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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과 탐라(耽羅)를 통합(統合), 연(延)4천리(千里)
섭라(涉羅)가 탐라(耽羅)고, 제주(濟州)냐? [제2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비판(批判)한다.〉
○「옛 섭라(涉羅)가 탐라(耽羅)고, 오늘날의 제주도(濟州道)냐?」하는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對答)하기엔 뭔가 꺼려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다면, 우리나라 일반(一般) 국민(國民)들께서는,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반문(反問)하겠지만 말이다.
「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이게 바로 문제(問題)다. 일본(日本)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그 허수아비였던 친일(親日)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에 의해 해설(解說)된 한글판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의 정체(正體)가 바로 “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 섭라(涉羅)가 탐라(耽羅)고,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 제주(濟州)냐? 제1편에 이어 계속(繼續) 알아보기로 하자.
※〈“열도(列島)·한반도(韓半島)·대륙(大陸)·대만(臺灣)·해남도(海南島)·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필리핀(Philippines)·보르네오(Borneo)·말레이(Malay)반도·수마트라(Sumatra)·자바(Java)·인도(印度)·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동구라파(東歐羅巴:러시아포함)·지중해(地中海)·홍해(紅海)·흑해(黑海)·북해(北海)”등지(等地)의 이곳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활동무대(活動舞臺)였다.〉
◇ ◇ ◇ ◇
(12)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종(高宗) 34년 정유(1897)9월 6일(임진, 양력 10월 1일) 맑음 : 《今我邦,統合三韓及耽羅地方,延亘四千里,人口不下二千萬,而且百度革新,足以自强矣. : 지금 우리나라는, 삼한(三韓)과 탐라(耽羅) 지방을 통합하여, 영토가 4천 리까지 길게 뻗었고, 인구는 2천만이 넘으며, 또한 온갖 제도가 혁신되어, 충분히 스스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하였다.
➊ 〈延 亘 四 千 里〉란 뜻은 : ‘연긍(延亘)’은 길게 뻗쳤다는 뜻인데, 연(延)은 특히 “멀리, 길이, 너비”등을 나타내는데, 위의 문장(文章)의 4천리(千里)는 길이, 또는 너비를 말하는 것이다. 곧(卽) 「동서(東西)로 길게 4천리(千里)에 뻗쳤다」고 해석(解釋)이 된다.
이는 “연무(延袤)”라는 뜻에서 : ‘연(延)은 동서(東西)’를, ‘무(袤)는 세로 또는 남북의 연장(延長)’의 뜻으로 쓰인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延 亘 四 千 里’ : 곧(卽), 동서(東西)로 길게 4천리(千里)에 뻗쳐 있다.」에서 4천리(千里)란 말은, 당시 ‘조선왕(朝鮮王) 고종(高宗)이 직접(直接)통치(統治)하고 있던 직할지(直轄地)’를 말하는 것이 되며,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➋ 또 하나 서력(西曆)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직전(直前)【고종(高宗)34년 : 1,897년】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인구(人口)는, 약(約) ‘2천만(千萬)명이 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괴물(怪物)의 탄생(誕生)은, 당시(當時) 팽창주의(膨脹主義)와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인 ‘서구(西歐)와 일제(日帝)의 야합(野合)’으로 탄생(誕生)된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이 자(者)들의 “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인 “반도조선(半島朝鮮)”은,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논(論)할 때, 「조작(造作)되었다」라는 것을 금방(今方)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서울(京) 한양(漢陽)에서 천자국(天子國) ‘경사(京師)=경조(京兆)’를 오고가는 사신(使臣)들은, 그야말로 백전노장(百戰老將)들로 여정(旅程)의 지세(地勢)를 손바닥 눈금처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➌ 조선(朝鮮) 선조대왕(宣祖大王)때를 살아간 우리들의 선대(先代)였던 최립【崔岦 : 1,539~1,612년】선생(先生)의 간이집(簡易集) 3권 서(序)편을 보면, 당시(當時) 조선(朝鮮)영토(領土)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나타내주는 한 구절(句節)【送朴僉樞子龍奉使赴京師詩序 :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으로 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박자룡(朴子龍)을 전송하며 시서(詩序)로 써 준 글】이 있는데, 이르기를,
《公將渡鴨江而西.流連遼廣.以屬之關.貫穿畿輔.以達于京. : 공은 앞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서(西)쪽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요동(遼東)과 광녕(廣寧) 땅을 두루 거쳐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고, 다시 기보(畿輔) 지방을 뚫고 지나가 경사(京師)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➍ 〈반도(半島) 북(北)쪽 지경(地境)을 가르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渡河), 서(西)쪽으로 가야만이 요동(遼東), 광녕(廣寧)의 땅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고, 다시 ‘기보(畿輔)=기내(畿內)’를 뚫고 지나가야 경사(京師)에 도착(到着)할 수 있다〉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글로 보면, 최립(崔岦)이란 분은 이미 경사(京師)를 다녀왔다는 것이고, 그 경험담(經驗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서(西)쪽으로 간다.〉는 말은, 난중잡록(亂中雜錄) 또는 여러 선인(先人)들의 문집(文集)속에 수없이 등장(登場)하는 문구(文句)다. 이런 옛 선인(先人)들의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고,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그들의 하수인(下手人)인들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이 옳다고 신봉(信奉)하고 따르는 무리가 바로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임을 어찌할까?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로 보면, 「사신단(使臣團)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북(北)쪽으로 올라가야 요동(遼東)의 심양(瀋陽)에 도착할 수 있다.」 만약(萬若) 최립(崔岦)선생(先生)의 말씀대로 서(西)쪽으로 간다면 바다(海)속에 빠져 익사(溺死)할 일만 남아있다.
많은 고전(古典)속에서 말하는「조선(朝鮮) 영토(領土) 요충지(要衝地)는, 동서(東西)로 길게 뻗쳐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반도(半島)조선사(朝鮮史)는, 이제 무덤(墓地)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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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해동잡록 2 본조(本朝) / 김종직(金宗直) / ○ 귤(橘)과 유자[柚]는 제주에서 나는 것인데, 해마다 서울에 와서 바쳤다. 공이 〈탁라가(乇羅歌)〉를 지었는데,
《집집이 열린 귤 흰 서리가 겨운데 : 萬家橘柚飽淸霜 / 대바구니에 따 담아 바다 건너 왔구나 : 採著筠籠渡海洋 / 대관이 받들어 대궐에 올리니 : 大官擎向彤墀進 / 소담스레 빛깔과 맛과 향기를 보전하도다 : 宛宛猶全色味香” 하였고, 「오매(烏梅)ㆍ대모(玳瑁)ㆍ흑산호(黑珊瑚)와 부자(附子)ㆍ청피(靑皮)는 세상에 이름난 물건인데, 물산(物産)으로 동국의 곳간일 뿐 아니라 정기(精氣)가 모두 사람을 살리도다. 점필재가 탐라 노래 14편을 지어 풍토와 물산을 대강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점필재(佔畢齋)【1431년 6월~1492년 8월】로, 「15세기에 살다간 조선인(朝鮮人)」이다. 이런 사실(事實)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즉(卽) 이때도 탐라(耽羅)에서는 집집마다 귤(橘)나무를 재배했고, 대모(玳瑁)나 청피(靑皮)등의 물산을 대궐(大闕)로 보냈는데, 이는 탐라(耽羅)가 유일한 산출지(産出地)였다는 것이고,
이는 조선왕조(朝鮮王朝) 이전(以前)의 고려왕조(高麗王朝)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고, 삼국시대(三國時代)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4) 속동문선 제9권 / 칠언절구(七言絕句) :《을유년 2월 28일에 직산의 성환역에서 제주에서 양을 공 받치러 온 사람 김극수도 역시 와 있었다. 그래서 밤에 얘기를 하는데 대강 그 풍토와 산물을 물어보고 그 말을 기록하여 탐라가 14수를 지었다[乙酉二月二十八日宿稷山之成歡驛濟州貢藥人金克修亦來因夜話略問風土物産遂錄基言爲賦乇羅歌十四首] / 김종직(金宗直)【필자(筆者) 주(注) : 金宗直, 1431년 6월~1492년 8월 19일】
《중략(中略). 오매와 대모와 검은 산호와 : 烏梅玳琄黑珊瑚 / 부자와 청피는 천하에 없나니 : 附子靑皮天下無 / 그 물산은 오직 동방의 부고일 뿐 아니라 : 物産非惟東府庫 / 정영은 모두 사람을 살리는 약에 든다 : 精英盡入活人須 / 큰 새우와 해월과 또 호산과 : 車螯海月與蠔山 / 거구와 문린 등 얼마나 많은가 : 巨口文鱗又幾般 / 해가 저물어 비린 연기가 향정을 덮으면 : 日暮腥煙羃鄕井 / 수우의 많은 배들은 생선을 싣고 돌아온다 : 水虞千舶泛鮮還 / 만집의 귤과 유자가 가을 서리에 익으면 : 萬家橘柚飽秋霜 / 그것을 따서 대바구니에 넣고 큰 바다를 건넌다 : 採着筠籠渡海洋 / 대관이 받들어 붉은 섬돌에 올리면 : 大官擎向彤墀進 / 아직도 완완히 빛깔과 맛과 향기가 완전하다 : 宛宛猶全色味香 / 중략(中略)
➊「오매(烏梅)·대모(玳瑁)·흑산호(黑珊瑚)·부자(附子)·청피(靑皮)」는, 천하(天下)에서 오직 아국(我國)【당시의 조선(朝鮮)】만이 유일(唯一)한 토산물(土産物)이었다는 뜻이다. 이게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 탐라(耽羅)일 수 있을까?
여기서 기막힌 이야기 하나,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청귤(靑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청귤나무(靑橘─ ) : 1976년 9월 9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1998년 9월 30일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2그루가 남아 있었는데 현재 한그루는 고사했고. 한 그루만이 남아 있다. 나무의 높이는 6.5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는 1.2m이다. 청귤은 다른 감귤류와는 달리 12월까지도 껍질이 푸르며 2∼3월에 가서야 주황색으로 익는다. 옛 부터 제주의 공물에는 감귤류가 많았고 진귀한 과일을 취급되었으며 일반백성들은 먹기 어려웠다. 재래의 감귤에는 옛 문헌에 기재되어 있는 것 중 확인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뜻에서 본 청귤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역설(力說)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
➨ “청귤(靑橘)”에 대해 : 〈일본인 다나카(田中)가 1950년 일본의 원예학회에 한국의 청귤을 ‘Citrus nippokoreana Tanaka’로 학명을 발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네는 이것이 “청귤(靑橘)나무”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만약(萬若) 이게 사실이라면 “1,900년대 이전(以前)”, 반도(半島) 제주(濟州) 땅에서 여러 종류의 귤(橘)이 산출(産出)되었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펑” 이란 거다.
➋ 15세기(世紀)의 탐라(耽羅)에 : 「귤유(橘柚)를 재배하는 1만 가구(家口)가 있었다.」는 뜻이다. 「귤(橘)과 유자(柚子)를 키우는 농가(農家)가 1만(萬) 가(家)였다」는 뜻이니, 그 외(外)의 백성(百姓)들을 합치면 1만 가구(家口) 이상(以上)이 15세기(世紀), 탐라(耽羅) 땅에서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만가(萬家)를 ‘집집마다’로 또는 ‘매우 많은 집’으로 번역(飜譯)한 예도 있다.】
그런데 위의 김종직(金宗直)의 말과는 다르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32년 짓게 하였다고 지리지 서문(序文)에서 말한다.】에서는. 「호수가 5천 2백 7호요, 인구가 8천 3백 24명이요, 군정은 2천 66명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된 일일까?
탐라(耽羅)의 호구(戶口) 통계자료(統系資料)를 살펴보자.
(15) 일성록(日省錄) / ‘정조 13년 기유(1,789)’ 2월 17일(갑진) / 탐라(耽羅)에서 무신년(1788, 정조12)의 호구(戶口)와 민수(民數)를 올렸다.
제주(濟州)의 원호(元戶)는 6692호(戶)인데 인구는 남자가 1만 6929구(口)이고, 여자가 2만 2509구이다. 대정(大靜)의 원호는 1704호인데 인구는 남자가 3658구이고, 여자가 4999구이다. 정의(㫌義)의 원호는 2325호인데 인구는 남자가 6440구이고 여자가 8262구이다. 이상 3읍(邑)의 총 원호는 1만 721호인데 남녀 도합 6만 2797구이다. (耽羅進戊申戶口民數 / 濟州元戶六千六百九十二戶人口男一萬六千九百二十九口女二萬二千五百九口大靜元戶一千七百四戶人口男三千六百五十八口女四千九百九十九口旌義元戶二千三百二十五戶人口男六千四百四十口女八千二百六十二口三邑都元戶一萬七百二十一戶人口男女竝六萬二千七百九十七口)
계(탐라전체) = 원호(元戶) 10,721 호(戶) 62,797 구(口)
(16) 일성록(日省錄)/ ‘정조 20년 병진(1,796)’ 1월 19일(병인) / 한성부가 탐라(耽羅)의 호구(戶口)와 백성 숫자를 올렸다.
제주(濟州) - 원호(元戶)가 6710호, 남자가 1만 5376구(口), 여자가 2만 1953구이다. - 대정(大靜) - 원호가 1733호, 남자가 3073구, 여자가 4453구이다. - 정의(旌義) - 원호가 1523호, 남자가 3576구, 여자가 5068구이다. - (京兆獻耽羅戶口民數 / 濟州 元戶六千七百十戶男一萬五千三百七十六口女二萬一千九百五十三口 大靜 元戶一千七百三十三戶男三千七十三口女四千四百五十三口 旌義 元戶一千五百二十三戶男三千五百七十六口女五千六十八口三邑都元戶九千九百六十六戶男二萬二千二十五口女三萬一千四百七十四口)
계 (탐라전체) = 원호(元戶) 9,966 호(戶), 53,499 구(口)
(17) ‘정조 21년 정사(1,797)’ 1월 19일(경신) / 한성부(漢城府)가 탐라(耽羅)의 호구(戶口)와 백성의 수를 조사한 별단을 바쳤다. : 별단은 다음과 같다. 제주(濟州)의 원호(元戶)는 6541호이고, 남자는 1만 3688구, 여자는 2만 3239구이다. 대정(大靜)의 원호는 1685호이고, 남자는 2688구, 여자는 4184구이다. 정의(旌義)의 원호는 1523호이고, 남자는 3545구, 여자는 5180구이다. 세 고을을 모두 합하면, 원호가 9749호이고, 남자는 1만 9921구, 여자는 3만 2603구이다.
계(탐라전체) = 9749 호(戶), 52,527 구(口)
◇ 위의 글 ‘(15)+(16)+(17)’의 탐라(耽羅) 인구조사(人口調査) 결과(結果)를 보면, 아주 상식적(常識的)이지 못한데… …어떤 특별(特別)한 사정(事情)이 있었을까? 인간(人間) 삶속에서 벌어지는 보편(普遍)타당(妥當)과는 전혀 다르게 세월(歲月)이 가면 갈수록 호구(戶口)가 줄어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 1,432년【위 글 (14) ➋】 : 5,207 호(戶), 8,324 구(口)
해동잡록(海東雜錄) 15세기【위 글 (14)】 : 귤유농가(橘柚農家) 1만가(萬家)
약(約) 300년 정도가 흐른 뒤의 탐라(耽羅)는?
서력 1,788년(정조12년)【위 글 (15)】: 원호(元戶) 10,721 호(戶), 62,797 구(口)
서력 1,796년(정조20년)【위 글 (16)】: 원호(元戶) 9,966 호(戶), 53,499 구(口)
서력 1,797년(정조21년)【위 글 (17)】: 원호(元戶) 9,749 호(戶), 52,527 구(口)
◆ 위와 같이 계속 줄어드는 호구(戶口)를 보면, 200년 후인 21세기(世紀) 오늘의 탐라(耽羅)는 무인도(無人島)여야 맞는 말이 아닐까?
【필자(筆者) 주(注) / 15세기 세종대왕(世宗大王)때 김종직(金宗直) 기록(記錄) : 귤유농가(橘柚農家) : 1만가(萬家)라고 했으니, 1호당 평균 5.56구(口)라 할 수 있으며, 귤(橘)과 유자(柚子) 과원(果園)에 종사하는 「농가(農家) 10,000호(戶), 55,560구(口)」로 추정(推定)되며, 그 외(外) 토착관리·농가(農家)【보리, 밀, 콩, 조등이 산출된다하였다.】어업(漁業)【고기를 잡는 많은 어선들이 있었다하였다.】· 목장(牧場)종사자【많은 수의 말(馬)·양(羊)·낙타(駱駝)·려(驢)등을 키우는 대규모(大規模) 목장(牧場)이 있었다하였다.】·광업(鑛業)【마노(瑪瑙)등의 산출된다하였다.】·기타(其他)【노예(奴隷)나 천인(賤人)등은 제외(除外)된다】등을 계산(計算)한다면, 15세기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의 탐라(耽羅) 원호(元戶)는, 15,000∼20,000 호(戶) 정도에 인구(人口)는, 83,400∼111,200 구(口) 정도(程度)였을 것으로 판단(判斷)이 된다.】
◇ 그런데 위의 인구(人口)현상(現狀)은, 보편적(普遍的)인 상식(常識)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여준다. 즉(卽)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릴 때는 어느 곳에서든지 인구(人口)는 급속(急速)적으로 증가(增加)하게 되고, 전염병(傳染病)의 창궐(猖獗)이나 반란(叛亂) 또는 전쟁(戰爭)등이 일어났을 때는 인구(人口)감소(減少)가 진행(進行)되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 예(例)임에도 탐라(耽羅)에서만은 이와 다르게 반대(反對)현상(現狀)이 벌어지고 있다.
15세기 김종직(金宗直)【1431년 6월~1492년 8월 19일】의 기록(記錄)으로 본다면, 본토(本土)에서 들어간 호구(戶口)를 제외(除外)한 원호(元戶)라고 하더라도 탐라(耽羅) 땅에서 귤(橘)과 유자(柚子)를 재배(栽培)하는 농가(農家)가 1만가(萬家)라고 때, 그 외(外)의 원호(元戶)를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最小限) ‘1만5천가 이상(以上)’이 탐라(耽羅)의 원호(元戶)였다.」고 보는 것이 아주 상식적(常識的)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천민(賤民)과 노예(奴隷)등은 포함(包含)되지 않은 것이다.
◇ 그 후(後) 2백년(百年) 이상(以上)이 지난 정조대왕(正祖大王) 때의 “탐라(耽羅) 인구통계(人口統系)”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상적(正常的)인 인구팽창(人口膨脹) 속도(速度) 또는 인구(人口)증가율(增加率)등으로 보면, 「“몇 배(倍)이상(以上) 증가(增加)했다.”」고 보아야 한다.
탐라(耽羅)에 대한 인구(人口)통계(統系)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붓 끝에 놀아난 장난질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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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가문집【서거정(徐居正, 1420~1488)】 제5권 / 서(序) / 제주 절도사(濟州節度使) 양공(梁公)을 전송하는 시의 서(序)
《탐라(耽羅)는 남해 가운데에 있고 둘레는 100 리이다. 중략(中略). : 盖州之土地肥饒.物產珍異.如橘柚,橙柑,美貝,貞梓等.貢他州所無.良馬之產.大有資於國用. : 주(州)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산은 진귀하여 귤, 밀감, 아름다운 조개, 곧은 가래나무 등과 같은 공물은 다른 주에는 없는 것이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좋은 말은 국용(國用)에 큰 보탬이 된다. 然海錯財貨之資於人者夥.故商船之懷利挾詐.冐竊往來者如梭.魚民塩戶之舟楫爲生.東西遷徙者亦多. : 그러나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각종 해산물과 재화가 많다 보니 상선(商船)들이 이익을 넘보고 협잡을 일삼아 몰래 왕래하는 일이 베틀의 북이 오가듯이 잦고, 어민(漁民)과 염호(鹽戶) 중에 뱃일을 생계로 삼아 동서(東西)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또한 매우 많다. 况與日本,琉球對馬諸島爲隣.應變之機不一 : 게다가 일본, 유구(琉球), 대마도 등 섬들과 인접해 있어 임기응변해야 할 기미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하였다.
➊〈盖州之土地肥饒.物產珍異.如橘柚,橙柑,美貝,貞梓等.貢他州所無.良馬之產.大有資於國用. : 주(州)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산은 진귀하여 귤, 밀감, 아름다운 조개, 곧은 가래나무 등과 같은 공물은 다른 주에는 없는 것이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좋은 말은 국용(國用)에 큰 보탬이 된다. 然海錯財貨之資於人者夥.故商船之懷利挾詐.冐竊往來者如梭.魚民塩戶之舟楫爲生.東西遷徙者亦多. : 그러나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각종 해산물과 재화가 많다 보니 상선(商船)들이 이익을 넘보고 협잡을 일삼아 몰래 왕래하는 일이 베틀의 북이 오가듯이 잦고, 어민(漁民)과 염호(鹽戶) 중에 뱃일을 생계로 삼아 동서(東西)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또한 매우 많다.〉고 하였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제주도(濟州道) 땅이 비옥(肥沃)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한반도(韓半島) 제주(濟州) 땅은 척박(瘠薄)하여 오곡(五穀)이 제대로 자라자 않는다고 하였다.
➋ 탐라(耽羅)는 :「况與日本,琉球對馬諸島爲隣.應變之機不一 : 게다가 일본, 유구(琉球), 대마도 등 섬들과 인접해 있어 임기응변해야 할 기미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홍자옥편(弘字玉篇) / 隣 : 鄰의 속자(俗字) / 近也 : 이웃 린 / 親比 : 이웃할 린 / 連接 : 맞붙을 린 / 주(周)나라 때의 행정(行政)구획(區劃)으로 5가(五家)를 지칭(之稱)한다.〉고 한 것을 보면,
위에서 말하는 수백(數百), 수천(數千)리 떨어져 있는 대상(對象)과의 관계(關係)를 “이웃하다 또는 가깝다” 등의 용도(用途)로 쓰이는 “린(隣)”자(字)를 사용(使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귀신(鬼神)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탐라(耽羅)·일본(日本)·유구(琉球)·대마(對馬)”등의 여러 섬(島)들과 가까이에 지경(地境)을 맞대고 있어, 시시때때로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대처(對處)해야 할 때가 많다는 뜻으로,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탐라(耽羅)는 고려(高麗)의 여국(與國)으로, 「탐라(耽羅)는 남송(南宋)ㆍ일본(日本)과 통하는 요충지라고 여겨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 것과 똑같은 지리적(地理的) 상황(狀況)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인간(人間) 삶의 발자취인 역사(歷史)’라 할 수 있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이제 ‘바람처럼 조용히 사라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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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임하필기 제1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일본(日本)의 섬들(日本諸島)
《薩摩,與浙江相對.馬島,與朝鮮相對.肥前,耽羅相對 : 살마(薩摩)는 절강(浙江)과, 마도(馬島)는 조선(朝鮮)과, 비전(肥前)은 탐라(耽羅)와 마주 보고 있다.》고 하였다.
➊ 지형(地形)지리(地理)는 왜곡(歪曲)한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다. 여기서 “상대(相對)”란 말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살마(薩摩)는 절강(浙江)과 마주하고 있다.」 살마(薩摩)는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서해도(西海島)인 살마주(蕯摩州) 곧 구주(九州:큐슈)지방을 말한다고 한다. 절강(浙江)이란 성(省)의 이름으로 연유(緣由)된 절강(浙江)을 가리킨다. 오늘날 대륙(大陸)의 절강성(浙江省)지방을 일컫는다. 결국 살마(薩摩)는 오늘날의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앞에 있는 주산군도(舟山群島)를 말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럴 때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➋ 「비전(肥前)은 탐라(耽羅)와 서로 마주하고 있다.」에서, 비전(肥前)은 열도(列島)의 서해도(西海島) 곧 구주(九州:큐슈)의 나가사키(長崎)로 알려져 있는데, 반도(半島) 땅의 탐라(耽羅)와는 동(東)쪽 바닷길로 1천리(千里) 가량 떨어져 있다. 1천리 길을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귀신(鬼神)이나 신선(神仙) 무리들의 무협(武俠)판타지(Fantasy)속에서나 가능(可能)할까? 즉(卽)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말이다.
➌ 마도(馬島)라고 했지 대마도(對馬島)라고 하지 않았다. 「마도(馬島)는 조선(朝鮮)과 마주보고 있다.」하였으니, 「반도(半島)와 열도(列島) 사이의 섬(島)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마’란 말은, 왜(倭)의 ‘Tsushima(對馬)’를 한자음(漢字音)이다. 이 땅은 왜(倭)의 것이 아니라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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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해동역사 속집 제10권 / 지리고(地理考) 10 / 고려(高麗) 1 / 강역총론(疆域總論)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 / 城邑 / 封境 : 高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求,聃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 :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성읍(城邑).봉경(封境) :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契丹)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日本), 유구(琉球), 탐라(耽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땅의 경계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하였다.
위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말하는 바는, 「원사(元史)의 탐라(耽羅)기록(記錄)·사가문집 제5권 서(序)의 탐라(耽羅)·임하필기(林下筆記) 제1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일본(日本)의 섬들(日本諸島)편에서 말하는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다.
◆ 「고려(高麗)는, 남(南)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契丹)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日本), 유구(琉球), 탐라(耽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땅의 경계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는 상황(狀況)을 설명(說明)해 보자.
➊ 동(東)쪽 : 금(金)과 맞닿았다.
➋ 서(西)쪽 : 요수(遼水)에 막혔다.
➌ 남(南)쪽 : 요해(遼海)로 막혔다.
➍ 북(北)쪽 : 거란(契丹)의 옛 땅과 접(接)했다.【글란(契丹)의 구지(舊地) : 여름(夏)과 가을(秋)에도 얼음두께가 2척(尺)이나 얼어붙는 아주 추운 곳으로,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엔 이런 기후대(氣候帶)는 없다.】
그런데, 또 고려(高麗)의 땅은, 「일본(日本)·유구(琉球)·탐라(耽羅)·흑수(黑水)·모인국(毛人國)」등의 여러 나라와 “땅의 경계(地界)”가 「개의 어금니가 서로서로 맞지 않는 것 같이, 국경선(國境線)이 볼록 나오고 오목 들어가 서로 견제(牽制)하려는 형세(形勢)이다.(犬牙相制)」라고 하였으니,
고려(高麗) 땅은, 반도(半島)가 아닌 동서남북(東西南北)이 확 트인 광활(廣闊)한 땅에서 여러 나라와 땅이 맞물려있어 시시때때로 서로를 견제(牽制)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서(西)쪽의 요수(遼水)는, 언제나 변함없이 지계(地界)였다는 것을 증거(證據)해 주고 있다.
◇ 동·서·남(東·西·南)이 바다(海)에 막혀 있고, 오직 북(北)쪽만이 터져 있는 한반도(韓半島)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여라 나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때로는 사이좋게, 때로는 원수(怨讎)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는, 〈귀신(鬼神)이 되어버린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귀신(鬼神)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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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좁디좁은 반도(半島) 땅에 처넣은 당사자(當事者)들인 일제(日帝) 제국주의(帝國主義) 어용(御用) 학자(學者)들과 이들에게 포섭(包攝)되어 야합(野合)한 반도(半島) 땅의 매국노(賣國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들의 몫이다.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역사(歷史)를 매국노들과 함께 신봉(信奉)하며, 식민지(植民地)백성(百姓)으로, 자칭(自稱) 천손(天孫)의 후예(後裔)들에게 지배(支配)를 받으며, 이등(二等) 국민(國民)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찾아 ‘조선인(朝鮮人)=한국인(韓國人)’을 위한 역사(歷史)를 찾아 행성(行星)안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대(大)제국(帝國)을 건설했던 후예(後裔)들로 자긍심(自矜心)과 자존심(自尊心)을 되찾고, 나라 발전을 이끌며, 살아갈 것인가?
이젠 모든 것이 작금(昨今)을 사는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의 몫이란 이야기다! [제2편/끝] 2019년 11월 1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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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날의 제주도(濟州道) 감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레에 걸쳐 설명하고, 논의되고, 고찰된 바 있다. 여기서 역사통설논자들은 말하기를, 조정에서 여러 많은 굴감들을 공물로 바치고, 탐관오리들 때문에 귤나무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귀한 과일이나 산물은 어느 때고 귀한 대접을 받기 마련이고,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귤나무 몇 그루로 자식들 대학까지 보냈다는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제주도 이야기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예니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 20세기 초까지였다고 봐도 무리없는 표현이다.
왜 하필이면 반도 땅에서만이 인간의 삶의 방식이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고, 목적을 가진 자들이 지들 입맛에 맞게 조작해 놓고, 역(반대)으로 설명하다보니, 다른 인간무리들의 삶의 방식과는 동떨어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1911년도에 15그루의 감귤나무를 선물받아 키우지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제주도의 감귤농사 연원이란 이야기가 사실인 것이다. 이건 백과사전에도 나와 있는 설명이다.
연복자(燕覆子)를 어떤 곳에는 멀꿀이라 하고, 어떤 곳에서는 어름이라고도 설명한다. 도대체 무엇이 맞는 말일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조그만 과일 나무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말이다.
탐라지(耽羅誌, 효종 4년, 1653년)에 실린 과원총설(果園總說)에 의하면 제주 3읍의 관과원은 36개소였다고 하였고,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관과원이 42개소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진상제도가 없어지자 과원이 황폐화되었다고 하는데, 몇 십년 사이에 귤나무가 모조리 없어졌다? 그 잔재물은 그대로 상존(尙存)했을 것이 아닌가? 황폐화되었다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귀한 물건은 귀한 대접을 받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도조선다.
추운데 건강 조심하셔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레시아>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올 겨울엔 웬 비가 이렇게 오는지,,,,,,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만......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주도 청귤은 여름 귤입니다.
청귤 맛은 레몬과 흡사합니다.
속도 레몬과 같고요.
마치 라임맛 같은데요. 라임과 다른 종류를 접붙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왔고 14년도에 저도 처음 먹어봤는데 맛이 없어서 청을 담갔던 기억이 나네요.
문헌에 나온 청귤은 2월달에 읶는다고 하는데 지금 제주도 청귤은 여름귤입니다.
그리고 실록에 인구수는 엉터리입니다.
인구수 만큼 세금을 걷어야 하고 군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누락을 시키는 것을 관례라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 태조때부터 인구수를 조사하다가 황당해서 더이상 하지 않았네요.
나라에서도 다 알고 니들이 낼수 있는 수 만큼만 보고하라고 한 것이죠.
아마 民數 혹으 戶數 등등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한번은 오류도 찾아냈었습니다.
인구수 합산이 안 맞는 거에요. 이런 기록이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누군가 조작질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수정이 안 된 거 보면
원본을 만진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Romantic>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동감합니다.
탐라(耽羅)=제주(濟州)에 대해 우리 카페에서는 많은 글이 게재되어 있는데, 공부하고 연구할 수록 대한민국 제주도는 옛 탐라가 아니다라는 확신만 있을 뿐입니다.
자연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곳에서 산출되는 토산물이 전혀 다릅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보아지며, 특히 지형지리면으로 살펴보면, 옛 탐라는 오늘날의 제주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