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사상에 대해서 알려 주세요..
특히 소유요 와 제물론에 대해서 부탁드립니다..그 부분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을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출처 : '장자에 관해서 질문' - 네이버 지식iN)
nes0323 (2003-05-07 12:02 작성)
이의제기 | 신고
제물론 다음에는 소유요와 제물론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를 퍼왔습니다.^^
장자
莊子 BC365?∼BC290?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또는 장자가 저술한 저서 《장자》를 가리킨다.
〔인물〕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나라의 몽(蒙;河南省 商邱縣) 출신. 전국시대인 BC300년 무렵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칠원(漆園)의 말단관리가 된 적이 있을 뿐 대개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논리학파(論理學派)의 혜시(惠施)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대성시킨 사람이라고 하여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라고 일컫기도 하나, 노자의 사적(事績)과 연대(年代)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노자의 현실적인 성공주의와는 달리 장자에서는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自己中心說)과 전병(田騈)의 귀제설(貴齊說;萬物平等說)의 영향을 받은 사변적(思辨的) 경향이 강하다.
〔서적〕 《장자》는 33편으로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나뉜다. 그 가운데에서 내편이 장주(莊周)의 근본사상을 기술한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내편의 뜻을 부연한 것으로서 그의 후학들이 연구발전시킨 것이라 하며, 노자와의 절충이나 다른 사상과의 교류 등을 엿볼 수 있다. 대략 전국시대 말기(BC 3세기 말)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문(原文)의 분합(分合)은 그 뒤에도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33편으로 정착된 것은 진(晉)나라 곽상(郭象)의 주석본이 나온 이후의 일이다. 곽상의 주석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본(完本)의 기본자료이며, 그 뒤에도 당(唐)나라 성현영(成玄英)의 《주소(註疏)》와 송나라 임희일(林希逸)의 《구의(口義)》 등 많은 주석본이 나왔다.
〔사상〕 장자의 사상은 우선 제물사상(齊物思想)을 근저(根底)에 두고 있다. 이것은 현실의 모든 차별상(差別相)을 평등시하는 일종의 관념철학으로서 생사·귀천·대소 등을 비롯하여 시비선악(是非善惡)문제에 이르기까지의 대립상(對立相)을 제일시(齊一視)하는 초월적 입장을 강조하고, 그 대립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실적 고뇌를 초탈하려는 것이다. 이런 높은 경지를 <도추(道樞;道의 中心)> 또는 <천균(天鈞;天의 中心)>이라 했다. 그리고 속계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스러운 경지를 <소요유(逍遙遊;구애받는 것이 없는 느긋한 놀이)>라고 이름지었고 이 경지에 달하는 방법을 <인순(因循)>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 즉 자연의 절대적 도리에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사망아(無私忘我)의 태도가 요구되며, <좌망(坐忘)>이 곧 그것이다. 인간의 얕은 지혜를 버리고 스스로 이루어지는 절대적 이(理)와 합일하는 곳, 즉 <천균(天均)>을 따르는 경지야말로 구애받지 않는 느긋한 정신의 자유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초월적 종교성이 있다. 즉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두는 인순주의에 의해서 정신의 자유와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후세에의 영향〕 그런데 장자의 후학에 이르러서는 초탈의 종교성은 신선사상(神仙思想)과의 결합을 보여 내면적인 수행의 강화를 추구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현실적 효과를 추구하는 세속적 관심도 커져서 처세와 정치적 성공까지 추구하게 되면서 《노자》와 접근하게 되었다. 그 양상 등은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서 볼 수 있으며,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방법으로서 내적 본성에 대한 주시가 있고, <성(性)에 반하는> 있는 그대로의 <성명(性命)의 안락에 장착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도 그 특징이다. 이어서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노장을 절충하는 형식으로 모든 사상을 통합하려고 했는데, 거기에서도 이런 경향이 특별히 현저했다. 《장자》가 즐겨 읽히게 되어 그 사상이 유행한 것은 위진(魏晉) 때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이르기까지였으며, 이른바 청담(淸談)의 내용도 대부분이 장자와 관련되고 귀족들의 초속적(超俗的)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후한(後漢) 때에 일어난 도교(道敎)는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하여 신격화하였고, 점차 노자를 비조(鼻祖)라하여 받들었지만 그에 따라 장자도 또한 신선화하여 신격화되었다.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에 의해서 진령(眞靈)이라 하여 제3급에 올려졌으며, 당나라 현종(玄宗)에 의해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존칭을 받아 그의 저서가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 1 편 소요유(逍遙遊)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하여 곤 이라 하였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 이라 하였다. 붕의 등도 그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붕이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았다. 이 새는 바다에 태풍이 불면 남쪽 바다로 이동하게 된다. 남쪽 바다란 천지를 말한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아갈 때에는 물을 쳐 올리되, 그 높이가 3천리나 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리나 올라가 유월의 거센 바람을 안고 날아간다. 아지랑이나 먼지 같은 것은 생명체가 숨을 쉬면서 서로 불어내 보낸 것이다. 하늘이 파란 것은 그 본래의 색깔이 그러한 것일까? 그 멂이란 다함이 없는 것일까? 그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역시 그러할 것이리라.
무릇 물이 깊지 않다면, 큰배를 띄울 수 없을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작은 웅덩이에 부어 놓으면 땅에 닿아 버리는 것은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쌓이되 두텁지 않다면, 그 역시 큰 날개를 떠받칠 힘이 없게 된다. 따라서 9 만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그런 뒤에 지고 거리낄 것이 없는 뒤에야 붕은 남쪽으로 날아가게 된다.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느릅나무 위에 올라 머물 수 있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데, 무엇 때문에 9 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가까운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 끼 밥을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를 것이나,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양식을 절구에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 그 두 마리의 작은 벌레가 그러한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수명이 짧은 것들이다. 초 나라의 남쪽에 명령이라는 거북이 살았는데, 오 백 년을 봄으로 하고 또 오 백 년을 겨울로 삼았다. 상고 시대에 대춘 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은 팔 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이것들은 수명이 긴 것들이라. 그리고 팽조는 지금까지도 오래 산 것으로 특히 유명한데, 세상 사람들이 그와 견주려 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의 관직을 맡아볼 만하고, 행동은 한 고을 정도에 합당하며, 덕은 한 임금을 모시기에 알맞고, 능력은 한 나라의 신임을 받을 정도인 사람이 그 자신을 보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송영자 같은 인물은 그런 것에 빙그레 웃을 뿐이다. 그는 세상에 들고일어나 그를 칭찬해도 우쭐하지 않았고, 세상이 들고일어나 그를 비난해도 저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안팎의 구분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었고, 영욕의 경계가 확연히 나뉘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세속의 일에 급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뿌리를 내려 제대로 서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표표히 잘 돌아다니다 15일 정도가 되면 돌아오곤 했다. 그는 바람에 대해서 급급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걸어다니는 일은 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바람이라는 것에 의지해야 했다. 만약 천지의 도를 타고, 육기의 변화를 다스림으로써, 무궁 속에서 노닐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지인은 자기 자신의 형체가 없으며, 신인은 현상 세계에 매여 있는 인위적인 행적을 남기지 않고, 성인은 세속에 연연하는 명성을 추구함이 없는 것이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기에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서 다섯 섬 들이의 열매가 열리더군요.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혼자 들 수가 없고,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펑퍼짐하고 얕아서 쓸모가 없었습니다. 횡뎅그레 크기만 컸지 아무데도 소용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 그것을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그려."
장자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큰 것을 쓰는 방법이 정말 서툴군요. 송나라에 손 안 트는 데 잘 듣는 약방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솜을 물에 빠는 일을 가업으로 삼고 잇었더랍니다. 한 나그네가 그 말을 듣고 그 처방을 백금에 사겠다고 제의하자, 그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상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우리가 대대로 솜을 빠는 일을 해 오고 있지만, 겨우 몇 푼이나 버는 데 불과했다. 이제 단번에 이 기술을 팔아 백금을 벌 수 있으니 그에게 팔도록 하자.- 나그네는 그 처방을 얻어 가지고 오왕을 설득했습니다. 마침 월나라에서 침범하여 왔으므로, 오왕은 그를 장수로 삼아, 겨울철에 월나라 군사와 수전을 벌여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습니다. 오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봉지를 내리었답니다. 손을 트지 않게 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떤 이는 봉지를 받고, 어떤 이는 솜이나 빨게 된 이유는 그것을 쓰는 방법이 달랐던 데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대가 다섯 섬들이의 박을 갖고 있다면, 어째서 그것을 큰 술통 모양의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않고 그것이 펑퍼짐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는 게요? 역시 선생은 앞뒤가 꽉 막히신 양반이구료!"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 있는 곳에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고 부르더군요. 그 큰 줄기는 혹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도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조차 없기에,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했지 아무 소용되는 게 없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거요."
장자가 말했다."선생은 삵이나 너구리를 보지 못했나요? 몸을 낮게 움츠리고 엎드려 있다가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을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리어 죽고 말지오. 그런데 이우 라는 큰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아 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쥐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대는 큰 나무가 있음에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 듯한데, 어째서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곳, 드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하릴없이 그 곁에서 왔다갔다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잠을 잔다거나 하지 않는 거요? 그 나무는 도끼에 찍혀 일찍 죽지도 않을 것이요, 어떤 사물도 그것을 해꼬지하지 않을 것이니,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 어째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인가요?
제 2 편 제물론(齊物論)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너그럽고 여유 있지만,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매사에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는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나, 하찮은 말은 수다스럽다. 잠이 들면 혼백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육신이 활동을 시작한다. 외계의 사물과 접촉하여 교섭함으로써 마음은 날마다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바쁜 사람도 있고, 우울한 사람도 있고, 답답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작은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흠칫 놀라게 하나, 큰 두려움은 오히려 망연자실케 한다. 사람들이 시비를 가릴 때에는 마치 쇠뇌의 줄을 튕기듯 재빠르게 행동한다. 그들이 자기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할 때에는 마치 신에게 맹세하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들이 날로 약해질 때에는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시들듯 쇠잔해진다. 그들이 늙고 퇴락하게 되는 것은 욕망에 억눌리어 앞뒤로 꽉 막히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와진 사람의 마음은 다시 소생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희노애락과 근심, 걱정, 변덕, 두려움 및 경박함, 방탕, 자만, 허세는 악기의 텅 빈 공간에서 음악이 나오고 땅 기운이 응집해 버섯이 돋아나듯, 밤낮으로 번갈아 가며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러한 감정의 변화가 싹트게 되는 까닭은 알지 못한다.
두어라! 아침저녁으로 이런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말미암게 되는 바가 있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들이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요, 내가 없으면 그것들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되,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을 다스리는 참된 주재자가 있을 법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그 작용은 믿을 만하나, 그 형체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곧 어떤 실체는 존재하되, 그 형체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란 그저 소리를 내는 것만은 아니다. 말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거늘, 그 의미하는 바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는다면, 그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새 울음소리와 다르다고는 하나, 도대체 거기에는 구별이 있는 것일까, 구별이 없는 것일까?
도는 본래 상대적인 진실이나 허위와는 무관하게 독립된 것인데, 도대체 무엇에 가리워져 진실과 허위라는 분별이 있게 되는 것일까? 말은 또 무엇에 가리워져 옳고 그름이 있게 도는 것일까? 도라는 것은 아무 데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말이란 존재한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도는 작은 성취에 숨기어져 있으며, 말은 화려한 수식 속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일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명석한 지혜로써 해야 할 것이다.
긍정이 있으면 부정이 있고 부정이 있으면 긍정이 있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그건 것에 의거하지 않고, 자연의 본성을 관조할 뿐이다. 곧 자연의 도리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석한 지혜로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신이 하나됨을 추구하려 애쓰되, 그것이 본래부터 하나임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일러 조삼모사라 하거늘, 그렇다면 조삼모사란 무엇인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그 먹이로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면 어떻겠느냐?" 그 말에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그러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마."라고 말하니까,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명분이나 실제 내용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를 내게 된 것 역시 그와 같은 주관적인 심리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의 논쟁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균형 속에 여유 있게 머무는데, 그것을 일러 양행 이라고 한다.
내가 자네와 논쟁을 했다고 가정해보세. 자네가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이기지 못했다면, 자네가 옳고 내가 옳지 못한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내게 졌다면, 내가 옳고 자네가 옳지 못한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그런 것은 나나 자네나 알 수 없는 것이네. 무릇 모든 사람들이란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거늘, 우리가 누구를 불러다 그것을 판단케 하겠나?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나나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어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러니 나나 자네,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가 알 수가 없는 것이지. 그런데 누구에게 의지하겠나?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자신이 장주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히 장주였다.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러 물화라고 한다.
★고명윤(高明允)님의 <<소요유(逍遙遊)>>
요즘에 고명윤님의 신작 소요유를 보았읍니다.
장자(莊子) 내편에 나오는 소요유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이라니..?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
제목이 주는 느낌이 제법 그럴듯하여 그래서 지체없이 호기심이 동하는대로
뽑아 들었습니다..
고명윤님의 처녀작인 잠룡기는 사실상 기억에 가물가물하여 어떤 내용이었는
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요..
음,,특별히 유니크한 점이 없었던 건가..?..아님..음..하여튼지 완전히 새로
운 신진작가분의 글인양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소요(逍遙)란 마음가는 대로 유유히 생활하는 모양이며..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노닌다는 말로써 장자 철학
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다..
책의 겉표지에 있던 이 내용이 또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생각키로 겉표지의 삽화는 한마디로 넌센스적인 작품입니다..
무산신녀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전혀 연관되지 않고 오히려 제목
을 가리지는 않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잘못 그려진 표지입니다..
소요유에 흐르는 전반적인 흐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는 것이
지요.. 표지 디자인에 더욱 신경을 쓰시기를..
드레곤의 전작인 남해 삼십육검에서 구현한 표지와 제목의 어울림에 비하면
음...좀 구닥따리 같이 뵈네요..
이번작 <<소요유(逍遙遊)>>는 주술과 부적,,방중술,,강시가 난무하는 동양적
인 환타지 구현이 특이해 뵈는 소설입니다..
딱히 말하자면 환주루주(還珠樓主)의 '촉산기협(蜀山奇俠)'과 유사성이 돋보
인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기환소설(奇幻小說)이 올해에는 유난히 엿보입니다..
광협요마전기,,금포염왕,,예전의 악선철하..등등의 계열에 드는 소설입니다..
한무에서도 기환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 나오는 것같아 무협의 지평을 넓힌 소
설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소요유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느낌이 드는 소설입니다..
작가분의 정성이 깃들여져 있음을 느낄수 있는 무협을 읽는 것은 언제든지 환
영할만한 일은 아닐른지..
몽환적인 분위기 ...
객관적인 자료에 의한 설정,,,
다만 작가는 무언가 놓친게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금 어설퍼 보이는 스토리라인이 눈에 거슬렸을 뿐 대체로 무난한 작품이라
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부텀 높임말은 생략한 글입니다..양해를..^^)
소요유라는 거창한 제목에 비하면 주인공의 활약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점
이 많았다.
무공에 자유롭지도 않았으며..
관념에 자유로움도 없었으며
표일한 기상도 없는데도 제목이 소요유라 차라리 허탈한 심정의 소설이다..
물론 다 끝마치진 않았지만 1부의 느낌만으로는 처음엔 잘나가다가 맺힌데가
풀리지도 않고 오히려 삼천포로 빠지는 잘못 갈아탄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느낌이 소설을 읽는 내내 들었다.
내용의 클라이막스는 모두 첫권에 집중되어있어서 1권을 읽고나선 2,3권은 읽
을 필요가 없는 소설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해 내었더라면 그럴듯한 내용이 되었을듯한데...
억지로 늘리는 모양이라서 그다지 재미롭지는 않았다.
이미 중요한 복선도 짐작할만한 수준이어서 새롭지도 않았으며 방중술로만 치
중해가는 2,3권의 이야기가 조금은 산만한 감이 있었다는 말이다..
처음에 등장하는 능자명(能自明), 고리타분한 덜떨어진 분위기의 도사였다가는
귀도를 만나고 나서 귀도에게 반말하는 그 순간부터는 어째,그전 까지의 주인공의
내음이 나지 않아서 혼란 스러웠다.
...작가가 설정을 바꾼것도 아닐진데 조금 쯤은 어색하였다..
방중술을 터득해가면서 처음에는 그런데로 묘사가 고아하여 재미있었는데 나
중에는 난잡하여 좀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능자명이 점점 사도에 빠져듦을 묘사한 것으로 애써 자위하려고 하였지만 집
중력을 떨어뜨리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 심하였다..
대개 재미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협을 손에 쥐면 밤을 새워서라도 보게되는데
나로선 이소설을 완독하는데에는 4일이라는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서두에 요몇일간을 소요유를 보았다고 하였던 것이다.
능자명(能自明).....작가가 주인공의 이름을 짓게 될 때는 아마 심사숙고 하
리라고 본다..설사 무의식중에 생각나는 대로 지었다고
하여도 결국에는 이름속에 그 주인공의 운명을 감지 할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일을 자명하게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일까..?
알순 없다...능자명은 노장사상을 익혔다.. 자신은 되도록 세상일에 말려들지
않고 소요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내면적으론 그렇지도 않은지 스스로
사건에 말려드는 인물유형이다.
자신이 원하였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여유가 있었지만 그런 능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수 있다.
모르겠다..2부에서는 과연 소요유란 제목에 걸맞는 행동이 엿보일지는...
지금은 신녀궁의 마지막 제자인 무운(巫雲)의 간계에 빠져서 신지가 흐려진
상태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공으로 인한 욕정의 문제지 신지하고는 상관이 없는 듯
하여 아리쏭하다..성격이 오락가락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황당하게 하는 점이
내가 보기엔 좀 되지만..뭐 이 정도야..음 그냥 읽고 넘어 갈수 있다고 보면
될듯도 싶다..^^
무운(巫雲).........무산 신녀궁의 마지막 제자..복수귀 원..
그녀의 원모심려함은 곳곳에서 조금씩 어설프게나마 드러
난다..자신을 헤친 원수를 갚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
이 담담하게 그려진다..뭐 그다지인 케릭터이다..주인공
의 무학이 방중술 계통이라면 이여인이 앞으로 나올 2부에는 조금 비중이 높
아지지 않을까 싶다..그래야 아주 재미 있을듯..아주 조금 밖에 드러내지 않
은 성격이며 무공이 의미심장한 면이 엿보여서 하는 말이다..
귀도(鬼刀).........낙산 영무곡의 살겁에서 혼자만 살아난..복수귀 투..
자신이 살던 영무곡을 불태운 복수를 하기 위하여 여인으
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무공만을 연마하면서 보
낸 철혈냉혈소녀..음 하지만 그러한 인물이 항상 그렇듯
성정이 순수하여 보기에 좋다..모 아님 도다..좋으면 좋
은 것이고 싫으면 그냥 모두가 싫은 것이다..날카로운 손
속 이상으로 단순무식한 여자다.. 그렇지만 방중술의 대
가로 성장해 나갈 듯한 기분이 드는 능자명의 여주인공으로서 제법 연구해볼
케릭터로 성장할듯하여 기대가 댄다..능자명 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대상감이
아닐른지..
2부는 단순하게 능자명의 무공에 천착하는 모습만 보고 싶다..그 속에 무운
의 노림수와 귀도의 황당함 체험이 포함되는게 좋은듯 하다..
1부에서 느끼는 지지부진함은 사실 짜증에 다름이 아니다..무극파에 얽힌 이
야기는 완전히 사족같은 느낌이다..지루함을 이끌어낸 무극파 따윈 과감하게
잘라 버리라고 작가에게 권하고 싶다..
제목이 소요유라서 하는 말이다..연연해 하질 말라는 말이다..
얽히는게 많음 진정한 소요를 이룰수 없는게 아닐른지..
1권이 흥미진진하였음에 비하여 왜 2,3권이 지지부진이었는지 연구해볼 가치
가 있다고 본다..쓸데없이 나타나는 복면인,,강시...솔직히 짜증이 난다..
능자명이 겪는 사건에 시간을 들이는게 더욱 나을 듯 하다..
몽환스런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던 1권이 그립기에 하는 말이다..
너무 비판 위주의 글이라서 조금쯤은 미안한 노릇이겠다..
***** 아래에 어느분께서 좌백님의 글이 너무 어렵게 서술이 되어 읽기가 상
그럽다고 하였는데 무협이라고 언제까지 단순무식과격형 서술만을 고집하려는
지 좀 그렇네요..어차피 대중문화의 주류에서도 변방으로 전락한 상태가 바로
작금 한국 무협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바로 단순무식과격형 서술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드시는지요..이즈음 신무협이 지향하는 무협이란 어차피 어느정도는
메니아성이 가미된 무협쪽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올바른 방향설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의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안된 이야기겠지만 이제는 독자층도 새롭
게 시작하여야만 하지요..구태의 답습이란 무협의 활성화란 측면에서는 그다
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안그래도 무협이 저질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
는 판국에 이제는 새로움을 추구해보는 것도 어쩌면 낮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
니다..한없이 파고들면 한없이 깊어 질수 있는게 바로 무협이라는 장르입니
다.
작가분들이 내고 있는 요즘 무협을 가만히 들여다 보시기를..조금쯤은
파고드는 여지가 보이지 않는지 말입니다..
독자분들도 언제까지 시간때우기용 단순일회성 글만을 찾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쉬운 무협,,단순한 무협,,말초자극적인 무협만을 찾고 있으
면서 ..거봐..무협은 쓰레기 잖아!! 내가 뭐라구 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지요..
좌백님께서는 혈기린외전을 쓰면서 그렇게 서문에 말을 하였지요,,,
지금까지의 무협보다는 조금쯤은 다른 무협을 쓰고 싶어서 쓴 글이 바로 혈기
린외전이라고 말입니다..조금쯤은 깊게 파고 들고, 조금쯤은 세심한 강호를
그려보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생각되어 집니다..좌백님의 새로운 시도는 한무
전반에 걸쳐서 이제 새롭게 정성을 드린 글쓰기로 방향을 잡아 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되어 지기에 언급하는 것입니다..
해서리..근래 나온 무협의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시기를 바라면서
아랫분에게 참고 삼아 말씀 드립니다..
------------------
호된 꾸지람을 달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적는 글월입니다..
조금은 나은 모습의 2부를 그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만간 전작인 잠룡기를 한번 읽어 보고나서 다시 시간이 허락된다면 감상평
을 올려 보기로 하지요..
소요유..이 한편으로는 고명윤님을 읽기에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읍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 고명윤님이 창작연재란에 올리신 파일이 있
으시다면 좀 보내 주셨음 합니다..신궁은 남아 있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작품은
보이지 않더군요..듣기론 더 있는 것도 같은디..
종합적으로 읽어보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7편 중의 제2편. 세상 모든 종류의 진위시비(眞僞是非)를 가리는 논쟁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잡론(雜論)을 한결같이 하나로 귀속시킴을 말하며, 이를 통해 장자 사상의 전모를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상(現象)은 모두 연관성을 지닌 하나의 전체(全體)이며,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도 진군(眞君:天地의 主宰者)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만물은 일체(一體)이며, 그 무차별 평등의 상태를 천균(天均)이라 하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생사(生死)도 하나이며 꿈과 현실의 구별도 없다. 이와 같은 망아(忘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수양의 극치라고 하였다.
내용출처 : http://www.daejin.or.kr/home/jhpark/jjang.htm
답변들
장자에 관하여...(퍼왔습니다.)
maginger (2003-05-07 10:53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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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사상
장자 철학의 중심문제
송의 척성원년(B.C 369)에 태어나서 송의 왕언 43년(B.C 286)에 죽었다고 가정하며, 이는 대체로 믿을 만하다. 대략 전국시대의 중기에 살았다고 한다.
사상가의 철학 체계에는 일정한 목적이 있고 사회 역사적인 일정한 원인이 있고 그가 해결하려고 하는 실재적인 문제와 이론적인 문제가 있다.
따라서 그 철학가가 해결하려고 하는 중심 문제나 주요 문제를 포착해야만 이 철학가의 사상 체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
노자 철학의 중심문제는 약소한 사회세력이 어떻게以柔克剛할 것인가 하는 문제고 동중서 철학의 주요문제는 秦왕조가 멸망한 교훈을 얻어서 농민 전쟁을 어떻게 방지하고 漢왕조의 장기적인 통치와 오랜 안보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장자 철학의 중심문제는 천성을 보존하고 몸을 보존하는 것(全生保身)이라고 말한다. 즉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중점을 둔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전생보신의 가장 좋은 형식이소요무위 이고 소요무위의 근본목적이 전생보신하는데 있다고 인식하였다.
장자 철학은 혼란한 사회의 산물로서 현실을 놓고 볼 때 철학이 대답이 주는 중심 문제는 난세에 어떻게 全生保身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객관 필연성 앞에서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장자가 安命無爲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을 피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자아도취를 하기 위한 덕이며 장자가 不知를 참된 지식으로 간주하고 만물을 한결같이 보도록 주장하는 것도 일체를 잊어 버리고 無河有之鄕에서 자득하기 위한 것이다.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장자 철학을 꿰뚫고 있는 주된 가닥이다.
만일 장자 철학이 최초로 제출한 문제는 어떻게 전생보신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장자의 가장 근본적인 회답은 곧 순 정신적인 자유를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또 장자 철학의 중심 문제란 어떻게 정신적인 자유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가 뚜렷하고도 선명하게 정신적인 자유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출할 것은 이론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리우샤오간님이 쓰시고 최진석님이 옮긴 소나무의 장자철학에서 발췌)
장자는 기원전 370년에서 280년 무럽 중국 宋나라에 살았던 인물이다. 전국 시대라는 말이 가리키듯 전쟁과 살육, 권모와 지략으로 뒤범벅되었던 혼란기였다. 또한 宋나라는 약소국인 탓으로 주변 강대국에게 쉴새 없이 유린당했으므로 인간 莊周에게 조국의 역사적 현실은 매우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자유하고 뒤죽박죽이었던 현실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장자의 근본 주제였다.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거나 피안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의 구속과 속박에 직면해 지금 여기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 더욱 절박한 과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현세주의자인 장주의 사상에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한 통찰과 직관적 예지가 종횡무진한 비유와 우화, 날카로운 풍자와 역설, 극적인 구성과 예술적 리듬을 통해 도처에서 번득이고 있다. 逍遙遊편은 상식과 관습에 매여 있는 일반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9만리를 단숨에 날아오르는 大鵬의 비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때 유는 모순과 다툼의 현실 속에서 자유롭게 노닌다는 뜻을 가진 용어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장자 33편 가운데 외편 15편과 잡편 11편보다는 내편 7편이 비록 후학이 손댄 곳이 있기는 하지만 장자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감산이 내편만 주석을 단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감산 지음 오진탁 옮김의 감산의 장자풀이에서 발췌)
제 1 편 소요유逍遙遊
1
북명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이다. 곤은 크기가 몇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에 달하
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을
연상시킨다. 붕은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
2
붕이 남쪽 바다로 옮아갈 때 파도는 삼천리나 솟구치고 붕새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위로
구만리까지 날아오르는데 6월의 바람을 타고 간다.
3
아지랑이와 먼지는 생물이 호흡으로 뿜어내는 것이다. 푸르른 하늘빛은 바로 하늘이 띠고
있는 빛깔일까? 아득하게 멀어서 끝이 없어 그런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다.
4
예컨대 물이 많이 고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는 법이다. 한 잔의 물을 움푹 패인
곳에 부으면 겨자씨를 배로 삼을 수는 있으나, 잔을 그곳에 띄우면 곧바로 바닥에 닿아
버린다. 물은 앝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붕과 같이 큰 새를 지탱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붕은 단번에 구만리를 솟구쳐 바람이 아래에 충분히 쌓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채 도중에 아무런 장애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5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날아도 박달나무나 느릅나무에 부딪힌다.게다가 종종 나무에도 이르지
못한 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지. 그런데 어찌하여 붕은 구만리나 솟구쳐 남쪽으로
가는 것일가?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끼 식사만 하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는 부르다. 백리길을 가려는 사람은
밤새도록 식량을 찧어야 하고, 천리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세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이 두벌레가 어찌 이를 알겠는가!
6
편협한 지혜는 탁트인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목숨은 긴 수명에 이르지 못한다. 어찌 이를
아는 가? 하루살이 버섯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 하루
살이와 쓰르라미가 바로 수명이 짧은 생명체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 살고 있었는데 5백년 동안을 봄, 5백년 동안을 가을로 삼고 살았다. 또
아주 오랜 옛날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다. 8천 년 동안을 봄, 8천 년 동안을 가을로 삼았다
한다. 그런데 팽조는 요즈음, 오래 산 인무로 특히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오래 살려고
발버둥친다.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7
궁발이 북쪽에 명해라는 바다가 있다. 그 곳에 물고기가 한 마리 있었는데 크기가 수천리에 달해
정확한 길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물고기 이름은 곤이다.거기에는 새가 한 마리 있었느데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은 태산과도 같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도 같아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구만리나 솟아오른다. 그름 위로 솟구쳐 푸른 하늘을 등에 진 연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이처럼 남명으로 날아가는 붕을 연못의 메추라기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놈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힘껏 날아올라도 몇길 지나지 않아 아래로 다시 떨어져
숙대밭 사이를 나는 것이 고작인데 저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다.
8
무릇 스스로 지닌 지식은 단 한가지 일에만 효험이 있고, 행동거지는 오직 한 마을에 유용하고,
재주는 겨우 한 왕의 눈에만 들 정도이고, 소신은 단지 한 나라에만 쓸모가 있다. 이런 인물은
소견머리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송영자는 이런 부류의 인물을 싱긋이 비웃었다.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더 애쓰는 일이
없고, 모두가 헐뜯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는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칭찬과 비난에
추호라도 흔들리지 않을 따름이다. 그는 세상일에 조금도 연연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여전히
근본이 수립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열자는 가뿐하게 바람을 타고 다니다가 15일이 지난 뒤에야 되돌아온다. 그는 복을 구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소 걸어다니는 번거로움은 면했으나 여전히 바람에 의지하고 있다.
만일 천지의 근본을 타고 육기를 부려 무궁한 경계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면 무엇에 의지하려 하겠는가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을 세우지 않으며,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
9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양도하려고 말했다.
"일월 광명 같은 선생께서 세상에 나오셨거늘 여전히 횃불을 끄지 않는다면 횃불은 너무 보잘것 없지
않습니까! 때에 맞게 비가 내리거늘 여전히 수고롭게 물을 대고 있다면 물을 끌어오는 일은 헛수고가
아닙니까! 선생께서 직접 나서면 천하는 저절로 다스려질 것입니다. 외람되게도 제가 여전히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제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허유가 말했다.
"임금께서 천하를 다스림에 이미 천하가 화평하거늘, 내게 그대 대신 왕위에 오르라 하니 왕이란 허명을
가지란 말이십니까? 이름이란 실상에서 비롯된는 손님이거늘 내 어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허명을
가지겠습니까? 뱁새가 깊은 숲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경우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자그마한 배를 채우면 충분하외다. 속히 돌아가 다시는 찾지 마십시오. 임금님! 내게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리사가 음식을 잘못하더라도 성직자가 제기를 놓아둔 채 대신 부엌을
갈 수는 업는 법입니다."
10
견오가 연숙에게 물었다.
"접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터무니없이 황당하고 나아 갈 줄만 알고 되돌아올 줄 모르더군.
그 이야기는 하늘나라 은하수같이 끝이 없어 나는 놀랐네. 세상일과는 크게 어긋나 상식과 맞지
않더군."
연숙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가?"
"막고야하는 산에 신인이 살고 있는데 그의 피부는 눈이나 얼음처럼 하얗고 처녀와도 같이
아름답더군. 그는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이나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용을 부려 사해
밖에서 노닌다는 게야. 그의 마음은 정에 들어 있어 만물을 병들지 않게 하고 해마다 곡식이
잘 익게 한다더군. 이렇게 허황되니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이지.
이에 연숙이 말했다.
"그럴게야. 장님은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없고, 귀머거리는 머거리가 있겠는가! 사람 마음에도
또한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다네. 마음이 귀머거리와 장님이란 이야기는 바로 자네를 일컫는
말일세. 그 신인은 자신의 덕으로 만믈을 화합시켜 하나로 만듦에 세상 사람이 다스려 주기를
바라지만, 무엇 때문에 초췌하게 천하 다스리는 일을 하겠는가! 이런 사람은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해칠 수 없다네. 큰 홍수가 나서 물이 하늘까지 이르더라도 그를 적실 수조차 없고
큰 가뭄이 들어 금속과 암석이 녹아내리고 산이 불탈 지경이라도 그는 뜨거운 줄도 모른다네.
신인은 먼지나 티끌 혹은 곡식의 빈 껍데기로도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천하 다스리는 일 따위를 하겠는가!
11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갓을 팔려고 월나라에 갔다. 하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장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요는 백성을 다스려 천하를 평정한 후에 신인 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막고야 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반수 근처 평양에 이르러 홀연히 천하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12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길래 이를 심었더니 나무의 열매가 다섯 석이나 될 정도로
크더군 물을 담는 그릇으로 쓰면 너무 무거워 쉽게 옮길 수 없고 쪼개어 바가지로 쓸 경우
납작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었네. 크기만 컸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부수어 버렸다네."
이에 장자가 말해다.
"자네는 참으로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 송나라 사람 가운데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네. 이 약을 손에 바르고 빨래하는 일을 대대로 하고 있었지. 어느 길손이
이 소문을 듣고 그 약 만드는 비방을 많은 돈을 주고 사려고 했네. 그러자 그는 가족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네. '우리가 대대로 빨래하는 일을 해왔으나 돈벌이가 변변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기술을 팔면 하루 아침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 이 기술을 팔기로 하자'
그래서 나그네는 비법을 얻게 되었지. 그는 오나라황에게 약의 효능을 설명했는데, 마침
월나라가 오나라를 침략하자 오나라 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다네. 마침 겨울에 수전을 하게
돼 월나라를 크게 물리쳤다네. 이에 오나라 왕은 그에게 땅을 주고 다스리게 했네. 손 안
트게 하는 약 하나로 어떤 사람은 벼슬을 얻게 되고 어떤 사람은 빨래하는 일을 면할 수
없었지. 동일한 약이지만 쓰는 용도가 달랐던 게야. 지금 자네에게 다섯 석이나 되는 커다란
박이 있는데 어째서 그것으로 큰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않고 납작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 걱정하는가! 자네는 꽉 막힌 사람이로군."
13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큰 마루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닥나무라고 부르더군. 그 큰 줄기는 울퉁불퉁해서
먹줄로 쓸 수 없고 작은 가지는 굽어서 잣대로 삼을 수 없다네. 나므를 길가에 놓아도 목수장이는
쳐다보지도 않더군. 이와 마찬가지로 자네의 말은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외면하는 걸세."
이에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살쾡이를 보지 못했는가. 몸을 낮추어 어슬렁거리는 짐승을 기다리지. 동으로 서로 날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덫에 치이거나 그믈에 걸려 죽지. 그런데 이우는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도 같은 거대한 소라네. 이우는 크기는 하지만 쥐 한마리 잡지 못한다네. 지금 자네는
큰 나무가 있어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데 어째서 '소유가 필요없는 고향'이나 '드넓은 들판'에
나무를 심어 그 주위를 자재하게 노닐기도 하고 평안하게 나무 아래 누우려 하지 않는가!
그 나무는 쓸모가 없어 도끼질 당하지도 않고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네. 아무 쓸모가 없으니
어찌 근심 걱정이 있겠는가!
제 2 편 제물론齊物論
1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육신이
해체되어 흡사 몸이라는 짝을 버린 듯했다.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육신을 마른 장작 같게 하고 마음을 참으로 불꺼진 재와 같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어 계신 모습은 예전의 그 모습과는 아주 다릅니다."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언아, 어리석구나, 그런 질문을 하다니! 지금 나는 나를 잊었는데 자네가 이를 알겠는가!"
2
남곽자기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자네는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게야. 설령 땅의 피리
소리는 들었더라도 하늘이 내는 피리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네."
3
안성자유가 말했다.
"세 가지 피리 소리가 나는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무릇 천지가 기운을 내뿜는데 이를 바람이라고 이름하네. 바람이 일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한번 불면 온갖 땅 위의 구멍들이 성난 듯이 소리를 내지. 자네도 큰 바람이 윙윙
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았겠지. 산림이 요동함에 백 이름이나 되는 커다란 나무 구멍은 흡사
사람의 코 같고 입 같고 귀같고 옥로 같고 바리때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기도 하다네. 바람이 불면 구멍들은 제각기 격렬하게 물 흐르는 듯한 소리, 화살이
나는 듯한 소리, 꾸짖는 것 같은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듯한 소리, 크게 부르짖는
듯한 소리, 낮게 부르는 것 같은 소리, 개가 가늘게 우는 듯한 소리, 개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지. 앞바람이 가볍게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바람은 보다더 무거운 소리를
낸다네. 바람이 살짝 불면 구멍들은 가볍게 응답하고, 바람이 사납게 불면 온갖 구멍들은
크게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구멍들은 고요해지지. 바람이 멈췄는데도 초목들이
여전히 요동하는 모습을 자네는 보지 못했는가?"
4
자유가 말했다.
"그렇다면 땅의 피리란 땅위에 있는 온갖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사람의 피리란 대나무의
그것이군요. 그런데 하늘의 피리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대답했다.
"하늘의 피리란 사람의 말이라네. 사람마다 하는 말이 각각 다르지만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네. 모두 스스로 얻은 소리인데 말소리를 내는 건 그 누구인가!"
5
커다란 지혜는 아주 한가롭지만, 자그마한 지식은 몹시 바쁘다. 훌륭한 말은 담백하고
맑으나 하찮은 말은 따지고 헤아린다. 잠들어서도 쉴새없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활동을
시작해 사물과 접촉하면서 나날이 서로 다툰다. 싸우는 사람 중에는 우유부단한 사람,
음흉한 사람, 치밀한 사람등 갖가지이다. 조금 두려운 일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크게 무서운 일에는 두렵지 않은 체한다. 그 말투는 화살을 쏘는 것같이 모질어 시비를
판결하는 재판관이라도 된 것 같다. 무언가를 감추는 경우 마치 목숨이라도 되는 듯
마음 속에 꼭 품어 어떻게 해서든지 고집으로 이기려 한다. 따라서 가을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과도 같이 그는 나날이 소진해 간다. 이런 인물은 자기 주장에 푹 빠져 다시는 참됨을
회복할 수 없으며 욕심에 억눌려 무언가에 꽉꽉 막히는데 늙을수록 더해진다. 이 같은
사람은 죽음에 이를지라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6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또한 걱정과 한탄을 하기고 하고 변덕을 부리거나 집착하기도 한다. 또 재앙을 당하기도
하고 교만을 부리기도 하며 솔직하기도 하고 꾸미기도 한다. 진정한 기쁨은 虛에서
나오지만 곰팡이느 습한 곳에서 생긴다. 아침과 저녁이 바뀌어도 왜 그런지 알지 못한다.
그만두자. 이제 그만두자. 아침과 저녁도 이를 얻어 생긴 것이다. 저것이 없으면 내 몸이
있을 수 없고,육신이 없으면 저것이 가탁할 곳이 없다. 이것을 얻으면 도에 가까우리라.
그렇지만 본래 그러하므로 따로 그 무엇이 부리는지는 모르겠다. 참된 자기가 있기는
있어도 다만 그 조짐은 알수가 없고, 참된 자기의 움직임은 일상에 있어 또렸하나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참된 자기는 실재하지만 형체가 없을 뿐이다.
7
100개가 넘는 뼈, 9개의 구멍, 6가지 장기가 갖추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것을 나로
삼을까?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자기소 삼겠는가? 그러면 자기가 여럿이 되므로 하나인 몸에
여러 사람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주인은 없고 신하와 첩만 있는 것일까? 신하와 첩은
다투기만 할 뿐 서로 다스릴 수 없다. 교대로 왕이 되기도 하고 신하가 되기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참된 왕은 존재한다. 구했다고 늘지도 않고 구하지 못했다고 줄지도
않은 채 참된 주인은 의연히 존재한다.
8
일단 몸을 받았으므로 잠시라도 이 육신에서 떠날 수 없으니 다 할 날을 기다리자. 사물과
서로 다투어 삶이 말을 달리듯 순식간에 지나가도 싸움을 그치지 않으므로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평생토록 애를 쓰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피로에 지쳐도 돌아갈
안식처가 없으므로 애달프지 아니한가! 세상 사람들은 이를 아직 살아 있다고 좋아하지만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겉모습이 늙어감에 따라 그 마음도 함께 찌들어 가므로 매우 가엾지 아니한가. 인간의
삶이란 이다지도 무지 몽매한 것일까! 아니면 나만 혼자 어리석고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은 것일까!
9
본래 지니고 있는 참마음을 좇아 스승으로 섬긴다면 그 누가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육신이
거짓 자기임을 알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얻은 사람에게만 스승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에게도 똑같이 있는 법이다.
자기 참마음을 얻지 못하고 시비 다툼을 벌이면, 이는 오늘 월나라로 떠나면서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처럼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이것은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을 있다고 억지로
우기는 처사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는 자는 성왕인 우왕이라 하더라도 어찌
알아 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내가 어찌 알아 줄 수 있겠는가!
10
무릇 말이란 무심하게 불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機心에서 나오므로 말한 내용은
아직 옳은지 그른지 정해져 있지 않다. 과연 말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사람의
말은 새끼 새의 울음 소리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시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11
도는 왜 가리어져 참과 거짓이 발생하게 되고 참된 말은 어디에 가리어져 시비 다툼이 생기는
것일까? 도는 어디 가서 오지 않고 참된 말은 어디에 있기에 시비 논란이 있는 것일까?
도는 자그마한 분별 지식에 가려지고 참된 말은 허황된 말에 가려진다. 따라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이 벌어져 상대가 주장하는 바를 비판하고 한쪽이 거부하는 것을 굳이 긍정한다.
상대가 틀리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한쪽이 옳다고 하는 것을 틀리다고 함은 대도에
밝음만 같지 못하다.
12
사물을 저것 아니 것이 없으며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저것으로부터 보면 자기의 허물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면 모두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비롯되고 이것은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 것이다.
13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하지만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이 있는 것이다. 옳음이 있으므로 옳지 않음이 있으므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옳음에 연유
해서 틀림이 있고 틀림을 근거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상대적인 시시비비를
떠나 홀로 도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긍정이다.
14
이것이 또한 저것이며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에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의 대립이 그치는 것을 도추道樞하고 일컫는다. 도추라야 비로서 환중環中을 얻어
무궁한 변화를 제어할 수 있다. 옳음도 하나의 무궁한 변화이고 틀림도 또한 하나의 무궁한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大道에 밝음만 같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15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저 말馬을 가지고 나의 말이 저 말이 아니라고 가리키는 것은 나의 말을 가지고 저 말이 나의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에 불과하고 만물도 하나의 말일 따름이다.
16
옳으니까 옳은 것이고 옳지 않으니까 옳지 않은 것이다. 도에 따라 행함에 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부르자 그렇게 된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으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물은 참으로 본래 그런 바가 있으며 사물마다 원래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 어떤 사물이건 본래
그런 바가 없지 않으며 어느 것이라도 옳지 않음이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예를 들면 커다란 대들보와 자그마한 집기둥, 문둥이와 서시라는 미인, 그리고 허풍쟁이나
사기꾼이나 궤변가 혹은 괴이한 것을 말하는 사람, 모두 道 가운데에서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
파괴는 곧 완성이며 완성은 곧 파괴이다.
하지만 만물은 본래 완성도 파괴도 없이 다 함께 하나이다.
17
오직 도에 능통한 사람이라야 만물과 하나됨을 알아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일반 사람에게
맡겨 둔다. 일반인에 맡긴다함은 그들의 좋아함과 싫어함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 따르면 일반인의 뜻에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얻는 바가 있게 되어 도에
가까워지리라.
그는 그대로 맡길 뿐으로 이미 그러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는 것을 道라고 일컫는다.
18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하나가 되려 해도 끝내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다.
이를 朝三이라 일컫는다. 朝三이란 무엇인가?
원숭이 사육사가 상수리를 원숭이에게 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벌컥 화를 냈으므로 사육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
이에 원숭이들이 한결같이 기뻐했다.
명실名實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기쁨과 노여움이 교차됐다. 또한 그대로 맡겨야 할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켜 "자연의 평등"에서 쉬게 하는데 이를 양행兩行이라 일컫는다.
<양행이란 옳다고 해도 맞고 틀리다고 해도 맞다는 뜻 designtimesp=29721>.
19
옛사람은 지혜가 지극했다. 무엇을 지극하다고 하는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자리이므로 지극하고 극진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사물은 있으나 구분하지 않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사물이 구분은 되지만 아직
시시비비가 없는 경계이다. 그러나 시비 분별이 횡행함에 도가 가리어졌고 도가 가려지자
애욕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완성과 파괴가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20
완성과 파괴가 있는 것은 옛날 소씨소씨가 거문고를 연주했기 때문이다. 완성과 파괴가 없는
것은 소씨의 거문고 연주 이전이기 때문이다. 소씨가 거문고를 탄 행위, 사광이 북채로 박자를
짚었던 일, 혜자가 책상에 기댄 채 변론한 행위, 이 세 사람의 재주는 극치에 다다랐다.
따라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 일에 종사했으나, 이 세 사람의 좋아하는 바가 세상 사람들과
달라 자신들이 즐기는 바로써 사람들을 계몽하려 했다.
혜자의 경우 자신도 진리에 밝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했으므로 견백론견백론이란 어리석은
궤변으로 시종한 것이다. 소씨의 경우도 아들로서 아버지의 손재주만 흉내냈을 뿐이므로 평생
동안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다.
이를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성공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은 성공
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만물과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으리라. 따라서
자신의 빛을 감추는 일은 바로 성인이 도모하는 바이다. 성인은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대신
세상 사람들의 소견에 맡겨 둔다. 이를 본래의 밝음에 따른다고 일컫는다.
21
가령 여기에 한 변론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성인과 한 분류인가? 아니면 다른 분류에
속하는가? 같은 부류이든 아니든간에 그가 성인의 마음에 부합하면 그는 성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22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한번 말해 보기로 하자. 처음이 있고, 처음이 아직 태동하지 않은
때가 있고, 처음이 아지기 태동하지 않은 때마저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있다.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도 태동되지 않음이 있다. 그런데 홀연히 있음과 없음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
혹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나는 이미 말을
하였으나 나의 말이 과연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모르겠다.
23
천하에 가을날 짐승털의 끝보다 큰 것은 없고 태산도 털 끝보다 작다. 일찍 죽은 갓난아이보다
장수한 이는 없고 팽조도 요절한 셈이다.
천지도 나와 함께 생긴 것이고, 만물도 나와 더불어 하나를 이룬다. 이미 하나가 되었는데
이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미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했을진대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이는 또한 말이 아니겠는가.
하나의 말이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렇게 나아가면 유능한 계산기라도 헤아릴 수
없거늘 어찌 일반 사람이 셈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無에서 有로 나아가는 셋이 되는데 有에서 有로 진행하는 경우에 있어서랴! 상대적
세계로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맡길 따름이다.
24
무릇 도는 한계가 없는 것이고 말에는 정해진 내용이 없는 것이다.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
다툼이 생기는 법이다. 한 번 대해 논쟁에 이야기해 보자.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이 있고,
倫이 있으면 義가 있고, 분별이 있으면 변론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경쟁이 있다.
이를 八德이라 일컫는다.
25
성인은 육합바깥을 그대로 놓아둘 뿐 말하지 않고, 육합 안에 대해서도 대강만 말할 뿐
자세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춘추]경전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선왕의 뜻이었으나,
성인은 이에 대해 명분과 품절만 밝힐 뿐 시비 곡절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눌 경우 나눌 수 없는게 있고 분별하더라도 분별할 수 없는게 있다. 왜 그럴까?
성인은 만유를 품어 주지만 세상 사람들은 분별함으로써 자기 소견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론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6
무릇 大道는 헤아릴 수 없고, 참된 변론은 말하지 않고, 지극한 인은 어질지 않고, 참다운
청렴은 가득 차지 않고, 진정한 용기는 해를 입히지 않는다.
도를 말로 분명하게 드러내면 도가 아니고, 말이 시비 다툼에 쓰이면 도에 미치지 못하게 되며
仁이 어딘가에 고착되면 아무것도 아루지 못하고, 청렴해 맑기만 하면 미덥지 못하고, 청렴해
맑기만 하면 미덥지 못하고, 남을 해치는 용기는 참되지 못하다. 이 다섯 가지는 원래 참된
實德이었으나 점차 한쪽에 치우쳐 모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데에 그칠 줄 알면 지극한 것이다. 어느 누가 말없는 변론과도 아닌
도를 아는가! 만일 이를 알면 天府라 이름하리라. 아무리 물을 거기에 퍼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마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보광이라 일컫는다.
27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다.
"나는 종, 회, 서오 세 나라를 정벌하려 하네. 그러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확연하지 않으니 왜 그런 것일까?"
순이 말했다.
"세 나라는 아직 쑥풀이 무성한 미개한 부족 국가입니다.
마음이 꺼림칙한 것은 어쩐 일이십니까? 옛적에 10개의 태양이 일시에 만물을 샅샅이 비춘
일이 있습니다. 하물며 마음의 덕이 태양보다 밝다면 무슨 꺼리낌이 있겠습니까?"
28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만물이 하나임을 아십니까?"
"내가 어찌 알겠나."
"선생님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아는 게 없으십니까?"
"어허, 어찌 알겠나.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디 한번 말해 보기로 하지.
안다고 하는 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또한 내가 모른다는 것이 아는 게 아닌 줄은 어떻게 알겠나!
이제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을 경우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무서워하던가?
셋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건가? 사람은 초식 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읕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즐겨 먹지. 넷 가운데 어느 누가 올바를
맛을 아는 것일까? 원숭이는 편저를 짝으로 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함께 놀지. 모장과 여희는 세상 사람들이 미녀라고 칭송하지만, 그들을 보면
물고기는 물속 깊이 달아나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과 사슴은 결사적으로 달아나지.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미인을 아는 것일까? 내가 보건대 사람들이 인의仁義와 시비를 어지럽게
주장하는데 나라고 어찌 그것들을 가려낼 수 있겠나!
설결이 물었다.
"선생님은 이해利害를 모르시는데 至人은 참으로 이해를 모르는 것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至人은 심묘한 사람이라네. 커다란 연못을 다 태워도 그를 태울 수는 없으며, 黃河와 漢水를
꽁꽁얼려도 그를 얼릴 수는 없다네. 사나운 우뢰가 산을 부수고 태풍이 파도를 몰아쳐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지. 이런 인물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부리면서 四海바깥에서 노닌다네.
생사로도 그를 움직일 수 없거늘 어찌 이해 따위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29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제가 공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인은 세상일을 좇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지도
해로움을 피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도를 따르지도 않고 말은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말하고 말을 해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아 초연히 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고 합니다.
공자는 이를 맹랑한 소리하고 일소에 붙였으나 저는 묘도妙道를 체득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오자가 말했다.
"이는 황제가 들어도 믿지 않거늘 공구 따위가 어찌 이를 알겠는가! 자네도 지나치게 성급하네.
알을 보자마자 새벽 닭소리를 기다리고, 화살을 보자마자 올빼미 구이를 찾는 격이군. 이제
자네에게 헛소리를 할 터이니 자네도 그리 알고 망녕되게 듣는 게 어떻겠는가.
성인은 해와 달과 나란히하고, 우주를 손바닥에 든 채 두 입술을 합치듯 온갖 변화와 하나가
되고, 혼탁한 속세를 그대로 놓아 버려 노예 상태로 서로 멸시하거나 존대하게 되지.
모든 사람들이 부림을 당해 외물에 얽매이게 되지. 성인만이 홀로 어리석고 우둔한 듯해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천연天然의 천진天眞을 그대로 보전하지만 만물이 다하도록 사람들은
자기 주장에 집착해 시비 다툼만 늘어 가지. 삶을 좋아함이 미혹한 게 아닌지 내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이 어려서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감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나?
여희는 예라는 지방의 관리의 딸이었네. 진나라에서 강제로 끌고 갈 적에는 그녀는 눈물로
옷깃을 흠뻑 적셨지. 진나라 왕궁에 이르러 왕과 함께 화려한 생활을 하고 맛있는 고기 요리를
먹게 되자. 그녀는 눈물 흘린 일을 후회했다고 하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살기를 고대했던 것을 나중에 후회할지 내 어찌 알겠나!
꿈속에서 유쾌하게 술을 마신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울게 되고, 꿈 속에서 구슬프게 운
사람은 사냥놀이 갈 일이 생긴다네. 한창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또한 꿈을 이리저리 풀어 보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야 꿈인 줄 알지. 우리네 삶은 이와
같아서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삶이 한바탕 꿈 속인 줄 알게 되지.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처하여 짐짓 아는 체하면서, 왕입네, 재상입네 과시하려 들지. 참으로
어리석구나, 공자여! 자네도 또한 꿈구고 있는 사람이네. 자네더러 꿈꾼다고 지적하는 나의
말도 또한 꿈 속의 헛소리라네. 이런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기는 하지만, 오랜 뒤에라도
성인이 한번 출현해 이 말의 의미를 알아 준다면 이는 아침 저녁으로 만난 것돠 다름없겠네.
30
"내가 자네와 논쟁한다고 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지면, 진정 자네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내게 지면, 정녕 나는 옳고 자네는 그른 것일까?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린 것은 아닐까?
나도 자네도 어떤지 알 수 없네.
그런데 사람마다 어둠속에 갇혀 있으므로 누구에게 물어 볼 수 있겠는가!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보면, 이미 자네와 같은 생각이므로 어찌 바르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소견이 같은 사람에게 물어 볼 경우, 벌써 나와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으므로 어떻게 시비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나와도 자네와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조회하면, 이미 두 사람
모두와 의견이 다르므로 어떻게 바르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와도 자네와도 입장이 같은
사람에게 조회할 경우,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으므로 어떻게 시비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도 자네도 또 어느 누구도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는데, 그 누구를 기다려야만 할까?
그러면 천연한 大道로 조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이 답하겠네.
옳다는 주장이 있으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따르고, 그렇다는 입장이 있으면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생기지. 만일 옳다는 주장이 참으로 옳다면, 옳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과 다르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네. 그렇다는 입장이 실제로 그렇다면 그렇다는 입장이 그렇지 않다는
입장과 다르다고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네. 빈 골짜기의 메아리 소리는 서로 기다리지.
만일 서로 기다리지 않으면 천연 대도로 조화시켜야 하네. 온갖 변화에 道로서 응하는 것이
바로 천수를 다하는 방법이라네. 나이도 義도 잊은 채 무궁한 경지에서 노닐게 되어 다함없는
경계에 깃들게 되는 것이지.
31
바깥 그림자의 그림자가 안쪽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 그대는 걷더니 이제는 멈추고,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일어나는구나.
왜 그리도 지조가 없는 게야!"
안쪽 그림자가 대답했다.
"의지하는 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또한 내가 의지하는 것도 기대는게 있어서 그러네.
혹시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째서 그런 줄 알며
왜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언젠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인간 장주인지도 몰랐지.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분명히 누워 있는게 장주였다네. 그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그가 된 것인지 몰랐다네. 장주와 나비는 틀림없이 다른
존재일 것이므로 이를 물화物化라고 일컫는다네."
참조싸이트
http://members.tripod.lycos.co.kr/jsoul/index1.html
(출처 : '장자에 관해서 질문'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