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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결을 거스르다
28살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성직자가 부족한 소비에트연방 지역에서 성직을 수행하라는 함부르크 주교 한스 오토 뵐버의 부름에 화답하여 자신의 첫 아이,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가 태어나는 수간을 지켜보지 못한 재 1954년 7월 17일에 함부르크에서 동독으로 향했다.
두달 후 두살 어린 영어 교사 아내 헤를린트는 바구니에 담긴 딸 앙겔라와 함께 남편이 있는 동독 크비초브(Quitzow)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으로 145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템플린(Templin)으로 이주했다.
당시 동독정부의 폭력과 탄압으로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하는 이주민들의 숫자가 치솟고 있었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동독과 서독, 그리고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과 갈라놓았다.
앙겔라는 체제에 철저히 순응한 차가운 사람으로 알려진 성직자인 아버지로부터 논리적 엄격성과 자기주장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신앙을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내게 종교는 개인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종교 덕에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고, 종교는 내게 주어진 책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막아줍니다. 만약 내가 무신론자였다면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한결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권력(power) 그 자체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필요합니다. 권력은 ‘만드는 것(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싶다면 적절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집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 권력의 반대말은 무력함(powerless)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해도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면 그 아이디어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2. 라이프치히 - 자신의 길을 가다
19살의 메르켈은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진학하여 물리학을 공부했다.
물리학은 택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제아무리 동독이라도 기본적인 연산과 자연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23살에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다.
3. 베를린
부부는 동베를린에 있는 동독 과학아카데미에 취업을 했다. 결혼 후 3년째에 이혼을 하였다.
1985년 서독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40주년 기념식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음
그들이 혐오하는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선을 넘어 부역자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 타협과 계산으로 점철된 끔찍한 생존
4. 1989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메르켈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 후 사우나에 갔다. 사우나를 마친 후 보른홀머 다리로 가서 서독으로 몰려가는 군중에 합류했다. 역사가 한창 만들어지는 와중에 집으로 가기로 결정.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했거든요.” 이후 메르켈의 생활은 서베를린에 몇 차례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거의 정상적으로 지속됐다.
우리는 난민이었습니다. 살던 나라에서 도망치지 않은 난민이었죠. by 미하엘 신트헬름
우리는 너희처럼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어. 그런데 너희는 우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우리 주인님은 죽었으니까.
1989년 12월, 동독의 신생 정당인 민주적 각성(DA)에 가입했다.
1990년 봄, 메르켈의 체계적인 접근 방식과 아수라장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성품을 눈여겨 본 DA 리더 아펠트는 DA 대변인을 맡아달라고 요청함
DA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력한 정당인 서독기독민주연합(CDU)에 통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