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걷기
글/김덕길
어느 여름, 죽령 옛길을 나는 아내와 함께 시나브로 걸었다. 내 걸음이 지치면 아내의 걸음이 나를 밀고 아내가 지치면 내 걸음이 아내의 걸음 보듬으며 걸었던 길, 그 길은 길이기에 앞서 삶의 여정이었고 여정이기에 앞서 역사였다. 퇴계 이황이 걸었을 길, 죽령 고개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며 다시금 사직서만 한양에 보내고 돌아섰던 그 길, 임금의 명을 차마 앉아서 거절하기 죄송스러워 죽령까지 올라가 사양하고 또 사양했던 그 길,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기생에서 명단을 빼 달라고 간청했던 여자 두향이가 퇴계선생님의 부음에 21년간 참았던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 절규했던 길, 두향은 퇴계와 이별할 때 시를 썼다.
“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리고 퇴계에게 매화화분을 선물했다.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로 있을 때 9개월 동안 두향이를 사랑했고 두향은 은둔 생활을 하며 평생을 수절했다. 퇴계 이황은 두향이가 준 매화 화분을 끼고 살았다. 퇴계 이황이 죽던 날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
두향은 퇴계선생이 죽자 옥순봉 가는 길 강선대에서 자결했다.
그 역사의 죽령 옛길을 걸어 올라선 후, 우리는 죽령 주막에 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었다.
나와 아내는 다시 길을 걷는다.
죽령 옛길을 걷고 제주 올레 길을 걷고 이제 지리산 둘레 길을 걷는다.
매동마을에서 금계리까지 장장 네 시간에 걸친 긴 길이다. 길이 세상에 알려지자 민박집이 들어선다. 이층집 민박집에서 우리는 민박 대신 늦은 아침을 먹는다. 산채나물 뷔페로 차려진 음식을 배불리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길은 지리산을 횡단하며 때론 오르며 때론 내리며 구불구불 이어진다. 길은 고속도로처럼 반듯하게 뚫리지 않고 구불구불 이어진다. 추수가 끝난 겨울 길은 쓸쓸하다. 오가는 사람조차 뜸하다. 둘레 길을 알려주는 통나무 표식 하나가 길의 안내자가 되어주고 길은 며칠 전 내린 눈을 깔고 눈 아래 마른 잎을 감춘다. 멀리 바래봉 꼭대기에 상고대가 하얗다. 겨울에 피는 꽃은 세 가지가 있는데 빙화, 상고대, 눈꽃이란다. 빙화는 나무에 수분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흰 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상고대는 맑은 날 밤 기온이 영하일 때 상공으로 올라간 수증기가 승화되어 차가워진 물체에 붙는 것을 말한다. 눈꽃은 나뭇가지에 얹힌 눈이나 서리를 말한다.
길은 지푸라기로 묶어놓은 포기배추의 밭고랑을 지나고 탄저병에 누렇게 시든 고추밭을 지나고 켜켜이 층층계단모양의 다락논 사이로 이어진다. 밭두렁에 아무렇게나 피었다가 시들어도 여전히 한들거리는 억새의 품위를 길은 외면하지 않는다. ‘고사리가 아파요. 눈으로만 보세요. 라고 쓰인 고사리 밭과 편백나무 향 가득한 숲 또한 길에서 만나는 인연이다.
감나무의 감이 붉다. 까치밥으로 한두 개쯤 남겨두었을 그 여유의 감은 아니다. 열매가 작아 상품 가치가 희박해서, 혹은 일손이 부족해서, 혹은 너무 흔해서 버림받은 감이라고 생각되기에 서글프다. 내 고향 정읍 시골의 감나무가 눈에 선하다. 불에 타서 형체도 없는 그 빈 뜰을 오늘도 감나무는 열매가 무성한 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겠지.
올라오는 길에 잠시 실상사에 들린다.
실상사는 마치 허물어져가기 직전의 쓸쓸함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매표소에서 받은 돈으로 무엇을 하는지 묻고 싶다. 탑사앞 설명문은 반쯤 뜯겨진 채이고 실상사 건물은 색이 퇴색되어있다. 늘 웃고 있는 부처님이다. 나는 실상사 화장실에 들른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건물에 해우소란 간판이 있고 소변 칸이 있고 대변 칸이 있다. 칸칸은 허리 위쪽으론 보이도록 개방되어있고 칸에 앉아 쪽창으로 바깥세상을 구경하게끔 되어있다. 세상 구경 다 했거든 나갈 때 톱밥 한 바가지만 뿌려주오. 란 글귀가 선하다. 해우소는 격절의 공간이 아닌 소통의 공간이다. 톱밥 한 바가지에 대변이 섞여 거름이 되고 다시 거름은 겨우내 모진 바람에 삭혀 퇴비가 되겠지.
돌아오는 내내 나는 생각한다.
나와 문학과의 인연은 어떤 인연일까? 내가 길에서 새로운 길과 인연을 맺듯 나는 이제 문학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자 한다. 인연이 다한 인연은 정리해야 한다.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그 추함이 나를 옥죄일 것 같아서 싫다. 그동안 주로 시와 인연을 맺었다면 이제는 소설과 인연을 맺을 것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다. 정리한다고 해서 아주 끝나는 것은 아닐 터, 애써 아파하지 말자. 길은 다른 길과 다시 이어져 새로운 길을 찾듯, 내가 향하는 나의 문학의 길 역시 다시 이어져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을 것이다. 나조차 나의 미래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구불구불 이어진 인생길을 오늘도 터벅터벅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