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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격류
그 날은 방안에 햇볕이 가득 스며들어 땀이 배어나올 정도였다. 12월 중순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날씨였다.
‘따뜻한 날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얼어붙으면 좀처럼 열리지 않던 창문도 오늘은 거침없이 열렸다.
나쓰에는 먼지떨이로 먼지를 털면서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몸 속에서 음악이 울러펴져 그것이 자연히 손가락 끝까지 스며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루리코가 죽은 후로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피아노는 그 후 줄곧 닫혀 있었다.
‘핑’하고 끊긴 피아노 줄의 그 불쾌한 금속성 소리의 느낌이 곧 루리코의 죽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제 슬슬 쳐 볼까? 그 후로 7년 동안이나 치지 않았으니까.’
나쓰에는 전부터 요코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피아노를 치려고 마음먹자 먼지떨이를 잡은 손이 이상할 정도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청소를 마치고 나쓰에는 창문을 닫았다.
서재는 네 칸짜리 양식 방이었다. 입구의 반 칸과 창문 쪽의 한 칸을 제외한 벽은 모두 서가였다. 아버지 디부터 내려온 의서 외에 게이조가 모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씌어진 문학 서적도 있었다.
꼼꼼한 편인 게이조는 나쓰에에게도 책상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한아름이나 되는 지구본과 약간 빛이 바랜 푸른 갓이 씌워진 전기 스탠드, 그리고 통나무배 모양을 한 아이누(일본의 원주민) 세공의 목각으로 된 필통이 언제나 같은 장소에 놓여 잇었다.
일기장이 필통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도 결혼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게이조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고 있었다.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계속해서 썼다. 그런 그를 두고 다카기가,
“일기를 3년 동안 계속 쓴 사람은 장래에 반드시 뭔가 이루어 놓을 사람이다. 10년 동안 계속 쓴 사람은 이미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은 사람이다”라는 누구의 말을 인용하며,
“그렇다면 쓰지구치 녀석은 굉장히 훌륭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긴데, 어째 곡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군.”
하고 빈정거린 적이 있었다.
게이조의 일기는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 쓴, 거의 메모라고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었다.
결혼 초기에 나쓰에는 가끔 게이조의 일기를 훔쳐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내용도 즐겁게 하는 내용도 전혀 씌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차츰 남편의 일기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기장은 항상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필통과 마찬가지로 단지 거기 놓여 있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 일기장을 몇 년 만에 펼쳐 보게 된 것은 지금 나쓰에의 마음에 뭔가 모를 즐거움으로 들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쓰에는 일기장을 폈다.
0 월 0 일 0 요일, 맑음
제약회사 영업사원 2명이 찾아옴. 히드론산 건. 간호사 가이모리가 결혼 때문에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함.
0 월 0 일 0 요일, 흐림
영양사와 입원 환자 대표와 함께 급식에 대해 의논함. 성과가 있었음.
0 월 0 일 0 요일, 눈보라
요즘 X레이 사진 현상이 서툴러 기사에게 주의를 시켰음.
나쓰에는 읽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남편의 일기는 10년 전과 글씨나 문장이 똑같았다.
‘그런데…….’
문득 나쓰에는 일기장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나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일기에 쓰지 않을까? 나와 아이들보다도 일이 더 소중한 것일까?’
나쓰에는 게이조가 그런 남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7년 전 루리코가 죽었을 무렵 게이조는 나쓰에에게도 쌀쌀하고 심술궂게 대한 적이 있엇다. 그러나 지금의 게이조는 역시 다정한 남편이었다. 물론 나쓰에는 게이조가 사이시의 자식을 데려온 것도 있고 해서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쓰지구치라는 녀석은 속을 알 수 없는 데가 있어.”
하고 아버지인 쓰가와 박사가 언젠가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가다듬고 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말이야.”
그때 덧붙이듯이 나쓰에의 아버지는 말했던 것이다.
‘언제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병원 일 때문에 머리 속이 가득 차 있을지도 몰라.’
그만큼 큰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나 자식에 대해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른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그런 반면 여자는 청소를 할 때나 바느질, 빨래, 쇼핑을 할 때에도 집안 일을 한 시도 잊지 않는다.
‘남자가 아내나 자식을 생각하는 것은 대체 언제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나쓰에는 일기장을 이리저리 넘겨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10년 전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일기였다. 반은 어이없어하고 반은 탄복하면서 일기장을 덮으려고 할 때였다.
일기장 안에서 접힌 종이가 떨어졌다. 무심코 펼쳐보니 병원용 편지지에 쓴 게이조의 편지였다.
나쓰에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방안 가득히 스며든 따스한 햇살만 아니었으면 읽지 않고 도로 집어넣었을지도 모르는 편지였다.
일점 일획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게이조의 꼼꼼한 글씨가 가지런히 씌어 있었다.
읽어 가는 동안 나쓰에의 얼굴이 점차 변했다. 책상 옆에 서서 읽던 나쓰에는 맥없이 허물어지듯 방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숨을 죽이고 읽던 나쓰에의 입이 가늘게 움직였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다카기, 저번에 자네가 샤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렀을 때 말해 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네. 그러나 역시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네. 이런 일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고, 사정을 잘 아는 자네한테나 말할 수밖에 없네.
나는 괴롭기 짝이 없네. 어쨌든 마음이 쓰라려 견딜 수 없네. 요코는 일곱 살이 되었네. 7년이라는 세월은 그다지 길지 않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나한테는 정말 길고도 긴 세월이었네. 그동안 가슴이 무척 아팠다네.
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 딸을 죽인 범인의 자식을 맡아 기르려고 했는지 정말 알 수 없네.
다카기, 나는 강변에서 죽어 있던 루리코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네. 그때의 루리코를 생각하면 요코가 죽도록 미워지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내 일생의 과제로 삼고 살겠다고 그때 나는 철없이 자네에게 말했었네…
처음에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대체 남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다시 읽어보았다. 그래서 무슨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맥없이 허물어지듯 방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던 것이다.
나도 어떻게든 요코를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네. 이런 일생을 보내는 인간이 있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내 생활 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네.
솔직히 말해서 요코는 불쾌할 정도로 선의에 가득 찬 아이라네. 그런 아이의 몸 속에 살인범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하고 나는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곤 하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없었네. 아무리 노력해도 손이 그 애의 머리에 가 주지 않는 걸 어떡하나. 그것은 생리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걸세. 이상할 만큼 뿌리깊은 혐오감이네.
그런데 지난번에 드디어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게 됐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서오세요”하고 달려온 요코의 머리를 나도 모르게 쓰다듬어 버렸던 걸세. 그런데 그런 뒤 나는 참을 수 없었네. 반사적으로 죽은 루리코를 생각하게 됐네. 요코를 사랑하는 것을 과연 루리코는 기뻐할까 하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고백할 것이 있네. 나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허울 좋은 말에 자신을 숨긴 추악한 사나이라네. 자네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 기만하면서 요코를 용서할 수는 없었네. 내가 요코를 맡은 것은 나쓰에에게 사이시의 자식을 기르게 하려는 잔인한 생각에서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네.
다카기, 나쓰에는 7년 전에 나를 배신했네. 루리코가 살해되던 날 나쓰에는 무라이와 단둘이 한 방에 있었네. 두 사람이 그곳에서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메스꺼울 지경이라네.
나쓰에는 그것도 모자라 그 후에도 무라이와 밀통을 했네. 물론 그 현장을 내가 목격한 것은 아니야. 그러나 무라이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는 그 날 밤에 나는 나쓰에의 목덜미에서 키스 자국을 발견하게 되었네. 소심한 나는 둘이서 무슨 짓을 했느냐고 따져 물을 용기가 없었네. 진상을 알고 싶었으면서도 그럴 용기가 없었던 걸세. 그 후로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자네는 모를 테지. 차라리 나쓰에를 죽이고 나도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네.
아무튼 나는 요코를 사랑하기 위해 맡은 게 아니네. 사이시의 자식인 줄 모르고 기르는 나쓰에의 꼴을 보고 싶었던 걸세. 사이시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까무라치는 나쓰에를 보고 싶었던 거야. 사이시의 딸을 위해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며 억울해하는 나쓰에를 말일세. 다카기, 결국 나라는 인간은……
편지는 여기서 끝나 있었다.
부치려고 한 편지인지, 아니면 부칠 생각 없이 그냥 쓴 편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군데군데 글자가 번져 있었다. 게이조의 눈물 자국인지도 몰랐다.
나쓰에는 멍하니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소녀 시절에 해수욕을 갔던 도마마에의 바다가 눈앞에 떠올랐다. 눈썹처럼 떠 있는 데우리, 야기시리의 두 섬 사이에 석양이 가라앉은 광경이었다.
나쓰에는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얗게 메마른 나쓰에의 입술이 간신히 움직였다.
‘이 얼마나……..무서운……’
나스에는 게이조의 사랑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게 믿어 왔다. 그의 사랑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외도 한 번 하지 않고, 어떤 여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 한 번 낸 적이 없는 남편이었다.
솔직히 무라이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게이조를 떠나 무라이에게로 달려가는 격렬한 것은 아니었다. 무라이에 대한 감정은 설사 게이조가 알더라도 그렇게 책잡힐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남편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잇는 행복한 여자라고 믿고 있었다. 설마 남편이 7년 전부터 자신을 증오하여 사이시의 자식을 기르게 했으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거짓말이야.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니……’
나쓰에는 게이조의 편지에 일단 놀라기는 했으나 도저히 믿을 수는 없었다. 요코가 살인범의 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딸을 맡아서 기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게이조는 분명 루리코의 아버지야 하며 나쓰에는 편지의 모든 내용을 빋으려 하지 않았다.
나쓰에는 다시 게이조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거짓이라는 암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쓰에는 자기 목덜미에 키스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은 키스였는데……’
그러나 만약 게이조가 다른 여성이 한 키스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면 자신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쓰에는 게이조의 분노와 야속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키스 외에 다른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나쓰에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는 게이조의 고뇌 속에서 그의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서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자식을 자신에게 기르게 한 게이조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니…..’
나쓰에는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 명랑하고 똑똑하고 얌전한 아이가 사이시의 자식일 리가 없어.’
나쓰에는 요코의 맑은 눈 속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이상한 빛을 떠올렸다.
‘거짓말이야.’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추녀 끝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디선가 지붕의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일지도 몰라.’
나쓰에는 다시 편지를 읽어 보았다.
무라이와 자신과의 일을 눈치채고도 게이조는 정면으로 추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 내색도 하지 않은 게이조를 생각하자 나쓰에는 이 7년 동안의 밤 생활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목덜미에 무라이 씨의 키스를 받았을 뿐인데 루리코는 살해당하고 게다가 살인범의 자식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길러 왔다. 내가 그렇게 큰 형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것일까?’
나쓰에는 지금은 요코가 어느 사형수의 딸이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시의 딸이어서는 안 되었다.
‘루리코의 목숨을 빼앗은 인간의 딸이라면 더는 키울 수 없는 일이다.’
루리코가 앉아야 할 장소에 어떻게 사이시의 자식을 앉힐 수 있단 말인가.
요코가 아파서 며칠 밤을 한잠도 자지 앟고 간호할 때에도 말없이 보고만 있던 게이조를 생각하자, 나쓰에는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는 내가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한탄하고 슬퍼하고 야속해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이 얼마나 잔인한…..’
그제야 자신에 대한 남편의 증오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악몽과 같은 느낌이 갑자기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나쓰에의 메마른 눈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특별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쓰에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만 남편 게이조가 미울 뿐이었다. 루리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나쓰에가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요코가 아니었던가. 그 요코가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딸이라니. 나쓰에는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자신이 무서운 귀신으로 변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게이조가 미웠다.
균형 잡힌 미모인 만큼 무표정하게 변한 나쓰에의 얼굴은 마치 탈바가지처럼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그 탈바가지 같은 나쓰에의 얼굴이 갑자기 180도로 변했다. 눈을 부릅뜨고 아랫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꽉 깨물었다. 창백하던 얼굴이 점점 충혈되어 붉어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신음하듯이 어깨를 세차게 움직이며 방바닥에 쓰러졌다.
“루리코, 흑흑.”
생명 전체를 쥐어짜는 듯 비통한 울음 소리였다.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딸인 줄도 모르고 요코를 사랑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키워온 것을 루리코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나쓰에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7년 전에 죽은 루리코를 껴안고 울부짖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욱 비통했다.
“용서해줘, 루리코.”
나쓰에는 게이조가 자신이 이렇게 슬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자 이중삼중으로 괴로웠다.
‘그렇게 귀여운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나쓰에도 그것을 믿고 있었다.
‘이제는 요코와도 헤어져야 해.’
그렇게 생각하자 나쓰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친자식 루리코보다도 더욱 사랑스러운 요코였다. 사별하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이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다카기 씨도 요코가 사이시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무슨 원한이 있어 다카기 씨마저도…..’
나쓰에는 다카기가 요코의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 말해 주지 않고 화제를 돌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게이조가 출생 신고를 주저한 이유도, 요코의 머리를 제대로 쓰다듬어 주지 않은 까닭도 지금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 남편도 다카기 씨도 그리고 요코도 모두 나한테서 떠나 버리겠지.’
갑자기 나쓰에는 너무도 외로웠다.
‘도오루와 다쓰코 뿐이구나.’
언젠가 도오루는 요코를 자기 색시라고 하여 게이조한테 크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게이조가 사이시의 딸 요코와 도오루의 결혼을 두려워하여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나쓰에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몰론 호적상으로는 남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법이 인정하지 않는 부부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도오루에게는 역시 요코를 진짜 여동생으로 알게 하는 수밖에 없다. 난 어쩔 수 없이 요코의 엄마로 일생을 보내야만 한다. 아니면 도오루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는 걸까?’
그토록 감수성이 예민한 도오루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쓰에는 울어서 퉁퉁 부어 오른 눈에 몇 번이고 냉수 찜질을 했다. 저려오는 듯한 냉수에 마음까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눈 찜질을 끝내고 나서 나쓰에는 경대 앞에 조용히 앉았다. 결혼한 후로 나쓰에는 자주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았다.
‘설마 이런 심정으로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섬뜩한 정도로 번뜩이는 눈이 자기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잇었다.
나쓰에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여느 때보다 더욱 정성 들여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요코를 더 이상 더 키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토록 사랑하던 아이를 갑자기 떠내 보내면 남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제쳐놓고라도 도오루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요코가 진짜 여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도오루는 대체 어떻게 나올까?’
나쓰에는 아까부터 몇 번이고 같은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눈두덩에 연지를 살짝 발랐다. 이제는 울었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울었다는 사실을 남편이 눈치채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나쓰에는 눈썹을 약간 길게 그리고 입술 연지도 평소보다 정성껏 발랐다.
‘남편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허둥거리는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화장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화장은 여자의 무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나와 무라이 씨와의 일을 용서하지 않고 사이시의 자식을 키우게 했다. 나도 절대로 그런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
무라이와 자기 사이를 오해하여 괴로워하고 있다면 오해하게 그냥 내버려둬야겠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그리고 적어도 남편 앞에서는 요코를 전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몸도 마음도 그를 배신해 보일 거야.’
나쓰에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맹세하듯이 소리내어 대담하게 중얼거렸다.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보았더니, 그 말에는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 있어 언젠가 자신은 반드시 게이조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문득 무라이 야스오의 쓸쓸하고 허무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뜻하지 않은 그리움이었다.
‘7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어.’
무라이의 넓은 이마도, 길다란 손가락도, 약간 구부정한 느낌이 드는 훤칠한 키도 모두 그리웠다.
어째서 7년 동안이나 잊은 듯이 지내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사무치게 그리웠다.
‘요코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야. 루리코 대신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었다고 생각하니 나쓰에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학교 다녀왔어요!”
명랑한 요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요코의 목소리였다. 나쓰에는 숨을 죽였다. 방금 생각하고 있던 무라이의 일 같은 것은 조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목이 탔다. 침을 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침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화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지문이 열렸다. 책가방을 멘 요코의 웃는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너무 예뻐요! 어디 가세요, 엄마?”
요코는 달려와서 나쓰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쓰에에게 뺨을 바짝 대더니 거울에 비친 나쓰에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요코야, 어제까지와 똑같은 요코야.’
나쓰에는 거울 속의 요코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요코는 여느 때와 다른 엄마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나쓰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요, 엄마?”
나쓰에는 그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게이조의 편지를 읽은 것이 꿈이 아니었나 싶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가봐, 그렇죠?”
이렇게 말하고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요코의 손을 잡으며 나쓰에는 말했다.
“요코!”
그녀의 목소리는 까칠했다. 그녀는 요코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잘생긴 짙은 눈썹, 끊임없이 빛나고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 약간 얇은 입술.
‘이 애의 몸 속에 그렇게 무서운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인가?’
“왜 그러세요, 엄마?”
나쓰에의 모습은 요코에게도 심상치 않게 보였다. 요코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고,
“놀러 갔다와도 돼요?”
하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쓰에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격렬한 감정이 나쓰에의 양손에 집중되었다.
“요코! 엄마하고 같이 죽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쓰에의 손이 요코의 목을 잡았다.
“싫어, 싫어.”
요코가 몸을 비틀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쓰에는 요코의 눈에 공포의 빛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싫어, 싫어.”
요코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죽어야 해, 둘이서……”
두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허둥거리는 게이조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쓰에는 뭔가에 씌어 버린 것 같았다. 이상하게 황홀한 심정으로 나쓰에는 점점 손에 힘을 주었다.
게이조의 놀라는 얼굴, 멍하니 서 있는 모습, 그리고 울부짖는 도오루.
“아앗!”
문득 나쓰에는 손을 놓았다.
요코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는 듯이 목구멍을 그르릉거리는가 싶더니 ‘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 요코!”
나쓰에는 얼결에 요코를 껴안았다. 요코도 나쓰에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 죄도 없는 아이에게 대체 나는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가?’
나쓰에는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니 무서워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쓰에와 요코는 서로 얼싸안고 마냥 울었다. 요코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흑흑 흐느끼다가 울고 울다가 또다시 흑흑 흐느끼는 요코가 딴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나쓰에는 사과할 말도 위로할 말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요코는 오늘 일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겠지.’
어른이 된 요코가 어떤 심정으로 오늘의 이 사건을 회상할까 하고 생각하니 나쓰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쓰에는 점심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갔다.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니 요코가 목에 손을 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본 나쓰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요코, 미안하다.”
하고 손을 잡았다. 요코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나쓰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엄마, 왜 화가 난 거예요?”
“화가 난 게 아냐. 아마 엄마가 꿈을 꾸고 있었나 봐.”
“잠을 안 자도 꿈을 꿔요?”
요코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그래, 어른은 잠을 자지 않아도 꿈을 꿀 수 있는 거야.”
나쓰에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런데 꿈속에서 왜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어머! 죽이려고 하더니…..”
분명히 요코 목에 손을 댔던 것이다. 그러나 죽이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나쓰에는 눈물이 치솟았다.
‘미워한 것은 아니다.’
나쓰에는 겨우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요코에게 할말이 없었다.
‘요코는 게이조나 도오루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을까?’
나쓰에는 무엇에 쫒기는 듯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했다.
“요코, 아빠와 오빠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나쓰에는 자신의 말이 비참하게 들렸다.
요코는 의아한 눈으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네, 엄마에 대한 일을 요코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