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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아주 무서운 악몽에 시달렸다.
나는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깊고 어두운 늪 속을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어
디선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소리에 집중을 해보았다. 그것은 분
명 낯익은 소리였다. 민구가 나를 부르는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바닥이 일렁거렸다. 비릿한 기운
이 물씬 풍겨왔다. 나는 피로 된 늪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칭얼거리는 민구의 울음소리가 내 신경을 온통 갉아댔다. 아무리 소리의 근원을 좇아 보아
도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미로 속을 헤매는 듯했다.
별안간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와 동시에 뭔가가 나의 발목을 덥석
물었다. 소스라치게 놀
라며 발목에 매달린 그것을 끌어 올려 보았다.
역겨운 피 냄새와 함께 딸려 올라온 그것은 잘려나간 민구의 목이었다. 나를 보자 민구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 모양이 되도록 구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는 듯한 울음이었다.
민구의 목을 품에 안고 계속 걸어가 보니 저 쪽에 민지와 아내의 잘린
목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두려움과 비통함에 전신이 허물어져 내리는 듯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어둠 속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놈이었다. 눈동자
가 하나 뿐인 그 괴물.
나는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어째서 나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냐고 광분했다. 하지만 정작 목소리가 새어 나오질 않았다. 숨통이 콱 막혀 버린 것 마냥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
대한 저주를 담아서 발악해 보았다.
그러나 놈은 하나 뿐인 큼직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을까?
나는 급히 방향을 틀어 어딘가로 달렸다. 달리다 보니 그곳은 어느 새
아버지의 별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중에 멈
춰서야만 했다.
아버지는 이미 죽어 있었다. 거실 샹들리에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목이
잘려 있었다. 배와 가
슴은 잔혹하게 해부되어 있었고 잘려나간 목은 탁자 위에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엄청난 살기가 느껴진 것은 그 때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2층으로 가는 계단, 그곳에 귀신이 버티고 있었다. 귀신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
다. 귀신은 계단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다가 내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눈치 채고는 기다렸다
는 듯 훌쩍 날아왔다.
그제 서야 나는 나를 향해 무섭게 돌진해 오는 그 귀신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눈알이 벌
겋게 뒤집힌 그것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임이 틀림없었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창밖에는 검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참담한 광경이었다.
-호러 스릴러-
<블랙 크리스마스 Black Christmas>
by 제이슨 친구^^ http://cafe.daum.net/suttlebus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아내와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엔 나 혼자 뿐이었고 이불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였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잠옷을 벗어 던지고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나는 지난밤의 악몽을 상기해보았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했던
꿈의 기억들이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뿌옇게만 보였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굉장히 끔찍했다는 느낌만 남아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와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어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게 눈
이 쌓여 있었다. 도저히 차로는 언덕을 내려 갈 수 없을 정도였다. 제설 차량 없이는 눈이
녹을 때까지 별장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거 눈이 너무 내려서 큰일이다."
소리 없이 아버지가 등뒤로 다가와 계셨다.
"아침에 이씨에게 연락했으니 제설차가 좀 있음 올게다."
"이씨 아저씨가 제설차도 가지고 있나요?"
"이렇게 폭설이 내릴 때를 대비해서 몇 해 전에 제설차 한 대를 구비해
두었단다."
"그래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이 언덕 주변에는 아버지의 별장 외에
도 몇 채의 별장이 더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분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별장들이라 이 곳
의 별장들을 총괄해서 관리하는 관리소가 언덕 바로 아래에 있었다.
이씨 아저씨도 그곳의
일원이었다.
"참, 아침에 경찰에도 연락을 했다."
"벌써요?"
"그래, 박반장이라고 나하고 친분이 있는 젊은이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나중에
이씨 제설차를 타고 함께 와 본다는 구나."
"네에~."
사실 경찰이 여기까지 직접 온다고 한들 달리 뾰족한 활로가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경찰
한 명이 산과 마을 전체를 다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기에 앞서 어젯밤 정영혜가
목격했다는 그 자가 정말로 미치광이 살인범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궁여지책
으로 형식적인 심리만 있을 뿐 그것이 우리들을 살인마에 대한 모호한 압박감으로부터 벗어
나게 해 줄 수는 없을 테다.
아침 식사는 칠면조 구이였다. 은주의 요리 솜씨는 뛰어났다. 이런 서양식 식단에 익숙하지
못한 나였지만 은주가 만든 칠면조 구이는 정말로 맛있었다. 구운 칠면조 두 마리가 금새
사라졌다. 민구와 민지는 식사 내내 자신들에게 전혀 낯선 인물인 정영혜를 호기심 어린 눈
빛으로 바라보았다. 정영혜는 낯선 식탁의 분위기에 적응을 못해서인지 아니면 나처럼 서양
식 식단이 기호에 맞지 않아서인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은주는
식사 후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내놓았다.
아침 식사 후 나는 별장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별장을 방문한 횟
수는 꽤 되었지만 별장 주변을 돌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올 때마다 별장 밖
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보니 아버지의 별장과 비슷한 외관을 지닌 다른
별장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언뜻 봐서도 10채 정도는 되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람이
살고 있질 않는 듯했
다. 그러한 별장들은 돈 많은 사람들은 목 좋고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지어 두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일정기간동안 임대하기 위해 지어진 것들 같았다.
그런 용도로 지어지는
별장들이 전국 곳곳에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멋지고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그 속이 모두 텅 비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모두가 생
기를 잃은 죽은 집들 같았다.
그런 크고 작은 별장들 속에서 마침내 문제의 검은 3층 양옥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바로
어젯밤 민구와 나를 극심한 긴장상태로 몰아갔던 그곳.
나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3층 양옥은 아버지의 별장과 직선 거리로 계산해본다면 과연
12~3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출입문까지는 길게 난 담벼락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야만 했다. 눈이 무릎까
지 쌓인 상태라 출입문까지 가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20분도 훨씬
넘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훌륭한 집이었다.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별
장에 비해 더 크고 웅장했다. 밝은 낮에 보는 것이라 그런지 어젯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
랐다. 으스스한 불길함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지난밤에 그토록 혼자 두려움에 떨어
야 했던지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대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굳게 관건 되어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다. 어젯밤 나의 비정상적인 관념들이 스스로 과대한 불안과 공포를 자아냈다지만, 붉은 창가에서 나를
노려보던 그 기형 인물에 대한 기억만은 분명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만은 정상적인
사고 회로 속에서 뚜렷한 객체로 남아있었다. 그것마저 거짓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나의 존
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집 주변을 천천히 배회하며 집안에서 새어 나올 작은 인기척이라도
감지하고자 했다. 그러
는 사이에도 함박눈은 소리 없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추위 때문에
귀가 얼 지경이었지만
나는 조금 더 관찰해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생각하고자 마음먹었다. 이 집에는 분명 누군가
살고 있다. 그는 얼굴이
흉측한 기형 인간이다. 선천적 기형인지 후천적 기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이
곳에서 사회와 단절되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도
외모에서 느껴지는 콤플렉스가 주원인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인들에 대한 맹목적인 공
격성이 강박관념처럼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여기까지 추론해 보니 어째서 어젯밤 그가 나와 민구에게
알 수 없는 적대감을 보
였는지에 대한 답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추리에 만족해하며 느긋하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제 멋대로 헝클
어져 있던 사고의 끈이 정상적으로 풀리는 기분이 들어 머리가 한결
가벼웠다.
바로 그 때, 3층 창가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나는 불을 붙이기 위해 끄집어내었
던 라이터를 다시 집어넣고 눈에 힘을 주었다.
3층 창가에 커튼의 일렁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담벼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3층 창문만을 예의 주시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나의
머리 위로 금새 수북히 쌓였다. 시원한 느낌이 뇌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나는 끈기 있게 기다리며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
도 나타나지 않았다. 집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10분 정도를 더 지켜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인기척도 발견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추위 때
문에 버텨볼 재간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 개비에 불을 붙이며 아버
지의 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놈은 나를 지켜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채 나의 행동 모두
를 차분히 관찰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쨌거
나 그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 그가 설사 기형아든 사회 부적응자
든 그런 것 따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 생각하면 되
는 것이다. 쓸데없이 상상력을 복잡하게 부풀려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와 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임을 간과하지 말자, 라고 결론 지으며 나는 그 문제의 검
은 3층 양옥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아버지의 별장에 도착하니 제설 차량이 와 있었다. 이씨는 부지런히
제설 차량을 움직이며 별장 주변 도로를 청소하고 있었다. 제설차의
소음 때문에 이씨는 내가 다가가는 것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차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쌓인 눈들을 조금씩 쓸어내고 있었다.
거실에는 향긋한 커피 내음으로 가득했다. 박반장으로 보이는 자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아버지와 아내를 상대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형식적인 심리는 벌써 끝난 듯했다. 박반장
은 은주가 내오는 쿠키와 과일들을 먹어대며 오래도록 눌러 앉을 기세였다.
아내가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한마디했다.
"당신은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오는 거예요?"
"응, 그냥 바람 좀 쐬고 왔어."
내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자 박반장은 필요 이상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대략 40대 중반쯤으로 보였으나 머리가 반쯤 벗겨져서 인지 그보다
좀더 들어 보이기도 했
다.
"어젯밤 정영혜씨 일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어르신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마 그 분께서 뭔가를 잘못 본 것일
겁니다. 더구나 살인마
라뇨……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반장은 사태에 대한 설득력있는 분석 따윈 내놓지 않고 무턱대고
안심하라고만 말했다.
정영혜가 겪었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 박자 뜸을 들이고 물었다.
"그 일가족 연쇄 살인마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후 무슨 단서라도 잡혔나요?"
"그거야 뭐 알 수 없는 일이죠."
박반장은 마치 그런 일 따위엔 전혀 신경을 두고 있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그러면서 금방 화제를 돌려버렸다.
"참, 출판사를 운영하신다 구요? 00출판사라면 꽤 이름 있는데 아닙니까? 아직 젊으신 분이
크게 성공하셨군요. 혹시 남는 책 있으면 제게 몇 권만 보내 주세요.
저도 젊었을 때는 문학
책도 많이 읽곤 했는데 말입니다. 이거 뭐 나이 들어가면서 책 한 권
볼 여유가 있어야지요.
더구나 요즘은 책 한 권도 왜 그리 비싼 건지 원."
그는 또다시 너털웃음을 흘리며 쿠키 접시로 손을 뻗었다. 나는 형식적으로 그의 말에 몇
마디 호응해주며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나왔다.
주방으로 가 보니 은주는 벌써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수기로 가서 온수를 따르며 은
주에게 말을 건넸다.
"그 여자는 어디에 있니?"
"네? 정영혜씨요?"
나는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2층에 계실 거예요. 나중에 박반장님 가실 때 같이 내려가실 거래요."
"그래, 음……."
나는 컵을 내려놓으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다시 은주에게
물었다.
"참, 은주야……."
내가 잠시 말끝을 흐리자 은주는 묘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혹시 건너편 3층 양옥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니?"
"예……?"
은주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왜 어제 민구가 했던 얘기 있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은주는 계속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러니까…… 어제 밤에 민구가 맞은 편 별장에서 괴물 같은 자가 자신을 노려보았다고 했
잖아. 너도 같이 들었잖아."
"예……."
은주는 여전히 의아해했다.
"민구가 했던 그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구."
"사장님도 참……."
그제서야 은주는 내가 말하려는 의도를 제대로 알아 차렸는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애들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으세요? 세상에 그런 괴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사장님도 참,
엉뚱하세요."
은주는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과장스런 웃음을 보이며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괜히
말을 꺼낸 내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은주는 사려있게 말을
이어갔다.
"상상력이 제일 풍부할 나이잖아요. 염려하실 것 없어요. 아마 잠에서
들깬 상태에서 뭔가를
잘못 본 것일 거예요. 저도 어릴 적에 그런 경험 많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누군가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이를테면 괴물 따위가 아니라…… 기
형아라든가 얼굴을 심하게 다친 사람이라든가……."
"글쎄요…… 제가 알기론 빈집인걸로 아는데……."
은주는 그렇게 말을 흐리며 국이 끓는지를 확인했다. 혹시나 은주가
그 집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은 건데 그녀는 아예 그 집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주방을 나와 거실로 가보니 그새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반장은 여전히 소파에
눌러앉아 아내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방에도 안 계셨다. 문득 생각이 미치는 데가 있어서 곧장 뒤뜰로 나갔다.
뒤뜰에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그 사당은 별장을 지을 때 같은 지은 것으로 어머니의 위패
를 모셔놓은 곳이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을 들러 분향을 하시며 어머니를 그
리셨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니 과연 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어제 내 아내가 선물
했던 앨범을 보고 계셨다. 혼자만의 추억 여행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내가 다가가서 앉아 아버지는 앨범을 내려놓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셨다.
"조금 전에……."
"춥지 않으세요? 여긴 난방 장치도 없는데."
"괜찮아. 좀 추워도 난 여기가 좋아."
"여기 이 사진이 어머니와 처음 만났을 때 찍었던 사진이죠?"
내가 앨범을 가리키며 묻자 아버지도 같이 시선을 옮기셨다.
"음, 그래. 네 엄만 나하고 크리스마스 때 만났지. 내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네
엄마가 나에게로 돌진해 왔었지. 네 엄만 그때 처음 자전거를 배우던
중이었고 그 서툰 운
전 솜씨 때문에 우린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게지."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잘 아는 얘기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길 좋아
하셨다. 나 역시도 그런 어머니와의 추억담을 듣는 것이 싫거나 지겹지 않았다. 어머니와 그
리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쉬는
어머니와 만난다는 것
은 나로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앨범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렇게 나와
아버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사당 문이 열리며 은주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다급함이 느
껴졌다.
"저기…… 큰일 났어요. 이씨 아저씨가 사라졌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씨 아저씨가 사라지다니?"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어서 나와 보세요."
나와 아버지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잊고 있던 묘한 긴장감이 다시금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