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국적자가 된 한국인 외인부대원 전병일
10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곰PD는 한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곰PD가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이름과 나이뿐이었죠. 남자의 이름은 전병일, 나이는 70대가 가까웠으리라는 어렴풋한 정보만 가지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파리 한인회 원로들과 여러 기관들을 수소문하고 있었습니다. 1998년 당시 IMF 관리아래 구조조정의 한파를 겪고 있던 한국사회는 극심한 구직난을 겪고 있었고, 암울한 경제상황은 청년들에게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몇몇 스포츠 신문들이 마치 외항선 선원 모집 광고를 하듯 해외취업의 한 방법으로 프랑스 외인부대를 소개했고, 1년 남짓한 시간동안 외인부대에 입대한 한국 청년들의 숫자는 1백 명 선을 훌쩍 뛰어 넘고 있었습니다. (전체 규모 8천 5백 명의 외인부대 규모에서 1백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고, 실제 이 숫자는 아시아 국가로서는 가장 많은 숫자였습니다) 당시 곰PD는 ‘프랑스 외인부대의 한국인들’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곰PD가 그토록 애타게 수소문했던 전병일 씨는 1950년대 외인부대에 입대한 최초의 한국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달 가까운 취재기간에도 그에 대한 어떠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끝내 프로그램에는 그에 대한 부분은 빠져서 방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4월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의 기사는 국적 없이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는 한국인 외인부대원 1호 전병일 씨의 사연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당시 곰PD가 취재했던 내용과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를 종합하여 재구성한 글입니다.
자신의 외인부대 입대 확인증을 들어 보이고 있는 전병일 씨 (사진=전진배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전병일 씨, 올해 일흔 아홉의 그의 비극은 반세기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함경남도 함주군 주북면 흥덕리가 고향인 전 씨가 홀로 남하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인 1950년 10월,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군과 UN군의 전투가 벌어질 무렵이었습니다. 함흥에서 배를 타고 주문진에 도착한 그는 다시 포항을 거쳐 대구까지 내려갔습니다. 남한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던 전병일 씨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에 입대합니다. 3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전 씨가 배치된 것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프랑스군 대대였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지원자로 이루어진 보병 1개 대대를 한국전에 파병하고 있었고, 프랑스 대대는 미 제 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미 2 사단에는 프랑스 대대 이외에 태국군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도 배속되었죠. 한국 국방부는 미군과의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미군에 ‘카투사’ (KATUSA,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 - 미군에 증강된 한국군 요원) 병사들을 배치했는데, 프랑스 대대에는 전병일 씨를 포함한 60여 명의 한국군 병사가 배속되었습니다. 전 씨는 중대 본부 행정 요원으로 프랑스군을 따라 단장의 능선, 지평리 전투 등에 참가했습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될 당시 전병일 씨는 하사로 진급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남한이 객지인 그에게는 달리 갈 곳이 없었습니다.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들과도 영영 이별이었죠.
한국전에 파병된 프랑스 대대.
그 때, 전 씨는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군 장교로부터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함께 인도차이나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독립동맹’ (베트민)이 일제 봉기해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한국에 파병된 프랑스군 대대도 진압을 위해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앞두고 있었던 참이었죠. 살길이 막막했던 전병일 씨는 프랑스군을 따라 인천항에서 베트남 행 수송선에 올랐습니다. 전 씨 이외에도 프랑스군을 따라 베트남으로 향했던 한국 군인은 모두 10여 명이었습니다.
디엔 비엔 푸에 낙하산으로 투입되는 외인부대원들.
베트남에 도착한 전병일 씨를 비롯한 한국 병사들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규군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외인부대에 현지입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한국인 외인부대원들이 배치된 곳은 베트민 군과 한창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디엔 비엔 푸’ (Dien bien phu) 전선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비엔 푸를 포위한 베트민군은 5개 사단을 투입해 프랑스군의 목줄을 조여 왔고, 비행장과 거점을 차례로 상실한 프랑스군은 반년 만에 항복을 하고 말았죠. 특히 외인부대는 이곳에서 1천 5백 명이 전사했고, 대부분의 한국인 대원들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행히도 전병일 씨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54년 베트남에서 철수한 외인부대가 배치된 곳은 역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였습니다. 이곳에서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외인부대는 알제리 독립군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죠. 생사를 넘나들며 전투를 치르던 그에게 1957년 12월, 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4년간의 군복무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국적과 함께 훈장이 상신된 것이죠. 하지만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전 씨를 시기한 몇몇 병사가 그를 ‘알제리 독립군과 내통 한다’는 혐의로 군 당국에 밀고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의사소통도 힘든 상태에서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결국 외인부대를 탈영하고 맙니다. 2년여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 모로코에서 체포된 전병일 씨는 프랑스로 압송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됩니다. 프랑스 국적과 훈장도 박탈되어 버리고 군 형무소에서 1년여를 복역한 뒤 1961년 6월 풀려난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알제리에 파병된 외인부대원.
다행히 외인부대 시절 알고 지냈던 사람의 소개로 파리의 밀가루 공장에 취직한 그는 10 여 년 동안 이곳에서 트럭 운전기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나마 배를 곪지 않고 잠자리까지 해결할 수 있어서 만리타향 땅이었지만 지낼 만 했습니다. 1972년부터는 이 밀가루 공장의 부설 제빵학교의 직원으로 일하며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7,80년대의 남북한 분단 상황은 그에게 남한도 북한도 선택할 수 없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프랑스 체류 허가서에는 ‘북한인’으로, 참전증서에는 ‘남한인’으로 기재되어 있죠. 남들처럼 가정도 꾸리고 싶었지만, 무국적자 처지인 그와 인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1990년 제빵학교에서 퇴직한 그는 파리 근교 ‘부르도네’의 한 하숙집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말도 거의 잊어 버려 한국 사람을 만나도 의사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그이지만 58년 전 고향의 기억만큼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모형제를 두고 혈혈단신 남하해,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50년이 넘는 세월을 무국적자로 살아온 전 씨에게 남은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고향 땅을 한번 밟아 보는 일입니다. 현행법은 그를 오갈데 없는 무국적자로 만들었지만, 그가 타국에서 홀로 겪어내야 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한다면 전병일 씨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작은 위로일겁니다.
전병일 씨가 ‘남한 사람’ (COREE DU SUD)으로 기재된 참전용사 보훈증<위>과 '북한 사람'(COREE DU NORD)으로 적힌 프랑스 체류증<아래> (사진=전진배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첫댓글 전설의 외인부대 잘 읽었음. 전병일 씨의 무사귀향이 이루어 지기도 빌겠고...
우리민족 역사에 이런분들이 한두분뿐이게 우리민족 역사에 이런분들이 한두분뿐이겠나 싶구나.. 남일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