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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5일 [연중 제30주일]
복음: 마태오 22,34-40
우리는 끊임없이 해고한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목적지입니다.
사랑하면 그러니 모든 율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지식이 결국은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지식의 목적은 행복이고 영원한 삶인데, 사랑을 위한 지식이 아닌 것들은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게 만들어 지식의 허세라는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겸손과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배워서는 안 됩니다.
교만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마치 히틀러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경쟁하여 남을 이기는 목적이 된다면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은 그 배운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은 분명 경쟁이 아니라 공생입니다. 나를 죽게 하여 타인을 살리는 삶입니다.
이 방향이 틀어지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는 해고 대행 회사의 베테랑 직원인 ‘라이언 빙햄’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전국의 사람들을 만나 회사 대신 해고통보를 해주는 일을 하며 1년 365일 중 322일을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런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아메리칸 에어라인(AA)에서 천만 마일리지를 모아 7번째이자 최연소로 플래티넘 카드를 발급받고 기장에게 인사받는 것입니다.
그는 해고통보를 하는 일과 별개로 강의도 하는데, 그의 강의 주제는 ‘당신의 배낭에는 무엇이 있습니까?’입니다.
배낭에 넣는 물건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부담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의 장점을 피력합니다.
라이언은 결혼도 안 하며 어떠한 관계에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출장을 가서 바에 들른 어느 날, 자신처럼 출장을 다니는 아름다운 여인 ‘알렉스’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의 출장 일정을 맞춰보고 일치할 때마다 만납니다.
그러나 그냥 가벼운 관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언의 회사에 ‘나탈리’라는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패기 넘치는 신입인 그녀는
회사에 출장비용을 감축시키기 위해 비디오 회의를 건의합니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멀쩡히 다니던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직접 출장을 가서 면대면으로 전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화면으로 해고를 한다는 것은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마일리지를 거의 다 모아가는데 플래티넘 카드를 못 받을까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라이언에게 그럼 나탈리를 데리고 출장을 가서, 직접 만나서 해고하는 일의 장점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라이언은 혹이 달리는 게 너무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떠납니다.
나탈리는 선배인 라이언이 하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직접 해 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화를 내고 자살을 하겠다는 등의 다양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탈리는 감성적이고 어쩌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탈리는 자살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를 건성으로 만나며 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해고의 달인인 선배 라이언에게 자기만 아는 아이 같다고 한바탕 퍼붓습니다.
라이언은 나탈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가끔 만나던 알렉스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자기가 해고하기 직전의 마음으로 만났듯, 그녀도 라이언을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라이언은 관계의 짐을 지려고 하다 알렉스에게 차이는 마음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때 천만 마일리지에 도달해 기장으로부터 플래티넘 카드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쁘지 않으냐고, 집이 어디냐고 묻는 기장의 말에 라이언은 “여기입니다!”(up to the air)라고 말합니다.
평생 자신이 쫓았던 목적을 달성했어도 한 명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당한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중누각을 지으며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별거 아니었던 한 사람과의 헤어짐이 자신의 감정에 이렇게 큰 울림을 준다면, 가족과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얼마나 큰 행복을 줄까?
그는 마음을 바꾸어 그동안 해왔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강의를 때려치웁니다.
그리고 해고 통지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그런 회사를 떠나버린 나탈리를 위해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도록 정성껏 추천서를 써줍니다.
또 돈이 없어서 신혼여행의 꿈은 꿀 수도 없는 자신의 매형이 될 사람과 누이를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섭니다.
해고 통지를 하던 삶에서 고용하는 삶으로의 전환.
이제 라이언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입니다.
땅으로 조금씩 내려오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5년 이상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어쩌면 끊임없이 사람을 해고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관계가 전부입니다.
늦더라도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 진리를 모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지식을 머리에 넣습니다.
그것은 공중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왠지 공허하고 하늘에 붕 떠 있어 정착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가지 맙시다.
주님은 플래티넘 카드를 들고 왔다고 칭찬해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들고 간 관계를 칭찬해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5일 [연중 제30주일]
마태오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힘겨운 날
오늘 오후 한 아이를 "큰집"에서 데려오는 차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마치도 길고도 깜깜한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느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아이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곳 저곳을 전전해서 그런지 아이는 자기표현이 뚜렷했습니다.
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한 아이는 자신의 지난 스토리를 스스럼없이 아주 소상하게 들려주었는데...
참으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아이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면서 진흙탕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를 건져줄 다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아이 홀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쳐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더라구요.
알아서 뭍으로 올라오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면,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은 헤어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하루였습니다.
힘겨운 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가지 하나 없이 홀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너무도 가엾어서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날, 이 세상에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계셔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랑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겨운 순간 함께 같이 길을 동행해주는 일, 깊은 좌절로 인해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통이 눈물 되어 흘러내릴 때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교육학 안에 참으로 중요하며 효과적인 도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친절한 사랑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친절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전략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친절한 사랑은 살레시오 정신 안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잘 대해준다든지 공감해준다든지 상냥하게 대하는 그 이상의 태도입니다.
친절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부족함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덕 중의 덕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한 알 썩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의 외적 표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인격 전체의 투신을 요구하는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친절한 사랑은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을 진정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복음적 삶의 방식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5일 [연중 제30주일]
오늘의 전례는 모든 인간의 삶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증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복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당신 계시의 새로운 면과 독창적인 면을 종합해주고 계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악의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라고 예수님을 떠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면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첫째 계명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는 것으로 품었던 의심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의심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신명기 표현을 들어 확언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그리고는 봉인을 하듯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하셨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거나 바꾸지 않으시고 오히려 강조하고 활력을 불어넣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 자신의 생활,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예수님의 대답의 의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재확인보다도 그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레위 19,18을 상기시키며 이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체계를 확인하면서도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두 계명 간의 보충적인 것에 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며, 인간 창조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창세 1,31). 둘째로, 강생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상’이 더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이제 신화(神化: Deificatio)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닮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바로 형제들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라고 역설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절) 는 말씀은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두 계명으로 모든 계시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합의 의무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더욱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현방법이었다. 1독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박애주의적’ 정신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부닥쳐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하시기”(탈출 22,26) 때문이다.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 만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 중심주의적’인 ‘박애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 형제들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이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7.39절).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가치관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물이나,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에 우리는 진정 이 두 계명을 ‘종합’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는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