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340 (9권 8. 김혼신. 펌글)
계집애가 안내해 준 방은 변두리 규모 작은 호텔방 같지 않게 넉넉하고 컸다.
술상과 종아리 예쁜 계집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은?"
"금방 오실 겁니다."
아주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 웃옷을 받았다.
"네가 예뻐서 오라고 한 게 아니라 네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오라고 했으니 그렇게 생글생글 웃지 마라."
계집애 낯빛이 대번에 굳어졌다.
내가 종아리 예쁜 계집애를 술상과 같이 준비해 두라며 내 이름을 밝힌 것은,
병태사단을 술상과 여자를 준비해 두라고 하면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이 빤하게 짐작되기 때문에,
나를 잘 구슬러보려고 할 터이고 어느 정도 안심을 한 채 나를 맞아들일 것 같았다.
다짜고짜 병태 형을 찾으면 처음부터 험악한 태도로 나를 대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두어 번 신세진 일도 있는 판에 살벌하게 만나기는 싫었다.
병태 형은 선거철에 한탕 튀기려고 별러온 인물인데 졸개한테 내 말을 전해 듣고 호락호락 넘어갈 입장이 아닐 것 같았다.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기동성을 발휘해 막바지 선거철을 이용해 수십억 원을 감쪽같이 챙겨먹을 배짱이라면,
내 말쯤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배경도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잘 보이려고 재물을 바친 사람들이 속았다는 걸 알았더라도,
사건을 확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병태 패거리들은 너무나 잘 아는 터수였다.
가짜에게 속고 돈까지 빼앗겼으니 하소연할 테가 없는 신세인 것이다.
다른 일에 사기를 당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찾아나서겠지만 가짜 기관원에게 빼앗긴 것이 알려지면,
이중으로 망신을 당할 판이라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손해본 선에서 참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바로 병태 패거리가 노린 것은 그것이었다.
현장에서 잡히지만 않으면 돈을 가지고 뛰어가는 것을 보더라도 잡으려 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을 정확히 한 것이었다.
그런 사기를 당했다는 게 알려지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 마련이었다.
뒷거래로 회사를 키우려 세금이나 부동산 투기를 불법한 방법으로 사세나 지위를 획득하려 했다는 수모를 당할 일이었다.
병태 패거리는 그래서 결코 노출되거나 잡힐 염려가 없다는 확신을 가진 채 가짜 기관원 행세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가짜들이 언제까지나 통용되어야 할까?
가짜들이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도록 방조하고 있는 유력인사나 기업인들이나 유명 인사들은,
어째서 정당한 방법으로 성장하려 하지 않고 그렇게 치졸한 방법으로 성장하려 할까?
그러고 보면 담박에 잘 살고 담박에 유명해지는 방법이 아직도 도처에 수두룩하다는 뜻이 아닌가.
노크 소리에 계집애가 벌떡 일어나 문을 내밀었다.
악수하는 손이 차가웠다.
실내에 있었던게 아니라 밖에서 들어왔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커튼을 열었을 때 주차장 근처에 젊은 사내들이 부산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모습을 생각하니,
나를 대접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병태 형은 계집애에게 안주감을 더 장만하라고 일렀다.
"술 마시러 온 게 아닙니다. 형하고 담판할 일이 있어서 온 사람입니다. 됐으니 그냥 앉읍시다."
"그래도 오랜만인데 이렇게 대접을 소홀하게 할 수 없잖나."
"진수성찬을 받은 것과 진배 없어요. 그리고 얘기가 끝난 뒤에 술을 마셔도 마실 겁니다."
"차암, 사람도...."
병태 형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맞은편에 앉고 계집애는 모서리에 앉혔다.
"용건부터 말하죠. 내 요구사항은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방송책임자 녀석을 서울역에 데려다 놓고.
따귀를 때리고 그 장면을 사진 찍어놓는 거였고 또 하나는 여기저기서 빼먹은 돈을 공민학교나 근로자들의 배움터가 되는 곳에
익명으로 기부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정 억울하면 이름을 밝히고 기부해도 좋아요."
"애들한테 말 들었다. 하필 너한테 걸렸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는 걸 알았다. 첫번째 약속은 지켰다. 여기 사진이 있다."
두툼한 봉투를 받아 펼쳤다.
내가 시킨 대로 따귀를 때리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일백여 장 나왔다.
구경꾼들과 국민우롱죄라는 현수막처럼 큰 글씨도 보였고,
얼굴을 감싸고 애원하는 방송책임자의 가엾은 얼굴도 보였다.
장면마다 확대한 사진도 있었고 필름까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우리 애들이 특수폭행죄로 잡혀가기까지 했다."
"마땅하고 당연한 일을 한 겁니다. 그런 큰 불의와 싸우려면 전 국민이 폭행죄라도 져야 하는데,
형의 졸개들이 대신 져 준 거죠. 문제는 두 번째 약속입니다."
"쟤를 내보내고 얘기하자."
계집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병태 형, 쟤를 옆에 있게 하는 건 쟤가 욕심나서도 아니고 무슨 수작을 걸려고 한 게 아닙니다.
형의 입장이 명색이 두목인데 그래서 저애를 증인으로 데려다 놓은 겁니다.
단순히 한 여자, 형이 월급 주는 고용원이라 생각하지 말고 국민의 한 사람,
부정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목격한 국민이라고 생각하란 말입니다."
"......"
병태 형의 얼굴빛은 굳어졌다.
번뜩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타협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나를 기다렸던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까놓고 말하자. 이건 내 목숨이 걸린 문제다. 더구나 난 거둬먹일 애들이 많다. 이미 상당히 많이 풀었다.
생각해 봐라. 내게 현찰이 쥐어졌을 때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턱이 없잖겠냐. 그동안 신세진 데도 많고...."
"그럼 형하고 나하고 둘 중 한 사람의 목숨은 내놔야 되겠군요."
"내가 그냥 죽지는 않을 거 아니냐. 발악이라도 할 거 아니냐. 그렇게 되면 너나 나나 상처를 입는다.
우린 오랜만에 만났지만 이렇게 인상 쓰며 만날 인연은 아녔다. 이렇게 된 마당에 나 혼자 다 먹겠다는 건 아니다.
섭섭잖게 주겠다. 나도 그냥 번 게 아니고 수억이나 투자해서 번 거다. 어떤 놈은 가만히 앉아서 펜대 움직여서,
수천억씩 해처먹고 어떤 놈은 고개만 까닥거려서 수천억씩 챙기는데 나라고 다리 괴고 있을 순 없잖냐."
"그런 식으로 모두 한탕씩 하겠다면 세상이 어찌 됩니까?"
"한번만 눈 딱 감아라. 조직을 다 해산시키고 사업다운 사업을 해서 정말 알짜로 살겠다.
다시는 이런 짓 않겠다. 다시 이런 짓하면 내 손목을 잘라라. 맹세하마."
"형한테 신세진 일만 없고 동주 형의 친구만 아니라면 벌써 작살냈을 거요.
그러나 난 한푼도 필요 없어요. 형이 이번 기회에 좋은 일 한번 합시다."
"내 마지막 소원이다. 한번만 봐 줘라. 사실 그 작자들 돈 좀 먹었다고 죄 될 게 없잖냐.
뒷구멍으로 번 거 내가 좀 빼쓴다고 망할것도 아니고 말이다."
"형이 그렇게 빼낸 거 내가 좀 털어낸다고 죄 될 것도 없지요. 시간 끌지 말고 사나이답게 결정합시다.
형도 모처럼 좋은 일 좀 해봐요. 공단에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젊은이들이나,
공민학교 다니는 친구들한테 이럴 때 인심 한번 씁시다. 난 이 이상은 절대 양보하지 못해요."
한참 동안 내 눈을 쏘아보던 병태 형이 심각한 어조로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네 실력은 안다. 그러나 양보할 선이 있고 거절할 선이 있다.
원한다면 내가 번 것 가운데 정확히 반을 주마. 이게 내 최후의 양보다."
"거절하죠."
"이해해라.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
그는 권총을 내밀었다.
월남전 때 퍼진 권총이 아직도 뒷거래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병태 형 손에 권총이 쥐어지리라곤 생각 못한 일이었다.
"날 죽일거요? 증인이 있는데."
"나로선 최후수단이다. 지금 밖에 우리 애들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나를 해치울 수 있다 하더라도 쟤들을 해치울 수는 없다."
"내가 맨몸으로 왔을 거 같아요?"
"확인했다."
"내가 사라지면.... 여기 온 줄 아는데.... 그냥 있겠습니까?"
"그건 나중 일이다."
"내 이름이 장총찬입니다. 권총찬이 아니라구요. 서부 활극을 보니까 권총 찬 녀석보다 장총 든 녀석이 훨씬 잘 쏘더군요."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다."
"여기가 궁정동도 아닌데, 저 계집애는 내보내고 따집시다."
병태 형이 턱짓으로 눈치를 하자 계집애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에 쇠젓가락이 병태 형의 가슴을 찍었다.
쓰러진 병태형 손에서 권총을 뺏은 뒤 총알을 제거하고 술상 위에 늘어놓았다.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었다.
계집애가 문을 열었다가 닫는 순간에 잠깐 한눈 파는 사이를 이용한 것이었다.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젓가락을 빼 주자 숨을 몰아쉬었다.
"병태 형. 부하들까지 이 꼴이 되면 형은 비참하게 은퇴해야 돼요. 내가 지닌 표창은 스무 개뿐이지만,
형의 부하들을 몽땅 해치울수가 있어요. 형은 내 실력 알잖아요. 기관총으로 나를 벌집 만들기 전엔 안 된다는걸.
형이 내게 권총 꺼냈다는 걸 계집애 때문에 부하들은 당연히 형의 승리를 점치겠죠.
내가 알기에 형은 지금 도전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하고 물러날 궁리를 했죠.
이만하면 내가 할 말은 다한 셈이죠. 일 분 내로 결정하시죠.
일 분이 지나면 형과 형네 그룹은 내 손에 끝장이 납니다. 배고프지 않을 테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사십쇼."
병태 형은 고개를 숙인 채 얼마 동안 침묵을 지켰다.
참으로 무거운 침묵의 순간이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내 눈동자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살기가 아니라 애원의 빛이었다.
"상당한 액수를 이미 썼다. 어디다 어떻게 썼느냐고 묻지 마라.
알다시피 나는 데리고 있는 식구가 많다. 삼분의 이쯤은 남아 있다. 되겠냐?"
"좋습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특수폭행으로 잡혀간 애들한테 충분한 변호사 비용과 넉넉한 생활비를 더 떼고 주십쇼.
또 형이 직접 변두리에 학교를 지어서 믿을 만한 사람한테 기증한다면 약속을 철저하게 이행한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되도록이면 형이 직접 지어서 좋은 사람이나 사회단체에 기증하길 바랍니다. 물론 형 이름으로 말입니다."
"고맙다. 목숨 걸고 약속을 지키마."
"내가 되레 고맙습니다."
"맹세의 표시로 피를 보이마."
그러더니 손가락을 깨물어 낭자하게 피를 보였다.
"형. 내가 보태 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곳보다 더 비열한 돈이 있는 데를 알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미 죽고 없어요. 그 가족에게 일부는 되돌려 주고 나머지는 형이 학교 짓는 데 보태겠습니다."
"그래. 나도 이제 사람다운 짓을 해 보겠다. 나를 믿어라."
우리는 굳게 악수를 했다.
벌여놓은 술상 앞에 앉아 몇 잔의 술을 같이 마시기도 했다.
성근이는 매일 저녁마다 상황를 보고하기 위해 달려오곤 했지만 내가 알아내려고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알려 주지는 못했다.
정복현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은 혜라가 추적 조사한 것이 너무 정확해서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이란 시간은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에겐 길고 지루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정복현을 무조건 잡고 우격다짐으로 족치면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있겠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도 성근이가 돌아가고 나서 두어 시간쯤 지났을 무렵에 전화가 왔다.
"정복현이가 압구정동 H아파트로 갔습니다. 지금 그 앞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냄새가 이상해요. 지난번에도 잠깐 들렀다 갔는데.... 조사해 보니까 그 방에 성주화라고...."
"탤런트 말이냐?"
"예."
"좋다. 지금 가겠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은주 누나는 밤 늦게 차 끌고 나간다고 성화였다.
전 같지 않게 가게에도 나오지 않으면서 밤낮 없이 쏴다니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다혜 얘기며 혜라에 얽힌 얘기를 간략하지만 어느 정도 해 주었는데도 몸조심하라고 성화였다.
H아파트까지 어떻게 달렸는지 모른다.
목덜미를 잡아채기 위해서는 현장을 덮쳐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경비원을 구워 삶아서 쉽게 성주화가 산다는 아파트 앞까지 갈 수가 있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은 정복현이란 남자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들르는데 그 넓은 아파트를 성주화 혼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비밀을 지키기 위해 군식구 없이 혼자 사는 것 같았다.
"안고리만 안 채워져 있으면 오 분 내로 열 수 있습니다."
자물쇠는 어떤 것이든 녀석의 손에 닿기만 하면 열린다는 전문가가 이렇게 말했다.
"행운을 빈다. 잠자리 들기 전엔 안고리를 채우지 않는 게 보통이다. 어서 시작해라."
전문가 녀석은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하더니 아파트 자물쇠를 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녀석이 가능한 빠른 시간에 해치우기만을 기다렸다.
성근이 목덜미엔 소형이지만 성능 좋은 자동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한 번 누르면 네 커트가 찍히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