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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31)】 ‘ ‘이 세상에 빛이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실까 "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31
‘이 세상에 빛이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실까
오늘은 「요한복음」12장 3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우리의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하는 말을 믿으려한 것 입니다.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마음을 가지고도 깨달아 돌이키지 못하며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요. 예수를 가리켜 한말입니다. 이 회원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있었으나 바리새파 사람들을 꺼려 고백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7-42)
이 구절은 이때까지 기다려 오던 것에 결말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것 때문에 기성 종교인들하고 자꾸 자꾸 충돌이 되가 충돌이 되가다 되가다가 마지막엔 죽은 사람을 살린 일까지 있었건만 그것으로 인해서 믿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문제가 더 악화 돼서 아주 예수를 죽이자하는데 결정적으로 되는 데까지 갔다. 거기대한 결론으로 하는 말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습니다.’ 하는 말은 이 위에 있던 35절 36절을 다시 읽어 보아야 그 연락이 되요.
예수에서 그들에게 대답해서 하셨습니다. 아직 얼마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다니고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도록 하라. 어둠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라.(요한복음 12;35-36)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대는 아주 어려웠던 시댑니다. 거의 현실적으로 볼 때에 소망이 없던 시대,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 우리도 그런 의미에서 인제 이점을 우리 자신에다 비추어서 생각할 필요도 있고 또 그럭하므로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까지는 내가 이 세상에 빛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실까? 그저 그걸 이렇게 쉽게 교리적으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계신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그랬지. 그렇게만 말하고 지내갈 것 그보다는 좀 더 이렇게 도리어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이해를 하도록 힘을 써 볼 필요가 있어요. 게까지 아니 가더라도 우리도 우리에게 있어서도 어느 의미론 어느 시대에는 어느 한사람이라든지 어느 혹 한 단체의 사람이라든지 그 시대에 빛이 되는 일이 있어. 세상이란 반드시 다 밝은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많지만 그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할 바를 아는 거 아니에요.
그 중에 어떤 때 어느 한사람 혹은 몇 사람이 그 시대에 빛 노릇을 하는 시대에 양심이라 할까, 그래도 시대의 혼이라고 할까, 쉽게 쓰는 말로 민족에 혼이라 민족의 양심이라고 그런 말을 합니다만 그러는 때가 있어요. 예수님의 경우만 특별한 걸로 그렇게 생각을 말고 일반 역사 위에 더듬어보면 역사 위에 그런 실례가 수두룩하게 있어. 물론 예수님같이 그런 정도로 뭐 퍽 거긴 높은 정도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까진 못되더라도 그런 걸 우리도 봐요.
자기는 예수님 말씀대로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걸 난 안다. 그래서 빛이라고 그래. 너희는 살긴 살지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질 모른다. 너 생각에 너가 아브라함에게서 났다고 그러고 또 이제 이 앞으로도 역사가 있을 거라고 그러지만 그게 아는 것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니 한다고 너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거 아니다. 이제 쉽게 말하면 역사 인생에 참 뜻을 몰라. 정신적으로 깊은 이해에 이르질 못했어.
그러니까 정말 역사를 안다고 해도 정말 진짜는 어디서 왔는 질 몰라. 4천 년여 전에 단군이라는 이가 나라를 세웠다. 그런다고 우리 민족의 기원을 아는 말이냐 하면, 제법 아는 말인 것 같지만 모르는 말이야. 또 이 나라의 장래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니까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겠지요 한다든지, 그런다고 이 앞으로 갈 것을 아는 말이라 할 수가 없어. 밝다는 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걸 알아야 하겠는데 이 사람들이 이런 걸 몰라. 좀 요샛말로 하면 인생역사에 온 길, 갈 길을 몰라. 의미를 몰라 그런데 자기는 자기 속으로 환하게 그런 것이 환하게 밝은 지경에 있어. 그거는 자기가 안다기보다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는 아신다.
그런 의미에서 빛이 얼마동안 아직 있을 거다. 그건 자기가 오래있지 않을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걸 아니까 얼마동안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다니고 어두움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 걸어라. 그래 그게 대단히 중요해. 이제 저 사람이 이 시대에 빛인데 저 사람이 하는 말과 하는 행동을 봐서만 인생의 사는 그 까닭이 뭔지 또 앞으로 인생의 가는 길이 뭔지 이 인류의 역사에 유래가 어디 있으며 그 앞에 방향이 어디 놓여 있는지가 그 사람을 봐서만 알 수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만 아니라 뭐 사는 것만 봐서라도 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 못 있을 거다.
말이 속에 들어가려면 기다려야 돼
이 세상에 얼마 안 있다. 그러니까 너가 그 있는 동안에 빛 가운데 다니도록 해라. 어두움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라. 빛을 믿어라. 믿으면 네 자신이 곧 그 빛이 아들이 돼. 곧 빛이 된다. 이제 그런 말씀을 했어. 이제 그 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런 것은 이제 이어 직접으로 이제 여 있는 35절, 36절 말만 아니지 죽 위에서 온 것을 다 말하자면 종합해 결론하는 심리로 그렇게 하신 거니까 이때까지 그런 말도 하고 기적도 행하시고 그러시고는 그런 말을 하신 후에는 “그들을 떠나서 몸을 숨기셨습니다.” 이건 왜 그러셨을까? 물론 늘 하는 말입니다만 뭐 죽는 것 무서워서 피한 건 아닐 거예요. 그것만은 우리가, 그럼 왜 그럴까? 말은 한다고 쉬지 않고 늘 계속해 말을 해야만 되는 것 아니에요. 사람은 말을 해야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확실히 한정이 있어. 또 그건 옳아요. 말을 하니까 사람이야.
저번에 저 얼마 전에 일본사람 무교회사람 다카하시라고 하는 사람이 낸 책에 그런 요새 일본문제 다루면서 「요한계시록」 얘기를 합니다만 정치와 종교에 관계있는 얘기를 하면서 정치와 종교 둘에 관계가 깊다. 정치가 결코 종교 무시하고는 해갈 수 없을 거다. 그런 이유의 하나는 정치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정말 참 권위는 종교로부터 오는 권위다. 그러니까 그게 한 가지. 그 다음에 한 가지로 말이 재미있는 게 종교에는 말씀이 있다. 말씀이 있어 있다고 하는 거. 그런 말 하는 것을 봤습니다만 뭐 종교라기 전에 사람이란 말을 가져. 말씀을 하는 말을 하는 말을 가진 혹은 사람이 곧 말, 사람이 곧 말이다 말씀이다. 그러면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말을 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가 다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뭔지 말을 아니하면 아니 돼. 그 사교술에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데 제일 그 중요한 것이 말을 하는 거, 말을 안 하고 있으면 한 집안에 식구도 식구끼리도 하루나 며칠 동안 말을 안 하면 점점 이상해가요.
그래서 그 말이란 건 그렇게 꼭 그 하는 말 내용이 달래질 안 해요. 욕을 하면서라도 서로 말을 해야 서로 이렇게 교통이 서로 통해지지, 입 꼭 닫고 있으면 왜 저러나 뭐 언짢은 거 있나. 뭐 저 때문에 마음이 점점 멀어지게 되요. 그러니까 사람 사귀는 데는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는 그래 그러고 난즉 그러고 사교술이 돼서 기술이 되서 사람 대하는 데는 어떻게 하면 그 화제를 끊지 않고 자꾸 새말을 끄집어내서 능히 잘하는 것이 그 사교하는 술이다. 이제 현대의 더구나 미국식의 그렇게 돼. 거긴 또 확실히 잘못된 데가 있어. 그래서는 그저 무슨 말을 끄집어내서 또 하고 자꾸 말을 하고 어쩐지 손님이 왔는데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대접을 잘 못하는 거지. 뭐라고 일부러라도 화제를 만들어서라도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그건 또 잘못이야. 그럴 것 없어요. 할 말이 없으면 그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만히 앉았어도 괜찮아요.
그러면 손님이 노해 가겠으면 가라고 그러지. 그래야 내가 손님이 손님 왔는데 그러다가 내가 가지나 않겠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겠어. 내가 그렇게 자유가 없어서야 내가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어떻게 남을 대하겠어. 뭐 모르고 있으면 할 일 가만 몇 시간이고 있지. 내속에 없는 말을 일부러 만들어서까지 할 건 없다. 그만큼 내 속에 참되게 그 뭐 자유라고 할까 확신이라고 할까. 근데 현대 사람은 그 점에 확실히 잘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말이 참 쓸데없는 말이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종교도 말 너무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퀘이커들이 될수록 말 적게 한다든지 예배를 침묵으로 한다고 하는 게 그런 의미로도 퍽 많이 좋아요. 좋은 점이 있어요. 어째 그런가 그러면 말을 한참 얼마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다가도 말하는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얼마동안 조용한 시간이 필요해요.
말이 속에 들어가려면 기다려야 돼. 화분에 물을 주면 물을 주고 얼마큼 있어야 물이 자자들지 체 자자먹기도 전에 자꾸 어서 부으면 물 다 헤져버리고 안 들어가고 말아요. 물이 자자먹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해요. 물도 그렇거든 말은 더구나 그래요. 말은 한 다음에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에 이해가 될라면 조금 이렇게 시간을 줘야 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또 퍼 붓고 또 퍼 붓고 자꾸 그렇게 하면 들은 건 많이 들은 것 같은데 결국은 아무것도 없어. 그런 잘못을 하는 중엔 나도 상당히 잘못을 많이 하는 사람일거예요.
말도 너무 많이 그럴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래도 나 자신도 잘못하는 일이지만 확실히 어느 때 가다간 말이 이제까지 한 말이 참일수록 이제까지 말한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한말일수록 얼마동안 끊을 필요가 있어. 예수님 그래서 종종 그런 시간이 있지 않아요. 후퇴를 해서 리트릿(retreat)이라 하는 종교에서 리트릿 퇴수라는 말을 씁니다만 물러가요. 물러가서 얼마동안은 말을 하지 말고 제자들이 전도하고 온 다음에야 얼마동안 좀 쉬라 말을 이렇게 하면 참 좋은 말을 해서도 속에 있는 것을 다 이렇게 그만 소모가 돼, 타 없어져버려. 이거 말하자면 우물에서 물을 다 박박 다 긁어 낸 모양으로, 사람치고는 그러지 않을 사람 없을 거예요. 하기야 아주 저 철철 흘러서 넘는 샘물에서 그저 또 떠내고 또 떠내고 그저 한이 없는 모양으로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사람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말을 하면 역시 뭐 이제 허탈감을 다 빠져요. 허탈감을 그러니까 다시 기운을 또 말을 하려면 얼마동안을 쉬어서 이 말이 생기도록 해야지 그런 걸 계속해서 말이야 또 자꾸 계속해서 말을 계속 해야지 이제까지 했는데 공백시간을 두면 저 사람들이 기운이 빠져버릴 거다 그래서 자꾸 자꾸 그건 한댔자 반복이지 반복하면 할수록 기운이 없어요. 그런데 이 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계속해서 요새 같은 더구나 그래요. 이렇게 데모하면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모래도 계속해. 데모를 해야지 그러면 식어버려 확실히 그래요 식어버리는 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면 자꾸 자꾸 그러면 그럴수록 그걸 가지고 버텨가는 그거 못 버텨. 가다가 보면 아무 때 가서도 밑천이 나오고 말지 밑바닥이 나오고 말아요. 안 나오는 재주가 없어 근데 말하는 나 자신도 듣는 사람으로도 말 들어가서 땅에 잦아먹는 모양으로 속에 그 사람의 속에 자기 말이 될라면 시간을 두고 이런 것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고 지금부터 이때까지 자기 말씀 다 거의 마지막 말이라고 하리만큼 빛이 이제 잠깐 동안 너에게 있을 거다.
빛이 너 가운데
“나 이제 조금 있다 죽는다.” 뭐 그렇게 직접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말이 “너가 나를 그만 안두고 죽일 거다” 그렇게 극단으로 하지 않아요. 요새 정치하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말할는지 몰라요. 그렇게 안하고 빛이 너 가운데 지금 있는데 얼마동안 안 될 거다. 빛이 없어진다. 제발 그 빛이 있는 동안에 그 빛 가운데 행하고 어두운 짓 하지마라. 그리고 빛을 믿어.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될 거다. 너 자신이 그러면 그다음에 어떻게 할 것을 알게 될 거다. 빛이 늘 있을 줄 없으니까 빛이 밖에 있는 한은 그걸 보고 따라가려면 안 돼.
그러니까 아무 때 가서도 빛의 아들이 돼야 그 빛을 제 자신이 빛이 되도록 빛이 속에서 나오도록 그래야 될 건데, 그러려면 말 듣기만 하면 되는 것 아냐. 말을 듣고 그 빛 가운데 걸어가기로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라 빛을 믿어야 돼. 빛을 믿어서 그 빛 너 그리스도가 예수가 겉에 있는 거 아니라 선생님이 겉에 있는 거 아니라 선생님이 네 속으로 들어가서 육신은 가버리고, 가버리더라도 네 속에 있도록 그러니까 빛의 아들 그게 빛의 아들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할 말 다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몸을 숨기셨다. 나타나질 않아. 그러면 사람들도 이때까지 들은 말을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숨어버렸다 하는 거는, 사실은 그 다음에 십자가에 돌아가는 것에 한발걸음 전이에요. 고걸 미리 연습을 하지, 졸업식 하겠는데 졸업식에 대한 연습 미리하고 그날 그다음에 나가서 식을 하는 모양으로 이제 정말 십자가를 지겠는데 그전에 난 오늘 아침에 이렇게 생각을 해봤어요. 이거 이 물러가서 어디 갔는지 모르게 숨어버리니까 “어 그 사람 요새 어디 갔나” 그렇게 일 많이 하고 뭐 이제 그 사람 어디 갔나, 생각이 좀 있는 사람 같으면 그때 되서 이제까지의 들은 말을 되새겨서 생각을 해 볼 거예요. 그래보라고요.
또 자기로서도 또 이제 현 십자가를 지려면 준비해야 돼. 준비 없이 되는 것 안 되니까. 그건 또 겟세마네동산 얘기가 나오면 잘 아는 겁니다만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떨까? 그래 물러가서 떠나서 몸을 숨기셨습니다. 그래도 찾았다는 말도 없어. 생각이 있다면 찾았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주 비통한 결론이에요. 이때까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만은 그렇게 많은 기적도 놀라운 다시 말해 죽은 사람 살리는 그런 기적까지도 행하셨건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주 참 비통한 말하자면 결론이에요. 믿지 않았다는. 그래 그러면 여기 기적을 그렇게 많이 행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거는 그건 좀더 생각을 해봐야 그거는 왜 그렇게 된 건가? 이제 그 아래 이제 설명이 있습니다만 또 왜 그건 무슨 뜻인가? 본래 기적을 구하는 심리가 그게 옳은 심리가 못돼요. 종교에 마음에 있는 사람일수록 기적을 구하는 마음이 많이 있지만 기적을 구하는 마음 그 자체가 본래 옳지 않은 마음이야.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말이야, 보여줄 거 선지자 요나의 기적 밖에 없다. 자기 자신의 이 일이 곧 기적이야 죽었다가 살아난 그것이 기적이 되는 그걸 말할 때도 있습니다마는 기적을 그러니까 놀라운 무슨 놀라운 일을 “아유 저게 보통사람이 아니지” 그러고 이제 그런걸 보고야 그를 믿으라고 하는 그런 심리. 우리는 하여간 믿을 라고 그러면 보통이 아닌 것이 있어야 믿지 보통인 것 보고는 믿지 않는다. 뭐 그런 심리가 거기 돼있지 않아요? 그럼 고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옳기도 옳아요. 보통거라면 말이야 여기도 다 있는 거라면 뭐 새삼스럽게 뭐 그 사람이 이상하다 그 사람이 우리의 선생이라 그럴 것 없지 않아.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능력이 우리보다 훨씬 앞섰다. 우리는 도저히 하지 못하는 그 능력이 힘이 그에게는 있다. 말하자면 쉽게 말하면 그런 거 있으니까 무리도 아니에요. 무슨 그런 능력 기적을 보고야 야 저 사람이 정말 참 지도자가 될 수 있다든지 선생이 될 수 있다든지 제법 그럴 듯한 거지만 그러나 그걸 가만히 분석을 해보면 그런 걸 보려는 그 심리 속에는 무슨 심리 들어있냐 그러면 내가 밑지지는 않으련다 그런 생각이 있어.
밑지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에 믿지 않는다
밑지지 않으려는 심리가 왜 것도 아닌 것 믿었다가 괜히 그까진 것 헛수고만 하려우 이왕이면 꼭 틀림없이 그런 것 믿지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그런 심리가 있는 한은 그건 끝까지 못 믿고 말아요. 이게 옳다고 하면서 인생이란 건 또 밑져서는 안돼요. 인생은 살아가는데 분명히 하나 생각할 건 세상없어도 밑져선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 하나 있어야 돼. 분명히 있어야 돼. 보통사람은 도리어 그 생각이 모라자서 안돼요.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떻고 말하자면 생명이 귀한 줄을 모른다 그 말이야. 이건 그런 것 아니에요. 나라 하는 건 나라는 것은 이건 보통이 아닌데,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복된 생명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특별한 그래 이건 한없이 말하자면 귀한 거예요.
그런데 이걸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고 이렇게 살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밑져서는 안 된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줄곧 그걸 가지고 어떻게든지 밑지지 않도록 해야 되. 내 뜻대로 됐으면야 문제없지. 대략 어느 학교 입학시험 쳤더니 대번에 아주 합격이 되었다. 아주 참 좋다. 그건 물론 알아. 하나 그럼 합격이 못된 경우엔 어떻게 하지. 못된 경우엔 아 낙심하고 말아. 그럭하면 안 돼. 못 돼서 못된 걸 어떻게 하나. 못 된걸 가지고 또 밑천을 삼도록 그렇게 해야. 그걸 밑천으로 해서라도 그걸 또 어떻게. 그럼 그게 사람들이 도박을 할 땐 그걸 알아요.
그래서 도박하는 놈이 마지막엔 가산을 다 없애고야 마는 거. 처음엔 십원 대고 했다가 잃으면 분해 또 십원 대고 또 십원 대고 열 번해보다가 분해 안 되면 백원 잃었다 어떻게든지 찾고야 만다. 그래 천원도 대고 만원도 대고 해서 있는 걸 다 들어대고 어떻게든지 내 찾고야 만다. 그래 노름으로 시작한 사람은 발목이 잡혀서 못 그만두는 거야. 그러다가보니 그 잃어버렸다는 것이 이때까지 밑천이 되니까 말이야 그거 내가 찾아내고야 말지야 찾아내지 않고야 그만 두냐? 그래 그러는데 사는 것의 그 본래가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생애에서는 밑져도 좋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요. 실패했으면 실패가 있을수록 실패대로 보내질 말고 실패를 어떻게 하면 그 다음에 얻는 것에 그 밑천으로 만들 수 있겠나 그런 태도가 반드시 취해야 돼. 그러니까 밑지고 그만두어선 안 돼.
싸움에 첫 번 싸움에 해서 져서도 졌으면 “그거 할 수 없지 뭐”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진 것을 어떻게든지 밑천으로 삼아서 그다음에 이기는 꼭 이기고야 마는 그 기회로 삼도록. 그래 싸움이라는 건 사실은 하면 늘 이기는 수 있소?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떤 때는 지고 그러지만은 늘 이긴다고 깊이를 알 수가 없어요. 정말 참 무사, 무의 정신을 아는 군인은 아는 사람은 어떤 때는 이길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질수도 있다.
그렇게 아는 게 그게 무사지 승패병가사불기(勝敗兵家 事不期)라고 옛날 사람들은 승패병가 이기고 지는 것은 이일을 반드시 깊이를 하지 않아. 꼭 이겨야 한다는 거 아니야, 그건 내가 할 거를 다 하면 되지 나할 거를 다한다면 이기는 수도 있고 지는 수도 있어. 그러나 질 때에 지고 그저 그만 두는 거 아니야, 이왕 졌으면 후퇴를 하는데, 후퇴를 할 때는 그 후퇴를 비겁하게 그저 죽을까봐 무서워 쫓겨 도망하는 거 아니라 요 다음번 싸움 할 때에 그 전략적인 땅으로 꼭 퇴격, 물러나야 돼요.
그렇게해서 그 다음 그러니까 지기는 졌지만, 싸움에는 패했지만 내가 마음이 져버려서는 못써. 속에는 그 싸울 뜻이 늘 계속해 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 후퇴하는 것을 전략적인 후퇴를 해야 돼. 제가 내가 쫓긴다면 따라올 거다. 저 자식이 따라오겠지만 말이야 나 따라오다가는 요 다음번에 기어이 네가 못 견디리라 하는 고런 지점으로 후퇴를 해 가야 돼. 이왕 후퇴를 해도 말이야. 그게 그 밑지지 않는 인생을 밑지지 않도록 하는 태도에요. 그건 모든 일에 다 그래요. 장사를 하다 밑져서도 그거고, 결혼을 했다가 실패를 할 때에도 그거고, 내 몸이 건강을 잃어서 약을 질 때에도 그거고, 그 손해다 그러면 그저 섭섭하게만 알고 그만두지 말고 어떻게든지 그걸 밑천으로 되살려 살려내도록 밑지지 않도록 하는 태도가 있어야 그게 필요한데. 그러나 또 한편은 그 밑지지 않으려 하는 그 심리 때문에 다른 점을 놓쳐버리는 점이 있어요. 웬고하니 그 밑지지 않자, 내가 어떻게든지 그 밑지지 않는다는 것과 이 밑지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은 같지를 않습니다.
그건 구별을 해서 생각해보면 알지만 어떻게든지 내가 밑져버리질 않는다. 그런 생각이 있으면 믿을 수가 없어. 믿질 못해요. 믿는다하는 때에는 그 믿음이 종교적인 믿음이라하는 그 배후에는 도박하는 것 같은 심리가 있어. 이거 이렇게 했다가 전부 다 잊어버릴는지 모른다. 잊어버릴는지 모르지만 건 됐다. 무슨 그 결정이 있지 않고는 못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다 하는데 하나님한테 웬통 아주, 몽땅 속아버릴는지 몰라, 속아 버릴는지 모르지만 나는 믿는다. 하나님을 테스트를 해보고, 테스트를 해보고. (녹음31, 3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