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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간 언덕 푸른 잔디밭에 봄기운 무성해라
써구새 돌나물 냉이 쑥 달래 엉겅퀴 지천이로다
밀양대 앞들 사래 긴 뽕밭에는 누렁소 쟁기 끌고
이랴이랴~어디어디 워워~ 밭갈이 풍경 정겹다
구당나무숲에는 종다리 뻐꾸기 까막까치 우짖고
분강 빨래터 아낙네 수다에 구여울 소리 멎었네
너울너울 흘러가는 강물 위로 아지랑이 가물가물
낙강 늘어진 수양버들 섶에는 버들피리 늴리리~
분강촌 아랫마 윗마 살구꽃 복상꽃 배꽃 꽃대궐
곤재 애일당 송곳밴달에도 참꽃 산수유 만발했네
해설피 해그름에 기러기 황새 청고개로 날아갈 제
선노할배 달구지 타고 동구밖길 따라 집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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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촌은 (부내ㆍ분천동)은 농암 선생으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분강촌의 입향시조는 670여 년 전인 1350년경 고려 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이헌李軒 공이다. 부내는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수몰 전까지 630여 년 동안 영천이씨永川李氏들의 세거지였다.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ㆍ1467~1555)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농암가聾巖歌ㆍ어부가漁父歌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현재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에 있는 숭덕사에 배향되었다. 농암종택 옆에 위치한 분강서원은 1699년 사림과 후손들이 농암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농암은 권벌의 후손인 충순위 권효성의 딸인 안동 권씨와 혼인했다. 농암의 자는 비중이고 호는 농암 혹은 설빈옹이라 했다. 농암은 강호시인으로 어부가, 농암가, 효빈가 등 100여 편의 시가를 남겼다. 이 가운데 40여 편이 퇴계 이황과 연관된 것이다. 농암의 강호문학은 퇴계의 시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도산12곡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암은 슬하에 8남1녀를 두었다. 분천동에서 출생하여 허백당 문광공 홍귀달에게 경전을 배웠다. 농암은 "효孝"와 "적선積善"을 몸소 실천한 선비로서 조선시대 전체를 보아도 임금으로부터 '효'와 관련된 시호를 받은 사람은 없다. 효와 적선은 농암의 삶과 철학을 형성하는 바탕이었다. 그는 사후 선조로부터 '적선'이라는 농암가문의 가훈이 되는 글자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명종12년(1557)에는 '효절(효절공)'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지금도 "적선"은 농암종택의 사랑채에 현판으로 걸려져 있다. 농암의 여섯째 아들인 숙량공이 세자의 교육을 맡는 관직에 제수된 후 선조에게 절을 올리자, 임금이 즉석에서 써준 글씨이다. 선조가 내린 현판의 복사본이 농암종택 사랑채 사랑방에 걸려 있다. 농암은 생전에 44년 동안(31세~76세)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등 무려 네 분의 임금을 모셨다. 이른바 숙청과 탄압이 난무하던 4대 사화기였지만 지방 수령을 자청하여 외직에 있으면서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난국에 백성을 잘 다스려서 후배 사림들의 귀감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분강촌 입향조인 소윤공(휘諱 헌軒)의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서삼리 모란에 있다.
♤그림 및 사진 종합 설명(caption)
<그림1> 은 분천동 아랫마(마을)에 살았던 조각 예술가 족친 재홍이 아재(75ㆍ2012년 대구운암중 교장 퇴직)가 2020년에 그린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이다. 왼편 중앙에 엄청나게 큰 새당나무가 보인다. 새당나무 앞으로 앞들(전평前坪)로 나가는 동구 밖 길이 훤히 보인다. 앞들에는 과수원과 밭과 논이 넓었고 그 중앙에는 새당나무보다 나이가 많은 웅장한 구당나무가 있었다. 구당나무 뒤로는 미루나무들이 빼곡한 밀양대(민왕대愍王臺)가 모래사장을 발판삼아 길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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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 고찰/ 분강촌(부내, 분천동) 밀양대(민왕대愍王臺) : 고려시대 홍건적 2차 침입(1361.10ㆍ공민왕10년ㆍ개경 함락)때 공민왕은 복주(안동)로 몽진했다. 난亂 중에 왕과 노국공주(?~1365)를 정성껏 도운 안동 백성들의 충심에 감복하여 내린 현판이 바로 우리 안동시ㆍ군민들이 잘 알고 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 : 웅장하게 큰 마을"이다. 그리고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시점도 이 무렵이다. 웅부는 이러한 사연을 안고 유래된 안동의 또 다른 지명이다. 신라시대 고창군으로 불리던 안동은 후삼국시대 때 고려의 장수들이 고창전투에서 힘겹게 견훤군에게 승리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동東쪽을 편안安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안동安東"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런 내력이 있는 이곳 안동에서 70여 일을 피신했다(1361.12.15 공민왕 일행 안동도착~1362년 2월 신축일 안동 떠남). 공민왕은 왕비와 도산골 청량산에 피신한 후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우리 동네 분강촌(부내) 밀양대(민왕대ㆍ愍王臺)에 도착하여 넓은 앞들(전평)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향후 나라 일을 계획하고 도모했다고 한다. 민왕대의 "민왕愍王"은 공민왕恭'愍王'의 이름에서 나온 지명이다. 즉, 공민왕이 환궁 길에 부내에서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뜻한다. 민왕대는 이런 연유에서 나온 지명이며 장구한 세월에 따른 언어의 변화로 인해 수몰 전 우리가 분강촌에 살 때는 그냥 발음하기 쉬운 밀양대라고 불렀다. 언어의 역사성으로 인해 부르기 쉬운 말로 변화한 것이다. 분강촌에 입향조 이헌 공이 처음 정착한 때가 1350년 경이었고 그로부터 10여 년 뒤 나라의 변고로 인해 공민왕이 피난에 이어 환궁 길에 부내에 들른 시기는 1362년이었다. 동네가 생성되고 국왕이 내왕한 것은 참으로 상서로운 일이지만 국가의 비상사태로 갑작스럽게 왕래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분강촌이 명멸(1350~1976)한 630여 년 동안 국왕이 들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군주가 아닌 대통령이 수몰 전 부내에 바로 이웃한 도산서원에 들른 적은 두 번이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산서원의 보수와 정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10월14일, 처음 방문했으며 이듬해인 1970년 12월 8일, 준공식 때 연이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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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그림>과 <사진>에 대한 해설을 계속해 보자. 동구 밖 길 끝에는 청고개가 있었다. 청고개가 생긴 내력을 보면 "조선 후기 광산 김씨 성을 가진 어느 병졸이 그의 스승인 농암 선생 회갑 때 푸른 옷을 입고 이 고개를 넘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청고개를 넘으면 분강촌汾江村이 아닌 새로운 동네인 청꼬(혹은 '청현靑峴'이라고도 함)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청고개와 청꼬 마을 모두 수몰되었다. 청고개 조금 못 미쳐 농로 오른쪽에는 논과 밭이 뒤섞인 앞들과 함께 언덕에는 행암대杏巖臺와 행암유원杏巖遺園을 새긴 비석(각자刻字)이 축대처럼 놓여 있었다. 수몰 전 마을 사람들은 이 비석 아래를 "비밑"이라고 불렀다. 행암은 농암 선생의 여섯째 아들인 윤량의 호이다. 행암대는 옛날에 있었던 정자의 터와 관련된 각자이고 행암유원은 행암의 자취와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대들이 새긴 각자이다. 행암대 위로 올라가면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봉우리인 수루뫼(수림뫼ㆍ소나무숲으로 우거진 산)가 있다. 그림 중앙에 마을을 관통하는 신작로를 중심으로 아랫쪽은 아랫마(아랫마을), 윗쪽은 윗마(윗마을)라고 불렀다. 그림 하단에 보이는 무성한 강물은 분강이다. 분강은 낙동강(낙강)이 분강촌 앞에 와서 넓고도 깊게 돛단배처럼 우묵하게 모여 있는 형상을 했는데 농암 선생은 이를 "분강"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림 오른편 강가로 200여 미터 올라가면 물레방간이 있었다. 물레방간 앞 강가에는 검은 돗자리를 펴 놓은 것 같은 방석돌이 찰랑거리는 강물과 포개져 있는 빨래터가 있었는데 겨울이 되어도 강물이 차갑지 않아서 마실 아낙네들이 이곳에 모여 수다를 떨며 빨래를 했다. 빨래터 앞에는 넓고 깊은 분강이 통소와 구여울을 지나 부포로 흘러 갔다. 구여울 옆에는 분천방구와 감퇴방구(쌍암雙巖)가 터줏대감처럼 누워 있었고 분천방구 뒤에는 마을과 강을 긴 둑으로 막아주는 천방이 있었다. 천방둑은 홍수가 났을 때 낙강이 불어나서 분강촌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제방 역할을 했다. 천방둑 오른쪽에는 마릉당골과 마당재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숫빠(곶이바위)를 거쳐 분강으로 들어가는 "실거랑"이 있었다. 실거랑은 분강촌의 유일한 거랑이었다. 그림 왼편 강물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구여울" 지대이고 오른편 소나무숲 아래는 강물이 통처럼 깊게 고여 있는 "통소"가 있었다.
<그림2>는 1992년 족친 화가 이택 선생(79ㆍ교육자 및 전 화랑교육원 원장)이 수몰 전 분강촌 전경을 그린 "분강도" 이다. 사진 왼편 상단에 넘티로 넘어가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곤재(건재乹峴) 길이 보인다. 이 곤재 길을 넘어가면 넓은 넘티가 나온다. 옛날 퇴계 선생이 마당재를 넘어서 이웃인 분강촌에 와서 농암 선생과 노닐다가 이 넘티 고개에서 늘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림 왼편 농암종택 뒤 가파른 산이 송곳배알 밴달이고 오른편 산중턱에 보이는 정자가 애일당愛日堂(1533)이다. 애일당은 농암이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날을 아껴 효도하기 위해 지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정자이다. 즉, 애일당은 당시 부모님과 마을 노인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한 경로당인 셈이다. 분강 언덕에 지은 이곳에서 동네 노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어울려 즐겁게 여생을 보냈다. 애일당은 농암의 "양로연養老宴(1519)", 구로회九老會(1533)", "효빈가效嚬歌(조선 중종 때 1542년경 )" 그리고 그의 "효孝 사상"과 선조 임금이 하사한 "적선積善"으로 이어지는 산실이 되었으며 2023년 후대들이 "농암 孝(효) 문화원'을 건립하여 그의 아름다운 덕행을 이어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농암의 시호는 "효절공孝節公(명종12년ㆍ1557)"이다. <그림2>에서 이택 선생은 애일당 오른편 바로 밑에 있던 농암바위도 선연히 그려 놓았다. 농암바위 왼편에는 사림과 후손들이 농암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분강서원汾江書院(분천서원ㆍ1699)이 보인다. 분강서원에서 오른쪽으로 신작로를 따라 400여미터 올라가면 한국 유학의 성지인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陶山書院(1574)이 위치하고 있다. 분강촌에서 도산서원까지 신작로에 있던 가로수는 아름다운 소나무였다.
<그림1.2.3>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천 원권 지폐 뒷면(그림4.그림6) 산수화[겸재 정선ㆍ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1746)]의 제일 왼편 상단 산과 강이 길게 접해 있는 분강촌 마을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6>의 노란색 덧칠을 한 지역이 농암 선생의 터전인 분강촌이다.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인 "계상정거도(그림4.그림6)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겸재가 그림 왼편 상단에 농암종택(분강촌)과 그 옆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애일당 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그림6 노란색 속 두 개의 정자가 보인다). 참으로 정밀한 그림이다. 우리가 유년시절 뛰어놀던 산천과 진배없는 전경이다.
계상정거도는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 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이다. 계상정거도는 겸재 선생의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퇴계와 우암, 두 스승의 참된 행적을 모은 서책)" 속에 있는 그의 그림 4개 가운데 하나이다. 퇴우이선생진적첩(1746)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이 주자학의 요체를 정리한 <회암서절요 서>와 우암 송시열이 이에 붙인 발문 두 편 그리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 네 폭이 곁들여진 16면짜리 서화첩이다. 이 서화첩은 현재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보물 585호로 지정돼 있다.
계상정거도 속에는 현재 도산서원내에 있는 도산서당(도산서당 안에는 온돌방 서재가 있는데 퇴계는 이곳을 "완락재玩樂齋"라 했다. 퇴계가 이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계상정거도'에서 보인다. 완락재의 오른편 마루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으로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했다. 1970년대 초중반 수몰 전 우리들이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공일날 이따금씩 마루를 닦고 주변의 잡풀을 뽑으며 정화를 하던 그 공간이다)에 앉아서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집필하고 있는 퇴계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그림5는 그림4와 6 속의 정자를 확대한 모습). 하지만 도산서당의 실제 모습은 그림과 같지는 않다. 그림 속에 보이는 정자는 퇴계 종택 맞은편 개울가 옆에 있는 "계상서당"의 모습이다. 겸재는 계상서당을 현재의 도산서당 자리에 놓고 주변 풍광은 사실적으로 그렸다. 도산서원 앞에는 도산오곡 지대인 넓은 강물이 고였다가 흘러가는 "탁영담濯纓潭"이 있었고 탁영담 건너에는 솔밭 속에 소각인 "시사단試士壇(1792)"이 자리했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시사단이 있던 섬마(섬마을)와 도산사곡 지대인 분강촌은 완전히 수몰되었다. 탁영담 건너 섬마 강변에 있던 시사단은 수몰 후 돌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그 위로 이건해서 현재 옛날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림3>은 이택 선생이 1950년대 분강촌 물레방간을 회상하며 그린 "부내 물레방간(2024)" 풍경이다. 철철철~ 하면서 물이 떨어지는 가운데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물레가 마구 돌아가는 것만 같다. 물레방간 언덕에도 분강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곤재와 송곳배알 농암종택 분강서원에도 봄빛이 짙다. 마지막 <사진1.2.3>은 지난 2009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캡쳐 장면이다. 옛날 분강촌 구당나무가 자리했던 앞들에서 사래 긴 밭고랑을 밭갈이 하던 옛 어른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서 진한 향수와 그리움을 자아낸다.
<사진4.5>는 수몰 전 분강촌 수루뫼(수림뫼)에 있던 행암대杏巖臺와 행암유원杏巖遺園의 각자 모양이다. 농암종택(홈페이지)의 '문헌자료'에 있는 사진이다. 분강촌 동구밖 길 끝에 청고개 조금 못 미쳐서 농로 오른쪽에는 논과 밭이 뒤섞인 앞들(전평)과 함께 언덕에는 '행암대'와 '행암유원'을 새긴 비석(각자)이 축대처럼 놓여 있었다. 수몰 전 마을 사람들은 이 비석 아래를 "비밑"이라고 불렀다. 행암은 농암 선생의 여섯째 아들인 윤량의 호이다. 행암대는 옛날에 있었던 정자의 터와 관련된 것이고 행암유원은 행암의 자취와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대들이 새긴 각자이다. 행암대 위로 올라가면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봉오리인 수루뫼(수림뫼ㆍ소나무숲으로 우거진 산)가 있다. 농암종택의 문헌자료에 있는 행암대 및 행암유원과 관련된 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행암杏巖은 농암 선생의 여섯째 아들 윤량閏樑(1516~1589)으로 명종 7년(1552)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의 관직에 올랐다. 행암이 명나라에 가 있을 때 황제가 관작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분송盆松 몇 그루만 가지고 돌아와서 행암대에 심고 만년의 소영거리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다른 자료인 사단법인 "농암 孝 문화원"의 문헌자료(행암 이윤량 묘갈명)에는 "행암은 명나라에 가서도 공로가 있었으나 벼슬과 포상을 받지 않고 다만 소나무 두 그루를 화분에 담아 와서 집의 남쪽 암대巖臺에 심고 스스로 호를 행암杏巖이라 하고 만년에는 거처에서 시가를 읊으며 세월을 즐겼고 쟁반과 항아리 등 유물이 본손의 집에 남아 있다"라고 고찰되어 있다.
수몰 전 유년시절 분강촌에서 도산국민학교에 다닐 때 가을에 수루뫼(수림뫼)에 있던 농암 선생의 둘째 아들 벽오碧梧(이문량李文樑·1498∼1581) 선생의 묘소에 시사를 지내기 위해 가는 길에 '비밑' 위에 있던 '행암대'와 '행암유원' 앞을 지나가며 바위에 새겨져 있던 각자刻字와 주변의 산봉오리에 있던 무성한 소나무숲을 본 적이 있다. 분송이란 보통 분재한 소나무를 말한다. 한편 윤량은 내의원판사를 지낸 어의御醫였으며 퇴계가 말년에 병환으로 위중할 때 그가 검맥을 여러 번 했다고 전해진다. 농암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퇴계가 병문안을 와서 자리를 지킨 인연과도 상통되는 대목이다. 이런 깊은 인연으로 인해 농암 사후 그의 행장기行狀記는 퇴계가 썼다. 농암의 친구인 송재松齋 이우李堣는 퇴계의 숙부였으며 둘은 과거에 함께 급제하기도 했다. 또한 퇴계는 농암의 둘째 아들인 벽오와도 절친한 친구 간이었다. 퇴계가 지금의 "예던길"로 불리워지고 있는 길을 옛날에 천사곡川沙曲에서 접어들며 청량산을 여행할 때 지은 시詩 ["강가에서 기다려도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先入畵圖中)"] 속에 나오는 임은 바로 농암의 아들이자 퇴계의 친구인 벽오공을 말한다. 퇴계는 평생 동안 청량산을 여섯 번 올랐다. 도산육곡인 천사곡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갔던 그 예던길은 퇴계가 사랑했던 선경 속의 오솔길이자 그의 철학을 더욱 깊게 하는 사색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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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를 보면 "계상정거도" 그림 속에 있는 도산서당에 앉아서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 퇴계가 주자대전의 요체만을 뽑아 만든 서책)"를 집필하고 있는 퇴계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퇴계退溪(이황李滉ㆍ1501~1570)는 조선 명종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퇴계는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며 "송나라의 주자"처럼 동방성리학의 기반을 세워서 "동방의 주자"로 불린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건립된 서원이다. 그의 위패는 도산서원 상덕사에 봉안돼 있다. 퇴계는 농암이 살고 있는 분강촌과 이웃한 토계에 살면서 34년이라는 나이차도 잊은 채 평생동안 함께 벗하며 학문과 자연을 깊이 사랑하고 노래했다. 말년에 퇴계는 농암과 함께 분강촌을 소요하며 탈속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분강촌 앞을 고적히 흘러가는 분강에 배를 띄우고 유영하며 지은 강호 시가와 강물 위에 표표히 떠 있는 자리바위(점석簟石)에서 자연을 노래하며 강호지락을 나누는 광경은 조선시대 강호 가사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유상곡수流觴曲水로 일컬어지는 당시의 시가와 전경은 "농암집聾巖集"의 ‘취시가醉時歌’에 잘 나타나 있다(餘泛舟遊簟石次退溪: 비가 그친 후에 배를 띄우고 자리바위인 점석에서 유상하며 퇴계의 시를 따라 짓는다. "농암집"의 ‘醉時歌’). 농암과 퇴계는 이웃이자, 벗이자 그리고 족질간이었다.
♤애일당은 농암의 "구로회(기로회 혹은 백발회 등으로도 불림)"와 "양로연", "효빈가" 그리고 그의 "효 사상"과 선조 임금이 하사한 "적선積善"으로 연결되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2023년 후대들이 "농암 孝(효) 문화원'을 건립하여 그의 아름다운 덕행을 이어가는 단초이자, 계기로 작용했다. 농암의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옛날 수몰 전 분강촌에 있던 분강서원에서 오른쪽으로 신작로를 따라 400여미터 올라가면 한국 유학의 성지인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陶山書院(1574)이 위치하고 있었다. 분강촌에서 도산서원까지 신작로에 있던 가로수는 아름다운 소나무였다. 사진 속을 보면 당시 신작로에 있던 소나무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보인다. 소나무를 심어서 만든 가로수... 경이로운 전경이 아닐 수 없다. 이서락 선생이 1974년 촬영한 광경이며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사진이다.
♤농암의 시호는 효절공이다. 농암은 효와 관련되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애일당愛日堂과 양로연養老宴, 효빈가效嚬歌, 구로회九老會 등은 농암의 "효" 사상과 직결되는 유무형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애일당은 "하루 하루 가는 날들이 안타까워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농암이 분강촌 강가 언덕 위에 지은 정자"이다. 이곳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마을 노인들이 모여 즐거운 여생을 보냈다. 위에 있는 두 개의 컬러 사진은 1976년 안동댐 수몰로 인해 2007년 가송리로 옮겨서 지은 애일당 앞마당(윗사진)과 강각 난간에서 2019년 불천위 제사 때 아내와 함께 한 사진이다. 유년시절 애일당 난간에 올라가서 왼쪽을 쳐다보면 멀지 않는 곳에 도산서원과 섬마 시사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래에 있는 흑백 사진은 안동 대륙사진관 월파 윤수암 선생이 수몰 전 1960년대 촬영한 분강촌에 있던 애일당(아래 정자)과 강각江閣(위 정자) 전경이다. 강각은 1544년 농암이 농암바위 조금 위 강가에 지은 소각 명칭이다. 강각은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누각이다. 영남가단은 시를 쓰는 모임이었다. 이 가단의 심지 속에서 농암가, 어부가 등이 탄생하였으니 강각은 필시 영남가단과 농암의 대표적인 시작을 탄생시키는 단초 역할을 한 시상의 요람이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강각은 퇴계와 김안국 주세붕 이언적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의 당대 걸출한 유학자들이 함께 한 명소이기도 하다. 2017년에 촬영한 두 개의 컬러 사진 속의 애일당 및 강각의 전경과 흑백 사진 속에 있는 수몰 전의 애일당 및 강각 사진 간의 세월 간극은 어림잡아도 65여 년이나 된다. 컬러 사진은 차종손(이병각ㆍ현 tvN joyProducer)이 담아주었다.
첫댓글
농부와 소가 밭갈이하는 모습이 너무나 정겹게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