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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는 박성우 시인의 시<아직은 연두>에서 따온 연두와 초록을 섞어 지은 이름이다. 또한 해의 시작부터 옛 담배까지 아우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책에 둘러 싸여 단어 하나하나에 고집스러웠던 이는 훌쩍 커 펜을 잡고 타자를 친다. 뭐든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연초는 차분히 노트북을 꺼내어 글을 쓴다. 봄 지나 여름까지 마음속 풋내를 지닌 연초는 오늘도 온 마음을 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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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한 번꼴로 포도를 드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요즘처럼 또 변덕스러운 날씨가 없잖아요. 어떻게 더위를 피하고 계시나요?
저는 여름을 되게 싫어했었어요. 지금은 되게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고 좋아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제가 몰랐는데, 작년에 엄마랑 대화하면 알게 된 게, “엄마, 여름 과일이 너무 맛있는 거 같아.”라고 했더니 엄마가 “여름에 과일이 제일 많이 나고, 꽃이 제일 많이 펴.” 이러시더라고요. 그냥 상투적으로 봄 아닐까 이 정도만 생각을 했지. 여름에 그런 면면이 있다고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구나 하면서, 여름이 꽤나 풍요로운, 되게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계절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름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해가 있거든요. 아마 스무 살 때였나. 그때 장마가 한 달 동안 지속이 됐어요. 무서웠죠, 그때, 비가 한 달 동안 올 수도 있구나 싶었어요. 여름은 뭔가 딱 그런 거 같은 거예요. 인간이 뿌린 대로 거두게 하는 계절. 그 해가. 정말 다 비 때문에 한 해 과일 농사도 다 망치고, 꽃이 필 날이 없었죠. 능소화가 그냥 피자마자 져 버리고 떨어지고, 그러니 되게 무서웠었죠. 빗물에 내려온 강물에 내려온 부유물들이 있잖아요. 쓰레기, 그런 것들. 보면서 다 인간의 업보이니라. 저기에 내 업보도 있다. 하면서 뭔가 여름이 정직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풍요로운 면모도 알게 됐고, 앗아가는 것도 많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걸 다 알고 보니까 정직한 계절이구나 싶었던 것 같아요.
여름에만 보고 즐길 거리가 또 있잖아요,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라던가 자주 드시는 포도라든가.
맞아요, 여름에만 꼭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어떤 계절이든 그 계절에만 보이는 게 있는데, ‘내가 여름을 참 많이 놓치고 지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름에 꼭 제철 과일을 챙겨 먹어요. 그 철에만 날 수 있는 과일. 그래서 포도도 열심히 챙겨 먹는 거고, 또 저랑 같이 사는 고양이 마루 눈이 엄청 초록빛이 돌아요. 그래서 여름에 사진을 찍어주면 참 예쁘게 나오거든요. 유독 창가를 더 열심히 보는 것도 있는 것도 있고. 더우니까 마루가 엄청나게 늘어져 있는데, 그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좋아요. 겨울엔 해가 길게 들어오잖아요. 거실에. 그래서 따뜻해서 늘어져 있는데, 여름엔 더워서 더 게을러져 있거든요. 그 모습을 보는 게 참 좋고, 마루가 온몸으로 그 차이를 느끼는 게 참 좋아요. 마루만큼이나마 저도 온몸으로 여름을 느껴야겠다 생각을 한 작년부터 한 것 같아요.
고양이 마루나 작은 숲이라 이름 붙이신 아스파라거스도 그렇고 돌보는 존재들과 공존하면서 지내시는 일상은 어떠신가요?
주고받는 관계인 것 같아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향적인. 관계가 모름지기 한 방향으론 유지할 수 없고, 쌍방향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쌍방향이라는 걸 사람들하고 지낼 땐 잘 몰라요. 사람들은 나랑 똑같이 말하고, 나랑 다르게 환경이 있고 하니까, 막상 만났을 때는 서로 주고받는 게 있는지 잘 모르는 거 같아요. 지나고서야 아는 것 같은데, 제가 물 주고 있는 아스파라거스 나누스랑 함께 사는 마루는 제가 주면 그게 다 보여요. 내가 사랑을 주면 마루는 제 손을 따라서 머리를 막 이렇게 움직이고, 제가 오면 막 반기고. 다 사랑을 줘서 가능한 모습들인 거죠. 근데 저도 그만큼 마루한테 사랑을 받아요. 골골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면서요. 그리고 아스파라거스 나누스는 정말 고심 끝에 데려온 아이거든요. 제가 식물을 잘 떠나보내서 (웃음) 제가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데려온 아인데, 일 년째 생각 없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요. 걔를 어떻게 두었나 생각해보니, 주에 한 번만 물주라는 걸 열심히 지켰고. 바람을 좋아한다길래, 제습제를 켜지 않는 한, 항상 베란다에 두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방에 가끔 데려와서 사치를 부렸죠. 내 방에 나무가 있노라 하면서.
귀여운 사치네요.
가끔 부렸어요. 나보다는 걔를 생각했거든요. 걔도 정말 잘 자라주었죠. 저는 오히려 식물이랑 마루를 통해서 관계라는 게 쌍방향이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선 저도 더 바라는 게 많아지고, 그 사람도 더 얻고자 하는 게 많아지는 그런 관계가 참 많았는데, 동물과 식물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결국은 서로를 돌보는 거죠.
맞아요
하루 중 이것만은 꼭 해야지 라던가 내 일상을 굴릴 수 있는 본인만의 습관이 있을까요.
습관화된 것들은 있는 것 같아요. 일기 쓰기, 모닝 페이지기도 하고, 또 하나는 제가 손이나 발이 되게 커요. 근데 이게 약간 후천적이에요. 노력으로 커졌거든요. 커지기 위해서 노력했다기보다, 내가 알고 보니 한 행동들이 커지게 했더라 이건데. 제가 일어나면 손을 이렇게 쫘악 쫘악 폈거든요. 아침마다. 손을 제일 많이 움직이니까 그 찌뿌둥한 느낌이 싫었던 것 같아요. 일어나면 항상 이렇게 손을 쫘악 폈는데, 그것 때문에 손이 되게 커졌어요. 정말로. 발도 이렇게 항상 쫙쫙 폈거든요. 발도 커졌고. 너무 신빙성 없는 말을 지금 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웃음) 손발 쭉쭉 늘리는 게 아, 오늘 아침 내가 발로 걸어야 하고 손을 써야 하고 그런 걸 인지하면서 하는 행동이었어요.
사소한 습관도 하루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죠. 마루나 아스파라거스를 돌보는 것처럼 연초가 나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이 있을까요?
당연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해야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잘 먹고, 잘 자고, 매일매일 씻고.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거 세 개만 잘해도 그날 하루는 성공한 거예요. 그니까 내가 하루가 진짜 막 너무 힘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하거든요. 밥도 안 먹고 잠도 잘 안 오고, 씻기도 싫고 모든 게 항상 그래요. 근데 그 세 개를 의식적으로 내가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싶다고 하면 정말 열심히 해요. 때를 민다든지, 재료를 사 와서, 먹고 싶은 걸 뚝딱 차린다든지. 잠도 잘 자려고 막 필로우 미스트 뿌리고, 베갯잇도 갈아주고.
내가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네요.
저는 진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나한테 정성을 기울이고 싶을 때, 그 세 개를 철저히 잘해주려고 해요,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환경 내에서 최상의 환경을 제공해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연초님 블로그에서 과외를 하던 학생에게 주신 편지를 봤어요. 좋아하는 것을 쉬이 놓지 말자는 문장이 울림 있게 다가왔는데, 연초가 좋아서 쉬이 놓지 못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나요.
정말 꾸준히 제가 좋아서 했던 것들,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것들은 글쓰기와 책 읽기였어요. 놓지 못해서 했던 거예요. 놓을 수 있잖아요. 그걸 안 읽으면 그만이고, 안 쓰면 진짜 그만인데. 그러질 못 했던 것들이 그 두 가지였고. 그 둘을 계속하게 할 수 있는 동력은 뭐냐, 라고 하면 결국은 또 타인에 대한 관심, 사랑. 진짜 그래요.
구체적인 예시가 있을까요?
이를테면 제가 너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거예요. 근데 그 친구가 제가 알던 모습과는 다르게 되게 못나 보이는 거예요. 제가 이제 싫어한다고 규정하는 그런 성향을 띤 사람이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만나고 되게 괴로웠어요. 만나고 있는데 뭔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 시간 자체가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그날 걔랑 헤어지고 돌아와서 제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양파의 왕따 일기>부터 해서 관계의 바이블이라고 스스로가 느껴왔던 책들을 다시 읽었어요. 왜 읽었나 생각해보면 내가 얘를 왜 미워하게 된 거지? 그게 너무 궁금해서 다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제 제가 마지막에 항상 읽었던 게 엄청 유명한 데일 카니의 책인데요, 인간관계론인가? 제가 진짜 어릴 때 아빠가 제 책장에 꽂아 주셨어요. 아빠는 그때 동생이 태어나기 전이었나 해서 아빠에 대한 그런, 좋은 아빠가 되는 법 이런 것에 밑줄을 그어놨고, 그 어렸던 제가 건졌던 것 하나는 좋은 친구 관계, 교우관계에 대한 파트였어요.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 같고, 그냥 ‘교우관계’ 그 말 하나에 끌렸던 거예요. 왜냐면 그 어릴 땐 그게 가장 난제였으니까.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 어렵고.
관계가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죠.
더군다나 내가 선택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 모든 사람을 다 만나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 상황이 매일매일 계속 있고. 너무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근데 그 책은 되게 있어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말해 이 사람은? 이 친구 이 친구 막 가릴 것 없이 ‘친구’라고 통칭해서 말해? 이런 놀라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겠는데, 그 책을 거의 매해 읽거든요. 지금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도 있긴 한데 계속 읽어요. 그렇게 읽고 한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는데. 미운 마음보다는 ‘얘가 지난 시간이 어땠길래...?’가 궁금해지더라고요. 물어봤어요. 그러고 나서 정말 거짓말처럼 이 친구가 이해되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으로 나를 대했는지. 그러니까 밉지 않더라고요. 책을 읽고 나면 어찌 됐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잖아요. 그 책을 읽고 나면 그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연히 나만의 시간만이 필요할 때가 있죠, 그렇지만 거기서 조금 나아가 타인한테 한 번이라도 관심을 두는 거. 그걸 할 수 있던 게 책이었던 것 같아요.
소설로도 읽히는 것 같아요. ‘밉다’ 그 자체로 그치지 않고 친구가 왜 그랬을까, 하는 이유를 덧붙여서, 그 인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죠. 근래 들은 이옥섭 감독님의 ‘남을 너무 미워하면 사랑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제가 이옥섭 감독이랑 구교환 배우 정말 팬이거든요, 근데 그 말을 보고 되게 놀랐어요. 왜냐면 제가 되게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거든요. 미워지면 사랑하려고 하는 거. 정말 미워하면 그 사람 단점만 보이잖아요. 단점이 아니라 끝내 예쁜 면을 찾아서 그것만 보려고 하는 거 그걸 되게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보면서 되게 많이 공감도 되고, 어 저런 생각을 해서 저런 작품이 나왔구나,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글이나 소설을 쓸 때도 그 마음이 똑같이 동하겠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소설이나 글을 쓸 때도 인물을 꼭 한 명 등장시키거나 나의 목소리를 대체해서 내는 거다 보니까 그 밑바탕에 어찌 됐건 사랑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뭐든. 그래서 사랑은 당연히 있거니와, 단순하게 구분 짓는 거긴 하지만, 선과 악으로 인물을 나누면, 악인이 있단 말이죠. 그 악인도 뭔가 애정 없이는 그릴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얘한테 애정이 없으면, 얘가 하는 악행들을 어떻게 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얘가 하는 악행들을 독자한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겠어요. 내가 애초에 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인물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글들인 거죠. 전 제 모든 글에 기저에는 사랑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 사랑이 엄청 확고하다 이런 게 아니라 저도 되게 미약하고 아직도 배우는 중이라서, 이게 사랑인가 아니면 이걸 그냥 왜 쓴 건가, 되게 아리까리 할 때가 많고요.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한 몇 분만 지나고 돌이켜 보면, 내가 얘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서 이 글을 쓸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너무 밉지만 동시에 정이 가서 연초 기억 속에 오래 머문 인물이 있을까요?
되게 그런 인물들 많거든요. 엄청 악한데 이해가 돼서, 그리고 내 주변인 같아서. 내가 곁에 둔 사람의 어떤 모습과 닮아 있어서. 그래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던 인물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 첫 시작, 제가 딱 그렇게 미운데 이해가 돼. 그리고 너무 싫은데, 짜증 나는데, 어쨌든 읽어볼까 했던 게 <운수 좋은 날>이었어요. 그걸 되게 어릴 때 읽었는데, 그 남편이 진짜 가부장적이고, 사실은 답도 없잖아요. 진짜 답도 없고, 그래서 커서 다시 읽었을 때는 그 가부장적인 모습이 너무 보이니 ‘짜증 난다’ 이게 더 컸었는데, 어릴 때는 그 사람이 너무 안쓰러운 거예요. 왜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질 못하니 이러는 데 그 말이 너무 슬펐어요. 그래서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저 아저씨가 배운 말이 저거밖에 없어서, 저 말밖에 못 해주는구나. 설렁탕밖에 사줄 수 없어서 저것밖에 못 사주는구나, 라는 걸 되게 어릴 때 보고 엄청 울었어요. 그게 제가 처음으로 미워하면서도 이해가 됐던, 그래서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평소 독서 습관이나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경험들이 궁금해지네요.
사실 저는 글을 남들한테 보여주는 걸 아직도 어려워하고, 정말 도전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 크지 않거든요. 그리고 되게 의심도 엄청 잘해요. 저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유독 그렇게 굴더라고요. 그래서 글을 막 쌓아두고, 혼자 쓰는 건 잘 할 수 있는데, 남한테 보여주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해 온 거라곤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글 써 줬던 거. 그래서 그냥 주변인들 극소수의 정말 가까운 사람들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제가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고 발화했던 시점이 기억에 나는 게,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선생님이 제가 뭐 과제 해오는 걸 보고 책을 좀 많이 읽는다고 보셨나 봐요. 그래서 사설 동아리로 독서토론 동아리를 만들건데, 들어오지 않겠느냐. 주말마다 하는 건데, 하고 담임선생님께서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선생님이 그 글을 어디다 가져가시기도 하시면서 이게 남들한테 보여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르게 다가왔어요. 글을 보여줌으로써 얻는 건 다르구나. 내가 내 안에서 쓰고 마는 거랑 다르구나. 해서 그때부턴 좀 백일장도 나가고 그랬었는데, 중3 때쯤이었나. 예고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을 때 그땐 진짜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입시는 또 다른 세계잖아요. 저 같아도 그 치열함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제가 자꾸 제 도망의 이력을 말하는 것 같은데, 진짜로 도망쳤었고, 자신이 없었어요. 와, 3년 내내 내가 대학 가는 것도 아찔한데 ‘대학을 가려고 글을 쓴다...?’ 그건 정말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도망쳤었고, 그 후로 고등학교 때는 제가 글 쓴다는 것에 매진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마음을 죽여가면서 고등학교 3년을 보낸 것 같아요. 학군이 쎈 동네에서 학교를 다녔어가지고, ‘내가 이걸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어’라는 마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가 그때였거든요. 그런데 꾸준히 그냥 국문과는 생각해서, 대학에 와서는 글을 써야겠다 했는데, 막상 와보니 내가 글을 쓸만한 창구가 그렇게 많지는 않더라고요. 내가 뚫어야지. 그래서 동기들이랑 창작학회를 만들기도 했고, 1년간 고민하다 가 용기를 내 2학년 때부턴 문예창작학을 전공하면서, 글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연습을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자기 안의 사람들에게만 공유하던 글인데, 점점 마음을 꺼내서 남한테 보여주기까지 왔잖아요. 이제는 스스로 글방을 찾아오기까지 이르렀는데, 나만 보려던 글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나요?
사실 단순하게 얘기하면은, 독서였어요, 그게. 왜냐면 책은 어찌 됐건 출간이 돼야, 저자가 출간해야, 출판사가 그걸 내주어야 저도 독자로서 읽을 수 있잖아요. 지금은 다양한 출간 방식이 생겼지만, 그냥 단순하고 책의 물성을 내가 쉬이 얻을 수 있는 건 출간이 돼야 했던 거였으니까. 한마디로, 독자를 전제하에 독자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책들. 그 책들을 쉬지 않고 읽다 보니까 나도 내 글이 내가 읽었던 글만큼 누군가한테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야금야금 키워왔던 것 같아요. 그 변화 과정에 있어서 뚜렷한 게 있다기보단 결국은 독서였던 것 같아요. 내가 글을 씀으로써 내가 얻은 것들 누군가한테 이만큼 주고 싶다는 그런 욕심들. 그런 것들이 정말 자연스레 조금 조금씩 생겼던 것 같아요.
저는 글을 공개하고 피드백 받으면서 다음 글은 더 잘 써야지 하는 것 같아요, 연초는 글을 쓰면서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좋은 에피소드가 여럿 있긴 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아있는 건, 제가 대학교 2학년 문예창작학 처음 전공했을 때, 단편 소설을 써서 냈어요. 분량이 좀 있는 단편 소설이었는데 그걸 한 학기 동안 쓰고, 합평 받고 제출하고, 교수님께 평가받고, 뭐 그런 과정을 거치다가 아마 동기 언니 어머니께서 퇴사하셨던 그런 시점이랑 겹쳤나 봐요. 제 소설을 읽더니 동기 언니가 어머니께 보여드려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된다, 그랬는데, 어머니가 그걸 보고 우시다가 몇 번 더 꺼내 읽어도 되나 물어보셨다는 거예요. ‘그 친구에게 허락받아줄 수 있겠냐고’. 그 말이 되게 오래 남아있어요. 내가 쓴 소설이 누군가한테 꺼내 읽고 싶은 글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확신, 자신감이 생겼던 일이라서 그 일화는 저한테도 귀한 에피소드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에피소드들이 모여서 글을 쓰게 만드는 동력이 되겠네요.
그쵸
글을 쓰는 동력과 글방을 계속 나올 수 있는 힘은 다를 수 있잖아요, 글방을 계속 나올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 같나요?
글을 쓰는 다른 사람들. 결국은 글을 쓸 수밖에 없어서 모인 사람들. 그 존재들 때문에 글방에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안 써오면 당연히 저도 마음이 불편하고, 아 진짜 답도 없다, 글 안 써서 글방 오면 뭐 하냐 싶지만- 제 글을 남한테 보여주는 그 용기만큼, 남들도 그만큼 용기를 내서 가져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합평을 열심히 해줘요. 그 몫이 항상 있다는 거죠. 저만큼이나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글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것. 그것 하나 때문에 제가 계속 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 말을 듣고 나니, 연초가 글방에 가져올 앞으로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굉장히 많아요. 근데 이제 저도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아직 이것까지 이야기하기엔 조금 이르다. 그리고 아직 모르는 것도 많다. 그런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고, 되게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또 사랑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웃음) 저는 제가 글을 계속 쓰고 책을 계속 읽는 이유가 사랑을 놓지 못해서, 라고 생각해요. 타인에 대한 애정 없이는, 타인 시선이 뭐가 궁금하겠어요. 그 타인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든, ‘그냥 나 혼자 열심히 살면 된다.’ ‘나만 잘살면 된다.’ 이런 마음만 지닐 수 있으면 책을 안 읽었을 거예요. 주식 책 이런 걸 읽었을지도 모르죠. (웃음) 아무튼 저는 결국 제 글이 읽는 사람에게 ‘아, 이 사람 되게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있구나.’ 이런 걸 좀 느끼게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것이 세심한 관찰이 될 수 있고, 어쩌면 그 세심한 관찰에서 나오는 큰 문장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큰 개념들. 우주, 세계 이런 것들이 나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관찰 했느냐에 따라서 그 문장이 주는 힘이 되게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결국은 근면한 사랑이 내가 쓰고자 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어요.
근면한 사랑에는 꾸준함이 중요할 것 같은데, 지금 연초가 꾸준히 하고 있는 건 뭔가요?
꾸준히 하는 건 되게 많은 것 같아요. 꾸준히라고 하는 게 뭐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꾸준히에만 집중해서, 일기 쓰는 거나 모닝 페이지 쓰는 거. 그 둘은 정말 매일 꾸준히 하거든요. 그걸 왜 했냐고 물어보면 내 삶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도 당연히 있겠지만, 안 하면 못 배기겠는 거여서 했었던 것뿐이에요. 그래서 제가 꾸준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건 일기 쓰기인 것 같아요. 그리고 뭐, 책 읽기. 책 읽기는 사실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서 제가 이만큼 읽었어요- 하고 자랑할 게 아니라,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제 모습 중 하나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그냥 일기 쓰기인 것 같아요.
요 근래 자꾸 정이 가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는 존재가 있을까요?
저는 요즘 엄마를 그렇게 관찰하는 것 같아요. 엄마를 사랑하거든요. 근데 그만큼 미워하는 것도 되게 크구나라고 생각을 했어요.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근데 엄마를 사랑만 하고 싶은 거예요. 미워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근데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건 너무 어려워요. 너무너무. 다른 건 좀 거리를 둘 수도 있고, 배치를 둘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너무 잘 알고 있고, 좀 뿌리 깊게 얽혀있는 느낌...? 그래서 요즘은 엄마를 엄청나게 관찰하는 것 같아요. 제 일기도, 모닝 페이지도 엄마에 관한 얘기가 많고요.
소설이나 글을 쓸 때 다루고 싶은 주제로도 이어지겠네요.
모녀 관계. 이 이야기는 제가 꼭 한 번 제대로 끝내고 가야 제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관문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왜냐면 이 모녀 관계란 게 너무 지난하고, 복잡하고 아리고, 괴롭고, 또 사랑스러운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비비안 고닉의 선집 중에 <사나운 애착>이라는 책이 있어요. 엄마와 나의 관계인데, 근데 그걸 읽으면서도 느꼈던 건 왜 여성들은 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놓지 못하는가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잘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지, 내가 다른 이야기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요.
모녀 관계만큼 복잡하고 엄청나게 많은 감정이 오가는 관계도 없는 것 같아요.
진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이야기를 어딘 글방에서든 어디서든 꼭 풀어낼 수 있길 바라요.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면서 떠오르는 책이 있다면 하나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들이 막 와르르 떠오르는데, 그래도 아까 모녀 관계를 얘기했으니까. 저는 <루시>라는 소설이 떠올라요. 그 소설이 작년에 읽은 소설 중에 정말 탑 쓰리였거든요. 작가가 이름이 좀 어려워서 기억이 안 나는데, 문학동네 세계 문학 전집으로 나온 <루시>라는 제목의 소설이에요. 그게 이제 흑인 이주노동자 여성의 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긴데, 우리는 많은 정체성을 지닌 채 살고 있잖아요. 근데 그 소설만큼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명확하고 잘 풀어낸 소설은 읽은 기억이 없어요. 그 소설이 저한테는 선망의 대상처럼 되어버리기도 했고요. 희한하게, 제가 엄마랑 뭔가 확 부딪힐 때 꼭 그 책을 읽게 되더라고요. 엄마에 대한 선연한 분노가 가감 없이 있는 책이거든요. 거기서 쾌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 작가만큼 엄마를 잘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결국은 그 관계를 계속 지켜보고, 계속 써야겠다고 마음먹는 게 제가 사랑을 놓지 않는 방법인 것 같아요.
<루시>, 꼭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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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연초에게 추가 질문을 건넸다. ‘이건 다른 질문이긴 한데, 연초는 정체성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앞뒤 뜬금없는 질문에 연초는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저만해도 정체성은 계속 변하는 것 같아서 뭐라 명명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계속 스쳐 가는 거죠.’
뜻을 되짚어본다. 바를 정에 몸체, 성품 성. 정체성은 바른 몸에 깃든 성품이라도 되는 걸까. 우리는 연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글을 쓰는 자세, 나아가 사랑하는 방법은 엿볼 수 있다. 사람은 사랑해서, 사랑을 쉬이 놓지 않으려는 마음은 계속된다. 우리는 꾸준히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글방을 드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