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0년 말 2차 아편전쟁으로 인한 베이징 함락 소식에 서울에선 피난 대소동이 벌어진다
- 조정에서 동지사 사절단에 이어 곧바로 2차 위문사절단을 꾸려 열하로 파견, 동정을 살피게 하다
- 1861.2.27 서울 출발, 2개월 후 열하에 도착하여 피난와 있던 함풍제를 알현하다
- 문안사 부사 박규수(54세), 역관으로 오경석(30세)
*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 북학 사상을 가학으로 익혀 왔으며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박학다식, 만물박사로 알려졌다.
- 실사구시 추구
- 1828년 21세 나이로 효명세자(19세)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아 자문, 보좌역으로 삼아 늘 옆에 끼고 다양한 주제를 논했다
- 1830년 효명세자가 21세 나이로 사망하자 낙담한 박규수는 칩거하여 북학과 주자학 공부에 전념
- 1848년 다시 세상으로 나와 과거에 합격, 헌종에게 환영을 받았다
- 1849년 평안도 용각현령으로 부임했으나 1949.7.25 헌종이 사망하자 또다시 낙담했으나 그럭저럭 능력은 인정받아 외근직, 암행어사 등 밖으로 공직생활을 이어나감.
* 박규수의 보고서
- 태평천국 토벌에 애를 먹고 있으며, 난징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수괴 홍수전이 죽고 석달개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고 잘못된 정보를 보냄
- 베이징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교역늬 이익에만 뜻이 있을 뿐 이며, 서양인들의 종교도 허무맹랑하여 사람을 모으지 못하고 교회에서 주는 떡고물 얻어먹으러 모이는 자들 뿐이라 보고
- 황제가 열하에 가 있는 현재 나라의 가장 큰 기둥은 베이징의 공친왕이며 군에는 승격림심과 승보 두장군이 탑이고 남쪽엔 증국번, 낙병장, 호림익이 있다고 보고, 인재는 많지만 관료사회가 전반적으로 썩어서 인사는 뇌물로만 이루어지고 백성들의 고혈을 심하게 쥐어 짜고 있다며 민심이반이 심각하다고 쓰다
- 위태로운 지경이면서도 시스템이나 사람들이 시장에서 사고파는 일상들은 안정적이니 확실히 대국은 썩어도 준치인 듯 하다고 보고
- 전반적으로 위기설로 겁을 줘봐야 조정대신들에 의해 탄핵을 당할까 걱정이고, 뭐가 될 변화될 것 같지도 않으리란 생각에 안이한 보고서를 작성하다
* 1862.3월 박규수는 경상도 전역에서 백성들이 대봉기 한 일에 대한 안핵사로 임명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