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낙태에 관한 천주교 신자들의 의식을 설문 조사한 내용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 설문은 각기 상반된 다음 두 가지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로서 어떻게 처신하겠는가를 묻는 내용이었다.
“만일 당신의 딸이 미혼모로서 임신을 하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 친구의 딸이 미혼모로서 임신을 하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해 나온 대답은 이렇다. 응답자들 중 2/3가 친구 딸의 경우 낙태를 하지 못하도록 권유하면서도 정작 자기 딸의 경우는 낙태를 권유할 것이라는 것이다.
윤리의식에 관해 쓴 매우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을 보았다. 교육학 및 윤리학 분야의 교수님들이 3년여에 걸쳐 조사 연구한 논문 「한국, 미국, 일본의 윤리의식 비교연구」는 특히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논문에서 제시된 설문 중에서 ‘옳고, 그름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문항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 설문에 대해 한국인 30.98%, 일본인 62.27%, 미국인 7.95%가 긍정적으로 답했는데, 이는 윤리가 서서히 그 보편적 및 절대적 규범으로서의 가치기준의 위치를 상실해 가고 있는 현실을 잘 설명해 주는 표지라고 하겠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수의 의견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비록 어떤 사안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다수가 그것을 지지한다면 옳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한 사조가 소위 문화사회학주의(Cultural Socialism)이다.
이 사조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가치들은 변화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영속적인 가치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윤리적 판단이나 행위의 기준은 역사, 문화, 지역, 관습, 계층,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식이 현대인들의 윤리의식에 깊게 뿌리내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30%이상의 국민이 행위의 윤리적 판단기준을 ‘다수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식은 생명윤리와 관련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낙태라든가 안락사에 관한 의식 문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회의 일각에서는 낙태라든가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고, 바로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다수의 의견’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낙태가 합법화되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를 원하기 때문에 안락사는 일종의 자비의 행위라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를 윤리가 올바로 확립되어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잔혹한 범죄들이 대중의 합의에 의해 합법화된다고 해서, 그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천주교 신자이지만 내 딸이 미혼모로서 임신을 했다고 한다면 그 낙태는 별로 죄스럽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민주주의를 우상화하여 도덕성의 대체물로 만들거나, 또는 비도덕성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민주주의의 ‘도덕적’ 가치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의 인간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이 체제가 당연히 종속되어야 할 도덕률에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강조한다.
윤리적 가치는 결코 ‘과반수’의 의견으로 변경할 수 있는 임시적이고 변경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내면의 소리로서의 하느님의 법이 윤리적 행위의 기준이 될 때, 오늘날 이 사회가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는 분열과 혼란,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