정완(鄭浣)
정옥형(丁玉亨)
이충건(李忠楗)
좌랑 구수복(具壽福)
이인(李認)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예조 판서 남곤(南袞)
병겸판(兵兼判) 이장곤(李長坤)
참판 방유녕(方有寧)
참지 성운(成雲)
형판(刑判) 김정(金淨)
공겸판(工兼判) 김령(金鈴)
한성 판윤 한세환(韓世桓)
대사성 김식(金湜)
판결사 이세정(李世貞)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승지 윤자임(尹自任)
우승지 공서린(孔瑞麟)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朴薰)
주서(注書) 이기(李芑)ㆍ안정(安珽)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
장령(掌令) 김인손(金麟孫)
최산두(崔山斗)
지평(持平) 이연경(李延慶)
이희민(李希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사간(司諫) 유여림(兪汝林)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
정언(正言) 김과(金鈛)ㆍ이부(李阜)
예문제학(藝文提學)
봉교(奉敎) 채세영(蔡世榮)
조구령(趙九齡)
대교(待敎) 권예(權輗)
이공인(李公仁)
검열(檢閱) 이구(李構)
신잠(申潛)
김신동(金神童)
강은(姜㶏)
대제학(大提學) 남곤(南袞)
제학(提學) 김정(金淨)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ㆍ정응(鄭譍)
응교(應敎) 기준(奇遵)
부응교(副應敎) 장옥(張玉)
교리(校理) 조우(趙佑)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적(權磧)
부수찬(副修撰) 심달원(沈達源)
박사(博士)
저작(著作) 경세인(慶世仁)
정자(正字) 권장(權檣)
김명윤(金明胤)
감사(監司)
경기(京畿) 한효원(韓效元)
충청(忠淸) 신공제(申公濟)
전라(全羅) 김안국(金安國)
경상좌(慶尙左) 이항(李沆)
상동(上同) 문근(文瑾)
강원(江原) 김굉(金硡)
황해(黃海) 김정국(金正國)
함경(咸鏡) 손중돈(孫仲暾)
평안(平安) 허굉(許硡)
개유수(開留守)ㆍ조원기(趙元紀)
난후 인물
난 후 추죄(追罪) 때에 정부 6조(六曹)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領議政) 김령(金鈴)
좌의정(左議政) 남곤(南袞)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
좌찬성(左贊成) 이계맹(李繼孟)
우찬성(右贊成) 장순손(張順孫)
좌참찬(左叅贊) 한세환(韓世桓)
우참찬(右叅贊)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정(沈貞)곤(袞)으로 대신하다.
참판(叅判) 김근사(金謹思)
참의(叅議)
호판(戶判) 고형산(高荊山)
예판(禮判) 신상(申鏛)
병판(兵判) 권균(權鈞)
형판(刑判) 홍숙(洪淑)
공판(工判)
한판윤(漢判尹)
판결사(判決事) 이세정(李世貞)
대사성(大司成)
병참판(兵叅判) 방유녕(方有寧)
대사헌(大司憲) 이항(李沆)
집의(執義) 유관(柳灌)
장령(掌令) 서후(徐厚)
채침(蔡忱)
지평(持平) 오준(吳準) 이순(李純)으로 바꾸다.
이영부(李英符)
대사간(大司諫) 이빈(李蘋)
사간(司諫) 남세준(南世準)
헌납(獻納) 남효의(南孝義)
정언(正言) 조침(趙琛)ㆍ한승정(韓承正)
도승지(都承旨) 윤희인(尹希仁)근사(謹思)로 대신하다.
좌승지(左承旨) 박호(朴壕)
우승지(右承旨) 성운(成雲)
좌부(左副) 윤은필(尹殷弼)
우부(右副) 조옥곤(趙玉崑)
동부(同副) 김희수(金希壽)
주서(注書) 정세호(鄭世虎)
이기(李巙)
대제학수(大提學守) 이행(李荇)
제학(提學) 이항(李沆)
부제학(副提學) 이사균(李思鈞)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 이지(李遲)
응교(應敎) 유부(柳溥)
부응교(副應敎) 김영(金瑛)
교리(校理) 임추(任樞)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예(權輗)
부수찬(副修撰) 손수(孫洙)ㆍ이환(李芄)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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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함양(咸陽) 출신으로
*이하 본문에서 본관이라 한 것은 출신으로 다 바꿔야 함. 본관이 아니고 거주지를 기록한 것임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盧友明 1471 1523 豐川 君亮 信古堂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본관이 개성(開城)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徐敬德 1489 1546 南陽 可久 花潭, 復齋 文康
당성(唐城)서경덕(徐敬德)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1 2월 17일, 松京 禾井里에서 태어나다.
생원 상진(尙震)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尙震 1493 1564 木川 起夫 泛虛亭, 松峴, 嚮日堂 成安
성종 24 1493 계축 弘治 6 1 6월 5일, 扶餘郡 場巖面 閤谷里에서 태어나다.
이제신(李濟臣) 1536년(중종 31)~1583년(선조 16)
淸江先生集卷之四 / 行狀 /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尙公行狀。
尙震 1493 1564 木川 起夫 泛虛亭, 松峴, 嚮日堂 成安
公諱震。字起夫。木川人。其先本縣吏。高麗太祖統合三韓。木州人以百濟遺民。屢有警擾。賜姓畜獸以辱之。公之先。得象爲姓。後改以尙焉。有諱國珍。生諱得儒。以崔文憲沖待聘齋生。始免鄕役。生諱愿。給事中。給事生諱元諝。通禮門奉禮郞。歷數四代。有諱天錫。監門衛大護軍。寔公高祖。曾祖諱英孚。累贈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祖諱孝忠。忠淸道水軍虞候。累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考諱甫。安奇道察訪。累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三世推恩。以公貴也。
判書公鄕居林川。貲甚殷富。貸與貧民。隨年豐歉。與民收散。晩年。悉取券投火曰。吾其庶有後乎。議政公席先業。居鄕殆六十歲。足絶官庭。未嘗非義作事。鄕人莫不飫德。蓋其種之者久也。議政公聘博士金徽之女。累贈貞敬夫人。乃延安望閥。前朝恭愍。親書八字以賜。提學金濤之後。本朝刑曹判書文靖公自知之曾孫。議政年衰無嗣。躬禱於聖住山。越明年公生。弘治六年癸丑六月五日也。
생원 변벽(卞碧)은 본관이 거창(居昌)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사미헌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증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 구산 선생 변공 묘갈명 병서 〔贈通訓大夫司憲府持平龜山先生卞公墓碣銘 並敍〕
구산(龜山) 선생 변공(卞公)의 휘는 벽(璧)이며 자는 헌지(獻之)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 호장(戶長)을 지냈던 휘 정실(廷實)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4대 뒤에 생원인 휘 고적(高迪)이 밀양(密陽)으로 옮겼기에 마침내
밀양을 본관으로 하였으니, 이는 대개 중산(中山)의 정씨(程氏)와 연(燕)의 소씨(卲氏)가 하남(河南)을 본관으로 하였던 예와 같다. 조선조에 벼슬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이며 호가 춘당(春堂)인 휘 중량(仲良)은 호가 춘정(春亭)이며 시호가 문숙(文肅)인 그의 동생 휘 계량(季良)과 함께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에게 사사하여 일세에 중망을 받았으며 나란히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 되었으니, 이분들이 공의 5대 조부이다. 고조부의 휘는 길상(吉祥)으로 풍주(豐州) 지사를 지냈으며, 증조부는 휘가 을명(乙明)으로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효생(孝生)이며, 아버지는 휘가 신보(申甫)로 충순위(忠順衛)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만호(萬戶) 벼슬을 지낸 사종(嗣宗)의 따님이다.
공을 성화(成化) 계묘년(1483, 성종14)에
합천(陜川) 돈평리(遯坪里) 집에서 낳았다. 겨우 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
친정에 데리고 가서 길렀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본관이 거창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형사보(邢士保)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중우(仲愚)이고, 호는 지지당(止止堂)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출신지는 거창(居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