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진족 문자
동의어 여진문자는 일반적으로 여진족문자를 가리킨다
여진문자 중국어 바이두백과는 몽골문자에서 파생이 되었다 한다
여진문자는 상형문자 홍산문자에서 파생을 한것으로 보이는 문자도 있다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은 여진 고문자와 홍산문자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출처:바이두백과 소스: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여진족 문자는 동북 고대 민족인 여진족이 사용하던 것이다
여진어를 기록한 글.여진문은 12에서 창제되었다세기의 금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자와 함께 공식문자였다.여진족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란문을 참고해 창제한 글이다.13세기 몽골인의 손에 금사망한 뒤 일부 여진 제부에서 15세기 중반까지 사용되면서 명나라 후기 여진문은 소멸됐다.후금이 창제한 만문은 몽고 자모로 여진문과는 관계가 없다.
명년 초년 동북 지방의 여진족 중에는 아직 소량의 용무가 있었다을 사용하다. 영락연간 사이관이 지은 《화이역어》여진관 잡자와 발췌문이 있어 여진문 연구에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이다.1413년 세워진 영녕사비는 현존하는 유일한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문비각으로 헤이룽장(黑龍江) 하류 지금의 러시아 트림 근처에 있다.현존하는 여진대자 석각(石刻)은 총 12점으로, 이 중 11점은 금대(金代), 1점은 명대(明代)에 속한다. [1]
중국어 명여진족 문자 민족여진족 여진어 유형을 투로 기록하다공식 문자 별칭은 여진문 유형어소 문자, 표음 문자어 여진어
카테고리
1 역사 연혁
▪생성하다
▪발전하다
▪목적
2 글꼴 구조
3문법적 특징
4 현존 문헌
▪ 비문
▪ 공문
▪제벽
▪ 동인
▪동경
▪ 원고
5 언어 연구
역사 연혁
생기다.
여자 진인은 본래 백산흑수 사이의 선진지숙신·양한이다
부여, 위진의 읍루, 북조의 물길 및 수당나라 말갈의 일맥상통하는 후예로, 사적 중 또 다른 관견으로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11세기 중후반 거단료 왕조에 복속된 흑수말갈의 한 지생인 여진의 완안부는 수령 아골타(阿骨打)의 인솔 아래 성장하여 1114년 두어연에서 요 천조제의 행보에 항거하였다.
1115년 아골타는 완안부의 옛 거처인 안출호(현재의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 남)에서 황제로 칭제되어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10년 후인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두 가지연후에 변경을 쳐부수고, 휘흠을 포로로 잡고, 또 북송을 멸망시켰다.
금나라 강역이 가장 넓을 때 동북쪽은 지금까지 일본해와 오호츠크해로 외흥안령을 장악하고 북서쪽은 몽골 초원 제부를 관할하며, 서쪽은 산시(陝西)와 서하(西夏)와 접경하고, 남쪽은 화이수이·친링(秦嶺)과 남송(南宋)을 경계로 하여 화북(華北) 지역 전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도성은 연경(延京, 지금의 베이징시)으로 오래되었다.금대력 10제, 향조 119년, 1234년 몽골에서 사망했다.이후 계속 중화된 여자 진인을 제외하고 많이 남았다중원 밖에서는 여진의 옛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삼강평야와 흥안령 지역으로 되돌아갔다.
발전하다.
여자 진인은 문자가 없었으며, 거란 정권의 절제를 받은 초기에도 신선했다
통치단어문. 대체로 아골타조 대대로부터 꽤 숙달되었다.금숙종)은 거란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아골타 자신은 거란어를 익혔으며, 파료(破遼)가 포로로 잡힌 후 거란문과 한문을 알게 되어 자제들에게 거란문을 배우게 하였다.거란문자를 거의 거란문으로 주고받은 금인여진어(金人女眞語)와는 거리가 먼 아골타(阿骨打)는 거란자와 한자를 익혔던 신료 완안희윤(完安希尹)과 예루(葉魯)에게 거란대자와 한자를 기초로 시제하고 1119년(金天輔 3)에 여진문자를 반제(反制)하도록 했다.대자(大字)는 20년 뒤인 1138년(김천권 원년) 희종완안(熙宗完安誠)이 거란자를 참조하여 또 다른 여진문자를 반포하였는데, 이것이 후대에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불리게 되었다.때 반포하여 다음과 같이 조명하다.
백성 가오밍, 여직, 거란, 한인이 각각 이 글자를 쓴다.발해인은 한인과 같다.
이때 여진 대자는 관용 문서에 쓰이기 시작했고, 소자는 돌려주었다
개정하여 1145년까지(김황통 5년)이로부터 여진대소자는 거란문(居丹文)과 한문(漢文)을 통달하여 국내를 병행하였고, 해릉조시(海陵朝時)에는 여진(女眞)·거란자(擧蘭字)를 경서(經書)로 시행하여 귀족의 자제들을 다층 선발하여 회집도(回集都·지금의 북경)에 집중적으로 가르쳤으며, 1173년(金大定13년)에는 여진사책(女眞士策)과 시회시(詩會試) 제도를 수립하여 여진국자학(女眞國子學)를 겸하여 여진국자학(女眞여진문에 정통한 층에서는 명나라 정부와 교류가 있을 때 여진자로 문답을 하고, 명정에 사이관(四夷館) 및 그 후의 회동관(會同館)인 연인(延人)이 여진자(女眞字)를 두어 통역에 필요하게 하였는데, 현재 두 관이 지은 《여진역어(女眞逆語)》가 그 증거로 남아 있다.
목적
금나라가 여진자를 창제하는 주요 목적은 민족 국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미지로 인해 여진자가 만들어진 후 주로 관에 사용되었다
방문서는 금나라 중후기인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두 문자로 한문전적 여진화되기 시작했다.1234년 몽골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오늘날 중국 동북 여진각부에 사용되고 있으며, 1185년 건립된 《대금득승타송비》부터 1413년 《영녕사기비(永寧寺記碑)》까지 228년 동안 금나라 문자가 동북통구스 제부의 소통 매개체였다는 점에서 여진 문자의 실제 여진문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사용기간은 446년 정도로 추정된다.16세기 중엽 여진이 부상하고 누르하치가 두루뭉술한 글을 만들어 사용하던 것을 멈췄다.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진의 글씨는 총량이 크지 않고 큰 글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글꼴 구조
여진문은 여진대자와 여진소자로 나뉜다.여진자 구조는 간단하고, 획은 가로, 곧게, 점, 삐침, 누름 등이 있다.필기 방식은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줄을 바꾼다.여진문은 한자 펜을 빌려 맞춤법을 쓴 여진어로 표의문자에 속한다.
여진문은 남송인의 치밀한 《계신잡식》에 나온다이후 중원 지역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1829년(청도 광구 9년)에야 청나라 사람인 유사육찬 여진자비고(劉師陸作女眞字碑考)가 시안비림 대금황제도통경략랑군행기(大金皇弟都統經略郞君行記)의 거란자와 하남개봉 여진사제명비(河南開封 女眞士題名碑)의 여진자를 각각 여진대소자로 보고 널리 포장한 오류로 파장이 아직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1950~60년대까지 거란 대소자 비각의 출토와 발표로 김광평은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졌다.현재 남아 있는 여진의 글자는 대부분 큰 글자이다.
《금사》는 대소문자의 구별에 대해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는다.자료와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글의 대부분이 여진(女眞)의 대자인 만근(晩近) 산시(陝西)성 비림(碑林)의 효경대(孝經臺)에서 여진문 창제 날짜와 가까운 '여진자문서' 금인이 손으로 쓴 파편이 발견된 것을 증명한다.확실한 여진소자 작품은 1972년 허베이성더가 발견한 금은주마패와 1976년 소련 빈해변에서 본 구니신 은메달 두 개에 불과하다.
여진자와 거란자의 구체적인 관계에 관하여 《금사》에 의하면>라는 기재가 있다.
희윤은 한인의 해서자를 본뜬 것인데, 거란자 제도로 인하여 이에 합당하였다국어,제여진자.(완안희윤전)
윤자께서 거단 글자를 본떠서 여진 글자를 만드시기 바랍니다.(욱전)
상술한 사료를 병합하면, 더욱 믿을 만한 해석은 여진자일 것이다
최초의 참조는 거란자 중에서 한자에 가장 가까운 크기다글씨는 희종이 나중에 또 다른 문자를 만들어 이를 병행한 것을 감안하면 여진 대소자의 청본은 각각 거란 대소자일지도 모른다.자세한 연구는 20세기 중엽 일인산로 히로아키(廣明)와 내국인 김광평(金光平)에 관한 것이다.
거란자와 유사하게 여진대자는 선형 배열로 쓰여졌다단체자; 여진소자는 대부분 합체이며 그 안에 들어 있다의 글자 색소는 대자에서 직접 채취한 것이 더 많은 것 같다.현존하는 여진문 자료는 여진자 계통이 표의자(ideogram)와 표음자(phonogram)의 혼합체로서 후자가 뚜렷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표음자가 여진어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변격 변위 접미사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표음자가 많아지자 원래 순수 표의자로 기록되던 어휘도 표의자(表意字)를 표의자-표음자로 혼합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문헌은 현대 일본어 서면 문헌의 특징을 더욱 많이 나타내 보인다.
시대 뒤편 문헌(명나라 때 편찬된 여진역어 포함)에는 여진어가 여러 표음자를 이어 붙여 붙여져 있고, 표의자는 고유의 명물 이름을 적은 어간으로만 쓰였다.현존하는 여진문의 총 자수는 갈루패 698자, 김계장은 859자, 우라희춘은 여진문자서의 잔엽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정했다.〈여진문자서〉의 잔엽에 반영되는 식별 가능한 자형은 중복되지 않고 총 1196자이며, 이 중 기존에 알려진 문헌에서 볼 수 없는 여진자는 584개이며, 이에 따라 현재 여진자는 총 1443개에 이른다.
여진자 자체의 자형으로 볼 때 외관상으로는 그럴 듯합니다.한자의 감필 또는 개필의 산물이다.여진자는 대부분 독신이다글자, 획수가 10획 이하이고 한자와 같은 편방부수를 가리기 어렵다.한자학상의 '육서(六書)' 이론을 참조하면, 그 조자의 메커니즘으로 미루어 여진자는 거란자와 한자에 기초한 전주(轉舟)·가차(假借)·지사(指事) 등으로 구성되고, 소량의 상형자와 회의자(會意字)도 있는 듯해 뚜렷한 형성자(形聲字)가 부족한 것이 여진자의 특징이다.표의자는 여진어사에 대해 말하자면, 일본어로 "훈독"한 표현과 유사하기 때문에, 왕왕 그렇다여러 개의 음성 음절이 하나의 단자에 대응하므로, 여진문 표의자 중 동음 현상은 극히 드문 반면, 여진문 중 표음자는 대부분 언어 중 한 음절을 기록하여 심음하고 세밀한 규범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간의 동음 현상은 꽤 흔히 볼 수 있다
어법적 특징
여진어는 알타이어족, 만-통구스어족. 주요 특징은, 비교적 엄격한 모음의 조화율이 명사와 동사의 어법 구조에 작용한다는 점, 명사의 변격과 동사의 변위 접미사가 풍부하다는 점, 연사 등의 허사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 동사를 핵심으로 하는 구법의 구조가 SOV형 구조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여진어는 이 같은 접미사형 접착형 특성이 같은 어족인 거란어 등 언어와 비슷하고 중국어와 차이가 많이 난다.이는 여진문자가 중국어 언어의 특징에 맞는 네모난 한자를 제자로 채택할 때의 선천적인 한계를 결정짓는 것으로 보이며, 후기 여진어가 만주어로 이행할 때 그 언어 구조에 더 적합한 속특-회골식 몽문(蒙文)을 제자의 기초로 삼은 내재적인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현존 문헌
여진문 문헌 형식에는 도서·비명이 있다'동경(銅鏡)', '인감(印監)', '제기' 등이다.
비문
《대금득승타송비》
여진문
여진문
-1185년(김세종 대정)25년) 음력 7월 28일 건립된 비석은 현재 지린(吉林)성 부여(夫與)현 라림허(拉林河)에서 발견됐으며 비문은 여진자(女眞字)인 한자 양면(兩面)으로 김문약(金文藥) 33행(行)으로 돼 있다.
《몽골 구봉 석벽 여진대자 석각》1196년(김장종 명창 7)에 비를 세웠는데, 지금의 몽골 켄트현 바얀호텍수목향에서 발견된 총 9행 140여진자 옆에 한자석각 대역이 있어 모두 훼손됐다.
《오둔량필 전음비》 일명 《태》화명잔석'인 1206년 음력 2월 2일 건립한 비문은 한자기사(漢字記事), 여진자(女眞字) 발(發)이라고 새겼고, 여진자(女眞字), 한자 양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한문에 기록된 한 면에는 김장종태(金章宗泰)와 6년(1206년) 음력 2월 2일로 기록돼 있다.그러나 뒷면의 여진문에는 김위소왕 대안 2년(1210) 7월 20일로 기록돼 있어 비 건립일과 발제일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둔양필시비》 일명 《산동》봉래각석(鳳萊刻石) - 지금의 산둥(山東)성 봉래(鳳萊)에서 발견되었으며, 여진어 칠언율시 서3행, 시7행, 비면에 약 170자가 새겨져 있다.
해룡여진대자마애—1216년(김선종 정우 4년) 음력 5월 5일에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의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룽(海龍)현 양수림(楊樹林)에서 발견되었으며, 여진문만 새겨져 있다.
여진사 제명비 일명 연회태국서여진비(台國書女眞碑)인 1224년(김애종 정대원년) 음력 6월 15일 금방(金放)의 진사(進士)를 축하하기 위해 세운 비석(碑石)은 금국태묘(金國太廟)의 연대관(延臺關)에서 개봉(開封)으로 옮겨져 하남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비문은 원래 여진문(女眞文)인 한문(漢文)을 대조한 것인데, 후한문비면은 명대에 개각되어 현재는 여진문비면만 남아 있다.
'류하반단산마애비'는 일명 '유하반단산마애비'지금의 랴오닝성에서 발견된 대금태조식마지비(大金太祖食馬址碑) 비문은 여진문(女眞文)인 한문(漢文) 양면으로, 여진문(女眞文)은 좌측면, 한문(漢文)은 우측면, 하반부 비면이 떨어져 나간 것을 놓고 석각의 진위 여부가 엇갈린다.
《소용대장군 동지웅주절도사》묘비(墓碑) -현 지린(吉林)성 서란(徐蘭)현 완안시이(完安希伊) 가족 묘군 중 하나인 비면에 21자가 한 줄만 발견됐습니다.
《북청대자석각》-우황호그해(1218년 추정 김선종 흥정 3년) 음력 7월에 세워진 비석은 현재 조선 함경도 북청현 속후면 창성리의 산곶에서 발견되었는데, 여진문만 새겨져 있고 비문은 오행으로 되어 있다.
《경원여진대자비》——비를 세우다연대는 불명확하며, 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 동원면에 있던 사찰(만관속사)에 있다가 1918년 대한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이 비석은 사방여진문(四方女眞文)으로 경원사(慶源寺)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영녕사기비-어1413년(명성조 영락 11) 음력 7월에 영녕사(永寧寺)의 기원을 기록하여 비음(碑陰)에는 여진대자(女眞大字)와 회골매체(回骨體) 몽고문(蒙古文), 비양(碑陽)에는 한문(漢文), 비측에는 6자(字)의 진언을 새겼다.우측 반부에 있는 여진대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로 쓰고(좌반부는 몽문(蒙文, 좌에서 우측으로 세로로 쓴다) 오늘날 러시아 시베리아의 흑룡강구의 특림(特林)에서 발견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이 있다.
《김상경여진대자권학비》.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 도외구 쥐위안(巨源)진청쯔촌(鎭子村) 인근에서 발견된 김상경 고성 유적은 김세종 때 여진자학을 세운 시설로 추정되며, 여진대자(女眞大字) 11개를 비각하고 7개의 단어를 만들어 '문자도(文字道), 숙야비(宿夜非懈)'로 번역했다.
《히리자르트 모크보르》는 정말 큰 글자이다석함(石艦)은 석함 앞벽에 새겨진 21개의 여진 대자로 '히리잘라모크보르제비헤리, 이리 민위장군 흑칸의 가문'이라는 번역문을 통해 금중 말기로 추정한다.
맨 처음 만문을 찍어서 썼기 때문에1630년 건립된 대금 라마법사보기비(大金羅馬法師寶記碑)는 금나라 문자가 사용 중지된 것을 알 수 있다.
공문
《여진 이니셜》——약 12일세기말엽에 편집된 여진어사전, 현재의 산실화.
《여진자 반고서》와 《여진자》공부서(孔夫書)인 금대(金代)의 공문서는 현재 《문연각서목(文淵閣書目)》 제18장에 수록되어 있으나 내용은 산실되어 있다.
여진문자서-시안비림효경대에서는 금나라 사람들의 필사본이 11쪽 분량으로 발견되었으며, 한 쪽은 흑수성에서 근대가 입수한 서하문 문헌에 섞여 있는 한 쪽은 현재 러시아 과학원의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 분소에 보관되어 있어 글씨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벽제
벽안의 먹물이 속속 발견되어 아는 바는 모두 다 안다3곳은 모두 내몽골 지역으로 후허하오터시 동쪽 교외 백탑 안에 있는 여진대자묵적, 과우중기 두르킬공사 부근의 여진대자묵적, 과우전기 울란무도공사 부근의 여진대자묵적이다.
(4) 이미 모두 산실되었으나 명저한문전적 여진문 번역본 : 1165년판 - 〈정관정요〉 〈백씨책림〉 〈사기〉 〈한서〉 1183년판 - 〈역〉 〈서〉 〈논어〉 〈맹자〉 〈노자〉 〈양자〉 〈문중자〉 〈유자〉 〈신당서〉 〈오공서〉 〈오공서〉 〈오공서〉
동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자는 모두 오방팔방으로, 계략은 '하두호'이다.논하모극인(論河謀克印, 1176년 즉 김대정(金大定) 16년제로 6여진자(女眞字), 장진박물관(藏天津博物館), 화졸해 모감주모극인(和海海 母克克印, 1128년 즉 금대정(金大定) 8여진자(天津博物藏), 협혼산모극인( 浑山母克印, 같은 기간으로 7여진품, 장고궁박물관), 장진자(長古宮博金 大) 7년제로 인화(印化) 등이 있다.
동경
'고위맹안동경' 변각 여진자하나는 '수대문동경'에 여진(女眞)을 새기고, 다른 하나는 여진화압(女眞花 的)을 쓴 동경이 여러 개 있다.
원고
중국—명대왕세정( 山州山)인사부고(人四部考) 및 방우로(方友魯) 《방씨묵보(方氏墨譜)》 저술에는 8개의 여진자가 겹쳤고, 일본 《오처경(吾處鏡)》에는 3개의 여진 단자가 주조되어 있다.
사이후기 회동관이 편찬한 《화이역어?여진역어(女眞逆語)는 《동양문고》(東洋文庫, ToyoBunko)와 《아바노쿠니문고》(の野國文庫, AbanokuniBunko)를 일본에 들여온 《여직역어》를 포함한다.
한문 전적에 기록된 여진어사가 따로 있다금사국어해와 건륭제 흠정금사어해, 우문무소가 1234년에 편찬한 대금국지(大金國志)를 비롯해 김원산곡극에는 고증할 여진어회가 적지 않다.
언어 연구
여진어문 연구 분야, 여진에 대해글 자체의 문자학적 검토가 흔치 않은 것은 여진자가 직접 거란자와 한자를 참조해 창제했기 때문에 자신의 특색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고, 현존하는 문헌의 석독과 여진고어의 구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도 여진문의 정체에 대한 연구의 동인이기도 하다.19세기 말 독일인 W.Grube는 명나라 영락본 여진역어의 베를린 장본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만몽어와 비교 연구해 여진어문자고(DieSpracheund Schriftder Ju?)라고 썼다.en, 1896)이란 책은 현대 여진어문 연구의 효시다.20세기 들어 여진문헌 더 많아지면서땅이 발견되면 중국과 외국의 연구자도부단히 증가하여 획득하였다일군의 중요한 연구 성과.
20세기 전반, 여진어문연구 성과를 배출한 학자는 중국의 뤄푸청(羅福成)으로, 당시 본 여진문 비각에 대해 대부분 고석방(考釋放)해 초보적인 성과를 냈고, 당시 일본 측에서도 여진역어와 내문을 조사·정리한 학자가 많아 야스마 야이치로(安馬彌一郞)가 편찬한 『여진문금석지고(女眞文金石志庫)』(1943)에 집약됐다.20세기 후반 들어 여진문자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일본인 야마로 히로아키(山路廣明)로 《여진문제자연구》(1958년 유인, 1980년 정식 출간)이며, 여진어문 연구에 건설적인 의견을 낸 사람은 헝가리인 리게티(L. L. Ligeti)로 노트프렐(Notepreal)을 대표했다.iminairesurledéchiffrementdes ?PetitsCaractères? Joutchen,1953)과 한국인 이기문(대표작이 중고여진)말의 음운학 연구, 19), 비문 고석에 많은 공을 들인 일본인 다무라는 《득승타송비》를 세 번 석학하였고, 집대성한 연구논저로 국민 김광평과 김계정의 《여》를 썼다.참언어문자연구(내몽골대 출판사, 1964년).문화재출판사, 1980년)와 김계경의 《여진문사전》(문화재출판사, 1984년), 김계정과 우라희춘의 《여진문대사》〈명선당〉(明善堂, 2003년), 〈여진어 만주통구스 제어 비교사전〉(명선당, 2003년), 〈여진역어〉의 결실은 미국 국적의 일본인 기요세 요시자부로(G.Kiyose)의 〈화이역어〉 중 여진어 문자의 연구(A Study of the Jurchen Language)이다.a-II-Yu, 1973)와 호주인 칸트랑(D.A.Kane)의 '사이관 중국어-여진어어어휘'(The Sino-Jurchen Vocabu)laryoftheBureauof Interpreterers, 1975), 여기에 김계석의 학생 치무드도르지, 그리고 히그쌍이 있다.여진어 음성의 재구성 및 이에 대한 어법의 검토(《여진역어연구》, 내몽골대학 학보 1983년 증간)여진역어는 아이신각라우라희춘의 《명대의 여진인》가 真《영녕사기비》헤이-(교토대 학술출판회, 2009년)와 국립중앙박물관소의 연구 성과로 최근 발표되었다.《경원군 여진대자 석각》과 《북청여진대자비》의 최신 연구 성과는 아이신각라우라희춘, 요시모토 도야의 《한반도 加 韩半岛조망다 거란여진》(교토대 학술출판회, 2011년)에서 밝혀졌다.이 밖에도 서안의 비림에서 발견된 여진에 대해서는 큰 글씨가 남아 있다우라히봄의 《여진문자서연구》(풍아사, 2001년), 흑수성에서 출토된 금나라 여진대자 잔장에 대한 연구결과가 종합되었다.연구 성과는 우라히봄의 '애신각라우라히봄 여진거란학 연구'(송향당·2009년)에서 나왔다.
이 밖에도 서양 학자 위열아력이 있다(A.Wylie), 드베리아(G.Deveria), 일본학자 야마모토 마모루, 와타나베 가오타로, 이시다 간노스케, 나가타 나쓰키, 한국인 김동소, 중국학자 자징안, 황진화, 무훙리, 류펑저, 김적 등이 여진어문 연구에 기여했다.
참고 자료 1. 김계환, 《여진언어문자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