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8(연중 1주)/ 이사42:1-9, 사도10:34-43, 마태3:13-17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우리는 언제나 성당에 들어올 때면 성수를 바르며 “주여, 나를 씻기시어 내 더러운 죄를 용서하시고, 처음 세례 때의 은총을 잘 보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바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세례의 은총을 늘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예수님 위를 휘돌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우리에게 주어질 은총과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바울로는 이 특권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신조들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던져졌고, 화형을 당하고, 까타꼼 동굴에서 평생을 지내면서 믿을 지켜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물려받을 영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두 가지의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는 물려받을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로서 받을 유산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물려받을 유산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 아시겠습니까? 사도신경을 보면 그 비밀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믿나이다. ...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 받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야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시편27:1)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시편23편)
이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아들과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내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내 삶을 치유해 주시고, 내 삶을 축복해 주시고, 그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이란 노래를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이 노래에 대한 간증을 듣고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시는 구나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이 노래는 오빠 윤향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입니다. 그 당시 윤복희는 이혼과 인기 추락으로 인해 파탄을 맞이했습니다. 이 충격으로 폐인이 되어버린 동생을 바라보며 윤향기는 기도합니다. 하느님, 제 동생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이사야 41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그는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문을 써내려갑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그리고 피아노 앞에서 이 기도문에 곡을 붙이고 흥얼거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방안에서 폐인이 되어 누워있던 윤복희씨가 이 음악을 듣고 방에서 나온 겁니다. 오빠는 놀랐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동생은 오빠의 피아노 반주에 노래를 시작합니다.
윤향기는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괴로울 때 위로해주고, 험한 길을 함께 가 주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어린양이십니다. 우리가 성찬에 포도주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라와 같은 쓴 우리의 인생을 단 맛으로 바꾸어 주심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까지 나와 함께 해주실까요? 세상 끝 날까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음부의 고통 속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셨습니다. 마치 시궁창에 빠진 진주를 꺼내기 위해 시궁창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내 마음에 드는 아들”입니다.
전자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후자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을까요?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 아들일까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는 아들입니다. 주님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으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동시에 “마음에 드는 아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에 드는 아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첫 번째 비밀이 바로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마음에 드는 아들”로 살아가기 위해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언제나 지켜야할 삶의 지침입니다.
정채봉 선생님의 글에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영혼은 썩게 합니다.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늘 회개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님의 지침이요, 그렇게 살겠다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때문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회개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회개는 세례 받을 때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 다하는 날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 달린 우편이 강도처럼 마지막 죽은 순간까지 회개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만이 사탄의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회개와 반성을 착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와 유다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유다도 주님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배반을 반성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기까지는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를 은 30냥에 판 것 때문에 애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자기의 고집대로,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닙니다. 날이 새기 전에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이나 스승을 배반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애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다른 점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돌아섬이 회개입니다. 아무리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고 잘못했다고 뉘우쳐도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고집을 꺾고 돌아서는 회개가 없다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세례란 회개의 은총을 기억하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자신의 잘못된 삶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돌아서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다음은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순종의 서약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예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 순종이 없이는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요한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지금 세례자 요한이 하고 있는 행위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께서 미천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은 내 자신의 영광, 자존심을 버리고 진리 앞에 순종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아들이 될 때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여기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만국의 빛이 되는 자가 누구입니까?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누가 세례는 받았습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가겠다고 순종서약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의 은총을 늘 기억하고 간직하며 살아가십시오.
세례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세례의 은총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십니다. 이것만 기억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환란과 유혹도 감히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