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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이 외 수
노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마 ‘참꾼’ 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속임수를 전혀 쓰지 않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참꾼의 무기는 염력(염력(念力):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떨어진 곳에 있는 물건을 움직이는 초능력적인 힘.)이다. 오직 마음의 힘만으로 승부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속임수가 뛰어난 ‘야마시꾼 이라 해도 이 참꾼을 당할 재간은 없다고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당구장 한켠에 준비되어 있는 임시 휴게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당구장 주인의 말에 의하면 당구장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달간 영업 정지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출입문과 창문에는 각각 검은 커튼들이 드리워져 있었고 벽에 나란히 정리되어 있는 큐대와 점수판, 텅 빈 당구대, 그것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현재 모두 네 명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한 명이 더 올 것이다. 우리는 어느 중개인의 비밀한 주선으로 이곳에 함께 모이게 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서로 초면이었다. 우리를 이곳에 함께 모이도록 주선했던 그 중개인이 아까 대충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기는 했었지만 그건 벌써부터 엿이나 먹어라였다. 이런 일이나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딱지 덜 떨어진 시골 면서기 도청에 월말 보고하듯 곧이곧대로 자기에 관한 일들을 중개인에게 밝혀 주었을 턱이 없었고 그렇다면 아까 중개인의 소개 내용은 편의상 제멋대로 꾸며낸 것들임이 틀림없을 거였다. 우선 나 자신에 관한 소개부터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우리는 아까부터 서먹서먹한 상태로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침묵이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에는 매우 편리한 도구일 것이다. 잠시 후면 우리는 서로 적이 되어 숨막히는 암투를 벌여야 할 것이고 그때는 저절로 입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미리 얄잡힐 필요는 없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따분했다. 나머지 한 명이 빨리 도착해 주었으면 싶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은 이미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리고 문득 의식했다. 내 왼편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자꾸만 곁눈질로 나를 흘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유한 마담 기질이 다분히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담배 피우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담배를 권해 보았다.
“담배 피울 줄 몰라요.”
그러나 그녀는 화난 듯한 목소리로 담배를 사양했다. 사양하고 나서도 곁눈질로 나를 흘끔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일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심한데 당구나 한 게임 치실까요.”
나는 앞에 앉은 사내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을 건네 보았다. 턱이 유난히 긴 사내였다. 만약 이 사내가 널뛰기 대회라도 출전하게 된다면 미처 세 번도 뛰어 보지 못하고 턱이 모조리 땅바닥으로 흘러내려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사내의 턱을 손바닥으로 받쳐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당구나 치자는 데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그 긴 턱을 들썩이며 몇 번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혼자 치쇼. 난 당구 칠 줄 몰라요.”
개애새……끼. 거젓말일 거였다. 이런 일이나 하러 다니는 주제에 그 나이까지 당구를 아직 칠 줄 모르다니, 아마 사내는 내가 신경전이라도 벌이려 드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혼자 일어섰다. 당구장 주인은 카운터에다 머리를 박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어제도 날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당구알들을 얻어 내어 초록빛 라사 위에 와그르르 쏟아 놓았다. 깊이 잠들었던 당구대와 큐대, 그리고 점수판들이 한꺼번에 눈을 뜨고 잠 속에서 깨어났다. 나는 혼자 심심풀이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큐대로 당구알의 뒤통수를 찍어 댈 때마다 당구알은 계산했던 코스대로 정확하게 굴러가서 맞아 주곤 하였다. 나는 그것으로 오늘 벌어질 일을 점쳐 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행운을 잡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내 곁에 있던 여자는 아직도 계속 곁눈질로 나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당구를 치다가 그만 시들해져서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걸어가서는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짙은 소청색이었다. 하늘이 회색으로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소청색 바다가 허연 거품을 게우며 기절하고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았다.
“이거 보세요.”
등 뒤에서 여자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다보았다. 내 곁에 앉아 었던 바로 그 여자였다. 여자는 다시 입올 열었다.
“댁은 형사 끄나풀이지요?”
약간 겁먹은 듯한, 그리고 경계의 빛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가슴이 심하게 움직일 정도로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생사람 잡지 마쇼.”
나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침 떼지 말아요. 경찰서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여자는 비웃는 듯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피해망상증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맘대로 생각하쇼.”
나는 귀찮은 듯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자도 조심스럽게 내 곁으로 와서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안한 기색만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가 아니라면 또 어디서 보았을까…….”
여자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뱀고기 좋아하세요?’
참으로 엉뚱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뱀고기라뇨?”
“뱀 말이에요. 정력에 좋다는.”
“네. 더러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 “맞군요. 경찰서에서가 아니라 거기서 봤을 거예요. 우리 옆집이 바로 뱀을 파는 집이었어요. 불로원집 아시죠?”
“아, 저도 부인을 한 번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부인께선 왜 거길 드나드셨던가요. 곗돈 때문이었나요?”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혔다.
“아니에요. 난 그저 우리 가게 앞의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 거기 드나드는 사랍들을 유심히 보았을 뿐이에요.”
여자는 비로소 약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불로원집? 금시초문이었다.
멀리 해안선을 따라 검고 기다란 뱀 한 마리가 느릿느릿 이 도시를 향해 기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16시 10분에 도착한다는 완행열차인 모양이었다.
“참 아니꼬워서 못 보겠어요.”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누가 말입니까.”
“저 여자 말이에요.”
여자는 소리를 낮춰 말해 놓고는 흘깃 뒤를 한 번 눈으로 가리켰다.
소파에 앉아 있는 우리들 넷 중 또 다른 한 명의 여자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이런 데나 돌아다니는 주제에 거만하기는.”
혼잣소리 끝에 여자는 칫, 하고 비웃었다.
우리들 넷 중 또 다른 한 명의 여자는 사실 약간 거만해 보이는 데가 있기는 있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고급 관리의 본부인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시종일관 입을 다문 채 오히려 우리를 깔보고 있는 듯한 눈초리를 이따금 보내오곤 했었다. 게다가 제법 근엄한 표정까지 짓곤 했었다. 그것은 정말 웃기는 노릇이었다. 여자의 근엄한 표정이란 집에서 자식을 타이를 때나 겨우 어울려 보이는 장신구이지 밖에 나오면 쥐뿔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그 여자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여자의 근엄한 표정은 무슨 기념 행사 따위에 자주 참석해서 근엄한 표정 하나로 의자를 지키다 돌아오는, 그 여자의 남편인 고급 관리에게서 모방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들 중의 그 누구도 지금 다른 사람을 헐뜯을 만한 처지가 못 되는 셈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차 똑같은 목적으로 피차 세상 눈을 피해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므로.
“뱀고기를 잡수시고 나서 정말 정력이 좋아지셨나요?”
여자는 이제 화제를 바꾸고 있었다.
“흐흐흐”
나는 그냥 그렇게 웃어 주었다. 말해 놓고 나서 여자는 약간 무안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열차는 이제 두어 번 길게 동물적인 괴성을 발한 다음 도시의 사타구니 속에다 대가리를 쑤셔 박고 있었다. 꼬리가 다 먹혀 들어간 다음에도 잠시 열차의 헐떡거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나는 소파로 다시 돌아왔다.
여자는 여전히 창가에 남아 있었다.
“어머나, 눈이 와요!”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탄성을 발했다. 전형적인 고급 관리의 본부인 같이 생긴 여자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여자가 왜 저렇게 천박하게 구는지 모르겠네 참.”
잠시 후 중개인이 다시 당구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우려가 기다리던 나머지 한 명이 조금 전에 도착한 열차 편으로 이 도시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화를 받았다는 거였다.
“그런데 왜 여태 안 나타나는 거요.”
턱이 긴 사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징어를 사러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오징어라니, 무슨 뜻이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화로 그렇게 말했어요. 오징어를 좋은 놈으로 꼭 몇 축 사야 하겠으니 이왕 기다리시는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입니다.”
“기가 막혀!”
그러나 중개인은 습관화된 유들유들함을 올리브유처럼 전신에 번들번들하게 처바르고는 우리를 쉴 새 없이 구슬리기 시작했다. 판이 깨져 버리면 곤란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중개인과 당구장 주인, 그리고 턱이 긴 사내는 한패거리임이 분명했다.
두 명의 여자는 솜씨가 그리 놀라운 편은 아닐 것 같았다. 그저 아마추어로서는 제법 뛰어난 편이라고나 할까. 이런 곳에까지 덤벼들 만큼 밝은 눈의 소유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계획적으로 던져 주는 미끼를 받아먹고 덫 속에 철없이 한 발을 집어넣고 있는 여자들, 그녀들은 오늘 저 턱이 긴 사내에게 모조리 돈을 빨려 버리게 되도록 계획되어 있을 거였다.
턱이 긴 사내는 여자들보다는 한결 담요 때가 손등에 반들거리는 편이었다.
화투
그것을 하러 오늘 우리는 이곳에 모인 것이다. 여자들은 중개인이 붙여 주는 사람들에게서 심심찮게 재미를 보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끼였을 것이다. 게임은 오늘부터다. 따로 잃어도 꼭 한 번만 더 손을 대보고 싶어지는 게 화투다. 이제 여자들은 볼 장 다 본 셈인 것이다.
그러나 턱이 긴 사내여, 중개인이여, 그리고 당구장 주인이여, 당신들은 오늘에야 비로소 임자를 바로 만났다.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기막힌 손재주를 가지고 있는가를. 조선 팔도 화투판을 다 돌아다녀 보아도 내 속임수를 눈치 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바둑은 집내기 할 때, 화투는 문지방 넘을 때, 안색을 보면 대번에 자초지종을 알게 된다던가.
화투장에 미쳐서 쓸어 박을 건 모조리 쓸어 박고 나서야 나도 겨우 터득했다. 직감과 눈치와 속임수를. 다만 나머지 한 명에 대해서만 나는 아직 확신을 못가지고 있었다. 화투를 하러 와서 오징어를 찾아 해매다니, 무슨 꿍꿍속이 있는 것일까.
꾼들은 대개 터부들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의 음모를 귓속에다 한 오라기 감추어 놓고 화투를 하면 반드시 따게 된다든가, 발등에다 오줌을 누게 되는 실수를 저지른 다음날은 반드시 잃게 된다든가, 여자에겐 약하고 남자에겐 강하다든가 등등. 우리가 기다리는 나머지 한 명도 오징어와 관계된 터부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노크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똑똑똑똑. 똑똑. 똑똑. 똑똑. 똑. 똑.
약속되어진 신호였다. 당구장 주인이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드디어 나머지 한 명이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일제히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청년 하나가 들어섰다. 머리와 어깨에 눈이 하DIG게 얹혀있었다. 제법 많은 눈이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청년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늦었음을 사과했다.
“예상 외로 열차가 늦게 도착한데다가 볼일이 좀 겹쳐서…….”
라고 청년은 덧붙이고 있었다. 청년의 곁에는 꼬마가 하나 딸려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였다. 한마디로 지독하게 못생긴 용모를 가진 계집애였다. 그 애의 머리자락은 성질 나쁜 식모애가 함부로 냄비바닥을 문질러 대다가 아무렇게나 팽개쳐 버린 수세미처럼 너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땟국물이 졸아붙은 얼굴, 들창코에다 주근깨에다 너부죽한 입에다 못난이 삼형제라는 인형들 중에서 가운데 인형과 흡사해 보였다.
“여긴 뭣 하러 왔니, 꼬마야. 집에서 애들하고 눈쌈이나 하고 놀잖구.”
당구장 주인이 그 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화투를 치러 왔어요.”
계집애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집애답지 않게 건조하고 탁한 목소리였다. 그 애는 게걸스럽게 오징어 다리를 물어뜯고 있었는데 청년의 또 한 손에는 큼지막한 오징어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오징어에 대한 터부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 짐작을 나는 여기서 일단 틀린 것으로 간주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청년의 용모는 계집애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해맑고 귀티 나는 얼굴, 짜임새 있는 자세, 단정한 옷차림, 그러나 약간 차가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나는 청년을 천천히 훑어보며 약간 안심을 하고 있었다. 팔씨름에 도사인 사람들이 상대편의 손목을 한 번 잡아 보는 것으로도 이미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를 대번에 알아낼 수 있듯이 나는 그 청년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 하나로서도 그 청년이 어느 정도의 꾼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은 닮고 닮아 있었던 것이다.
“빨리 시작합시다들.”
턱이 긴 사내가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중개인에게 약정한 금액을 떼 주었다.
“고맙슴다. 재미많이들 보쇼.”
중개인은 유들유들하게 인사를 치르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당구장 주인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었다. 비밀 도박장은 이 당구장 바로 밑지하실에 있는데 지금 자기에겐 지하실 문을 열 열쇠가 없다는 거였다.
“그럼 누구한테 있습니까.”
청년이 물었다.
“건물 주인한테 있어요. 임대료를 먼저 줘야만 열쇠를 내줍니다.”
“얼맙니까.”
“일인당 3만 원씩입니다.”
우리들은 각자 돈가방을 열었고 당구장 주인은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오징어를 계속해서 게걸스럽게 물어뜯고 있던 꼬마가 청년에게 말했다.
“여긴 현찰 박치기로 하나 봐, 삼촌.”
청년은 왜 저런 꼬마를 이런 데까지 데리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건물 주인이 열쇠를 가지고 올 때까지 청년은 아까 내가 치던 당구대에서 말없이 당구를 치고 있었다.
“좋은 자세다…….
처음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차츰 치는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나는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가지고 따질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딱!
시종일관 청년이 큐대로 공을 찌르는 동작은 가볍고 상쾌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공이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은 판이했다. 마치 가위로 반듯하게 오려다 놓은 초록 풀밭같이 산뜻한 라사 위에서 희고 빨간 공들은 뇌를 가진 생명체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완전히 청년이 마음속으로 내리는 명령에 따라 멈춰 섰다가 다시 앞으로 굴러가기도 하고 다른 공을 멀리 밀어내고는 재빨리 뒤로 빨려 들기도 하는 것 같았다. 확 흩어져 버리는가 하면 다시 고스란히 한자리에 모이고 도저히 맞을 가망성이 없는가 하면 또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급격한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 맞아 주곤 하는 거였다. 별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그저 장난삼아 청년은 그런 묘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섰다.
“이것 한번 쳐 보시겠습니까?”
언젠가 친구 녀석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쳐낼 수 없을 거라던 모양이 생각나서였다.
“글쎄요. 어디 한번 놓아 보시죠.”
청년이 흥미 있는 눈을 하고 내게 말했다.
나는 우선 흰 당구알 하나를 쿠션에 갖다 붙였다. 그리고 빨간 당구 알 두 개를 그 흰 당구알에다 마저 갖다 붙인 다음 흰 당구알이 옆으로도 앞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배치했다. 뛰는 쿠션에 막혀 있었다. 속칭 쿠션 쌍떡이었다.
“쳐 볼까요?”
그러나 청년은 말하면서 빙긋 웃었다. 갑자기 벽에 붙어 있는 점수판이며 큐대들이 숨을 딱 멈추고 청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청년은 큐대를 천천히 수직으로 곧게 세웠다. 일순 세상의 모든 시계도 딱 움직임을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팍!”
큐대가 무서운 빠르기로 내리꽂혔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얀 공은 당구대 난간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리고 급격히 회전하며 잠깐 난간 위에 멎어 있더니 스르르 굴러 내려가 두 개의 빨간 공을 흐트려 놓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노릇이었다.
“속임습니다.”
잠시 후 청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로서는 왜 그게 속임수인지조차도
모를 노릇이었다.
“실례지만 얼마 치십니까?”
“보시고 판단하세요. 드리쿠션입니다. 자, 칩니다.”
처음으로 빠르고 세차게 청년은 큐대로 하얀 공 하나를 횡겨 보냈다.
그러자 그 하얀 공은 쏜살같이 쿠션을 먼저 한 번 치고 나가서는 빨간 공하나를 매끄럽게 스치더니 다시 쿠션을 두 번 탄력 있게 박찬 다음 다른 빨간 공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나서 무서운 속도로 청년을 향해 굴러 오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 공을 향해 민첩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큐대를 일직선이 되게 비스듬히 갖다 댔다. 그러자 더욱 놀랍게도 그 공이 큐대를 타고 두르르 굴러 왔다. 나는 완전히 귀신에 흘린 듯한 기분으로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청년은 공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가 받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별것도 못 됩니다. 내 위로 고수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까요.”
건물 주인에게 임대료를 지불하고 여렷이서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완전히 기가 팍 죽어있었다.
그러나 화투는 별 볼일 없는 실력일 것임이 틀림없다. 아직 내 직감은 살아 있다. 그리고 내 솜씨도 녹슬지는 않았다. 녹슬기는커녕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까지 무르익어 있다. 당구를 잘 친다고 해서 화투까지 잘 친다는 법칙은 없다. 인정사정없이 긁어 버리는 것이다. 안면몰수, 끗발유지, 개평사절, 화투의 3대 원칙대로 새벽까지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격려해 주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노름꾼은 저 애지 제가 아닙니다.”
오징어를 게걸스럽게 물어뜯고 있는 계집애를 가리키며 청년이 거듭거둡 그렇게 말했다. 정말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장난인 줄 아쇼?’
턱이 긴 사내가 화난 듯한 목소리로 청년에게 말했다.
“장난이라뇨. 저 애에게 돈을 딸 수만 있다면 한번 따 보십시오. 저 앤 저래 봐도 화투엔 귀신입니다.”
턱이 긴 사내는 화투를 뒤적거려 다섯 장을 맞추고는 계집애에게 펼쳐 보였다.
“꼬마야. 이게 몇 끗이냐.”
계집애가 재빨리 대답했다.
“콩콩팔 짓구, 덜비!”
“그럼 이건 몇 끗이냐.”
“알삼육에 질곱 끗!”
“그럼…… 이건.”
“못 져요.”
“그럼…….”
사내는 국화꽃 두 장과 매화꽃 두 장, 그리고 목단꽃 한 장을 펼쳐 보였다. 계집애는 히죽 한 번 웃었다.
“누가 구구니로 지을 줄 알구. 구구니로 지으면 덜비밖엔 안 돼. 니니 육 짓고 구땡이지!”
“좋시다.”
사내가 청년에게 말했다.
“좋시다. 우린 어차피 돈을 따러 온 사람들이니까. 누구한테 따든 상관없시다.”
사내는 그 기다란 턱을 들썩거리며 혼자서 일방적으로 그 못난이 삼형제 인형 중 가운데 애와의 도리짓고땡을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뭔가 잘되어 간다 싶더니 별 희한한 노름판을 다 벌여 보게 된 셈이었다.
“그럼, 시작해요.”
우리는 노잡이를 정하기 위해 뒤집어서 흐트려 놓은 화투 중에서 각각 한 장씩을 집어 들었고 첫 노잡이는 내게 뱀고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여자로 결정되어졌다.
이제부터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나이도 무시되고 신분도 무시되고 근엄한 표정도 무시되고 긴 턱도 무시되고 무시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무시되고 다만 무시되지 않는 것은 끗발과 돈뿐이다. 지하실 밖에 있는 도덕과 법률은 이제 개떡도 못 되는 것이다. 담배 한 갑에 무조건 2천 원, 커피 한 잔에 무조건 천 5백 원, 통닭 한 마리에 무조건 2만 원으로 대폭 인상되었다. 배짱 좋은 놈은 맨몸일지도 모르지만 품속에 나이프 하나쯤은 모두 간직하고 있으리라.
인생은 도박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건 멋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진리는 아니다. 도박을 할 때만큼 뼛속까지 녹아들 정도로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패가 돌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눈동자가 음흉하고 교활한 빛을 띠며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턱이 긴 사내가 돈줄을 팽팽하게 당겨 대기 시작했고 그의 무릎 앞에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쌓여 있었다. 그동안 노는 내게로 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속임수를 쓸 때가 아니라고 나는 판단했으므로 정직하게 노잡이 노릇을 해 주고 있었다. 잃은 건 나와 고급 관리의 본부인같이 생긴 여자였고 나머지는 그저 본전치기 정도였다.
고급 관리의 본부인 같은 여자는 간만 컸지 눈치가 좀 모자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여자는 아주 재빨라서 패가 좋지 않거나 끗발이 남에게 계속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할 때는 슬그머니 손을 빼곤 했다. 그리고 못난이 삼형제 중의 한 애는 오징어로 완전히 배를 채우고 나서야 화투를 하겠다는 셈인지 침까지 질질 흘려 대면서 오징어를 물어뜯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끗발이 불로원집 옆집에 산다는 여자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노도 내 손을 벗어났다.
당구장 주인은 장사에 열중해서,
“이것 좀 드시면서 하십시오. 저것 좀 드시면서 하십시오.”
하고 간헐적으로 연발했고 청년은 벽에 가만히 기대앉아 말없이 나이프로 손톱을 다듬는 데 열중해 있었다.
밤중이 되면서부터 판은 점차로 열기를 더해 갔다. 실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암투의 칼날이 여기저기서 번득이고 있었다. 턱이 긴 사내는 따 놓았던 돈을 조금씩 잃어 가고 있었다.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스태미너를 조절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불로원집 옆집에 산다는 여자는 제법 수북하게 돈을 쌓아 놓고 있었고 연방 좋아서 업을 벙싯거리고 있었다.
“난 정말로 어젯밤에 돼지꿈을 꿨었어요.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어마 또 죽어요, 죽어. 보세요, 갑오잖아요. 미치겠네.”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중에 기자나 형사 끄나풀은 없겠지요?’
가끔 그런 소리로 불안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고급 관리의 본부인같이 생긴 여자는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그러나 이따금 절망적인 그늘이 이마에 드리워지기도 하면서 배짱 좋게 듬뿜듬뿍 돈을 걸고 있었다. 따도 왕창 따고 잃어도 왕창 잃겠다는 속셈 같았다. 자정이 조금 지나서 다시 노가 내 손에 잡혔다. 나는 놋돈을 듬쁨 얹었다. 그리고 마침내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매번 속엄수로만 패를 돌릴 수는 없는 노룻이어서 두 번의 속임수에 한 번의 정직한 화투로 패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슬로비디오로 내 손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이
렇게 생각할 것이다. 뼈가 없구나!
그만큼 나는 손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다. 나는 조금씩 돈을 긁어 오기 시작했다. 한 번 잃어 주고 두 번 긁어 오는 장사인 것이다. 손해볼 턱이 없는 것이다.
높은 끗수를 주고 트게 민들어 먹고 낮은 끗수를 주고 갑바, 덜비, 질곱으로 잡아 오면 된다. 계속해서 반 시간 정도만 노를 잡고 있으면 지금 놓아둔 놋돈의 네 배는 쉽게 채워질 것이고 노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고도 한두 번 정도의 노잡이 기회는 올 것이다. 그때는 끝장이다. 완전히 바닥을 긁어 버리는 것이다.
화투가 겨울에 성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겨울은 밤이 길기 때문이다.
이제 실내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고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꽁초, 닭 뼈들, 음료수 병들도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교양 따위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소변이 마려우면 여자들은 옆에 있는 음료수 병을 집어다가 치마 밑으로 가져가곤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내 앞에 앉아 있는 불로원집 옆집 여자는 내 끗발을 죽이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허벅지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스팀 파이프 꼭지가 그녀의 허벅지를 곁눈질하며 ‘치익 칙’ 소리와 함께 침을 흘리고 있었다.
30분이 조금 지나서 나는 예상대로 놋돈의 네 배를 채우고 다른 사람의 손에 노를 옮겨 놓았다. 다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엎치락뒤치락이 계속되었다. 계집애의 손을 떠나서 턱이 긴 사내의 손으로, 턱이 긴 사내의 손을 떠나서 고급 관리의 본부인 같은 여자의 손으로, 고급 관리의 본부인 같은 여자의 손을 떠나서 노는 다시금 내게로 왔다.
기회다!
나는 이제 지금까지 수련해 옴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서 화투를 버무르기 시작했다. 먹이 되든 고물이 되든 그건 내 마음 하나에 달려 있었다. 이미 화투는 내 손과 합일되어 있는 상태였다. 물론 자기만이 아는 표시를 화투 뒷면에다 해 둘 것을 염려하여 화톳목을 지주 갈아치우기는 했었지만 이미 내겐 그 아무 화투로건 자신이 있었다. 화투 뒷면에 표시를 해 두는 따위의 속임수는 하수들이나 쓰는 수였고 나는 주로 섞고 치면서 내 뜻대로 화투를 주무르고 상대편 패에 화투를 빼 던지면서 적당히 끗수를 조합하고 있었다.
나는 몇 번 실수 없이 돈 무더기를 긁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가 마악 속임수가 들어 있는 화투 패를 돌리려고 했을 때 계집애가 날카롭게 소리쳤던 것이다.
“이젠 야마시 고만 쳐요.”
그 갈라지는 목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내 눈썹 언저리를 반짝하고 스치며 내리꽂히는 물체, 나이프였다.
팍! 팍!
나이프는 이어 두 개가 더 날아와 정확하게 내 바짓가랭이를 양쪽 다 방바닥에 묶어 놓았다.
청년이었다.
“조심해. 개자식 !”
그의 손에는 아직도 몇 개의 나이프가 번뜩번뜩 빛나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정직하게 화투 패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새벽이 가끼워져 오고 있었다.
비로소 계집애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좀 텀벙대지 말고 해, 이 예펜내야. 이걸로 어떻게 져? 새, 오, 장 한 끗 모자라잖아!”
턱이 긴 사내가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고급 관리의 본부인같이 생긴 여자에게 소리 질렀다.
“저 씨팔 놈이 어따 대구 욕질이야, 욕질이!”
이제 못난이 삼형제 중의 한 애를 닮은 것 같은 계집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런 식이 되어 있었다. 엄청난 욕지거리들이 튀어나왔고 별의별 비굴한 방법들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 어떤 비굴한 방법도 계집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을 수 없는 걸 지었다고 속이거나 재빨리 화투장을 옆 사람과 바꿀 때마다 계집애는 영악스럽게 상대편의 손등을 할퀴어 버렸고 급기야는 모두들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면서 속수무책으로 돈을 잃어가고 있었다. 계집애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돈을 따고 있었다.
“쌈에 갔어. 백!”
자신만만하게 계집애는 돈을 찔러 넣었고 언제나 그것은 적중했다. 노를 잡건 안 잡건 계집애는 따기만 했다. 계집애는 잠시 방바닥에 깔린 석장의 화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눈은 회색으로 흐리멍텅해져 갔고 그러다가 찰나적으로 한 번 반짝 빛나고는 다시 흐려졌었다. 그리고 그 다음 돈을 찌르는 것이었다.
“빵에 갔어. 천!”
마침내 사람들은 귀기(귀신이 나타날 것 갈은 무서운 느낌)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건 실내가 추워서가 아니었다. 화투를 잡으러 가는 손들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건 귀선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집애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어른들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살펴보고 있었다. 내 앞에 치마를 걷어붙이고 화투를 하던 불로원집 옆집 여자가 이상하게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떠나갈 듯한 통곡을 터뜨렸다
나는 여기서 손을 빼기로 작정해 버렸다. 그래도 본전에서 10분의 1은 건진 셈이었다. 더 견뎌 봐야 결과는 뻔할 뻔자였다.
“다 빨렸시다. 망할.”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이 웬수 같은 놈!”
고급 관리의 본부인같이 생긴 여자가 갑자기 턱이 긴 사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사내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는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다.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네놈 때문에 내 돈 다 잃었다, 이놈아, 천만 원! 천만 원 내놔! 이놈아,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 그 돈이!”
머리카락을 움켜잡힌 사내는 사정없이 여자의 배를 발길로 걷어차고 있었으나 여자는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내 남편이 불같이 뜨거운 중동 땅에서 피땀 흘려 모아 보낸 돈이다.
이놈아! 이 웬수 같은 놈아! 네놈한테 몸 바치고 돈 바치고 다 바쳤어. 이번엔 모조리 긁어서 반타작 하자더니 이놈 손 좀 벌려 봐라, 얼마나 땄니!”
“미쳤나, 이년이.”
사내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여자의 가슴팍을 걷어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날이 훤하게 밝아 올 시간이었다.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나자빠졌던 여자는 가슴팍과 머리카락을 집어 뜯으며 짐승 같은 모습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마저 합시다.”
사내가 비굴한 웃음을 보이며 계집애 앞으로 어기적거리며 걸어가 앉았다.
“판은 끝났어!”
청년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청년은 어느새 바닥에 깔려 있던 돈 무더기들을 모조리 가방 속에 쓸어 넣고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겁도 없구나, 이 도시는 내 터야.”
사내는 천천히 일어섰다. 당구장 주인이 쇠파이프를 꺼내 들고 어느새 사내에게 합세했다.
“좋지.”
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뱀처럼 싸늘했다.
획, 파이프가 날았다.
그러나 청년의 몸은 새처럼 가벼워 보였다. 두 명의 공격을 재빠르게 피하면서 돈가방과 계집애를 끼고 지하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하실 문은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했는지 비로소 청년은 나이프를 재빨리 꺼내 들었다.
획. 획.
그것들은 날카로운 빛살이 되어 그들의 팔과 다리에 날아가 꽂혔다.
청년이 당구장 주인에게 소리쳤다.
“어이, 이젠 그만 하자구. 앤 돈에 욕심이 나서 노름판엘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돈을 잃고 비굴해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 노름판엘 돌아다니는 애야. 얘하고 난 둘 다 피도 눈물도 없다구.”
청년 곁에서 계집애는 여전히 오징어 다리를 우물거리며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덤벼. 덤벼. 이 새까, 덤벼 보란 말이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눈에 덮여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성한 듯한 모습으로 한 여자가 내 곁으로 다가와 참결의 목소리처럼 횡설수설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장님. 불로원집 옆집 아시죠. 갚아 드리겠어요. 제 몸을 바칠게요. 차비 좀…….”
“부인. 저는 불로원집이 어느 도시에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아깐 거짓말을 했던 거예요.”
“제 몸을 바칠게요. 사장님, 불로원집 옆집…….”
나는 갑자기 노름꾼 특유의 피가 전신을 엄습해 옴을 의식했다. 나는 비정해지고 싶었다.
“내 차비도 없시다.”
나는 여자를 떨쳐 버리고 방금 개찰이 시작된 개찰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1979년 《뿌리깊은 나무》
이 외 수
1946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나 직업군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와 강원도 등 여러 곳에서 어련 시절을 보내다. 1965년 인제고둥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교대에 입학하다. 1968년 군 입대, 제대 후 1972년 춘천교대를 중퇴하다.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견습어린이〉 당선, 1975년 월간종합지 《세대》 ‘신인문학상’ 에 중편 〈훈장〉이 당선됨으로써 중앙 문단에 데뷔하다. 이 무렵부터 학교 소사, 신문사, 학원 강사 등 전전하던 직장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몰두하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1990년 4인의 에로틱 아트전’ 과 1994년 ‘선화개인전’ 을 열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삽화가 돋보이는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1983), 〈외뿔〉(2001) 등과 시집 〈풀꽃 술잔 나비〉(1987), 〈그리
움도 화석이 된다〉(2000) 등을 발표하다.
<대표작>
〈꿈꾸는 식물〉(1978), 〈겨울나기〉(1980), 〈들개>(1981) 〈칼〉(1982), 〈벽오금학도>(1992), 〈황금비늘〉(1997), 〈괴물〉(2OO2) 등이 있다.
<미리보기>
<고수〉는 1979년 7월호 《뿌리깊은 나무》에 발표한 초기 단편이다. 시인이 되려고 했던 만큼 작가의 시적이고 감각적인 문체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데뷔작 〈훈장〉에서 젊은 예술가의 갈등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그려 중앙 문단에 충격을 던져 준 바 있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체와 감각적인 묘사로 많은 마니아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 작품도 역사 유려한 문체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치밀하고 감각적인 묘사로써 신선한 느낌과 시적인 상상력을 유발하는 분위기를 매력 있게 빚어내고 있다. 신문이라기 보다 시에 가까운 표현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열차는 이제 두어 번 길게 동물적인 괴성을 발한 다음 도시의 사타구니 속에다 대가리를 쑤셔 박고 있었다. 꼬리가 다 먹혀 들어간 다음에도 잠시 열차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나는 소파로 다시 돌아왔다.’
〈고수〉에서 주인공이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열차가 시가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문장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도시와 여자를 의인화한 비유는 기가 막히다. 이런 묘사와 문체는 이 작품의 미화적 수준을 높이고 있다. 비록 화투장을 돌리는 하찮은 노름꾼들의 비극적 현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작가는 아름다움을 찾아 선명한 이미지로 독자 앞에 제시한다. 이러한 기술은 작가의 유미주의적인 작품경향을 오래 지속하는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작가 이외수는 ‘기인’ 이라는 소문에 걸맞게 가지각색의 기인들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 노름꾼 ‘고수’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작품의 전반부에서 당구를 치는 주인공과 청년의 프로급 당구 솜씨가 소개되더니 이어서 벌어지는 ‘화투’에서도 고수들의 도박 세계가 슬쩍슬쩍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 고수들 속에 지독하게 못생기고’,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된 어린 소녀’를 끼워 놓는다.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대는 이 소녀가 빚어내는 독특하고 귀기 어린 분위기는 왜 이 작품이 우리 나라 단편 문학중에서 ‘고수’로 뽑히는지 깨닫게 한다.
♣ 학습길라잡이
<구조분석>
· 갈래 : 단편소설
· 주제 : 승부노름에 모든 것을 건 인간의 욕망.
· 배경 : 시간은 현대. 공간은 노름이 벌어지는 당구장.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등장인물>
· 나 : 이야기를 풀어 가는 화자이며 관찰자 스스로 ‘고수’ 라고 자신하는 인 물.
· 소녀 : 주인공 ‘나’도 물리치는 진정한 의미의 고수. 초등학교 4학년짜리 어린나이의 지독하게 못생긴 소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화투 를 한다.
· 청년 : 당구와 나이프를 잘 쓴다. 소녀의 보디가드이자 주인.
· 당구장 : 주인 노름판을 열고 개평을 뜯는 인물. 노름꾼들과 한패.
. 그 밖의 노름꾼들 : ‘불로원 옆집’ 에 산다는 유한 마담 고급관리 본부인 같은 여자 턱이 긴 사내 등.
<플롯>
· 발단 : ‘나’는 화투판에 참석하는 마지막 문이 탄 열차가 시가지로 들어오 는 것을 보고 있다.
· 전개 : 일행을 파악하기 위하여 ‘나’는 당구를 치자고 제안한다.
· 위기 : 가방을 들고 청년이 당구장으로 들어서고, 그 옆에는 지독하게 못 생긴 소녀가 질겅질겅 오징어를 씹으면서 “화투를 치러 왔어요”라 고 말한다.
· 절정 : ‘나’는 지금까지 수련해 온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화투판을 제압하 기 지작했다.
· 결말 : 차비까지 소녀에게 털린 ‘나’는 이 도시를 떠나려고 역 개찰구로 걸 음을 옮긴다.
♣ 이것만은 놓치지 말자
<인터넷과 작가 이외수>
작가 이외수는 요즘 인터넷에 푹 빠져 산다.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서핑하는 것은 이미 그의 일과가 되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메일들을 훑어보고 일일이 답장을 해 주는 것도 그의 삶의 한 부분이다. 이외수의 소설이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며 시대의 조류를 읽을 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컴퓨터 자판을 또닥거리며 턱을 길게 뽑고 사이버 세상에 심취해 있다. 우리 나라 소설가 중에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가 홈페이지를 개설한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나이를 잊고 인터넷의 세계까지 쳐들어온 이외수. 그는 늘 새로운 도전을 위하여 준비하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다.
<‘기인’ 이외수?>
작가 이외수는 한때 허름한 창고 속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1년 내내 두문불출한 채 소설을 쓴 적도 있다. 그때 그는 교도소에 납품되는 철창 문을 구해 달고 자물쇠까지 채워 원고가 탈고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글을 썼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당시 사용된 교도소 철문이 있다. 쇠창살이 나 있고 아래쪽에는 식판 투입구가 설치된 실제 교도소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는 작품에 몰두할 때 지금도 가끔씩 이 철문을 생각한다고 한다. 또한 지금도 작품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철문 속에 가둘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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