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쌍피(一打雙皮)다.
남북으로 이어진 늘봉산-정안산-매봉 코스 동쪽 가까이에 하동읍성이 있으니 사적답사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
1)하동읍성(사적 453호)은 조선전기 태종 17년(1417) 양경산(149m)에 축성된 전형적인 연해읍성(沿海邑城)으로 고현성(古縣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계곡을 감싸 쌓은 포곡식 석축성으로서 평지성(平地城)과 평산성(平山城)과 달리 산성에 가깝다.
지금의 고전면 고하리가 읍기(邑基)가 된 이래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기 까지 읍기였다.
그러나 임진왜란(1593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객사, 관아, 향교 등이 불타버려 1661년에 이읍(移邑)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 1,019척, 높이 13척으로 성은 높으나 협소하여 전시에 방비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하동읍성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성곽 개보수가 이루어진 곳에 옹성 형태로 남문이 복원되어 있다.
옹성(甕城)은 성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으로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리는 성곽.
그 안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어 성문을 호위하거나 방어를 강화할 때 쓰인다.
문지 주변에서 와편이 확인되어 기와지붕의 문루에 목제문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동읍성의 발굴은 순전히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덕분이다.
연전연승하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597년 2월 25일 느닷없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왜군에게 적극 공격하지 않았다’는 죄명.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형만은 겨우 면했고, 사면을 받았지만 선조는 백의종군을 명한다.
1597년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5월 26일(양력 7월 10일) 비에 흠뻑 젖은 채 경남 하동 땅에 들어선다.
평사리와 두곡리를 거쳐 하동읍성에 도착한 이순신은 하동현감 신진의 따뜻한 배려로 별채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5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하동읍성은 '백의종군로'의 주요 지점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2)정안산성(鄭晏山城)은 둘레 약 800m의 테뫼식(山頂式) 석성으로 1216년(고려 고종 3)경 정안(鄭晏)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정안이 죽자 자손이 없어 폐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관련유물이 없으니 그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나 정안산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축조수법과 동일하고, 출토된 기와편도 8∼9세기대와 부합하는 등 동시대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한 성으로 판단된다는 것.
따라서 라말여초(羅末麗初)에 수축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정안의 활동연대인 13세기와는 시차가 생기므로 조사가 더 필요하다 하겠다.
기상청은 장마에 접어 들었다고 발표하였다.
전날 일기예보에는 다음날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고, 당일 아침에는 오전 9시에 한차례 비라고 하더니 나중엔 종일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몇 시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일기예보가 무슨 예보고?
비싼 인공위성 띄워놓고 겨우 이 정도일까, 오만 육두문자를 썪어 쫑알쫑알.
우중산행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뼛속까지 빗물이 들어간 데 대한 자기화풀이인 셈이다.
1)양경산 하동읍성
2km남짓으로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2)정안산은 처음 늘봉산을 찍은 뒤 갈록치에서 매봉까지 쭉 뽑은 뒤 빽하여 서릉을 타고 개인마을로 하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악천후에다 코스가 만만찮아 늘봉산을 제외하였고, 우중산행으로 도중에 마치마을로 탈출한 뒤 개인마을까지 걸었다.
파일.
마치마을 입구 노거수가 있는 '마치정'까지 약 9km 남짓. 개인마을까지 철로를 따라 걷는 길이 약 1.2km.
매봉까지 가서 개인마을로 내려간 사람이 없었다면 마치마을에서 산행을 종료했을 것.
<고도표>. 업·다운이 잦은 편.
<국제신문: 용소~횡천>
고하 보건진료소 옆 '주성마을경로당'앞에 버스를 댄다.
주성문화관광마을 안내도.
하동현이 임진왜란으로 옮겨지기전까지 이곳이 행정중심지였다. 성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하동읍성이 재탄생된 건 '이순신 백의종군로' 덕택이다.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나 서울에서 초계(합천)까지 먼 길을 이동해 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했다.
따라서 백의종군은 4월 사면 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 받을 때까지 4개월의 여정을 일컫는다.
최근 경상남도에서 의욕적으로 개발하는 길이 바로‘백의종군로’다.
이 길의 경남 구간인 하동~진주~산청~합천에 이르는 161㎞의 코스와 이순신이 이틀을 머물렀던 하동읍성이 '백의종군로'의 주요 지점이다.
입구의 이정표.
바라보이는 '주성마을경로당' 좌측이 하동읍성 가는 길.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운동 기념비.
고전면과 금남면 애국 청년들이 33인의 민족대표를 본떠 33명의 일신단을 조직하여 1919년 4월 6일 주교리 배다리장터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튿날 아침 노약자들을 지소마을 뒷산으로 피신시키고, 이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말라며 스스로 체포된 사건이다.
이순신 백의종군로는 하동읍성으로 올라간다.
고하리는 조선시대 하동군의 읍치였으므로 옛 하동을 뜻하는 구하(舊河) 또는 고하(古河)라 하였고,
주성마을은 '배다리(주교 舟橋)'와 읍성의 남문동 성내(城內) 마을을 합쳐 주성(舟城)마을이라 불린다.
곧장 이어지는 포장길 끝에 둔덕같은 나즈막한 산이 양경산으로 하동읍성이 있는 곳.
복원된 성곽 앞에...
하동읍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탐방로는 이어진다.
나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위해 우측으로 가면서 좌측 복원된 남문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다.
안내판에는...
하동읍성 주변 약 2km구간이 고전역사탐벙로라고 한다.
데크계단을 오르면...
양경산(149m).
앞서간 일행들이 우측 도드라진 곳에 올라있다. 양경산이다.
뒤따라 올랐더니 무너진 성돌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구간인 듯.
이대로 보존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꾸만 훼손될 건 불보듯 뻔하다.
일행들은 200여m 떨어진 지형도 상의 양경산(135.2m)으로 봉따묵기 떠났으나...
나는 이 봉우리에 한마음산악ㅎ히 시그널 뒷면에다 양경산(陽慶山)을 쓴 뒤 아카시나무에 걸었다.
자료에는 이 봉우리가 149m이니 저 아래 봉우리(135.2m)보다 더 높다.
흘러내린 성돌들.
양경산에서 내려와...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듯 황토세맨 포장길은 미끄럽다.
반시계 방향이지만 어느 방향으로 돌아도 무방할 것.
목책을 건너...
복원된 성곽으로 올라 내려온 지점을 바라보다...
우측 아래를 내려다 보니 복원된 남문이 보이지만 문루(門樓)와 성문(城門)은 복원이 되지 않았다.
당겨본 남문의 옹성(甕城).
가까이 다가가 옹성을 살펴보다...
옹성 밖으로 나와 보았더니 남문 밖은 물이 내려가는 수로로서 자연스레 해자(垓子) 구실을 하고 있다.
성 위에서 둘러보는 남문 주변.
남문의 옹성.
다시 출발지점인 주성마을경로당으로 돌아오자 길 건너에...
제법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제 정안산을 가기위해 10여분 차량 이동을 해야 한다.
버스가 멈춘 곳은 늘봉산 들머리인 '하동군 고전면 범아리 산153-4' 공동묘지 입구.
일행들은 늘봉산을 오르기 위해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가지만 우리는 도로를 따라 200여m 이동,갈록치로 바로 접근을 한다.
늘봉산은 제외하기로 했기 때문.
나중엔 뿔뿔이 흩어져 버릴 4명이 일단은 함께 걷는다.
헐~ 버스가 우리를 앞질러 올라가고 있넹. 이럴 줄 알았으면 차에 타고 있을 껄.
고갯마루인 갈록치재.(해발 150여m)가 코 앞이다.
돌아보는 지점 우측 펜스(안내판) 옆으로 우리 일행들이 늘봉산을 찍고 내려올 가파른 산길이 보인다.
갈록치 등산로 입구엔 정안산 5.8km 이정표와...
정안봉 등산로 안내도가 서 있다.
코스를 크로즈업 시켜보니 갈녹치재에서 장안산까진 5.8km로 3시간이 걸린다는 안내판.
이순신 백의종군로 안내판 뒤로...
임도급 산길이 우리가 걷는 길.
무덤을 만나면 곧 'ㅓ'자 갈림길. 우리는 직진 능선으로 바로 붙기로 하고...
호기있게 치고 올랐다가 빗물 머금은 잡목과 가파른 경사도에 돌아서고 말았다. 만약 그대로 올랐다면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됐을 것.
되내려와서 좌측 사면으로 돌아 완만한 능선으로 붙기로 한 것.
사면길은 유순하여...
어렵사리 좌측 능선에 붙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 되돌아 내려오지 않았다면 올라왔을 산길을 좌측으로 돌아본다. 거리를 따져보니 제법 둘렀지만 그만큼 수월했던 것.
이후 피톤치드 어쩌구저쩌구, 룰루랄라~~
이미 커버린 고사리 지대. 무덤이 있는 곳이다.
뉴 여성 심마니가 태어났다. 싸리버섯 채취로 한 재미본 미옥 씨.
바위지대에선 우회.
유순한 산길.
무덤이 있는 △436.4m봉엔에서 잡초를 휘저으며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철탑을 지나면...
곧 생태교. 앞서간 사람들은 도로로 내려갔다 도로를 건너 올라왔지만 우리는 가파른 생태교로 내려서서 산짐승처럼 생태교를 건넜다.
이정표를 만나는 지점은...
용소보에서 오는 길로 국제신문이 오래전 올라왔던 길.
정안산 0.5km 남은 지점인 모구재. 구학 갈림길이다.
정안산이 얼마남지 않은 듯.
돌무더기는 정안산성의 성돌들.
앞서간 미옥 씨한테 전화를 해 정안산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그녀는 정안산 정자에서...
바다에 뜬 섬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의 돌비를 확인하고자...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돌비는 두 개.
그 중 한 개에서 엉거주춤 쑤구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다리던 미옥 씨도.
정자에서 잠깐 쉬다...
오보무중(五步霧中)인 하산길을 찾아...
횡천 횡보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횡천은 오래전 국제신문 가이드의 날머리가 있는 지점.
깨진바위를 지나고...
밧줄구간을 만난다.
밧줄은 가파른 내림길을 안전하게 내려오게하는 난간역활을 하는 것으로 제법 긴 구간.
그 구간에서 안전밧줄을 월선하여 맑은 날이라면 천혜의 조망처가 되었을 조망바위에 올라서 보았다.
내려서서 돌아본 '등산로' 이정표. 등산로는 능선을 가리키고 있으나 좌측 사면으로 길이 반듯하다.
철탑을 지나자 전화가 걸려온다. 다시 만나는 두 번째 철탑에서 좌측 사면으로 길이 있으니 빨라 오라는 이야기다.
미옥 씨와 권 형님이 기다리고 있는 두 번째 철탑.
마치고개에서 마치마을로 탈출을 계획하고 있던 우리들은 이 지점에서 마치마을로 탈출하게 된 것.
마치고개까지 가는 덴 몇 번의 업다운을 더 거쳐야하지만 이곳에선 수월하게 탈출할 수 있는 것.
사면을 난 길은 나름 정비된 길.
좌측으로 운무가 걷히는 산정을 올려다 본다.
얼마가지 않아 우측으로 반듯한 임도가 보이고...
우리는 임도로 내려서게 된다.
임도는 완만하게 내리막으로 내려가고...
뒤돌아보니 우리가 내려선 얕은 능선자락.
임도를 걷다 농장인 듯 닫힌 문앞 사거리에서 우측 내리막으로 걷는다.
비옷을 입으면 비는 맞지 않으나 땀에 흠뻑 젖어버리니, 이판사판 아예 벗고 걸어보자.
철탑을 지나고...
마을 한복판 '젊은이들이 살기좋은 마을'을 모토로 예쁜 미끄럼틀이 놓여져 있다.
마치노인정은...
마치정 정자와 400년이 넘은 팽나무 가까이에 있다.
마치는 말티재가 줄어 말티로 불리다가 다시 마치(馬峙)로 불려진 것이고, 학동(鶴洞)은 마을 앞 소나무 숲에 백로가 많이 서식해 붙은 이름.
행정구역 개편(1914년)으로 내횡보면 인동(仁洞)·마치동·학동·개인동(開印洞)·하남동(下南洞), 적량면 상속산동(上束山洞) 일부가 통합 횡천면 학리(橫川面 鶴里)가 되었다.
마치정 정자 앞의 패널집은 우리 한마음산악회 전영관 씨 농장 시설. 농막치곤 4성급 호텔이다.
흠이라면 부산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
마치정(馬峙亭) 현판. 보호수는 수령 400년이지만 1982년도에 작성하였으니 얼추 440년이 된 것.
이제 처음 계획했던 날머리인 개인마을로 걸어야 한다. 이미 매봉으로 간 일행들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산행을 종료 버스를 대기시킬 수 있을 것.
개인마을로 가는 길은 경전선 철로를 좌측 겨드랑이에 끼고 걷는 길.
신설 2번 국도를 아래로 통과하여...
일행들은 철로를 건너 차도를 걷지만 나는 내내 경전선 철로를 좌측 겨드랑이에 꼈다.
개인마을이 보이고...
철로 건너 학유정 정자가 있는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우측으로 올려다 보니 도드라진 봉우리가 매봉(?). 매봉은 국제신문 개념도에서 보이는 이름.
중앙선이 그어지지 않은 1차선 도로이니 대형버스가 대기하는 장소로는 오로지 이곳만이 유일할 것.
정자 뒤로는 빗물로 수량이 불은 횡천강이 있어 씻기에 적합하였다.
팔각정자로 돌아온 뒤 현판을 올려다 보다 크게 당겨 잡았다.
학유정(鶴遊亭)이다. '학이 노니는 정자'이니 우리는 신선이 된 것.
戊子夏(무자년 여름에...)/ 頑石書(완석이 쓰고...)/ 木石金信秀刻(목석 김신수가 새겼다).
당시엔 '완고할 완(顽)'자를 몰라 집에 와서 옥편을 뒤적여 알게 된 것. ㅋㅋ
철로 건너 개인마을 경로당이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거짓 정보에 속아 조정은 이순신에게 그를 생포하라 명하였다.
이순신은 거짓정보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된다.
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 3일 한양을 떠나 하동을 거쳐 6월 4일 합천 초계 도원수부 초입까지 걸어간 길이 '백의종군길'이다.
원균이 참패 전사하자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해상권(명량대첩)을 회복했으나 노량해전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빈궁과 영달은 오직 저 하늘에 달렸으니 (궁통지재피창천 窮通只在彼蒼天)
모든 일은 모름지기 자연에 맡기리라 (만사료수임자연 萬事聊須任自然)
부귀함은 때가 있으나 홀로 차지하기 어려운 법 (부귀유시난독천 富貴有時難獨擅)
공명이란 임자가 없어 번갈아 서로 전하는 것이네 (공명무주체상전 功名無主遞相傳)
마침내 멀리 갈 때는 천천히 걷고 (종당원도의서보 終當遠到宜徐步)
처음에 먼저 오를 때는 넘어질 것을 염려하라 (초약선등공지전 初若先登恐躓顚맥
도성의 누런 티끌 속을 헤쳐 나아갈 길에 (구맥황진전거로 九陌黃塵前去路)
남의 뒤를 따라가되 (말을) 채찍질하지 말라 (차수인후막가편 且隧人後莫加鞭)'
<새로 발견한 이순신 장군의 한시(漢詩) 2편 중에서... >
카페 게시글
산행기(사진)
1)양경산(149m,하동읍성),2)정안산(447.6m,정안산성)
산마루
추천 0
조회 309
20.06.29 20:54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