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필드는 잊혀진 탑의 구조를 이해해보려 했다. 그리곤 분노를 터
뜨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 물론 세상에 알
려진 바 잊혀진 탑에는 입구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18층이나 44층,
혹은 126층 쯤에 있을지도 모르는 입구를 찾아내는 것은 아무런 쓸모
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1층에서 다른 목격자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입
구를 찾거나, 아니면 입구를 만들거나, 하다못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창문에서 뛰어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런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데스필드는 이것이 그가 맡은
패스파인딩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깔리고 있을 무렵 데스필드는 벽을 걷어
차며 발광을 하고 있었다.
"이건 탑이 아냐, 나무야!"
"뭔 말이냐?"
"자라고 있잖소! 그러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계속 그 자리잖아!"
물론 잊혀진 탑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잊혀진 탑은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최소한의 근연 관계도 없는 기묘한 구조를 가지
고 있어 아래로 내려간다는 두 사람의 단순한 목적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잊혀진 탑은 외벽 바로 안쪽으로 둥글게 이어진 환형 통로들과 그것
들을 위아래로 잇고 있는 계단들, 그리고 중심부의 둥근 방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데스필드는 각 층에서 세 개, 혹은 네 개의 계단을 발견
했다. 어떤 층에서는 다섯 개의 계단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
은 올라가는 것이기도 했고 내려가는 것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전부 올
라가는 것이거나 내려가는 것이었다. 어떤 층은 중간의 층을 뛰어넘은
채 연결되고 있는 것 같았고 같은 층임에도 불구하고 통로 중간이 막
혀 있어 다른 층을 통해서만이 오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환형 통로들에는 가끔 중심부의 원형 방으로 통하는 입
구가 있었다. 몇 개의 방 안으로 들어가보았으나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휑하니 비어있는 방뿐이었다.
그 방들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낮은 방이 있는가 하면 천장을 보기 위해 목을
한참 꺾어야 되는 높은 방도 있었다. 데스필드는 가까스로 중심부의
둥근 방들을 나누는 바닥과 환형통로들이 같은 높이에 있지 않다는 것
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
려 길 찾는 작업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데스필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탑의 이 기괴망측한 구조가 아니었다.
"이상해. 본인은 패스파인더요."
멈춰선 채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파킨슨 신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아, 그랬어? 비밀은 지켜주지."
"적당히 하쇼. 어쨌든 본인은 패스파인더이므로 철창이나 두꺼운 벽
이나 일흔일곱 명의 미녀로 본인을 가둘 수는 있어도 미로로는 본인을
가둘 수 없다고. 그런데 이 탑에서는 패스를 그을 수가 없어요. 아래
쪽으로의 그 간단한 패스가 안 그어진단 말이오."
다시 한번 비꼬아주려던 파킨슨 신부는 헛바람을 삼키며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어라? 그러고보니 그렇군. 너 왜 길 못찾는 거냐?"
"퍽도 빨리 물어보시는군. 허!"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크게 당황했다. 그는 데스필드에게 이 오후
가 다 지나가고서야 길을 못 찾는다는 것을 고백하느냐고 화를 내었고
데스필드는 데스필드대로 패스파인더가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도 아직
까지 못 알아차렸다고 응수했다. 두 사람의 논쟁 - 이라기보다는 말다
툼이 고성을 동반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였고 그 동안 윈
디어는 침울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해학정신이
풍부한 풍자시인이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 '그렇게 바람 사슴은 고등생
물로 자처하는 두 존재의 저등한 대화를 바라보며 언필칭 고등생물로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고 있었다' 등의 묘사를 생각해낼
수 있었겠지만 그곳에는 그런 시인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논쟁은 곧 흐지부지해졌다. 이성을 되찾았다기보다
는 오후 내내 계단을 오르내렸기 때문에 얻게 된 피로 때문이다. 파킨
슨 신부는 초조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데스필드. 이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는 거냐?"
"응? 물론 최후의 수단은 있지."
"설마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자거나 창문 밖으로 투신하자는 건 아니
겠지?"
"기도하시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거 반대할 수 없는 말이라 더 짜증나는군. 젠장!"
"농담이오. 창문을 이용하는 건 맞지만 투신은 아니오. 밧줄이 있잖
소. 절벽을 내려가듯이 탑의 외벽을 내려가면 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밧줄이 저 아래까지 닿지는 않을 텐데?"
"무슨 상관이오. 중간의 적당한 창문에 도착한 다음 밧줄을 다시 아
래로 내리면 되지."
"어떻게 밧줄을 끌어내리는데?"
"밧줄 중간을 창문 기둥에 걸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데스필드는 손
가락으로 ∩ 모양을 그려보였다. "그리고 밖으로 늘어진 두 가닥을 한
꺼번에 잡고 내려가는 거요. 아래에 도착한 다음 한쪽을 놓고 다른쪽
을 잡아당기면 밧줄을 회수할 수 있소. 그런 식으로 반복하면 언젠간
아래에 도달하겠지."
"아, 그렇군! 그럼 왜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거냐?"
데스필드는 통로 벽에 기대어 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위험하오. 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밧줄 하나 의지해서 외벽을
내려갈 자신 있으쇼? 바닷바람 겁나게 불어오는 지상 수백 피트 높이
에서?"
파킨슨 신부는 그 상황을 상상해보고는 곧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리
고 데스필드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윈디어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그리고 당신 때문에. 윈디어 당신은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없어. 놔
두고 내려가야 될 걸. 보나마나 굶어죽게 될 텐데 왠만하면 그러고 싶
지 않군요."
"으음. 그렇구나."
데스필드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미간을 심하게 찡그렸다. 그들이
잊혀진 탑 안에서 위아래로 방황하는 동안 여름의 기나긴 낮도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이대로 계속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짧게
고민했다. 밤이 오더라도 큰 창문을 통해 달빛과 별빛은 충분히 새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한숨 잡시다."
"자자고?"
"그래요. 어두워지면 더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아. 배 고픈 상태에서
너무 움직이는 것도 안 좋을 것 같고. 눈 좀 붙였다가 내일 해 뜨는대
로 내려갈 길을 찾아보지요. 윈디어 당신에게 줄 것이 없다는 게 안
좋군."
그들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닷바람을 피하기 위해 중앙실로 통하
는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적당한 높이의 방으로 통하
는 입구를 발견했다. 안쪽으로 들어간 파킨슨 신부는 아무렇게나 쓰러
져 누웠다. 그냥 움직인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 것이라
두 사람과 윈디어 모두 꽤나 지친 상태였다. 데스필드는 윈디어의 안
장과 재갈을 벗겨준 다음 안장을 베고 누웠다.
여름인지라 돌건물 안쪽에서는 충분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추위로 고생할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불쾌할 정도의
더위가 일행을 찾아들었다. 누워있던 파킨슨 신부는 결국 못견디겠다
는 듯이 일어나서는 헐렁한 신부복을 벗어 바닥에 깔고 누웠다. 그 모
습을 보던 데스필드가 말을 걸었다.
"자, 이제 이야기 좀 합시다. 아까는 길 찾느라 이야기할 겨를이 없
었지. 도대체 본인과 당신은 어쩌다가 여기로 날아오게 된 거요?"
"글쎄.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안에 들어갔던 이야기 좀 해보쇼. 거기서 뭔 일이 있었으니까 여기
로 날아오게 된 거 아니오? 그 안은, 어, 정말 천국입디까?"
파킨슨 신부는 팔베개를 하며 돌천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 직전
이라 서쪽을 향한 통로에서는 햇빛이 옆으로 새어들고 있었다. 윈디어
가 불평 비슷한 푸르릉거림을 내고 곧 고요가 찾아들었다.
"글쎄다. 천국은 아닌 것 같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군. 목소리는 있었으니까."
파킨슨 신부는 중간중간 하품을 하며 그가 펠라론 게이트 안쪽에서
본 것을 설명했다. 사실 본 것이라곤 마지막의 빛 이외엔 아무 것도
없었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 안에서 그가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해보려
애쓰며 데스필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와 데스필드 사이로
비쳐들고 있는 햇빛 때문에 데스필드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파
킨슨 신부는 그 햇빛 속을 떠다니는 금빛 먼지 너머로 데스필드를 보
기 위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냐, 데스필드?"
데스필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눈을 더 찌푸렸
지만 그가 잠든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후 담배
연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당신이 만난 것이 신 당신일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데스필드."
"어려운 건가? 글쎄. 본인이 생각하기로 신 당신이라면 척 보자마자
아, 당신이구나 하고 알아야 될 거 같은데."
"그건 알 수 없지. 데스필드. 네 말대로 주님과 다른 모든 것을 구분
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주님은 유일한 창조자고 나머지는 전부 창조
물이라는 점. 따라서 주님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 특징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는데 도움될지 도움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창조자를 설명할 수 없는 법
이기 때문이야. 망치가 그것을 만든 대장장이를 설명할 수 있겠냐? 하
지만 대장장이는 망치를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겠지. 그와 같다. 나는
주님의 창조물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악마는 척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흐음. 악마는 그래도 우리와 같은 창조물이지. 절대창조자라는 대명
제를 둔 상태에서 악마와 우리는 같은 범주, 그러니까 창조된 것이라
는 공통점을 가지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마의 재주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지. 성전에서도 나타나듯이 악마의 변장 능력은 상상을 뛰어
넘으니까."
"아아. 악마 당신의 재주 같은 건 알 바 아니고, 본인은 한 가지만
지적하겠소. 본인이 여기로 오게 된 건 아무래도 본인이 당신과 밧줄
로 연결되어 있어서요. 간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고, 아무래도 그렇
게 생각하는 것이 간단하지요?"
"그렇지요. 데스필드."
"그러면 나는 왜 여기로 온 거냐?"
"바로 그것을 제기하고 싶은 거요. 당신은 답을 만든다는 말을 들었
던 것 같은데?"
"그렇게 들었다. 내가 답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답을 만든다는 말은 답의 창조자가 된다는 뜻도 있고 답의 일부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 요리사 당신이 빵을 만든다. 이 경우는 빵의 창조자
가 된다는 뜻일 거요. 당신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 경우는 모임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지."
"어라?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답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
겠군?"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누군가의 답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의미
인 거요?"
"그렇습니다. 파킨슨 신부님은 이곳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누군가의
답이 되는 거죠."
"이곳? 잊혀진 탑으로 날아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인 거요?"
"잠깐만. 여기서밖에 만날 수 없는 것이 누군데?"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올바른 답이냐는 거지요.
당신이 찾고 있는 별은 뭡니까?"
"나는 인간이 선을 만들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
"선? 선이라고 했소?"
"그래."
"그게 무슨 뜻이쇼, 신부님 당신? 선을 만든다니."
"나는 주님을 믿고 그 분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할 수 없는
영원한 어린아이일까? 우리는 영원히 신의 보호를 받고 그 분의 지도
를 받아야 되는 존재일까? 나는 신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말을 하
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언제까지나 그 분을 사랑할 것이며 그 분 또한 언제까지
나 우리를 사랑할 것을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더 우월
한, 더 훌륭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국화를
키운다는 것은 언젠가 탐스럽게 피어날 그 꽃봉오리를 기대한다는 것
아니겠느냐? 나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기에 그 분이 우리의
발전과 성장을 기대할 것을 믿는다. 그 분이 우리의 번영과 행복을 바
라시는 것처럼."
"흐음. 선을 만든다라."
"율리아나 공주의 건이 바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성장한 내가 선을 만들 수 있을지,
주님 얼굴에 기쁨이 피어오르게 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다. 성전이나
교회처럼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어낸 선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 분을 영광되게 해
드릴 수 있을지 알고 싶단 말이다."
"그건 언젠가 들어본 것 같군. 착한 노예 당신과 어리석은 노예 당신
의 예였지요? 그리고 당신은 주인 당신이 시키지 않은 짓을 해서 주인
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고?"
"그렇다. 그리고 내 문제가 뭔지도 말했지?"
"그 주인이 전능자라는 것이지요. 전능자의 명령은 완벽한 명령이고,
따라서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 맞았어!"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헛짓을 하고 있는 것이군, 안타깝게도."
"아냐, 데스필드. 생각을 해봐라. 전능자이신 주님이 만드신 이 몸이
늙으면? 우리는 지팡이를 만들어 짚을 수 있다. 다리가 잘려나가면 의
족을 만들 수 있고. 먼 곳을 보기 위한 망원경이나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한 안경 같은 것도 생각해봐라. 성전에는 그것을 만들라거나 만들지
말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우리를 보완
하고 그럼으로써 신을 더 찬미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군."
"만약 지팡이나 의족, 망원경 등이 신이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면 우
리는 지팡이가 필요 없는 다리, 혹은 망원경이 필요 없는 눈 따위를
가지게 되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만들어 사용하지. 그렇
다면 우리는 선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는 더 착해지고, 더 많이 사
랑할 수는 없을까? 주님이 만들어주신 이 몸을 더 정갈히 다루는 것처
럼, 주님이 만들어주신 성전이나 교회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는 없을
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것은 배교는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 하지만 아직도 확신은 없다."
"이제 당신이 쫓는 별이 뭔지 알 것 같군요. 당신은 스스로 당신을
만들고자 하는 자. 그렇다면 당신의 반대는 세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아의 소유자로군요."
"그 당신이 누군데?"
"있습니다. 무리 속에서 더 두드러지는 자. 보입니다. 한 무리에 속
해있고 그곳을 벗어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자. 그곳에서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 하지만 그 속에서 유난히 튀는 말투. 예. 보입
니다. 이제 답은 만들어졌습니다."
"답이 뭔데?"
"당신이 선택되었습니다. 파킨슨 신부님."
"당신이 이곳으로 온 거니까."
"그런데, 데스필드?"
파킨슨 신부는 미간을 문지르며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이미 해는
졌고 그래서 오히려 데스필드의 모습은 더 잘 보였다. 그들 사이를 가
로지르는 햇살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서 이야기 나눈 거 맞냐?"
데스필드의 얼굴 역시 파킨슨 신부처럼 의혹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 그렇잖으면?"
"그렇지. 이상한 말을 했군.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지."
"아니, 하나 더 있소. 윈디어 당신이 있잖아."
"아아, 그렇군.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꼭 여러 명이랑 이야기를 나
눈 기분이야."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편한 자세를 취했다. 돌벽은 순식간에
찾아든 어둠 속에 기이한 질감으로 되태어나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파
이프를 챙기며 말했다.
"그만 주무쇼. 여기 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불침번은 안 서도
되겠지."
"그래. 잘 자라."
그 시각, 다림만에 떠있는 물수리호의 메인마스트.
짙은 밤 속에 물결은 고요하다. 알버트 '네일드' 렉슬러 선장의 머릿
결을 흐트러뜨리던 바람이 흠칫하여 물러난 자리에는 벨로린이 앉아
있었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다리에 등을 기댄 채 갑판에 앉아 있었다.
돛대에 못박힌 시체와 그 발치에 앉아있는 검은 소녀의 모습은 소름끼
치는 모습이었고 그런 정제된 공포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주위에는 그 모습을 보며 매혹되
거나 겁에 질릴 눈동자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물
수리호의 고급선원들이 순찰을 돌기도 했고 다른 용무로 갑판을 가로
지르는 선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물수리호의 과묵한 선원들은 돛대쪽
에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고 벨로린 역시 그들 때문에 주의를 흐트러뜨
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 무심한 눈동자조차 없는 어떤 시간.
벨로린의 눈동자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였다.
벨로린은 왼손으로 갑판을 짚었다. 하지만 일어나는 대신 벨로린은
허리를 뒤틀며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알버트 선장을 올려다보는 자세
가 된 벨로린은 선장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굵은 혈관과 신경줄,
그리고 과장되고 왜곡된 근육들 속에 검은 입술을 묻은 채 벨로린은
낮게 속삭였다.
"아버지."
벨로린의 왼손은 알버트 선장의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 오른손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가슴께에 이른 벨로린의 오른손은 곧 녹슨 못
대가리를 찾아내었다. 벨로린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그 못대가리를
누르듯이 하며 말했다.
"이제 세 명의 하이마스터가 선택을 끝내었어요."
벨로린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어둠에 가려진 알
버트 선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벨로린은 선장의 머리 위로 보이
는 별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그들 중 둘이 이미 저편으로 넘어갔어요."
벨로린은 못대가리에 손을 짚은 채 서서히 무릎을 일으켰다. 알버트
선장의 다리를 지나 그의 아랫배, 그리고 가슴에 이를 때까지 그녀의
얼굴은 선장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
목을 기어오르는 검은 뱀처럼 보였다.
"비니힐에게 선택된 파킨슨 신부는 안되었군요. 그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테죠. 하긴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비니힐 역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스터는 아니지요. 비니힐이 그
를 선택한 것은 혹 아무 도움도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존재be
하지도 부재nihil하지도 않는 그 하이마스터의 성격은 나로서도 이해
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런 의심이 들어요. 아니면 라오코네스의 장난
일지도 모르지요. 신부를 그곳으로 보낸 건 그니까. 어쨌든 파킨슨 신
부는 안됐어요. 킬리 선장이나 서 발도에 비하면-"
벨로린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조금 후 그녀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
렸다.
"내가 또 동정했나요?"
벨로린은 녹슨 못대가리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녀의 작은 이마의 반
을 덮을만큼 큰 못이었다.
알버트 선장의 거친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떠올랐다. 바람이 사그라들
었을 때, 나부끼듯 떨어진 그 머리카락은 벨로린의 어깨에 내려앉았
다.
벨로린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거기 바보처럼 못박혀 있는 주제에."
쓸쓸한 시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키의 흉내인가요? 아니, 당신은 또다른 키 드레이번일 수도. 아니-
그게 아닌가요? 저 자는 아직 심장에 못이 박히지 않은 알버트 렉슬러
인 건가요? 아버지, 부탁이니 악마를 동정하지 말아요."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
녀의 작은 키 때문에 고개 숙이지 않는 알버트 선장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는 어려웠다. 벨로린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동정하세요."
벨로린은 검은 손을 들어올려 검은 머릿결을 쓸어넘겼다.
"이제 넷. 그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벨로린은 진저리를 치며 알버트 선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두 손
으로 선장의 가슴에 박힌 못을 덮고는 그 위에 이마를 얹었다.
"철탑의 인슬레이버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새매의 공작? 그 거짓말
쟁이는 종잡을 수가 없지요. 일몰의 왕은, 오오, 아버지. 나는 왕의
이름을 가진 자의 흉중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신부를 잊혀진
탑으로 보낸 것으로 볼 때 나와 뜻을 같이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
고 황금의 조커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벨로린은 온기를 구하듯 알버트 선장의 몸에 더 바싹 다가섰다. 그러
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따스한 피에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아니다. 그
녀가 원하는 것은 알버트 선장 아니면 아직 매장이 끝나지 않은 묘지
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시체와 죽음의 냉혹함에 몸을
깊이 빠트리며 벨로린은 흐느끼듯 말했다.
"아버지. 더 아는 자는 더 불안한 법이죠. 모든 것을 아는 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요. 남은 그들 중 과연 몇이나 나와 함께해 줄
까요?"
알버트 선장의 머리카락이 다시 벨로린의 어깨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벨로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벨로린은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자
신의 얼굴 앞에 늘어진 그 머리카락을 핥았다.
"내 선택을 철회하고 싶어요. 판데모니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갑자기 그녀의 의식 한가운데서 이질적인 경악이 솟아났다.
'그게 무슨- 그러면 당신이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
거침없이 나아가던 노래에 갑자기 불협화음이 섞여든 것 같은 충격이
벨로린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머리카락을 깨
물며 모든 의식으로 외쳤다.
'닥쳐! 플로라!'
의식의 저편에서 한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벨로린은 가슴을 부풀려
그 공포를 한껏 들이마시며 잔인하게 말했다.
'비루한 년. 돌려보내도 돌려보내도 또 돌아오는구나. 법황의 첩질로
만족할 수 없는 거냐!'
한없는 공포 속에서 슬픔이 긴박하게 소용돌이쳤다. 벨로린은 의식의
채찍질을 중단한 채 짧게 호흡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불합리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옥의 지배자는 빠
르게 자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동정심을 가진 하이마스터다.
'불쌍한 것.'
주저하는 듯한 희망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벨로린은 이 급격한
의식의 변화가 번잡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어라. 플로라. 내가 조금 전에 한 말들을 모두 잊어라. 그리고 돌
아가라.'
벨로린은 머리 속의 이물감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
와 접촉해보려던 플로라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돌
아갔을 것이다.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 그녀지만, 노래의 불꽃이 명령
을 내린 이상 그녀에게는 감정의 희미한 자취마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플로라는 그녀가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임을 망각한 상태에
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접촉하려 할 것이다.
벨로린은 여전히 알버트 선장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극히 짧은,
마치 비명소리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든 벨로린은 자신의 입
술에서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보았다. 조금 전 그녀가 물어 끊어버린
알버트 선장의 머리카락들이다.
벨로린은 손가락을 들어올려 입 앞에서 휘저었다. 머리카락은 손가락
에 감겨 입술에서 떨어져나왔고 벨로린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 친구의 맛은 어때? 시체 중의 시체라. 정말 진귀한 거지."
벨로린은 맹렬한 속도로 몸을 돌렸다.
물수리호의 뱃전에 한 사내가 걸터앉아 있었다. 달빛이 그 머리에 떨
어져 가볍게 부서지고 있었고 발치에는 커다란 배낭이 놓여있었다. 벨
로린이 똑바로 바라보는 가운데 사내는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먼지가 일어나 달빛 속에서 반짝였고 그래서 사내는 마치 후광을 뿜어
내는 것처럼 보였다.
벨로린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알버트 선장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에 짧은 웃음
을 터뜨리고는 메인 마스트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벨로린 앞에 선 사내는 그녀의 조그만 키 너머로 알버트 선장을 꺼리
낌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안 벨로린은 섬뜩한 눈초리로 사내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사내는 감탄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
다.
"하아… 이건 정말 걸작이군. 나도 맛 좀 보게 해줄래?"
사내는 말 끝에 입술을 살짝 핥았다. 분명히 조롱하기 위한 의도임을
알고 있었지만 벨로린은 사람이나 동물이 내는 것 같지 않은 으르릉거
림으로 사내를 후려갈겼다.
벨로린의 낮은 으르릉거림은 창검이 되어 사내를 침범해들어갔다. 하
지만 사내는 침착한 동작으로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였다.
"부드럽게 살자구, 부드럽게."
"그 얼굴은 뭐지?"
"아, 이 얼굴? 너라면 알겠군."
"데스필드. 그 패스파인더의 얼굴이다."
데스필드의 얼굴을 한 사내는 싱긋 웃었다. 벨로린은 그 얼굴 너머에
있는 것을 지긋이 노려보며 질문했다.
"데스필드가-?"
"벌쳐라고 불러줘. 어쨌든 그런 이름이니까. 그리고 선택이라면 아직
내리지 않았어. 둘 다 봐야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거 아냐."
"반대쪽?"
벨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벌쳐를 쏘아보았고 벌쳐는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움직였다. 그 턱이 가리키는 곳을 본 벨로린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알버트 렉슬러!"
벌쳐는 맑게 웃었다.
"당연하잖아. 이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어야지."
"못박혀 움직일 수 없는 자와… 움직임 위에 못박힌 자."
"정확해."
"알았어."
잠시 후 벨로린은 아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알았어."
벌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린은 잔뜩 일그러진 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선택은 뭐지?"
"선택하지 않아."
"무슨 말이야? 둘 다 찾아놓고 선택하지 않는다니."
벌쳐의 얼굴이 변했다. 벌쳐는 뭔가 쑥스러운, 혹은 계면쩍은 듯한
얼굴이 되었고 벨로린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벨로린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벌쳐의 얼굴은 더욱
낭패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벨로린은 그 얼굴을 보며 더 크
게 웃었다.
"안됐군. 벌쳐. 깔깔깔."
"그렇게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을 텐데. 너답게 동정심을 좀 발휘해보
면 안되나."
"아, 지금 그러고 있잖아? 정말 불쌍하게 됐군. 거짓말쟁이 하이마스
터. 다른 때나 다른 장소, 다른 존재에게라면 분명히 거짓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뭐, 피장파장이잖아."
"무슨 말이야?"
"너도 내게 거짓말은 못해."
"아아, 알고 싶은 게 있나? 물론 거짓말을 관장하는 너에게 거짓을
말해서 창피를 당할 생각은 없어. 왠지 꽤 악마답지 않은 대화가 되겠
군. 진실만 말하는 대화라니… 깔깔깔!"
벨로린은 다시 허리를 꺾으며 웃었고 벌쳐는 그녀의 웃음이 진정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이제 질문 좀 해도 될까?"
"아, 그런데 미안해. 내가 먼저 질문 좀 해야겠어."
"그러시지. 나 역시 거짓말을 단번에 알아보는 너에게 거짓을 말해서
창피를 당할 생각은 없어. 알고 싶은 것이 뭐지?"
벨로린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쏘아졌다.
벨로린의 손이 벌쳐를 향해 포환처럼 날아들었다. 만일 그 앞에 가만
히 서있었다면 그 속도만으로 몸이 꿰뚫릴 정도의 빠르기였다. 하지만
벌쳐 역시 대포에서 튕겨나가는 것처럼 몸을 뒤로 튕겼다. 그래서 벌
쳐는 벨로린의 손에 관통당하지는 않았다 - 대신 벨로린의 손에 멱살
이 잡힌 채 갑판 끝까지 밀려났다. 벨로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쳐를
뱃전까지 밀어붙였고 뱃전에 부딪힌 벌쳐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뒤로
꺾어야 했다. 벨로린은 벌쳐를 뱃전 너머로 밀어붙이며 강하게 외쳤
다. "열어!"
벨로린의 손아귀에 붙잡혀 뱃전에 걸쳐 누운 극히 불안한 자세에서,
벌쳐는 씁쓸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뱃전 옆의 검은 바다가 맹
렬한 속도로 함몰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겨났다. 분명히 항
구의 바닥이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무시되는 것 같았다. 구멍은 그저
끝없이 깊게 이어지고 있었다. 벌쳐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벨로린을 돌아보았다.
벨로린은 벌쳐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네가 그 신부를 그곳으로 보낸 거냐?"
벌쳐는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뭐든 알아버린다. 그래서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그건 사실 일몰의 왕의 작품이야."
"흥. 왕이라 이거지. 그래서 파킨슨 신부가 비니힐의 답 중에 하나라
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군.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 해도 이건 반칙인
것 같은데."
"뭐가 반칙이라는 거지?"
"파킨슨 신부를 그곳으로 보내서 비니힐로 하여금 그를 선택하게 만
들었잖아."
"아- 거꾸로야. 비니힐은 잊혀진 탑에서가 아니면 우리들 불쌍한 존
재 쪽에 교차접촉할 방법이 없는걸. 그래서 일몰의 왕은 그를 그곳으
로 보낸 거지."
"어쨌든 그래서 비니힐은 한쪽밖에 못 봤잖나! 돌탄 선장도 보여줘
야-"
노하여 외치던 벨로린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후 벨로린
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데스필드?"
벌쳐는 자신의 불안한 상황을 잊은 채 가볍게 박수를 보내었다.
"아아, 파킨슨 신부의 반대쪽은 돌탄 선장이었나? 선택이 끝나서 곧
장 알게 된 것이군. 그래. 맞았어. 비니힐은 양쪽 다 본 거야. 데스필
드는 패스파인더고 그는 언제라도 두 지점 사이에 패스를 그을 수 있
지. 한 지점인 파킨슨 신부가 있으면 데스필드는 다른쪽인 돌탄 선장
까지 패스를 그을 수 있어. 물론 데스필드 자신은 알지 못했겠지만 비
니힐은 그의 능력을 살짝 빌려쓸 수 있었겠지."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너는 데스필드로 하여금 그를 따라다니게 한 거냐?"
"그것도 일몰의 왕의 부탁이었지."
"그래. 알았어. 반칙은 아니군. 비니힐이 그곳에서밖에 나타날 수 없
으니까. 흐음. 역시 왕이시군."
서쪽을 쳐다보며 차갑게 웃던 벨로린은 다시 벌쳐를 돌아보았다. 그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던 벌쳐는 벨로린의 얼굴을 향해 웃었다.
"자, 이제 나 좀 똑바로 세워주지 않겠나?"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끌어당겼다. 놀랍게도 벌쳐의 몸은
휴지조각처럼 날아 벨로린의 어깨 너머로 떨어졌다. 꽈당! 하는 소리
가 났어야 정상이겠지만 벌쳐는 공중에서 몸을 돌려 똑바로 섰다. 그
리고 벨로린이나 벌쳐 모두 그 사실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벌쳐는
그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고 벨로린은 뱃전 너머를 향해 말했다. "닫
아."
바다에 생겨났던 바닥 없는 구멍이 사라졌다. 벨로린은 벌쳐를 돌아
보았고 벌쳐는 한쪽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싱긋 웃었다.
"그럼 나도 질문 좀 할까?"
"질문이 뭐지?"
"간단한 거야. χαχοζ δαιμων은 어떻게 되었지?"
벨로린은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거짓말을 관장한다. 그
래서 그녀는 맹렬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푸핫하하하!"
벌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았지만 벨로린은 한참
동안이나 웃어댄 다음에야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후아, 하. 나는 몰라."
"뭐라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거야?"
벌쳐는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벨로린은 잔인한 웃음만 돌려
주었다.
"선택한 하이마스터는 이제 겨우 셋이야. 아직 넷이나 남아있어. 아
아. 혹시 네가 지금 선택하면 χαχοζ δαιμων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네가 뭐라고 말할지 알아. 다른
마스터들의 선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지? 네가 캐스팅 보트를 쥐
게 되길 바라는 거지? 동정심을 발휘해드리지. 안됐군, 듀크. 내 질문
에는 대답 다 해줬는데 자기 질문에는 답을 얻지 못했으니, 그 좁아터
진 소갈머리에 얼마나 화가 날까. 하하하!"
벨로린과 벌쳐가 말하는 저 로마자들은… 원래 그리스어로 두드려야
되는 건데 한글완성형의 특수문자들에는 고대 그리스어의 톤을 표시할
방법이 없군요.(어차피 훈민정음의 방점도 없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
는 건가?) 그래서 비슷한 로마자로 대충 두드렸습니다. 카코스 다이몬
이라고 읽으며, 톤은 ο 위에 \, 그리고 ι 위에 /가 들어갑니다. 관심
없으시다고요? 하하.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8. 산폭풍, 평야로…2
가장 잔잔한 바다도 별빛을 반사하지는 않는다. 그런 먹물 같은 바다
를 가로지르는 배가 있었다.
키를 쥔 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오스발은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스발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검은 윤곽
을 보았다. 달빛 밖에 없는 밤바다였지만 오스발은 어렵잖게 그것이
율리아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 주무십니까?"
율리아나는 대답 대신 오스발의 등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오스발의 등에 등을 기대었다.
"발. 난 조금 전 매우 발칙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잠이 안 와요."
오스발은 빙긋 웃으며 허리를 약간 앞으로 굽혀 공주가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생각이시기에 발칙하다는 말씀을 다 하십니까?"
"아까 저녁에 슈마허가 미적거리며 물어봤던 것 기억나죠? 행선지를
알고 싶다고."
"예. 기억합니다."
율리아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려는 듯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율
리아나의 머릿결이 오스발의 목을 눌렀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머릿결
이 목을 간지럽히자 오스발은 몸을 살짝 흔들었고 율리아나는 불평하
듯이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어디까지 말했죠? 아, 그래. 행선지. 침대에 누워서
그 생각을 해봤어요. 당신도 대충 짐작할 수 있겠죠? 카밀카르 아니면
검독수리의 성채죠. 그렇죠?"
"예."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는 걸까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젠가 우리 이런 이야기 나눈 적 있었죠. 왕족의 책임 말이에요.
미노만에서 테리얼레이드로 가는 도중이었지요? 예. 그 때만 해도 나
는 왕족의 책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말하
려는 생각 같은 것은 절대로 떠올릴 수 없었죠."
"어떤 생각입니까?"
"만약 말이에요. 당신은 나를 걷어찼지만-" "예?" "시끄러워요. 듣기
나 해요. 어쨌든 당신은 나를 걷어찼지만, 그래도 내가 술김에 당신
겁탈하고-" 듣기나 하라는 명령 때문에 오스발은 신음만 흘렸다. "꼼
짝 못하게 된 당신을 끌고 어느 조용한 어촌으로 도망쳐버릴 수도 있
겠지요? 그리고나서 당신은 이 배로 고기를 잡고 나는 그 고기를 절대
로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바꿔놓은 다음 당신에게 강제로 먹이며… 그
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요?"
오스발이 뭐라 대답할 틈은 없었다. 율리아나가 먼저 대답했기 때문
이다.
"헤헤헤. 옛이야기에는 그런 가증스러운 공주들이 나오죠. 그런 지독
한 이기주의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를 애들한테 들려주다니."
"이기주의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런 공주들은, 그렇게 살고 싶다면 공주로 살아온 날들에 대해 환
불조치는 했어야 했어요.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교
육받고 심지어 그들에게서 존경받고 사랑받은 것들 전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나서 자기 길을 찾아가야 했지요. 받은 것에 대해선 아무 것
도 안 돌려주고서 제멋대로 자기 좋아하는 것만 찾아 훨훨 떠나다니,
정말 공주 망신 다 시키는 것들이라고요. 같은 공주라는 것이 창피해
요."
오스발은 소리없이 웃었다. 하지만 떨림은 전달되었고, 그래서 율리
아나는 오스발의 등에 자신의 등을 비비적거려 주의를 촉구했다.
"가만있으라고 했잖아요. 응. 계속 말할게요. 어쨌든 난 그렇게 생각
해왔어요. 그런데 말이죠. 정말 그러면 안될까요?"
"환불조치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다 돌려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받은 것을 다 돌려주
려면 우리는 세상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해요. 빵 한 조각을 들어올리
며 농부와 수레꾼과 방앗간 일꾼과 제빵사와 물 길어온 하녀와 오븐에
넣을 나무 해온 나무꾼과… 아아, 이건 끝도 없어요. 어쨌든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어느 선부터 다른 세
계의 일부와 관련이 없어지는 세계의 일부. 같은 것은 없지 않습니
까?"
"맞아요. 세상은 편집증 걸린 거미가 끝없이 뽑아내는 무한한 거미줄
처럼 이어져 있지요. 당신처럼 그런 거미줄에서 빠져나와 있는 인물이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겠지요."
"예? 제가 빠져나와 있다니오?"
율리아나는 방긋 웃으며 오스발의 목소리를 흉내내려 했다. 하지만
곧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목소리가 특별한 개성없이 그저 부드러운 목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
다.
"면천? 싫어. 신분에 나를 돌려주고 싶진 않아. 정의의 실천? 싫어.
정의에게 나를 돌려주고 싶진 않아. 공주 구출은 여가활동이었을 뿐이
야. 세기의 신부? 싫어. 세기의 신부에게 나를 돌려주고 싶진 않아.
아무 것도 안 주기 위해서 아무 것도 안 받는 자유인. 하아, 그대는
세상의 왕."
"노랫말 같군요."
"노래… 그 가수."
"예?"
율리아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말했다.
"으응. 그건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지금 하고 있
는 것은 세상이 내게 준 것과 그 보답으로 내가 세상에 줘야 하는 것
의 저울눈 맞추기 이야기에요. 어쨌든 계속하죠. 도대체 어디까지 돌
려줘야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거미줄만 보고
시야 너머에 있는 거미줄은 신경쓰지 않고 살잖아요. 내가 먹는 빵이
구워진 오븐을 만들기 위해 대장간에서 사용된 철광석을 캐어낸 광부
의 곡괭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채벌한 나무꾼의 옷을 만들어낸 재단
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에요."
오스발은 빙긋 웃었다.
"더 이어질 수 있겠군요."
"물론 무한히 이어질 수 있지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어느 선부터 다
른 세계의 일부와 관련이 없어지는 세계의 일부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럼 나는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지요? 나를 키워주신 아바마마의 고마
움만 생각하면 될까요? 아니면 카밀카르의 장래? 대륙의 평화? 세계의
운명?"
"세계의 운명이오?"
"그건 그냥 말해본 거예요. 하지만 대륙의 평화 정도는 고려해볼 수
있겠지요. 잠깐. 지금 속으로 과대망상도 참 더럽게 걸렸구나 등의 생
각을 하나요? 도망다니는 공주 주제에 대륙의 평화를 고려해서 어쩌겠
다는 거냐고?"
"그렇지 않습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차라리 그렇다고 말하지, 이 악당. 그러면 나도 헤헤 웃으며 맞장구
치고는 대륙의 평화 따위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스발. 내 쪽으로 좀 돌아봐요."
오스발은 키를 쥔 손을 바꾸며 뒤로 돌아 공주를 바라보는 자세로 앉
았다.
율리아나는 선원용 반바지에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아직도 햇살은 뜨거웠고 그래서 율리아나의 팔다리는 갈색으
로 그을려 있었지만 이 밤하늘 아래 오스발의 눈에는 그저 하얗게만
보였다. 율리아나는 그 하얀 무릎을 가슴 앞에 모아 그 위에 턱을 얹
었다.
"비밀 이야기 해줄게요. 나 혼자 끙끙거리기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
오스발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시선을 약간
낮추며 말했다.
"휘리 노이에스 이야기는 들어봤지요?"
"예."
"난 좀 복잡한 경로들을 통해 그 아버지가 누군지 추측해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이야기를 다 하는 건 지루한 일이니 넘어가고, 어쨌든
그 아버지는 혼 족의 타르타니어스에요. 그러니까 휘리는 휘리 타르타
니어스인 것이지요."
"타르타니어스라면-?"
"그래요. 레프토리아 회전에서 늦게 도착했던 하이낙스의 친구. 혼
족의 반란을 앞장서 지휘했던 맹장. 무시무시한 사람이지요. 혼 족의
장수라서 더 높게 평가되는 거라고 트집잡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제국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날이 올지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예. 그러면 휘리 노이에스는 그 아버지를 닮은 것이군요."
"그래요. 또 하나. 언젠가 말해줬지요? 휘리가 팔라레온, 다케온, 록
소나를 정벌하게끔 만든 것은 나라고. 옛기억을 되살려봐요, 발. 다림
에 들어가기 전, 볼드윈 씨의 산장에서 만났던 롱레인저 기억나나요?"
"도나텔 백부장님 말씀이군요."
"그건 가명이었어요. 그 사람이 휘리 노이에스지요."
오스발은 눈을 커다랗게 떠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무릎
위에 얹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예. 그 사람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찰 같은
것이었나 봐요. 어쨌든 나는 그 때… 그에게 아버지를 닮으려고 애쓰
지 말라고 말해줬지요.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그 때 아버지를 너무
강하게 인식하고 있더라고요."
"기억납니다. 언젠가 바탈리언 남작님과 말씀하시던 것이군요."
"예. 그리고 그는 나와 헤어져서 곧장 정복사업에 뛰어들었지요. 모
르지요. 내가 지금 한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식의 과대망상
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하지만 내가 만났을 때의 그와 지금 정복사업
을 벌이고 있는 그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고, 그 둘 사이의 시간
간격은 너무 짧아요. 그러니까 내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
할 수도 있잖을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공주님께서는 아버지를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재능을 쓰고 있잖습니
까?"
"바로 그거예요! 그 재능을 어디서 물려받았건 간에 그것은 그의 재
능이잖아요? 그 때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휘리 당신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휘리 당신으로서 설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
스스로가 되라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이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요? 아버지의 이름
에 구애될 필요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아닐까요?"
"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겹게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휘리를 그렇게 만든 거라면 나는 팔라레온과
다케온, 록소나, 심지어 다벨의 사람들에게까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렇죠? 또 하나의 거미줄, 아주 진득진득한 거미줄
이 생긴 것이겠지요?"
오스발은 약간 멍한 듯한 얼굴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율리아나
의 얼굴은 짙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스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환불 조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너무 잘 말해줘서 미울 정도예요."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여 무릎 속에 감췄다.
"내 문제를 알겠나요? 난 남해상에서의 강한 조력자를 원하는 아바마
마나 우리 국민들을 위해 발도 로네스에게 가야 하지요. 혹은 휘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책임을 지기 위해 다벨로 가야할 수도 있고요. 내
가 도대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지요?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지나가다가 내뱉은 말 한 마디까지 책임져야 하냐고. 하지만
그 결과를 보세요."
율리아나의 어깨가 한번 크게 움직였다.
"아니, 그런 것은 옆으로 치워두더라도,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우스워지지 않는 것이지요? 도대체 어느 선부터 진지하게 책임져야 하
는 건가요?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 책임의 거미줄은 무한
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조금전 당신과 내가 증명했어요. 그렇다면,
발. 나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엄청난 씨실들의 행렬에서,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날실을 움직여야 되는 거지요? 어디까지가 내 천인 거죠?"
오스발은 묵묵히 율리아나의 어깨를 바라볼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
다.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가는 달빛과 뱃전을 애무하는 파도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다.
잠시 후 율리아나는 풍성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위로 같은 건 안 하는군요. 내 슬픔에 책임질 건 없다 이거죠."
"죄송합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끌리는지 알겠어요."
오스발의 눈꼬리에 미세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율리아나는 세웠던
무릎을 다시 눕혀 무릎 걸음으로 오스발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부러뜨리고 말 짐을 어깨에 진 자는 미풍처럼 가볍게 걸어가
는 자를 선망하겠지요. 그래요. 난 당신을 선망해요. 가짜 자유밖에
누리지 못하는 공주를 비웃는 당당한 노예… 돌려주기 싫어서 아무 것
도 받지 않지만 그래도 결핍감을 느끼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결핍감이 무서워서, 고독이 무서워서 허겁지겁 받고 안간힘을 다해 돌
려줄 텐데…"
율리아나의 얼굴은 이미 오스발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오스발은 사
이를 가로막고 있는 천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뜨거운 볼, 매끄러운 이
마, 그리고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나는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조만간 가을이겠지요. 추우니까, 안아줘요."
오스발은 키를 잡았던 손을 놓고는 율리아나의 등에 손을 올려놓았
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어깨에 기댄 채 태평하게 잠들어버렸고 그래
서 오스발은 다시 키를 잡을 기회를 놓치고는 아침까지 그녀를 안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배는 제멋대로 흘러갔다.
물수리호의 갑판에 올라서던 하리야 선장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어라, 벌쳐 씨? 당신이 여긴 왠 일이오?"
갑판 구석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던 벌쳐는 하리야를 향해 손을 흔들
어보였다.
"아아, 발길 가는 대로 걷다보니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하리야는 이상하다는 투로 물수리호의 갑판을 둘러보았지만 언제나
사교성 빵점인 물수리호의 선원들은 그에게 아무 눈길도 보내지 않았
다. 하리야는 미심쩍다는 투로 벌쳐에게 말했다.
"승선 허가는 받은 거요?"
"집어던지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앉아있습니다."
하리야는 미심쩍다는 투로 메인마스트의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지만
무슨 대답을 얻을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하리야는 팔짱을 끼며
그에게 로드 데자크의 서신을 전달했던 패스파인더를 바라보았다.
"발길 가는 대로라니, 그러면 아무 목적도 없이 물수리호에 승선해
있다는 말입니까? 묵을 곳이 필요하다면 여관이나 다른 곳으로 갈 것
이지."
벌쳐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웃어보였다. 하리야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자신의 배도 아닌 이곳에서 그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물수리호의 선원들이 놔두기로 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동료들에 대한 해묵은 답답함
을 느끼며 하리야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 때 벌쳐가 말했다.
"벨로린을 찾으시는 거라면 포어마스트 위에 앉아있습니다. 하리야
선장님."
하리야는 포어마스트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벨로린이 가로대
위에 다리를 뻗은 채 돛대에 기대어앉아 있었다. 하리야는 다시 벌쳐
를 돌아보았다.
"벨로린도 아시오?"
"예."
하리야는 벌쳐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햇살은 벌쳐의 얼굴에 정면으
로 떨어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은 하얗고 멀어보였다.
"당신 목적이 뭐요, 벌쳐 씨? 왜 여기 앉아있는 거지?"
"선단에 이상한 불청객이 들어온 것에 대해 화를 내시는 것은 이해합
니다. 뭐, 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곳에 있어야할 필
요를 느끼며, 그리고 미안합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
습니다."
하리야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벌쳐를 바라보았지만 벌쳐는 이제 눈
을 감고 다시 햇빛에 얼굴을 내맡겼다. 하리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밧줄을 붙잡았다.
빠르게 앞돛대 위로 기어올라간 하리야 선장은 벨로린이 있는 높이까
지 이르렀다. 벨로린은 그를 흘끔 보고는 약간 옆으로 물러나 주었고
그래서 하리야 선장 역시 가로대에 앉을 수 있었다. 이 배 위에서 말
이 통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리야
는 벨로린에게 말했다.
"벨로린. 저 아래의 저 남자는 뭐지?"
"벌쳐라는 패스파인더."
"그건 나도 안다. 왜 이 배에 타고 있는 거야? 선원들이 왜 저 친구
를 쫓아내지 않는 거지?"
"알버트 선장의 손님이야."
"손님?"
"응. 일항사는 이미 확인했어."
확인이라. 하리야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수리호
의 일항사가 선장에게 명령받은 일이라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하
지만 알버트 선장이 무슨 손님을 받는다는 거지?' 하리야는 메인마스
트 아래에 못박혀 있는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답답함을 느꼈
다. '젠장. 뭘 물어도 답이 나오나.'
하리야는 '뭘' 물어도 답이 나오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알았다. 손님이라니 어쩔 수 없겠군. 뭐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
아왔는데, 벨로린."
벨로린은 하리야를 흘끔 쳐다보았다.
"하리야. 하나 말해두겠는데, 나는 킬리를 돕는 거지 너를 돕는 것이
아냐."
"킬리가 좀 바빠서 내가 직접 온 거야. 하지만 꼭 따질 필요가 있겠
니? 그가-"
"그가 너희들을 돕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아. 동료니까. 하지만 킬리
가 폴라리스를 배신하고 싶어졌을 경우 나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그 방
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는 것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하리야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싱긋 웃었다.
"알았어. 원하면 죽여준다고도 했다지? 그래. 잘 알아. 너에게 뭐 좀
물어볼 것이 있고, 킬리 역시 내가 그걸 알게 되는 것을 원할 것 같아
서 물어보는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되겠니?"
"좋아."
"지금 대륙 내에서 목도리도마뱀들을 구할 방법이 있을까? 한꺼번에
대량으로."
"목도리도마뱀?" 벨로린은 한 호흡 쉰 다음에 말했다. "패잔병- 다케
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이 찾아왔군. 322명? 꽤 많이도 모였군. 그들 중
자신의 목도리도마뱀을 가진 건 126명. 그러면 넌 196 마리나 되는 목
도리도마뱀을 구해서 그들을 무장시킬 생각인 거냐?"
하리야는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좋긴 한데, 익숙지 않은 거니 좀
불안하기도 하군. 그래, 그 자들이 이곳으로 도망쳐왔어. 그 자들을
무장시켜 팔라레온을 칠까 하는데. 어떨까?"
"밀 수확을 방해하겠다는 것이군. 유격 활동에서는 가장 적합하겠지.
빠르고 강하니까. 그리고 나는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어. 그들이 훌륭
하게 활동할지 그렇지 않을지야 모르겠군. 그런 건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시지, 그래?"
"알았어. 그러면 아까 질문에나 대답해주렴. 196 마리의 목도리도마
뱀을 구할 방법이 있을까?"
"그건 너도 알 텐데? 다케온에 목도리도마뱀을 판매하던 나라들은 바
이스라와 레모, 켄타로니아. 그 중 제일 좋은 것은 켄타로니아산. 그
수입선을 이쪽으로 돌린다면… 현재 그곳에 있는 구매가능한 목도리도
마뱀은 다 합치면 15 마리 정도군."
"겨우 그 정도야?"
"뱃사람이라서 잘 모르나 보군. 목도리도마뱀은 말이나 소처럼 목장
에서 키우는 동물이 아냐, 하리야 선장. 사냥꾼들이 어린 새끼를 생포
해서 파는 거지."
"할 수 없지. 15 마리라. 어디에 있지?"
"켄타로니아에 7 마리, 그리고 바이스라에 3 마리, 레모에 5 마리.
서둘러야 될 걸. 그 사냥꾼들 이제 목도리도마뱀 팔아먹을 곳이 없다
고 낙담하고 있거든."
하리야는 고개를 홰홰 내저으며 다시 밧줄을 쥐었다. 그 때 벨로린이
말했다.
"그렇잖으면, 직접 잡든지."
"잡는다고?"
"잊혀진 탑 섬. 거기엔 아무도 가지 않기 때문에 대륙에서 건너간 목
도리도마뱀들이 지천으로 뛰어다니지. 리저드라이더들을 태우고 직접
잡으러 가면 되겠군. 그 자들이 목도리도마뱀들 다루는 데 최고인 것
은 당연하니까. 돈 별로 안 드는 방법이니 너나 식스가 환호를 지를
것 같지만-"
벨로린은 말 끝에 하리야를 돌아보았다. 하리야는 반가움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벨로린은 싸늘하게 웃었
다.
"아무래도 거기는 좀 무섭지?"
창밖을 내다보던 파킨슨 신부는 환호를 내질렀다.
"이 놈, 축복 받아랏! 기어코 패스를 그었구나?"
그들이 서있는 높이는 보통 건물의 3층 정도 되는 곳이었다. 그 정도
도 충분히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현기증 날 정도의 높
이에 있던 파킨슨 신부는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까지도 느꼈다.
바다는 이제 충분히 가깝게 보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파도들이 허
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
도였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목청껏 고함지르고 있었으므로 데스필
드는 무리없이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은 거요."
"나? 내가 긋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데스필드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분해서 데스필드의 말
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파킨슨 신부는 잠시 후에야 그의 말에 올바른
주어를 넣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은 거요.'
파킨슨 신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계단
을 오르락내리락거리느라 녹초가 되다시피 한 윈디어가 힘들게 서있었
다.
"저 윈디어가 동물적 감각으로 내려오는 길을 찾았다는 거냐?"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본인은 무턱대고 걸었소이다. 그런
데 이렇게 낮게 왔다니. 아무래도 이상하군."
"뭐가 이상하냐?"
"그냥 쭉 내려뻗은 계단으로 왔어도 이렇게 빨리 내려올 것 같지는
않단 말이오. 그런데 본인과 당신은 그렇게 내려온 것은 아니잖소. 아
무리 내려오는 길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법이라도- 흐음. 모르겠군.
한 가지만은 확실해. 패스파인더에게 직업적 자부심의 손상을 입히고
싶다면 이 탑은 제일순위의 추천대상이군… 젠장! 아무렇게나 오다보
니 도착하다니, 패스파인더 최고의 모욕이라고! 끄아아아!"
차분하(다기보다는 시무룩하)게 말하던 데스필드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광하기 시작했다. 파킨슨 신부는 당혹하여 뒤로 물러났지만
데스필드는 그의 모습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벽을 후려치고 통로를
짓밟다가 결국 자기 분에 못 이겨 벽을 차며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넘
었다.
"그놈 참, 성질도 요상하게 부린다. 끝난 거냐?"
"준비는 끝났소."
파킨슨 신부는 아무 말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며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매달린 홀스터를 톡톡 두드려보였다. 데스필드
는 그에 대하여 상냥하고 우아하고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임으로써 복
수했다.
"됐다. 역겨우니까 그만해. 어쨌든 이 층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안 보
이는군. 또 올라가다보면 더 내려갈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만 난
아무래도 사양하고 싶다. 여기서 네가 말하던 그 방법을 쓰면… 그런
데 저 놈이 문제군."
데스필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윈디어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으로 밧줄
을 묶어 내려줄 수는 없다. 창문의 크기가 도저히 말 한 마리가 지나
다닐 크기가 못된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두 사람의 힘으로 말 한 마
리를 지탱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
다.
"놔두고?"
"젠장.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
그러나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슨 답 비슷한 것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
다. 3층 높이의 건물에서 두 사람의 힘으로 말을 내릴 방법은 모두 기
중기나 아주 긴 경사로, 혹은 동물을 사랑하는 마법사 등 이 섬에서는
구할 수 없는 수단들을 이용하는 방법 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풀죽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데스필드가 먼저
스완대거의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굶어죽는 것보다는 안락사가 낫겠소?"
파킨슨 신부는 얼굴을 다 구겨놓은 다음에야 대답했다.
"일단은 놔두고 나가자. 밖에 나가서 무슨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
냐. 물론 우리조차도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
에서 방법 어쩌고 하는 건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만,
어쩌면 아래로 내려가서 우리가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
냐."
데스필드는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배낭에
서 밧줄을 꺼낸 데스필드는 그것을 풀면서 통로를 걸어갔다. 그들이
서있는 곳은 바다를 향한 쪽이었으며 반대쪽의 땅으로 내려서기 위해
선 환형통로 저편의 창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윈디
어에게 다가갔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던 윈디어는 이미 꽤 지친 상태였다. 파킨슨 신부는 성심성의
껏 윈디어에게 축복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 때 통로 저편에서 데스필드가 말했다.
"아무래도 나갈 수 없소."
파킨슨 신부는 어두운 얼굴로 통로 저편을 돌아보았다.
"데스필드. 나도 가슴 아프다. 이 죄없는 놈을 놔두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든 말든 나갈 수 없다고요."
파킨슨 신부는 얼떨떨한 얼굴로 통로 저편을 보다가 윈디어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데스필드가 걸어간 쪽을 향해 걸어갔다. 파킨슨
신부를 본 데스필드는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켜보
였다.
창밖을 바라본 신부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육지 쪽에는 꼬리 길이를 제외해도 키가 10피트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도마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다리로 일어서 성큼성큼 뛰어다니
고 있었고 동작은 꽤 기민해보였다. 가끔 쉬식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전체적으로는 고요했다. 그리고 그 중 특별히 덩치 큰 몇
놈은 주의깊은 시선으로 탑을 쳐다보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그 놈
들이 정확히 3층의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데스필드가 억
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목도리도마뱀… 제기랄. 여긴 목도리도마뱀 당신 천지구만!"
주위를 더 둘러본 신부는 데스필드의 말대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
에서 도마뱀들을 발견했다. 얼핏 보아도 백여 마리는 되는 목도리도마
뱀들이 시야 이편과 저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의 두 팔
에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이, 이 놈들이 집단 생물이냐? 난 이렇게 많은 목도리도마뱀 집단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아니, 잠깐. 어제는 저런 것 안 보였잖아?"
"해질 무렵이라 슬슬 기어나온 것일 거요. 낮에는 너무 뜨겁잖소. 그
리고 본인과 당신이 여기를 내려다본 것은 어제 낮이었고. 한 방 쏘
쇼."
"쏘라고?"
"하늘로 한 방 쏘아보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드건을 뽑아들었다. 데스필드는
뒤로 물러나 윈디어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하늘을 겨냥한 파킨슨 신부
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맹렬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도망치지 않아!"
데스필드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의 목도리도마뱀들 중 몇몇은 약간 어리둥절한 기세로 주위를 둘
러보았지만 대부분의 목도리도마뱀들은 조금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
는 모습이었다. 더 안 좋은 변화를 일으킨 녀석도 있었다. 조금 전 잊
혀진 탑을 주시하고 있던 덩치 큰 놈들이 조심스럽게 탑 쪽을 향해 걸
어오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 놈들에겐 이 대포소리가 그저 천둥소리 비슷한 것으로밖에 생각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 섬에 사람이 들어왔을 리가 없으니까, 이 놈
들은 한번도 사람을 못 본 야생 그대로의-"
"잠깐. 좀 조용히 해보쇼."
"뭐?"
"입 닫으라고! 당신들의 동태가 이상하오."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탑 바깥을 바라보았
다.
덩치 큰 목도리도마뱀들은 이제 탑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
다. 파킨슨 신부는 별 생각없이 그 놈들이 수컷일 거라고 생각했고 보
다 생물학적 지식이 많은 데스필드는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포유류라면 대개 경계와 전투를 맡는 것이 수컷이지만, 상대는 파충류
이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첫번째 놈이 뛰어올랐다.
목도리도마뱀은 걸어오던 속도 그대로 솟아올랐다. 도약이나 발구름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에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 모두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다. 신부 같은 경우 목도리도마뱀의 입이 얼굴 앞까지 치솟
아오른 다음에야 그 놈이 뛰어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애-애액!"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서로 뒤엉키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비명도
그 때 쯤에야 터져나왔다.
"우아아아악!"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통로 바닥에 쓰러져 서로 팔다리를 얽어놓은 채
한참 동안이나 버둥거렸다. 가까스로 일어난 파킨슨 신부는 통로 반대
쪽 벽에 후다닥 달라붙었고 데스필드는 스완 대거를 뽑아들었다. 그
때 두번째 놈이 뛰어올랐다.
"쐐애애애액!"
창문 높이까지 얼굴이 솟아오른 것은 것은 찰라의 시간이었다. 하지
만 신부는 프릴을 잔뜩 펼친 그 얼굴과 커다란 입, 그리고 그 속에서
번득이는 이빨들을 보며 소리높이 비명을 질렀다. 데스필드는 통로 바
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무서운 시선으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세번째 도약은 없었다. 데스필드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정말 엄청난 도약력이군. 저런 건 못봤는데. 아마 리저드라이더 당
신을 안 태워서 더 높이 뛰어오르는 모양이지."
파킨슨 신부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뛰어오를 수 없어. 그렇지, 데스필드? 얼굴이 올라오는 것이 한계
야. 저, 저 앞발로 창턱을 잡거나 하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
"방금 두 당신이 목도리도마뱀 사회에서 가장 높이뛰기를 못하는 당
신들이라면?"
"젠장! 꼭 그런 비관적인 예측을 해야 되겠냐!"
"일단 좀 봅시다."
"안돼! 다가가지마! 얼굴이라도 깨물리면 어쩔 거야?"
하지만 데스필드는 스완 대거를 꽉 움켜쥔 채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청턱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아래쪽이 보일만한 위치에 서서, 데스필
드는 목을 조심스럽게 뻗어보았다.
다가온 놈들은 모두 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해
야 좋을지 의논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그저 산보 중이라
고 생각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데스필드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갑자
기 창턱에 손을 짚으며 상체를 쑥 내밀었다.
"어이, 당신들!"
파킨슨 신부는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목도리도마뱀들은 기절하는 대
신 모두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한 놈의 눈이 데스필드의 눈과 마
주쳤고, 놈은 다시 뛰어올랐다.
"쐐애애애액-!"
"이거나 잡수셔!"
데스필드는 몸을 뒤로 튕기며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스치기만 해도
돼!' 데스필드의 소원대로 스완대거의 칼끝은 뛰어오른 목도리도마뱀
의 코끝을 스쳤다. 데스필드는 우당탕거리며 파킨슨 신부의 발치까지
굴러갔고 신부는 기겁하며 스완 대거의 칼끝을 피했다. 그리고 탑 저
편에서는 퍽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데스필드는 다시 일어서자마자 창가로 도로 뛰어갔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얼굴을 잔
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제엔장. 이리 와 보쇼."
"사양해주겠어. 이야기 듣는 걸로 만족할 테니까."
"그러지뭐. 조금 전의 당신은 이 칼에 코끝을 스쳤고 그래서 땅에 떨
어지기도 전에 얼굴의 절반이 터져나갔소. 조금 전의 이상한 소리는
당신의 얼어붙은 얼굴조각들이 탑에 부딪히는 소리들과… 당신이 추락
하면서 낸 소리였소."
"그, 그럼 지금 들려오는 이 소리는 뭐냐?"
"당신들이 얼굴 터진 당신 뜯어먹고 있는 소리. 가정교육을 잘 받진
못했군. 꼭꼭 씹어먹어야 되는데."
파킨슨 신부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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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카코스 다이몬을 굳이 현대 영어로 쓴다면 Cacodemon입니다.
왠만한 영어사전에는 나오는 단어지요. 하지만 영어로 쓰지 않은 이유
가 있겠지요? 하하.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8. 산폭풍, 평야로…3.
거목은 거대한 그루터기를 남긴다.
바탈리언 남작은 1024년 9월, 페인 제국에서 일어난 전무후무한 반란
사건을 저렇게 표현했다. 거목은 쓰러져도 그냥 사라져버리지는 않는
다.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뿌리가 아직 땅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
리고 제국기사단 북좌가 남쪽을 향해 움직인다는 첩보가 란셀에 도착
했을 때 페인 제국이 경험한 충격은 바로 그런 거대한 뿌리가 땅을 가
르며 숲을 흔든 것에 비유될 수 있다.
9월 5일. 하르타틱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기사단 북좌는 서 킬드
온의 지휘 하에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문이나 서신, 통고문 따
위는 전혀 없었다. 제국기사단 북좌는 말 그대로 조용히, 하지만 폭발
적인 속도로 똑바로 남진했다. 그러나 제국기사단 북좌의 총병력은
25,000 명. 이 정도의 대병력이 움직이는데 포착되지 않을 리가 없다.
9월 9일. 제국기사단 북좌의 이상한 움직임이 란셀에 전달되자 란셀
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천년의 역사에서 페인 제국이 경험한 반란
은 한둘이 아니다. 란셀은 충격 속에서도 기민하게 움직였고 9월 12일
에는 남진을 계속하고 있는 북좌에 대한 정지 명령과 함께 레프토리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기사단 남좌에 대한 북진 명령이 전달되었
다.
그러나 곧 제국은 두번째의 충격 속에 아연해 해야 했다. 북좌가 정
지 명령에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좌조차도 출동
명령에 대해 침묵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페인 제국은 그들
이 제국 천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겪는 무시무시한 위기에 처했음을
깨닫고는 비명을 올렸다.
제국기사단 남북좌의 동시 반란.
천년의 역사에서 제국은 강력한 방위력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충
분히 체득하고 있었다. 적을 막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면 그 강
력한 군대는 거꾸로 조국을 향해 칼을 들이댄다. 그러나 반란이 무서
워서 군대를 약화시키면 적에 의해 공격받는다. 그리고 페인 제국은
인류의 역사에서 해결될 날이 올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딜레마를 해소
하려들지는 않았다. 제국이 천년의 세월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력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기 때문이라 말
하는 자들도 있다. 그 말처럼 페인 제국은 어떤 환상적인 해결법을 찾
는 대신 제국 군사력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제국기사단을 남북좌로
분할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대방을 우아하게 경멸하는 전통을 심어
주는데 성공했다.
제국기사단의 기사들은 언제라도 야전 지휘관이 되어 제국 방위에 투
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국 군사력의 두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국은 군사력 전체를 철저히 장악하는 대신 이 '머리'들을 분리한 것
이다. 나뉘어진 머리들은 서로를 향해 으르릉거리지만, 그들 모두가
고결한 기사이므로 정도 이상으로 폭주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 때문
에라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협력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
호 경멸은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 중 어느 쪽이 기사의 맹세를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킬 경우, 다른 쪽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 때문에 - 혹은 형제의 오욕을 몸소 처리한다는 심
정으로 - 토벌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좌는 모두 그 사실을 알
고 있다. 최악의 경우 반란이 성공하여 제위가 바뀐다 하더라도 신임
황제는 그 즉시 최정예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는 유격대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증명된 일이다. 제국력 689년, 제국기사단
남좌가 주축이 된 반란군은 란셀을 점령하고 당시 황제였던 아스로이
황제를 퇴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기사단 북좌가 전
부 지하로 잠적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그래서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기사단 북좌의 조직적인 반격에 무릎을 꿇었다. 아스로이 황
제는 다시 제위를 되찾았고 제국기사단 북좌의 영수였으며 레지스탕스
활동의 총지휘자였던 손필 경은 대공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머리를 나누어 서로를 견제시키는 이 수단은 언제나 유효했다. 따라
서 아자르 황제와 제국 정부는 제국기사단 북좌의 돌발행동보다도 남
좌의 기이한 침묵에 더 당황했다. 그러나 연거푸 보내어진 진군 명령
에도 남좌는 아무런 회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황제의 명령에 불응했
다.
제국기사단 남좌의 침묵은 란셀을 최악의 혼란으로 몰아갔다. 어쨌든
제국 내에는 무수한 병력이 있었고 돌출 행위를 일으킨 것은 제국기사
단 북좌 뿐이다. 따라서 아자르 황제에게 토벌병력이 부족하지는 않았
다. 그러나 북좌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앞장서서 그
들을 견제해야 할 남좌가 침묵한 것은 그런 당연한 사실까지도 망각하
게 만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황제와 제국 대신들이 당황하고 허둥대는
사이에 북좌는 무서운 속도로 란셀에 접근했다.
그러나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최고 속도로 남진한 북좌의 병력은 란셀을 한번 훔쳐보지도 않은 채
지나쳤다. 란셀 시민들은 제국의 수도를 그냥 지나쳐버린 그 맹랑함에
무시당한 기분마저도 느꼈다. 이미 꾸려놓은 피난짐 위에 걸터앉아 아
자르 황제와 란셀 시민들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북좌의 진로를 응시
했다.
숨가쁠 정도의 남진을 계속한 북좌는 미리온 산맥에 도달하자 남서쪽
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북좌의 진로 앞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달은
제국 정부가 신음을 흘릴 무렵, 제국기사단 북좌의 영수 서 킬드온은
짤막한 서신을 란셀에 보냈다.
'페인 제국과 그 식민지의 지배자이며 아흔아홉 눈의 섬의 백작이며
사무이다크의 공작이며 신앙의 수호자인 페인제국 황제 나르실 로이
아달탄 아크레아 리 온 놀가드 아자르 나이제스 만세. 제국기사단 북
좌 일동은 약간 강도 높은 동절기 훈련에 돌입함을 삼가 알려드립니
다.'
'약간 강도 높은 동절기 훈련'이라는 용어는 제국 외교관들의 악몽이
되었다. 제국기사단 북좌의 1024년 동절기 훈련이 다벨 공국과의 '약
간 강도 높은' 충돌로 진행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제국기사단은 제국 외교관들이 휘리 노이에스와 복잡한 가장무도회를
벌일 기회를 주지 않고 몸소 기사단장의 핏값을 받아내기로 결정해버
린 것이다. 두 영수 간의 비밀 접촉은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역할 분
담을 위한 제비뽑기는 필요없었을 것이다. 서 브라도는 북좌 출신이
다. 따라서 복수를 맡는 것은 북좌여야 했다. 그리고 남좌는 침묵으로
써 복수를 맡은 형제를 지원함과 동시에 북좌가 복수 이외의 다른 행
동을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거목은 거대한 그루터기를 남긴다. 휘리 노이에스가 볼지악 요새 앞
에서 쓰러트린 것은 서 브라도일뿐 제국기사단은 아니다. 그리고 거목
의 남겨진 뿌리는 그들이 있어야 할 땅 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복수를
노래하며 다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야만인들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북좌는 겨울 동
안 결판을 짓고 자신들의 주둔지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겠
지요. 그 외에도 급히 움직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떤 이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복수를 완결시켜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이겠지요. 아자르 황제의 가슴 속에 노여움이 불타고 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그들이 지금 당장 우리를 짓밟는다면 아직 서 브라
도의 전사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못한 황제는 그들의 이 돌발행위를
묵인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무단이탈이라고밖에 볼 수 없
는 이 행동에 대한 처벌도 흐지부지되겠지요."
"흐음. 나는 그들 자신이 복수를 더 기다릴 수 없어서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바탈리언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서 브라도는 홀수대 기사단장입니
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모두 제국기사단 북좌가 번갯불처럼 우
리를 파멸시킬 수 있어야 된다는 전제조건을 가지지. 그들의 이 대단
한 자신감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질 정도인데. 그들은 정말 야만인이
준동하는 봄이 오기 전에, 남좌에서 짝수대 기사단장이 나와서 그들에
대해 곤혹스러워하게 되기 전에, 그리고 황제가 그들의 근무지 이탈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게 되기 전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건
가?"
"어쨌든 제국기사단이니까요. 오만해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요."
바탈리언 남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고 휘리는 피식 웃었
다. 자신이 적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작은 부연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분리된 남북좌는 여기서도 기능을 발휘합니다. 최악의 경우
남좌가 이동하여 야만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좌가 존재하
는 한 황제께서는 북좌를 견제할 수단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되지요.
견제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는 법 아닐까요."
"알았어. 자네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
"말씀해주십시오."
"황제의 귀 속에 반란이라는 단어가 계속 메아리치게 만들어. 황제로
하여금 북좌를 의심하게끔 하라고. 그러니까-"
"시작했습니다. 다른 것은?"
"라트랑에 축하서신을 보내. 선물꾸러미와 함께. 에름 후작으로 하여
금 이제서야 맞이한 신혼에 머리 끝까지 잠겨들게 하라고. 그래서 중
부동맹을-"
"어제 보냈습니다. 브라이트썸의 눈물을 이루미나 후작부인에 대한
선물로 보냈습니다."
휘리는 껄껄 웃었다.
"자네 배짱 대단하군. 그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를 말인가? 하하. 좋
아. 또 무슨 일들을 했는지 먼저 묻고 싶어지는데."
"별 것 없습니다. 폴라리스를 국가 수복활동의 성지로 부각시킨 것
정도가 남는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나?"
"폴라리스를 잔존시켜두기로 결정하신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들을
쓰레기통으로 사용하실 생각이시잖습니까?"
쓰레기통이라는 말은 휘리를 다시 웃게 만들었다. 팔라레온, 록소나,
다케온의 구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고토에서 광복활동을 벌이는 것은
절대로 피곤한 일이다. 따라서 손 댈 수 없는 폴라리스로 이동해주는
편이 차라리 낫다. 손 댈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은 거꾸로 그들 역시
이쪽에 손을 뻗기 어렵다는 뜻이 되므로. 그리고 바탈리언 남작은 폴
라리스의 그런 용도를 쓰레기통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해왔던 일을 삼가 평가해 보고자 하니 들어주겠나?
자네는 내가 제국기사단 북좌를 맞아 싸워야 된다고 결정하고 그외 잡
무를 다 처리해놓은 건가?"
"절대로 안 싸우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군요."
"서 브라도의 유해 반환."
"타진해보겠습니다."
"거기에 공식 사과 덧붙여서 보내. 서 킬드온에게 딸이 있다면 메르
데린 공작과 결혼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나도 감히 황제의 명령을 모른 체하며 달려오고 있는 복수광
들이 그 정도로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할 것은 다
했다는 명분을 세울 수는 있겠지. 자네가 말한대로 이왕 저쪽에 있는
선택권이잖아. 그러니 그 선택권을 좀더 보태준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바탈리언 남작은 잠시 말없이 휘리를 바라보았다. 휘리는 의자에 앉
아 두 손으로 뒷머리를 받친 자세로 책상 위에 두 다리를 뻗고 있었
다. 말하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 하에 남작은 조용히 물었다.
"이런 질문을 용서하십시오. 격퇴할 방법이 있습니까?"
"제국기사단을 말인가?"
"그렇습니다."
휘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렵겠지."
바탈리언 남작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휘리의 다음 말이
이어졌을 때 남작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 뿐이라면 깰 수 있다. 하지만 제국을 끌어들이게 돼. 어쨌건
유배죄인이었던 서 브라도와는 경우가 달라. 이기면 안 되는 싸움이니
어렵지."
바탈리언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휘리를 바라보았지만
휘리는 책상 위에 켜놓은 초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책상으로 바
짝 다가서며 말했다.
"자작님. 죄송합니다만 무슨 되지도 않는 여유를 부리시는 겁니까?
상대는 우리가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의 두 배가 넘는 대군입니다. 더
군다나 제국기사단 북좌입니다. 혼 족과의 전투에서 단련된 베테랑 중
의 베테랑-"
"혼 족은 못 깨도 나는 깬다."
"예?"
휘리는 여전히 촛불을 노려보며 말했다.
"혼 족이 북좌를 못 깬다고 해서 나 또한 그러라는 법이 있나? 물어
보겠다, 남작. 혼 족이라면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를 모두 공략할
수 있었겠나?"
"지금 혼 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휘리는 고개를 들어 바탈리언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은 휘리의 얼
굴에서 초조감 같은 것을 읽었다고 생각했으나 곧 자신의 생각을 의심
하게 되었다. 휘리의 얼굴은 초조감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감정을 드
러내고 있었다.
문득, 물 속에서 떠오르는 익사자의 얼굴처럼 휘리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아, 그렇지?"
바탈리언 남작은 긴장한 채 휘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오,
자작. 난 투필종군한 적 없소. 그 노예의 말처럼 나는 계속 쓸 거요.
그리고 나는 당신을 쓰기 위해 편리하다는 이유로 찾아온 거요. 이제
나를 향해 말하시오. 당신의 속에 있는 불꽃은 어떤 거요? 무엇이 당
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지요? 혼 족이라는 말에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뭐요? 말하고, 자작. 위안을 얻으시오. 말하시오!'
"더 이상 시킬 일이 없다. 나가라."
남작은 실망감을 채 감추지 못한 채 물러났다. 휘리 노이에스는 의자
에서 일어난 다음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바탈리언 남작은 한번 더 휘
리를 불러보았다.
"자작님."
"나가라고 했다, 남작."
바탈리언 남작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휘리의 등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
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휘리는 어두운 창밖만 내다보고 서
있었다.
휘리는 갑자기 넌더리를 냈다.
밝은 방과 어두운 바깥의 밝기 차이 때문에 창문에는 휘리 자신의 모
습이 거울처럼 어리고 있었다. 그래서 휘리는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없
었다. 휘리는 짜증스럽게 몸을 돌려 촛불을 불었다.
훅! 방 안을 밝혀주던 촛불이 꺼지자 방 안은 캄캄해졌다. 다시 몸을
돌린 휘리는 창문에 어리던 자신의 영상에 방해됨이 없이 창밖의 어둠
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휘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했다.
"암흑, 어두움, 타들어가는 칠흑, 이은 자리 없는 음영. 거울 따윈
필요없어. 내게 필요한 건 바로 이거야."
말끝에 휘리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입에서 떠난 말들이 그와 괴리된 무엇이 되어 그를 덮쳐왔다.
휘리는 다시 물러났지만 어둠은 거리를 둔다고 해서 희미해지지는 않
는다. 휘리는 책상에 부딪혔고 떨리는 손을 뻗어 의자를 당겨잡았다.
그리고 거기에 몸을 던졌다.
의자 깊숙이 주저앉은 휘리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안정을 되찾은 휘리는 다시 암흑을 쏘아보며 말했
다.
"하지만, 천사여. 당신이 있으면 더 좋겠군요."
서 슈마허는 눈을 뜨자마자 곧장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동작의 끊어
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갑옷을
착용하고 망토를 걸치고 검을 들어올렸다. 마치 이 기사의 기상동작은
모든 무장이 끝났을 때에 완성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서 슈마허는 신발을 몇 번 굴러보고나서야 잠에서 깼다. 그리
고 그는 또 한번의 감미로운 아침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
다.
하지만 덕분에 그와 같은 선실에 있던 다른 선원들은 몹시 괴로운 아
침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절그럭거리고 쿵쾅거리고 중얼
거리고 있는 슈마허를 노려보며 으르릉거렸지만, 그것은 모두 이불 속
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고용인이고 서 슈마허는 그들
의 선주였으므로. 다행히도 서 슈마허는 빨리 아침 공기를 쐬고 싶다
는 갈망 하에 선실을 나갔기에 남겨진 선원들은 서 슈마허를 잡아간
(?)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서 슈마허는 승강구를 올라가 뒷갑판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마지막 별들이 휘날레를 장식하는 새벽 하
늘은 이미 충분히 푸르렀고 그런 새벽을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것
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서 슈마허는 마음껏 감탄했고 심지어 기대
감마저 느꼈다. 그는 검기만 한 바다와 해도 달도 없는 하늘 가운데
서있는 고독한 구도자였다. 인식을 오도하고 환상을 진실로 바꾸는 어
떤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어쩌면 세계에 틈이 생기며 그에게
우주의 비밀이 드러나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 슈마허는 우주가 뒤집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세 바퀴 정도 뒤집힌 것 같다.
오스발의 얼굴은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으
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될 수 있는 일이었다. 슈마허는 잠시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절대적으로 그런 얼굴이어야
해.' 그리고 슈마허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발."
오스발 역시 낮게 말했다.
"예."
"나는 이것을 기나긴 고통의 도피행 중 당연히 생길 수 있는 동료애
의 발현으로 이해해야겠지?"
"죄송합니다만 아닙니다."
서 슈마허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칼자루로 옮겨가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몰랐을 뿐 아니
라 오스발마저도 충분하지 못한 조명 때문에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스발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서는 저를 쿠션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만."
"쿠션?"
"예. 잠이 오지 않는다고 나오셨다가 이대로 주무시게 된 겁니다."
서 슈마허는 충분한 이해심으로 그 상황을 상상해보려다가 그냥 포기
했다. 오스발의 목을 친 다음 바다에 던지는 편이 훨씬 간단하겠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칼을 뽑아들려던 슈마허는 자신이 이미 칼자
루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스발. 공주님을 조심스럽게 눕혀드리고, 이리 나와라."
"알겠습니다."
"절대 안돼요."
서 슈마허와 오스발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율리아나는 눈을 감은
모습 그대로였고 그래서 슈마허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까
지 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요, 서 슈마허."
슈마허는 그제서야 공주가 확실히 깨어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공주님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공주님의 목숨 뿐만 아
니라 명예도 지켜드려야 됩니다."
율리아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한번도 잠든 적이 없는 것처럼 가볍
게 일어났다. 오스발이 놀라서 바라보는 가운데 율리아나는 낮은 목소
리로 슈마허에게 말했다.
"당신이 본 것 전부 잊어요. 서 슈마허. 당신이 본 것은 밤새 키를
잡고 고생한 오스발과 방금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던 내 모
습이에요."
"제 입은 봉할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저 노예의 입은 어쩌시겠습니
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런 위압감 넘치는 어투 그만 사용
하시죠? 마치 가정교사에게 꾸중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
는군요.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 그만
해요."
"공주님."
"당신이 오스발을 죽이면 그게 더 수상하게 보일 거라는 것은 생각하
지 못하나요?"
서 슈마허는 곰곰히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공주의 말
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런 망망대해에서 오스발을 죽
인다 해도 선원들의 입은 남는다. 그리고 선원들은 갑자기 죽은 오스
발에 대해 벼라별 추문들을 만들어낼 것이 당연하다. 슈마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남습니다."
"문제가 뭐죠?"
"오스발이 밤새 키를 잡고 있었다는 부분 말입니다. 그게, 죄송합니
다만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왜요?"
"만일 그랬다면 저게 보일 리가 없으니까요."
슈마허는 손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켜보였다. 오스발과 율리아나는 모
두 그 방향을 쳐다보았고,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수평선에서 하늘까지 이어져 있는 듯한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보였
다. 가늘다는 것은 순전히 그 말도 되지 않는 높이 때문에 그렇게 보
인다는 것 뿐이다. 누군가 하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
이 있다면 보여줄 만한 광경이다. '안심해. 기둥이 있잖아.' 율리아나
는 약간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저, 그러니까 그게, 어… 어떻게 여기로 왔지?"
오스발 역시 저 위대한 모습은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잊혀진 탑이군요."
"그러네요."
"그렇습니다."
"맞아요."
"예."
그리고 서 슈마허는 뒷덜미를 붙잡힌 채 확 끌어당겨졌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은 슈마허는 조금 후 자신이 율리아나에 의해
끌어당겨졌다는 것, 그리고 오스발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끌어당겨졌
다는 것, 그리고 그와 오스발이 율리아나의 머리를 중심으로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있다는 것을 차례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세 명의 머리
를 한데 모아놓은 율리아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거짓말 하나 생
각해보자고요! 어서!" 오스발과 서 슈마허는 짐짓 고뇌에 잠긴 표정을
지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답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콰-앙!"
오스발과 서 슈마허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던 율리아나는 엉겁결
에 두 사람의 머리를 찧고 말았다. "커억!" "우욱!" 얼굴이 빨개진 율
리아나는 뭐라 사과하려 했으나 서 슈마허는 머리를 문지르면서도 씩
씩하게 뱃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 때 승강구에서 선원들과 선장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그들은 사방
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이 예상하던 것, 즉 해적선이나 군함 등은 발견
하지 못했고 그래서 어리둥절해 했다. 그 때 잊혀진 탑을 발견한 선원
하나가 기이한 비명을 올렸다.
"어어- 어?"
다른 선원들이 뭐라 외치기 전, 잊혀진 탑을 바라보고 있던 슈마허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망토가 한번 떠올랐다가 가라앉은 곳에는 가장
성실한 기사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오스발의 말이 맞군요. 공주님. 저쪽에서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난파한 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만."
율리아나는 박수를 치거나 환호를 내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
고는 선장에게 말했다.
"선장님. 어서 가봐요."
훌륭한 라트랑 뱃사람이지만 그래도 뱃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선
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잭스 선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공주님. 저기는 잊혀진 탑 섬입니다. 불길합니다만."
"그래도 누군가 신호를 보내고 있잖아요. 놔두고 갈 수는 없겠지요,
선장님?"
그리고 잭스 선장은 역시 바다 사나이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선원들은 기막히다는 얼굴로 잭스 선장을 바라보았지만 잭스 선
장은 턱을 앞으로 내밀며 사납게 말했다.
"만약 내가 저기에 난파되어 있는데 그냥 지나가는 배가 있다면 귀신
이 되어서라도 따라갈 거다. 너희들이라면 어떻겠냐? 그러니, 돛을 올
려라!"
파킨슨 신부는 다시 한 방을 쏘아올린 다음 탄환이 떨어졌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탄환들을 재장전하며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 배가 해적선이거나 밀수선이거나 더 나쁜 배면 어쩌지?"
"혼-아피르 혼혈 당신들로만 채운 배라도 상관없소. 저 배가 그냥 지
나가면 향후 몇백년 동안 이 근처에 배가 안 지나간다고 해도 본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저 배를 꼭 불러들여야 하오!"
"흐음. 그건 맞다. 그런데 혼-아피르 혼혈이라고? 그거 끔찍하군."
파킨슨 신부는 껄껄 웃었지만 재장전 동작은 빨랐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창밖을 향해 핸드건을 쏘기 시작했고 데스필드는 통로를 따라 달
려가 육지쪽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해가 높이 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목도리도마뱀들은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해골들을 보며 데스
필드는 목도리도마뱀들이 자신의 요리 솜씨에 감명받은 건 아닌가 하
는 생각마저도 떠올렸다. 어제 데스필드는 뛰어오른 목도리도마뱀들을
서넛 정도 쳐내렸으며 공중에서 요리된 - 요리는 불로만 하는 것이 아
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 목도리도마뱀들은 그 가족들의 진수성찬
이 되었다. 다행히 아직 쌀쌀한 새벽녘이라 목도리도마뱀들의 동작이
약간 굼뜬 것 같아 보인다는 사실이 데스필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 때 환형 통로 저편에서 파킨슨 신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차린 거 같아!"
"좋아요. 목소리가 들릴 만큼 다가오면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라고
전하시오."
"왜?"
"목도리도마뱀 당신은 물 위도 달린단 말이야. 바다에서도 뛸 수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젠장. 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에 떨어져 있는 거지? 알았
다."
잭스 선장은 망원경을 내려놓고는 머리카락도 별로 없는 정수리를 긁
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선원들이 듣지 않았으면 싶었지만 이
작은 스쿠너 안에서 그들의 귀를 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잭스 선장은 될 수 있는대로 담담하게 말했다.
"서 슈마허.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일단 난파한 배 같은 것은 없는
데요."
"그러면 뭐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 잊혀진 탑의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선원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들이 '잊혀진 탑에서 몸을 내밀
고 있다면 그건 틀림없는 악마다!' 라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잭스 선
장은 재빨리 말했다.
"닥쳐, 케틀!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졌느냐. 내가 지금 선주님과 이
야기 중인 것 보이지 않느냐! 너는 선주님 앞에서 선장을 창피하게 만
들 생각이냐?"
잭스 선장은 케틀 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까지 목표로 삼아 노성을
질렀다. 케틀은 입을 다물었고 여차하면 이구동성으로 외쳐댈 것이 뻔
한 다른 선원들도 침묵을 지켰다. 잭스 선장은 아슬아슬하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아무리 봐도 신부복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럼 이 소리는 뭡니까? 신부님이 대포를 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오. 신부님께서는 손에 무슨 작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아
무래도 그게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 슈마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선원들의 얼굴은 다시 퍼렇게
변했지만 오스발과 율리아나의 얼굴은 환해졌다.
"파킨슨 신부님!"
그리고 율리아나는 선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애쓰는 잭스 선장을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잭스 선장과 다른 선원들
을 향해 말했다.
"선장님! 내가 아는 신부님이세요. 교회의 보물 핸드건을 가지고 계
시죠. 지금 그걸 사용해서 신호를 보내시는 거예요!"
율리아나의 말에 선원들은 크게 안도했다. 이후 잭스 선장이 신경써
야 될 것은 접안할 만한 곳을 찾는 일 뿐이었다. 파도를 갈갈이 찢어
놓고 있는 바위와 절벽들이 잊혀진 탑의 북서면을 두르다시피 하고 있
었고 그래서 잭스 선장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섬에 상륙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상황을 알아야 했기에 잭스 선장은
손수 키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탑으로 접근해 갔다.
스쿠너는 쾌속선이기는 하지만 모험항해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안
정된 부두시설이 없을 경우 이 조그만 범선은 바다 사나이의 기량의
시험대가 된다. 물론 가볍게 파도를 타넘어 암초도 통과하는 묘기를
부리는 것이 이 배지만 잊혀진 탑 섬 주위의 해역에 대해서는 아무 것
도 알려져 있지 않다. 선원들은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측심기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바다 속의 상황을 잭스 선장에게 전달했고 잭스
선장은 세심하게 키를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릴만한 위치에 오자 서 슈마허는 선원으로부터 확성기를
받아들었다. 그는 잊혀진 탑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본함은 라트랑 소속의 파웨이브 호다!" 서 슈마허가 선주이긴 하지
만 파웨이브호는 라트랑의 선적에 등록되어 있었다. "거기 있는 것은
사람인가?"
아련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파킨슨 신부요! 더 다가오지 마시오!"
다가오지 말라고? 서 슈마허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파킨슨 신부님. 저는 서 슈마허라고 합니다. 구조 요청을 하신 것
아닙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지금은 다가오지 마시오! 뭐? 해가 더 떠오르면?
알았어. 이보시오! 해가 더 높이 떠오른 다음에 다가오시오!"
서 슈마허는 다시 당혹해버렸다. 그 때 율리아나가 서 슈마허로부터
확성기를 받아들었다.
"야-호! 파킨슨 신부님? 나 유리예요!"
"엉? 율리아나 공주님? 아니, 거기 왠 일이십니까?"
"그건 만난 다음에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왜 해가 더 높이 떠야 된다
는 거죠?"
"아, 도대체… 험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야생 목도리도마
뱀 천지요! 수백 마리도 넘는 놈들이 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놈들이 바다 위를 뛰어 그 배로 다가갈까 무섭소!"
율리아나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율리아나는 재빨리 해안과 배 사이의
거리를 어림해본 다음 잭스 선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잭스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메리우스 평원에서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90 로드나 되는 수
면을 가로질렀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수였습니다. 이렇게 파도가
심한 곳에서는 그렇게 못 뛸 겁니다. 하지만 상륙하는 것은 위험하겠
는데요."
"그런가요. 그런데 왜 해가 더 높이- 아, 그렇군요. 날이 너무 뜨거
워지면 목도리도마뱀은 더위를 피해 숨을 테니까."
"그렇다면 제 7 시나 제 8 시 정도까지는 기다려야겠군요."
"하지만-" 율리아나는 파킨슨 신부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신부
님! 혹시 그 놈들이 바다 속에서 더위를 식히거나 하지는 않나요?"
잊혀진 탑에 있던 파킨슨 신부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데스필드를 돌
아보았다. 데스필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탑 바깥의 목도리도마
뱀들을 바라보았다.
"신부님 당신. 지금까지 바다에 들어가는 목도리도마뱀을 본 적 있습
니까?"
"너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본 적 없어. 그런데 말이야. 나는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게 뭡니까?"
"이 놈들이 이 섬에서 뭘 먹고 사는 거지?"
"글쎄. 사슴이나 토끼나 그런 것이 아니면, 어-" 데스필드는 말꼬리
를 흐리며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곧장 손
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아, 안돼! 더 멀리 가시오! 이 놈들은 헤엄을 칠지도 몰라! 물고기
를 잡아먹기 위해서…!"
풍덩 풍덩!
데스필드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재
빨리 창밖을 내다본 데스필드는 해안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들고 있는
목도리도마뱀들을 발견했다. 요란한 물보라가 연속으로 일어나는 가운
데 물 속에 뛰어든 목도리도마뱀들은 코와 눈만 내어놓은 상태에서 천
천히 꼬리를 휘저어 헤엄쳤다. 그리고 그 때 태양이 떠올랐다. 떠오르
는 태양은 파웨이브호의 돛을 환하게 비춰 주었고 목도리도마뱀들은
검푸른 바다 위에 도드라진 그 흰 점을 향해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수십 개의 통나무가 떠내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
다.
코와 눈, 그리고 등의 일부와 꼬리 윗부분만 수면 위에 드러낸 채 똑
바로 다가오고 있는 목도리도마뱀들의 모습은 벌목장에서 통나무들을
하류로 보내는 모습 같았다. 목도리도마뱀들이 통나무와 다른 것은 그
거대한 꼬리가 좌우로 천천히 꿈틀거린다는 점 뿐이었다. 느리게 보였
지만 목도리도마뱀들의 굉장한 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절
대로 느린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목도리도마뱀들이 크기는 순식간
에 커졌다. 잭스 선장은 낮고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배를 정지시켜. 하지만 닻은 내리지마. 모두들 무기를 꺼내어들고
뱃전 가까이 붙어라. 절대로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지는 말고! 서 슈
마허, 공주님을 보호하시오. 우리는 공주님까지 보호할 수는 없습니
다."
선원들은 조용하면서도 날쌘 동작으로 흩어졌다. 커틀러스, 후크, 스
페이드, 대거 등이 아침햇살 속에 반짝였다. 율리아나 공주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돛대 가까이까지 물러났고 공주의 앞을 막아서던 슈마허
경은 오스발을 흘끔 쳐다보았다.
"너도 공주님을 막아라, 오스발."
그리고 슈마허는 허리 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오스발에게 던졌다. 오
스발은 그것을 받아쥐곤 잠깐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걸어왔
다. 그리고 슈마허와 함께 돛대를 등지고 선 공주의 앞을 막아섰다.
잭스 선장은 '손 하나가 아쉬운데.' 하는 표정으로 슈마허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슈마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서 슈마허는 공주
가 밤새도록 잠든 척하며, 하지만 잠들지는 못한 채 기대어 있던 노예
가 공주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정도는 짐작할 줄 아는 기사였다.
(그리고 서 슈마허는 그답게도 이것이 모두 키 드레이번 때문에 일어
난 일이라고 속으로 주장하며 그에게 모든 죄값을 뒤집어씌워버렸다.)
선원들은 뱃전에 몸을 다 감춘 채 눈만 내밀어 수면을 매섭게 노려보
고 있었다. 목도리도마뱀들의 함대는 급속도로 커졌다. 이윽고 첫번째
놈이 파웨이브호의 선수에 닿았다. 하지만 첫번째 놈은 그대로 선수의
왼쪽을 돌아 옆으로 헤엄쳐갔다. 그리고 두번째 놈은 오른쪽으로 헤엄
쳤다. 잭스 선장의 입 안에서 쇠 긁는 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제기랄, 포위?"
다가오던 목도리도마뱀 무리는 그대로 좌우로 갈라지며 파웨이브호를
둘러쌌다. 잊혀진 탑에서는 파킨슨 신부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질렀
다.
"제기랄! 놈들이 파웨이브호를 포위하고 있어!"
으르릉거리며 창밖을 쏘아보던 데스필드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발
아래에서는 이제 햇빛 속에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가 그르릉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환형 통로가 길게 이어
진 가운데는 윈디어가 서있었다. 데스필드는 손가락을 몇 번 꺾은 다
음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신부님 당신."
"왜?"
"수마(水馬)하실 줄 아오?"
"수마? 수마라니. 나는 그런 거 할 줄-" 파킨슨 신부의 말은 입천장
쯤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파킨슨 신부는 눈을 부릅뜬 채 데스필드를
바라보았지만 데스필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너, 너, 너 설마?"
"설마고 설사고 간에 지금 좀 속성으로 배우셔야겠어."
"마, 말도, 아, 아니 그런 웃기는, 데, 데스필드?"
"저 배가 침몰하면 본인과 당신도 끝장이야. 그리고 수마를 하려면
하나만 타야 해. 둘 다 태우고는 안 돼지.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당신
이어야 하지. 더 가볍고, 핸드건도 있으니까. 자, 시작할까요?"
파킨슨 신부는 절망적인 눈초리로 데스필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데
스필드는 이미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파웨이브호의 선원들과 공주 일행은 눈이 뒷통수에도 있으면 좋겠다
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파웨이브호를 천천히 둘러
싼 목도리도마뱀들의 원진은 갈수록 두터워지고 있었다. 케틀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선, 선장님?"
"닥쳐, 케틀. 뛰어오르진 못해."
"이, 이 놈들 힘이 얼마나 좋은데요."
"뛰어오르려면 힘 가지고는 안돼. 물 속 깊이 잠수한 다음에 빠르게
솟구쳐 올라야 한다고. 그런데 이 놈들이 그만한 수영 실력이 있을까?
겨우 물 속을 오갈 정도는 되겠지만 그 정도는 어림없어. 다리가 달린
놈의 속도는 한계가 있다. 젠장, 수영 잘 하는 네놈이라면 물 속에서
배 위까지 단숨에 뛰어오르겠냐?"
케틀은 그 말에 약간 안심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심은
길지 못했다.
쿠쿵.
둔한 소리와 함께 배 위의 사람들은 질겁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
다. 이물에서부터 고물까지 배 전체가 크게 울렸다. 잭스 선장은 이를
악문 채 외쳤다.
"놈들이, 놈들이 용골을 친다!"
쿠쿵, 쿠쿵! 용골뿐만이 아니었다. 파웨이브호를 둘러싼 목도리도마
뱀들은 그 거대한 꼬리와 단단한 머리로 뱃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충
돌이 일어날 때마다 파웨이브호는 떠 있는 구조물이라는 것을 증명이
라도 하듯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선원들은 뱃전을 꽉 움켜쥐었고 율
리아나는 얕은 비명을 지르며 돛대에 매달렸다.
현재까지는 흔들림 뿐이었고 목도리도마뱀들도 별로 난폭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잭스 선장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
다. 이 괴물들이 물 위에 떠있는 이상한 물체에 장난을 치는 것을 뭐
라 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배는 평압에는 강해도 점압에는 취약한 구
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해머로는 못 뚫어도 송곳으로는 손
쉽게 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목도리도마뱀이 배 밑바닥을 물
어뜯기라도 한다면 파웨이브호는 당장 침몰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장난치고 있는 것을 괜히 건드렸다가 더 난폭해진다면? 잭스 선장은
목도리도마뱀들이 흥미를 잃고 물러날 가능성과 그 전에 배에 구멍이
나버릴 가능성을 놓고 무서운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목도리도마뱀
들은 그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쿠쿵! 다시 한번 목도리도마뱀의 꼬리가 뱃전에 작열한 순간 케틀은
괴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는 자루가 달린 긴 스페이드를 들고 있었
고 그것을 곧장 수면을 향해 휘둘렀다. 탁월한 솜씨에 의해 케틀의 스
페이드는 가장 가까이 있던 목도리도마뱀의 두개골 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선혈이 튀어오르며 바다가 순식간에 분홍색으
로 물들었다. 그리고 목도리도마뱀들의 공격이 멈췄다. 스페이드를 세
워든 케틀은 헉헉거리면서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놈들, 이제야 좀 알아모시겠느냐!"
그러나 목도리도마뱀들은 케틀을 알아모신 것이 아니라 피냄새 때문
에 잠깐 주춤한 것 뿐이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데스필드나 파킨
슨 신부가 이미 발견했듯이 이들이 동족을 먹는데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쐐애애애-액!"
"쐐애애애-액!"
물보라가 거칠게 끓어올랐다. 목도리도마뱀들은 머리가 쪼개진 놈이
가라앉기 전에 한 점이라도 더 뜯어먹기 위해서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
었다. 그리고 그 난동의 한가운데 있던 파웨이브호는 폭풍 한 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진동을 경험해야 했다.
배 곳곳에서 충돌음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선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
동그라졌다. 목도리도마뱀들이 진로를 막고 있는 것은 뭐든 뚫고 지나
가겠다는 듯이 배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잭스 선장은 케틀에게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퍼부어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일을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다. 서 슈마허가 외쳤다.
"선장! 지금 빠져나갑시다!"
"어떻게 말이오! 우리 아래는 바닷물이 아니라 목도리도마뱀 카펫인
데! 그것도 미친듯이 난동을 부리는!"
서 슈마허는 다시 뭐라고 외치려 했으나 그 말은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 맹렬한 폭음이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잊혀진 탑 쪽에서 천둥소리 같은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오스발은 고
개를 돌렸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탑신의 하단부에서 연기가 피
어오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탑 안쪽에서는 데스필드가 귀를 막은 채 고함질렀다.
"잘 했소, 신부님 당신. 그럼 가시오!"
"좋다. 있다가 보자, 데스필드! 이랴-하!"
파킨슨 신부는 재빨리 성호를 그은 다음 윈디어를 출발시켰다. 환형
통로를 내달리던 윈디어는 눈 앞에 생긴 구멍을 보고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심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등에 타고 있던 파킨슨 신부는 그대
로 윈디어를 밀어붙였다. 윈디어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꽤 험
악한 욕설이 터져나왔겠지만, 대신 윈디어는 그 기수의 명령대로 벽에
생긴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음 순간은 이미 허공이었다. 윈디어는 애처롭게 발을 굴렀지만 발
굽에 와닿는 것은 세찬 바람 뿐이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안장에
달라붙듯이 한 채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첨벙! 요란한 물보라와 함께 파킨슨 신부와 윈디어의 모습이 사라졌
다. 재빨리 달려온 데스필드는 불안한 눈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요란한 입수의 파문이 바다 위에 그려졌지만 곧 다가온 파도가 그것을
지웠다. 데스필드는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
었다. 아무 쓸모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데스필드가 고함을 질러보려
했을 때였다.
다시 물보라가 끓어오르며 갑자기 파도 사이로 윈디어의 머리가 솟구
쳤다. 데스필드는 환성을 질렀고 잠시 후 윈디어의 등에 매달려있는
파킨슨 신부를 보고는 더 큰 환성을 질렀다. 파킨슨 신부는 안장을 놓
치지 않았다. 윈디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었고 파킨
슨 신부는 조금 후에야 정신이 나간 듯한 얼굴을 들어올렸다. 젖은 머
리를 뒤로 쓸어넘긴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자신이 말 위에 앉아있음
을, 그리고 윈디어가 힘차게 헤엄치고 있음을 발견했다. 파킨슨 신부
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탑 쪽을 돌아보았다.
"데스필드!"
"해내셨소, 신부님 당신! 우오-아! 이건 정말 기적이라고!"
"다음에는 네가 말 타고 뛰어!"
데스필드는 껄껄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벽에 있는 구멍이 거의 가려
질 때까지 물러났던 데스필드는 배낭끈을 단단히 고쳐맨 다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맹렬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구멍 앞에 이른
데스필드는 바닥을 박차며 조금 전 파킨슨 신부가 그랬듯이 가장 빠른
속도로 잊혀진 탑 섬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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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J. D. 샐린저.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8. 산폭풍, 평야로…4.
파웨이브호를 뒤흔들던 요동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파웨이브
호의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지는 못했다. 그들은 윈디어와
파킨슨 신부를 향해 헤엄쳐가는 목도리도마뱀들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윈디어는 사흘 동안이나 제대로 먹지 못한 것치고는 굉장한 힘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물론 빠져죽을지도 모른다는 절실함이 이 바람사슴
으로 하여금 죽을 힘을 다 쓰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파킨슨 신부는 태
평하게도 '과연 명마구나!' 등의 바람사슴 복장 뒤집는 소리를 하며
핸드건을 뽑아들었다.
"데스필드! 놈들이 우리 쪽으로 온다. 파웨이브호는 안전해졌지만 우
리는 어쩌지?"
배낭까지 둘러맨 채로 날렵한 수영솜씨를 뽐내던 데스필드는 어푸거
리며 말했다.
"다가오기 전에 쏘쇼! 식사 대접을 하라고!"
"아, 그래. 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웨이브호의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
올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콰아아앙! 맹렬한 폭음과 함께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엄밀하게 말하
면 물보라라기보다는 피보라, 혹은 고기보라 등의 흉측한 신조어가 만
들어져야 할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솟아오른 물보라의 절반쯤
은 박살난 고깃덩이와 피였기 때문이다. 파킨슨 신부는 서부 최고의
건맨다운 연속발사를 시도했고 수면 곳곳에서 그 비슷한 물기둥들이
솟아오르는 가운데 잊혀진 탑 앞쪽의 해상에서는 지옥의 풍경화가나
좋아할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케틀은 딸꾹질을 심하게 하며 말했다. "신부님이라고?" 율리아나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잭스 선장은 아예 손을 부들부들 떨며
저 작자들을 선상에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덟 마리의 목도리도마뱀들을 파도 속에 흩어놓
은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입 앞으로 가져와 가볍게 불었다. "훅!"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목도리도마뱀들의 동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케틀을 싹 무시했던 목도리도마뱀들도 주위의 해역이 몽땅 핑크빛으
로 바뀔 정도의 살벌한 공격을 받게되자 파킨슨 신부를 '알아모시기'
시작했다. 목도리도마뱀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와
파웨이브호 사이에는 텅 빈 해역이 나타났다. 잭스 선장은 깊은 고민
끝에 일단 배를 전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의 넘치는 인류애나 성직자
에 대한 존경심 때문은 아니다. 그들을 놔두고 갔다가는 조금 전 목도
리도마뱀에게 가해졌던 공격이 자신들에게도 가해질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잭스 선장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파킨슨
신부는 환호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그래, 어서 오시오! 말이 지쳐가고 있소. 빨리!"
하지만 스쿠너에는 노가 없고, 그래서 정지 상태에서 빠르게 출발하
지는 못한다. 파킨슨 신부는 급속히 지쳐가는 윈디어를 도와주기 위해
안장 옆으로 뛰어내렸다. 윈디어 옆에 뜬 파킨슨 신부는 그 안장을 부
여잡았고 데스필드 역시 빠르게 다가와 안장 반대쪽을 붙잡았다. 그리
고 두 사람은 각자 핸드건과 스완대거를 뽑아든 채 물결을 따라 오르
락내리락하며 주위를 매섭게 응시했다.
목도리도마뱀들은 데스필드의 소망대로 핸드건에 피격당한 동료들의
시체를 뜯어먹지는 않았다. 핸드건의 끔찍한 위력은 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난폭한 생물에게도 경계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그들은 식사보다는 자기보호에 더 신경쓰게 되었다. 목도리도마뱀들은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조심스럽게 헤엄치고 있었고 가끔 그들을 향해
달려들듯이 움직이다가 곧 멀어지곤 했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며 초조하게 파웨이브호의 접근을 기다렸다.
파웨이브호의 선상에서는 율리아나 역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 때 오스발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저, 공주님?"
"뭐죠, 발?"
"이상한 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스발은 고물쪽의 바다를 가리켜보였고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가리킨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율리아나는 재빨리 잭스 선장을 향
해 외쳤다.
"선장님! 고물 쪽에 이상한 모습이 보여요. 마치 바다가 쪼개지고 있
는 것 같은데요?"
잭스 선장은 이 이상한 표현에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
표현이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당황했다. 고물 쪽의
수평선에서 바다는 율리아나의 말대로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잭
스 선장은 망원경을 들어올렸다.
망원경의 촛점을 맞추자 잭스 선장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굉장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물
체의 앞쪽에서 갈라지는 파도가 좌우로 크게 일어나 마치 바다가 절단
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잭스 선장은 일단 세상이 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곧이어 잭스 선장은 저 정도의 끔
찍한 속도를 내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빠졌다.
"배? 아니, 배라니?"
망원경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확실히 배였다. 찢어질 듯 부푼
돛 아래로 쾌속을 내며 날아오고 있는 이물이 보였다. 잭스 선장은 지
독한 쾌속 때문에 수면 위로 1피트 쯤 떠오른 이물을 보며 질린 얼굴
이 되었다.
"배입니다. 맙소사, 말도 안되는 속도… 돌고래보다 빠릅니다!"
"뭐라고요?"
"정말입니다, 공주님. 저조차도 믿지 못하겠습니다만, 오오, 저런 속
도라니. 아! 사람이 보입니다. 제기랄, 다행입니다. 저건 악마들의 배
는 아닌가 봅니다. 하지만 저건…? 검은 옷을 입고 있군요. 날려갈까
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도- 꽤 키가 큽니다."
율리아나 공주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돛대를 끌어안았고 그 동
안에도 잭스 선장은 계속 말했다.
"음? 스쿠너군요. 아무리 스쿠너라도 저렇게 빠를 수가- 잠깐. 저 모
습 왠지 눈에 익은데? 저건-"
"잭스 선장님! 빨리 신부님을, 신부님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핸드건
으로 저 배를 쏴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봐! 신부님에게 구명 부이를 던져! 빨리!"
라이트버드호라는 말에 사색이 되어있던 선원들은 황급히 구명 부이
에 밧줄을 연결했다. 그 동안에도 라이트버드호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
오고 있었다.
키 드레이번은 허리를 굽힌 채 전방을 주시했다. 바람은 그의 코트
자락을 사정없이 흔들어대고 있었고 그래서 키의 모습은 마치 라이트
버드호에 새로 생긴 돛대처럼 보였다. 그의 등 뒤에는 세실이 갑판에
주저앉아 진짜 돛대를 끌어안고 있었다.
"너무 빨라. 정신을 못 차리겠어!"
세실은 필사적으로 돛대에 매달린 채 고함질렀다. 하지만 이물에 선
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세실은 한번 더 고함질렀다.
"너무 빠르다고!"
키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흔들
고 있었지만 세실은 그 머리카락들 사이로 넌더리를 내는 것이 분명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키는 그렇게 세실을 돌아보다가 잔뜩 억누른 목
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세실은 환하게 웃었고 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
다. 세실은 그 등을 향해 히죽거렸다.
"늙으면 사소한 것에 예민해진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또 뭔가?"
"정말 카밀카르에 없으면 필마온 섬까지 갈 생각이었냐?"
"물론."
"젠장. 늙은이 장사 치를 뻔했군. 공주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겠는데."
세실은 조금 더 중얼거리고 싶었지만 바람이 너무 세차서 더이상 말
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세실은 한 손으로 돛대를 꼭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사납게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내리눌렀다. 그 때 이물
에 서있던 키가 복수의 칼자루를 쥐며 말했다.
"복수를 뽑겠다."
"아, 다 왔나? 그래. 알았어."
"속도가 갑자기 줄면 배가 심하게 흔들릴 거다. 주의해라."
세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돛대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키는 복수를
뽑아들었다.
라이트버드호를 밀어붙이던 마법의 바람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물론
마법이 취소된 것일 뿐 공기의 흐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라
이트버드호의 속도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래서 바닷물은 거친 저항으
로 라이트버드호를 뒤흔들었다. 라이트버드호는 심한 롤링과 피치를
동시에 일으키며 요동쳤다.
그리고 그 덕분에 초탄은 빗나갔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라이트버드호의 좌현 쪽에서 물보라가 피어올
랐다. 그렇잖아도 흔들리던 라이트버드호는 더 심한 롤링을 일으켰고
그래서 세실은 비명을 내질렀다. 키 역시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선 갑판에 엎드리다시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위로
바닷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내렸다. 비어있는 손으로 갑판을 짚으며
키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포가 있다니!"
세실 역시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자, 잠깐만! 천둥소리랬잖아!"
"제길. 포성은 아니었어."
"웃기지마, 내 말대로 그건 포성이었어!"
"내가 포성과 천둥도 구별못 하는 줄 아낫!"
뭐라 응수하려던 세실은 곧 입을 다물었다. 키 드레이번은 제국의 공
적 제 1 호고 어쨌든 그 말은 제국의 공적 제 1 호라고 불릴 수 있게
될 때까지 상대를 거꾸러뜨려온 노련한 뱃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키 드레이번이 포성과 천둥도 구별 못할 리는 없다.
"그럼 이건 뭔데! 왜 포환이 날아오고 있는 거야?"
세실의 말 대로 파웨이브호는 분명한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포성과
함께 두번째로 날아든 포환은 라이트버드호의 우현쪽 바다에서 물보라
를 일으켰고 그래서 세실과 키는 다시 물벼락을 맞아야 했다. 억수 같
은 바닷물에 맹폭당하면서 키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렸다.
"설마- 그 신부가?"
"신부라니?"
"철탑 앞의 그-"
"파, 파킨슨 신부! 핸드건이라고?"
"제기랄, 정말 못 쏘네! 하긴 그 때 그 큰 대사 당신도 못 맞췄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이놈아, 그 땐 일부러 철탑을 쏜 거라고 했잖냐!"
"그러면 지금은 일부러 바다를 맞추고 있는 거요?"
"…젠장. 저 배가 저렇게 흔들리고 있잖아? 그리고 나 팔에 기운도
별로 없단 말이다. 솔직히 여기 올라왔을 땐 긴장이 풀려서 그대로 졸
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파킨슨 신부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웨이브
호 선상의 모든 사람들은 데스필드와 기운 넘치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
는 신부를 보며 저 신부가 과연 잊혀진 탑에 사흘 동안이나 갇혔고 맹
렬한 수마를 했으며 조금 전에는 가까스로 갑판 위에 끌어올려진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했다. (아직까지 의심을 풀지 못한 케틀 같은 경우
자꾸만 파킨슨 신부의 엉덩이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머리에 수건을
얹어놓은 채 윈디어를 보살피던 데스필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
었다.
"아- 그래그래. 자꾸 빗맞추다보면 도망가기라도 하겠지, 뭐. 계속하
쇼!"
"말 다했냐? 자식아, 맞추면 어쩔래?"
파킨슨 신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신부는 왼팔을 신중하게 굽
혀 눈높이로 들어올린 다음 그 위에 핸드건을 얹었다. 그리고 입 속으
로는 짧게 기도문을 외웠다. '주님. 제발 맞게 해주십시오.'
핸드건이 세번째로 불을 뿜자 라이트버드호의 돛대에서 강력한 폭발
이 일어났다. 그리고 돛대는 곧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돛대는 갑판을 강력하게 때리며 쓰러졌다.
파웨이브호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공주는 오스발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팔짝팔짝 뛰었고 그래서 서 슈마허는 더 요란하게 발광함으로써 모
든 이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충성스러움을 발휘했다. 파킨슨
신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데스필드를 돌아보았지만 윈디어의 몸을 닦
아주고 있는 데스필드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위의 함성에
고개를 돌린 데스필드는 라이트버드호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
다.
"뭐요, 맞추셨소? 호오. 대단하군요."
파킨슨 신부는 곧 인상을 풀며 머쓱하게 말했다.
"하하, 뭘 그까짓 것을 가지고."
"아니, 아니지. 저 넓은 바다 놔두고 실수로 돛대를 맞추다니, 정말
대단해."
"…잭스 선장님. 미안하지만 포환과 큰 자루 좀 준비해주시겠습니
까?"
데스필드를 수장시켜버리겠다고 발광하는 파킨슨 신부를 달래며 잭스
선장은 서 슈마허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 슈마허. 서 슈마허! 그만 좀 좋아하시고 저 좀 봅시다."
"예? 아, 말씀하시오, 선장."
"어떻게 할까요?"
서 슈마허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율리아나 공주가 먼저 끼어들었
다.
"놔두고 가요!"
"놔두고 가다니오? 확인 사살을 해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도 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현상금이라는 말에 선원들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들 모두는 6천만
데리우스라는, 돈주머니에 넣어 휘둘렀다가는 공성무기가 되고 말 금
액을 떠올리며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
다.
"아니, 안돼요. 놔두고 가요. 저기에는 마법사가 있어요. 조금 전의
그 얼토당토 않은 속도 보셨지요? 접근했다가는 우리가 당할 수도 있
어요."
"마법사라면- 그건 좀 귀찮군요."
잭스 선장은 찌푸린 얼굴로 라이트버드호를 바라보았다. 돛대가 부러
진 라이트버드호는 완전 침묵한 채 서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돛대가 쓰러지면서 갑판의 여러 부분이 손상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공주님. 그렇다고 해서 저 자를 이곳에 그냥 내버려두고 가자는 겁
니까?"
"신부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만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저
자에게서 복수를 빼앗을 수도 없는 걸요. 게다가 세실은 마법사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는 저 둘을 강제로 체포해갈 방법이 있나요?
우리는 저기에 안전하게 접근할 방법도 없는 걸요. 그리고, 우리가 구
조해줘도 어차피 키 드레이번은 교수대 행이에요. 그러면 차라리 바다
에서 죽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파킨슨 신부는 끙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율리아나의 말에 반박할 수
는 없었다. 잭스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완전히 침몰시키는 편이 좋을 텐데요. 솔직히 노스윈드를
저 지경까지 몰아넣고 침몰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면 온 바다의 뱃놈들
이 저희들을 씹어먹으려들 겁니다. 신부님께서 한번 더 쏘시면-"
파킨슨 신부는 어두운 표정으로 잭스 선장을 바라보았고 잭스 선장은
자신이 신부에게 살인 청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선장님. 이대로 놔두고 가면 우리 대신 키 드레이번을 처
리해줄 자들이 있으니까요."
잭스 선장은 율리아나의 말에 주변 해역을 둘러보았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대해적의 말로는 끔찍하겠군요. 그러면 출발하
겠습니다."
잭스 선장의 명령에 따라 선원들이 재빨리 흩어졌다. 선원들은 현상
금에 대한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 드
레이번에게 접근할만한 용기를 끌어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그들의 남아있던 용기마저도 깨끗이 증발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현상금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며 서둘러 돛을 올렸다.
서 소팔라는 씁쓸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꼭 교본대로 노는 녀석들이 있어. 서 킬드온인지 뭔
지 하는 녀석은 틀림없이 레이디가 기다리는 침대에 올라갈 때도 교본
대로 행동하려들 녀석일걸."
그의 주위에 서있던 노예병들은 모두 사납게 웃어젖혔다. 더불어 웃
기는 했지만 서 소팔라의 마음 속은 편치 않았다. 그는 차가운 모래바
람 저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제국기사단 북좌의 기세는 삼엄했다. 잡병이라고 취급해버려도 별 이
상할 것이 없는 노예병들을 상대로 완벽무쌍한 진형을 펼치고 있었고
그것으로써 자신들의 자존심을 완벽무쌍하게 만족시키고 있었다. 서
소팔라는 자신이 아직까지도 상대편의 헛점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
서 소팔라는 '전투 발발 후 10분 내에는 이길 부대가 없다'고 자평했
던 노예병들의 폭발력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부대가
오왕자의 땅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동안 그 폭발력을 감당해낸 부대
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눈 앞에 서있는 부대는 저 차가운 북방에
서 바로 그런 종류의 전투력을 늘상 상대하고 있는 부대였다. 입밖으
로 내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서 소팔라는 솔직히 임자 만났다는 심정
이었다.
서 소팔라는 몸을 돌려 노예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간단한 손짓을 보내었고 곧 두 명의 건장한 노예들이 서로의 팔
을 붙잡아 서 소팔라를 태웠다. 노예들의 머리 위로 솟아오른 서 소팔
라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외쳤다.
"어이, 친애하는 잡것들아."
노예들의 틈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무기도 몇 번 오르락내
리락 했다. 서 소팔라는 팔을 들어올려 그들을 진정시킨 다음 침울하
게 말했다.
"너희들처럼 불학무식한 것들도 저 앞에서 으스대고 있는 것들이 어
떤 종자들인지는 알 거다. 그래. 제국기사단 북좌다. 믿을 수 있는 정
보에 의하면, 저 살벌한 것들은 식후 운동으로 혼 족 전사 몇 명을 때
려잡지 않으면 소화불량에 걸려버리고 마는 특이체질이라고 한다. 그
런데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정보를 전해준 녀석이 혼 족
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는 점이야. 혼 족 전사들은 제국기사 몇
놈을 두드려잡지 않으면 뒷간에서의 분출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다던
가. 응? 왜들 그렇게 웃는 거야. 이건 '믿을 수 있는 정보'라고. 아,
그래. 하나 더 알려줄 것이 있다. 그 녀석은 다른 곳에다 대고 우리
소문도 퍼뜨리고 있던데. 서 소팔라의 노예병들은 적을 몇 놈 거꾸러
뜨리지 않으며 잠자리에서 영 시원찮아진다고 말이야. 어이, 어이! 그
만들 웃으라고. 이 무례한 놈들. 대장님이 훈시 중이잖냐…"
하지만 노예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웃어대었다. 서 소팔라는 싱
긋 웃으며 자칭 '훈시'를 계속했다.
"농담은 적당히 하자. 그래. 깨놓고 말해서 이건 어쩌면 너희들과 내
가 만난 이래 최대의 위기다."
노예들의 웃음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의 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이에스 자작님의 깃발 아래 다벨, 록소나, 팔라레온, 다케온이 하
나로 묶였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
만 바로 우리 시대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 깃발 아래에서 가장 훌륭히 싸웠고 가장 명예로운 피를 흘려왔던
것은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바로 이 기적을 제련해낸 대장장이인 것이
다. 나는 너희들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서 소팔라는 손을 크게 뿌려 등 뒤의 제국기사단을 가리켜보였다.
"하지만 너희들이 만들어낸 이 기적을 무시하고, 전쟁터에서의 정당
한 대결의 결과를 무시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알
량한 힘만 믿고 그 결과를 강제로 뒤집으려 하고 있다. 복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지만, 이것은 결국 힘 있는 자의 횡포일 뿐이다. 우리
가 서 브라도를 암살하기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오히려 우리들의 전쟁
에 제멋대로 끼여든 것은 그 늙은이 아니냐!"
"우와아아아!"
"그들이 강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의 도덕
위에 자신의 도덕을 군림하게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도대체 뭐가
복수란 말인가. 이것은 스스로의 힘에 도취되어 피범벅이 된 사냥감
위에서 뒹구는 늙은 맹수의 추악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냥감이 되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와아아아!"
"그러니, 제군들! 그대들이 만들어낸 기적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노이에스 자작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는 제
안한다. 저들에게 우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든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키자. 자, 제군들! 모두들-"
"튀자!"
노예병들은 신속하게 몸을 돌린 다음 열심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들의 대장으로부터 역시 '대륙 최고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는 평가
를 받고 있는 절기를 마음껏 펼쳐보이고 있는 노예병들의 등 뒤로 서
소팔라의 애처로운 외침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그건 내 대사야아아앗!"
탄기 협곡은 미리온 산맥 최남단에 위치하며 다벨 공국과 페인 제국
의 연결 통로로 사용된다. 따라서 9월 29일, 탄기 협곡 전투에서 서
소팔라가 그들 부대의 최고 장기를 펼쳐보인 것은 다벨 공국이 제국기
사단 북좌에게 대문을 열어준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서 소팔라
는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은 채 도망쳤고 그래서 제국기사단 북좌 역
시 약간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서 소팔라가 약간이라도 전투
를 벌여줬다면 제국기사단은 다벨 공국으로 쳐들어갈 명분을 얻게 되
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 소팔라는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도망쳐버렸고,
따라서 그 상황에서 제국기사단에 탄기 협곡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것
은 명백한 침략 행위가 된다. 서 소팔라는 이길 수도 없는 전투에 매
진하는 대신 그들에게 이런 버거운 문제를 집어던진 것이다. '문은 열
었다. 한 발짝이라도 들어오면 너는 적이다.'
그러나 제국기사단은 거침없는 태도로 탄기 협곡에 들어섰다. 바탈리
언 남작은 비명과 환호성을 동시에 올리며 제국 정부를 향해 모든 종
류의 항의문을 무차별 발사했고 그와 동시에 페인 제국을 향해 악성
루머를 포화 사격했다. 그리고 탄기 협곡에서 사라졌던 서 소팔라는
노예병들과 함께 협곡 내에 스며들어 제국기사단 북좌를 향해 유격활
동을 개시했다. 서 소사라는 형의 유격활동을 돕기 위해 다벨의 자랑
인 롱레인저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탄기 협곡으로 출발했다.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들의 공격은 매서웠고, 그래서 제국기사단 북좌는 탄
기 협곡에서 꽤 긴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림파이어 기사들도 그들을 영원히 탄기 협곡 내에 묶어둘 수
는 없었다. 어차피 이기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휘리 노이에스로부터
'이기면 안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탈리언 남작은 그
때까지도 제국 정부와 제국기사단 양자에게 계속해서 서신을 파송했
다. '제국기사단의 동절기 훈련이 다벨 공국의 영토 내에 영향을 끼치
고 있다. 다벨은 이 사실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제기랄, 진짜 심
각하게 생각한단 말이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제국 수도
에서 뜻밖의 저항을 발견하고는 그 저항의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답은 뻔한 것이었다.
9월 36일. 바탈리언 남작은 휘리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
다.
"하드루스 대통령입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휘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탈리언 남작을 바라
보고는 턱을 갸웃했다.
"아니, 자네는 바탈리언 남작이야. 믿어도 좋아."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사트로니아가 우리들의 공작에 역공작을
걸고 있었습니다."
"역시 놈들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휘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작이었어. 길버트 하드루스 대통령이 그냥 물러날 성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소제국의 힘은 아직도 강력할 테고."
"그렇습니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돌발상황이 생기
지 않는 한 북좌를 회군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돌발상황? 그런 것을 기대할 수야 없지. 그렇다면 역시 정면대결로
가야 하나."
세실은 키 드레이번의 코트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햇볕을 막고 있었
다.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햇살은
아직도 뜨거웠다.
그 때 승강구 쪽에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실은 고개를 돌렸다. 바지만 입은 키 드레이번이 승강구에서 빠져
나왔다. 갑판 아래에는 이미 바닷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키는 계
단에서 올라온다기보다는 물 속에서 뛰쳐나오는 자세로 솟아올랐다.
왼손으로 갑판을 부여잡은 키는 오른손을 약간 힘들게 들어올렸고 거
기에는 작은 단지가 쥐어져 있었다.
키는 온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갑판에 앉아서는 들고나온 단지
를 세실에게 건네었다.
"뭔지 모르겠다. 다른 건 다 쓸려내려갔다."
세실은 빙긋 웃으며 잘 밀봉된 단지를 열었다. 곧 세실의 얼굴이 환
하게 바뀌었다.
"건포도다! 바닷물은 안 들어갔어."
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의 물기를 대충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앞쪽
의 절벽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라이트버드호는 가까스로 침몰하지 않은 채 수면 위에 떠있었다. 핸
드건에 명중당한 돛대가 쓰러지며 라이트버드호의 좌현 상당 부분을
박살내고 선복을 쪼개었지만 3L의 배는 그런 상황에서도 뗏목 비슷한
형태가 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키 드레이번은 3L의 배가 빠른 것은 가
벼운 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다 위에 이렇게
떠있다는 것은 그런 그의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돛대가 없기 때문에 세실의 마법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키 드
레이번은 갑판의 판자를 뜯어내어 노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혼자 힘
으로 스쿠너를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를 다 만든 키 드레이번은 접안할
만한 해안이 없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 해안은 절벽과 거
대한 바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다가가지 않는 편이 훨
씬 안전할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헤엄쳐 다가갈 수도 없다. 키 드레이번은 물 위를 유유히 오
가는 목도리도마뱀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또 다가오는군."
건포도를 주워 먹던 세실은 고개를 돌려 목도리도마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뭐라 중얼거렸다. 곧이어 목도리도마뱀 하
나가 질겁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포는 전염되었고 그러자 다른
목도리도마뱀들도 덩달아 도망쳤다.
세실은 눈을 뜨며 투덜거렸다.
"짜식들이 기억력이 없는 건지, 상상력이 없는 건지. 무서운 걸 봤으
면 다시는 안 와야 될 거 아냐."
"저놈들이 뭘 본 건지 말해줄 수 있나?"
세실은 다시 건포도 단지에 손을 집어넣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핸드건을 휘두르는 파킨슨 신부."
키는 차갑게 웃으며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목도리도마뱀들은 어떻게
물리칠 수 있더라도 상륙하지 않는다면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을 판국
이다. 세실은 비를 부를 수 있지만 자칫 비를 불렀다가는 아슬아슬하
게 떠있는 라이트버드호를 완전히 침몰시킬지도 모른다. 키는 좌우를
둘러보며 어느 쪽에 모래사장 같은 것이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현재 위치에서는 잊혀진 탑과 해안 절벽이 시야를 제한하고 있었기 때
문에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키는 일단은 제멋대로 흘러가
게 놔두자고 결정했다. 결정을 마친 키는 갑판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세실은 단지를 내려놓은 다음 손가락을 빨면서 키를 바라보았다.
"안 먹어?"
"생각없어."
"무슨 계획 있어?"
"일단은 상륙해야지."
"그리고?"
"섬 위에서 목도리도마뱀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다면, 뗏목을 만들
어야겠지. 그리고 음식과 물을 준비하여 이 섬을 벗어나야지."
"아주 쉽게 말하는군?"
"1년이면 어떻게 될 거야. 여기서 판재를 뜯어낼 수도 있고 연장도
건져낼 수 있으니까. 만일 재수없어서 맨몸으로 상륙한다면 3, 4년 정
도 걸리겠지. 네 마법과 내 복수 말고는 연장이 없으니까."
"아- 그래. 3, 4년이란 말이지."
세실은 늙은 자신보다도 더 쉽게 시간을 년단위로 취급하는 사람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때 하늘을 보던 키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키
는 누운 채 세실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세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
다.
"뭐야?"
"얼간이를 보고 있다."
"아, 그러셔?"
키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3, 4년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어쩌면 평생 저 섬을 못 벗어날 수도
있다. 아니, 상륙하자마자 목도리도마뱀의 밥이 될 수도 있고."
"알아. 그런데 그것과 내가 덮어써야 하는 오명 사이에는 무슨 관련
이 있지?"
"돌아가라고 했을 때 돌아갔어야지."
"흐응.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네, 젊은 친
구."
"그럼 뭐가 무서운가."
"답을 얻지 못하고 죽는 것."
키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괘씸하게 여긴 세실은 단지 속에서 건
포도를 하나 꺼내어 키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뺨에 건포도를 맞
은 키는 찡그린 표정으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왜 웃는 거야, 이 꼬마야."
"죽음은 안 무서운데 답을 얻지 못하고 죽는 건 무섭다고? 같은 말
아닌가?"
"같은 말이라니?"
"죽음 자체는 무서운 것이 아냐.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오는 기회의
상실을 무서워하는 거지."
"쳇. 찬성해줘야 될 것 같군. 그래. 내가 실언했다. 하지만 나는 무
섭지 않아."
"왜?"
"네 옆에 있으니까."
"또 내가 답을 찾아낼 거라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군. 젠장.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 굶주린 목도리도마뱀 밖에 없는 곳에서 내가 그걸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세실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어깨에 걸쳐두었던 키의 코트를 접었다.
코트를 옆에 내려놓은 세실은 먼바다를 쳐다보며 말했다.
"라트라인에 도착하기 전날 밤, 에름 후작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
더군. 그는 라이온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던데."
키는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세실은 입술을 한번 실쭉거린
다음 계속 말했다.
"라이온의 평가인지 에름 후작의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에 의하면 너는 복수 그 자체라더군. 나는 그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
해."
"어떤 점에서."
"복수. 복수는 되돌려주는 것이지. 그건 적극적 세계 인식이 전재되
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행위라 할 수 있지. 세계를 명확하게 보고
있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영향을 알고 있을 때 복수라는 행위가 성
립가능하지. 자기가 무슨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얼간이는 복수
를 못하지. 따라서 복수라는 것은 세계의 작용에 대한 개인의 반작용
전반이라고 규정지어질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사랑도 복수라고 할 수 있겠지."
"뭐?"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되는 거야. 대상 없는 사랑은 없지. 그런데
그 대상이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세계야. 세계의 작용, 그러니까 세계
가 보내어오는 어떤 자극에 의해 느끼는 개인의 반작용이 사랑인 것이
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침인사에는 아침인사, 노래에는 환호,
키스에는 키스, 사랑에는 사랑…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모든 좋은 것
들은 복수야.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그것을 알고 있지. 복수라는 말이
섬뜩하면서도 뭔지 모를 아련한 그리움, 통쾌함 따위를 주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그리고 사람이 경멸이나 증오보다 무시를 더 참기 어려워
하는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경멸은 복수의 한 형태지만 무시는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으니까."
"노망인가."
"젠장, 집어치워, 이 빌어먹을 꼬마야. 잘난 건 알지만 정말 괘씸하
군. 어쨌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내 질문에 답을 줘야 하지. 무시
하거나 거부하거나 도망치거나… 모를 수도 없어. 넌 알고 답을 말해
줘야 하지. '질문에 답'이 복수니까."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노망이라고 하는 거다."
"흥. 시험해볼까?"
"뭐."
세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키 드레이번. 나는 여기가 싫어. 그러니 나를 구해줘."
"어떻게?"
"어떻게도 할 필요 없어. 벌써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만 일어나, 짜
식아."
키는 세실을 돌아보았고 그녀가 비웃음 같은 것을 흘리고 있음을 깨
달았다. 그 비웃음의 원인을 추리해보려던 키의 귀에 고함소리가 들려
온 것은 잠시 후였다.
"키 선장니-임!"
키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하늘을 보고 있는 사이에 다가온 질풍호
위에서는 트로포스가 맹렬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키는 어이가 없다
는 얼굴로 질풍호를 바라보다가 세실을 돌아보았다. 세실은 자신만만
한 얼굴로 키의 코트를 들어올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키에게 코트를
건넨 세실은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고는 곧 큰소리로 웃었다.
북소리는 느릿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원 위를 별스러운 기세로 치닫던 바람이 모닥불에서 불티를 퍼 올
려 사방에 흩뿌렸다. 하지만 모닥불 주위에 정좌한 전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상의를 벗은 전사들의 구릿빛 몸 위로 모닥불의 반사광이 춤을 추었
다. 불티를 퍼 올리던 바람은 이제 그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렸지만 전
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가 바람을 피하는 척하며 저
편의 황야를 훔쳐본 것은 그야말로 잠깐 동안의 일이었을 뿐이다. 그
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별을 읽는 무녀를 어떻게 훔쳐본다는 말인가.
그 때 바위 위에 앉아 별을 바라보던 무녀가 몸을 일으켰다.
검은 옷과 검은 베일로 몸을 감춘 무녀는 지팡이를 이리저리 던지며
걸어왔다. 풍성한 옷에도 불구하고 가냘파 보이는 무녀는 전사들이 만
들고 있던 구릿빛 원진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 때 바람이 검은 베일을 흔들었고 짧은 순간 무녀의 얼굴이 드러났
다.
전사들은 재빨리 눈길을 피했지만 그래도 그들 중 몇몇은 무녀의 얼
굴에서 대정령과의 합신을 나타내는 흔적을 보게 되었다. 짓무른 이마
에 눈썹이라는 것은 뽑다만 털처럼 몇 가닥 매달려 있었고 코는 없어
져 두 개의 구멍만 뻐끔 뚫려있을 뿐이다. 일그러진 볼에서 흘러나오
는 것이 땀인지 고름인지 구별하는 것은 모닥불빛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윗입술은 썩은 고깃덩이처럼 말려들어가 잇몸이 다 보였고 그
안에서는 흐물거리는 잇몸이 짧게 반짝였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몸으로 위대한 대정령과 동침한 여성은 저렇게 될 수밖에 없다.
베일은 다시 가라앉았고, 전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닥불 옆에 도착한 무녀는 잠시 숨을 고르듯 가만히 서있었다. 조금
후 그녀의 오른손이 힘들게 올라갔다. 둘둘 말린 붕대 끝에서 비어져
나온 파들거리는 손가락이 전사들 가운데를 가리켰다.
지적받은 노전사가 몸을 일으켰다.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벗고 있었지만 그 드러난 상체에서
는 탄탄한 전사의 근육만 찾아볼 수 있을 뿐 노쇠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희게 세고 있는 옆머리와 얼굴의 굵은 주름살에서, 그
리고 온몸에 아로새겨진 흉터들에서 그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북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힘찬 걸음걸이로 무녀를 향해 걸어간 노
전사는 무녀 앞에 정좌하여 앉았다. 그리고 두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똑바로 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검은 무녀의 계속 떨리는 손끝이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아름다운 소녀가 걸어나왔다.
나이 열대여섯이나 되었을까. 더없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몇 시간이
나 다듬었을 것이 분명한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불쌍하게도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상태였다. 어제 아침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알
았을 때 소녀는 벌써 한번 기절했었고 지금까지도 침착을 되찾기는커
녕 더욱 무서워하고 있었다. 물론 내일이 오면 소녀의 또래 친구들은
소녀를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겠지만 그건 내일의 일이다.
소녀는 가장 억센 전사들조차 감히 가까이하기 어려워하는 대정령의
애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믿고 신뢰하는 것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피 뿐이
었다. 하긴 그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피는 액막이가 되어 난폭한 대
정령으로부터 소녀를 보호할 것이다.
소녀는 손에 받쳐든 쟁반을 똑바로 앞으로 내민 채 무녀의 앞에 섰
다.
무녀의 손이 천천히 뻗어 나왔을 때, 공포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소녀
다운 호기심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소녀는 친구들의 말대로 무
녀의 네번째와 다섯번째 손가락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소녀는 재
빨리 무녀의 손짓대로 쟁반을 노전사의 무릎 앞에 내려놓고는 그 옆에
무릎 꿇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정좌하여 있던 노전사는 눈을 감았다. 소녀
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노전사의 희게 센 옆머리를 한 웅큼 쥐어들
었다. 그리고 소녀는 '이 정도면 될까요?'라고 묻듯이 무녀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검은 베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울고 싶은
마음과 기절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절반씩 느끼며 가까스로 쟁반 위에
서 빨간 끈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소녀는 노전사가 아파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며 머리카락 끝을 빨간 끈으로 묶었다.
노전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쟁반 위에 놓인 두번째 물건인 가위를
집어들었다.
노전사는 묶인 머리카락을 서슴없이 잘라내었다.
머리카락은 묶인 그대로 툭 떨어졌다. 노전사는 가위를 도로 쟁반 위
에 던졌고 소녀는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쟁반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올려 무녀의 발 앞에 살짝 내려놓았
다.
느린 북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일어난 소녀는 조심스럽게
전사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돌아온 소녀는 곧장 졸
도해버렸다. 물론 이런 경우 긴장이 풀린 소녀가 혼절해버리는 일은
흔한 일이므로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와 이모, 고
모들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소녀를 수습해갔다. 내일이 되면 그녀들은
실수 없이 일을 마친 소녀를 크게 칭찬할 것이다.
모닥불 가에서는 무녀가 복잡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성한 손으로도 간단한 일은 아니기에 무녀의 작업은 느렸다. 무녀는
쟁반 위에 놓인 세번째 물건인 풀인형을 들어올렸다. 조금 전의 소녀
가 어제 하루를 꼬박 사용하며 정성들여 만든 것이다. 무녀는 풀인형
의 배 부분을 분해하여 그 속에 전사의 잘린 머리카락을 집어넣은 다
음 그 위에 불그르슴한 침을 뱉었다. 무녀는 풀인형을 다시 조립하여
몇 번 다듬었고 잠시 후 풀인형은 깜쪽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
다. 풀인형을 쟁반 위에 놓은 무녀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북소리가 딱 멈췄다.
무녀는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문을 외웠다. 음산한 목소리였
다. 전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모닥불가에 앉아있던 노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전사들과 달리 모닥불가에 앉아있는 노전사의 얼
굴에서는 약간 귀찮아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노전사는
무녀의 주문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주문이 끝나자 노전사는 풀인형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노전사는 전사
들의 원진 한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다른 전사들과는 달리 화
려한 옷을 걸친 늙은 전사가 찌푸린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노전사
는 풀인형을 그에게 내밀었다.
"대족장. 내 맹약의 인형을 받아주소서."
전통에 따라 화려한 털가죽옷을 입고 있는 대족장은 내키지 않는 눈
길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대족장은 전사의 어깨 너머 무녀를 바라보았
지만 검은 무녀는 이제 아무 관심없다는 몸짓으로 모닥불을 좀 지핀
다음 원진 바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족장은 다시 노전사를 바라보
았다.
대족장은 인형을 받아들었다.
맹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노전사가 배신할 경우 대족장은 보관하고 있던 인형을 무녀에게
넘길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전사라면 차라리 목숨을 내
줄지언정 맹약의 인형이 무녀의 손에 들어가게끔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족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족장이 일어났다.
각 부족을 대표하는 전사들은 그렇잖아도 당당한 자세를 더욱 당당해
보이게끔 했다. 잔뜩 수축된 그들의 근육들에서 핑핑 소리가 날 것 같
았다. 나란히 걸어간 대족장과 노전사는 이윽고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섰다. 대족장은 모닥불 너머 노전사의 눈을 매섭게 바라보았지만 노전
사 역시 날카롭게 그 눈길을 받아내었다.
대족장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대족장은 모닥불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 재와 흙먼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모닥불 너머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반대쪽에 서있던 노전사는
온몸에 재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잘 싸워라, 타르타니어스. 성명판을 채우도록."
타르타니어스라 불린 노전사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갑자기 북소리
가 터져나오며 원진에서는 무시무시한 함성이 솟구쳐올랐다.
9월 36일. 다벨 공국에서 휘리 노이에스가 제국기사단과의 정면대결
을 고민하던 바로 그 시각, 제국기사단 북좌가 떠나간 하르타틱 요새
는 혼 족의 공격 아래 무너지고 있었다. 물론 제국기사단 북좌는 방어
군을 남겨놓고 떠났지만 그들은 14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혼 족
이 쳐내려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혼 족의 모든 부족이 참가하는 대동맹이 성립된 것이 제국에 알려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지만 14만이라는 그 엄청난 숫자만으로도 제국
은 이미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그 대동맹이 누
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도 짐작해냈다. 이합집산의 경향이 강한
혼 족을 대동맹으로 이끌어 지휘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레프토리아 회전에서 하이낙스를 돕기 위해 대족장에게 맹약의 인형을
바쳤던 타르타니어스는 다시 한번 맹약의 인형을 바치고 혼 족의 모든
부족의 협조를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까마득한 하늘에서 분노의 벼락으로 산봉우리를 매만지던 산
폭풍은 노호하며 제국의 기름진 평원으로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