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밀양시장애인협회 청도면 분회장님의 권유로 적게 되었다
예병화의투병체험수기 정상인으로서의 나의 추억들
나는 밀양시의변방 청도면 구기리에서 정미소를 세우신 조부모님 밑에 농촌지도사로 공직 생활하신 아버님 아래 삼남일녀의 사형제중 장남으로 태어 났다.
우리는 공부하라는 소리만 들어면서 자랐다
맞이인누나는 동생들 때문에 처음에 중앙대약대를 들어 가서 졸업 하고 대학원을 진학해서 1년다니다 처음 목표를 세운 의대에 편입해서 지금은 전공의가 되었다. 나는 진주 경상대학교 농과대학축산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어서 학부 졸업 하고, 박구부 지도교수님밑에 축산가공학전공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바로 밑에 동생은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항공우주기계공학부에 들어가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중이다 막내는 아직 경남대학교 경영학부에 다닌다. 이처럼 우리 형제들은 어른들의 기대와 뒷바라지에 보답 하듯이 사 년제대학에 진학 했다.
나의 대학생활
나는 대학생활이어떻다는것에대한사전지식 없이 성적에 맞추어서 담임 선생님께서 권하시는 대학에들어 가게 되었다. 그래서 학부1년차에는 등록금을 아끼는 방법은 학교 시설물을많이이용하는것과 장학금수혜를 받기 위해서 공부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많은 선배들과 여 러 실험실들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선배의 권유로 일학년여름 겨울 방학을 제주도에서 돼지를 키우면서 실습 겸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내가 갖고 싶은 카메라와 컴퓨터를 구매 했다.
날개잃은새로다시태어나든날 나는1999년12월21일(동짓날)내나이29살 석사학위 논문 마무리중 대학교 실험실에서 세미나중 쓸어 졌다.오전 10시경 세미나실에서 교수님과 실험실 선후배간에 세미나를 하다 졸고 있는 나를발견하신 교수님께서 일어나라는말씀에 일어났어나 왼쪽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졸리 듯이 왼쪽으로 쓸어지는 나를선 후배들이 부축해서 자리에 앉혀두자 정신을차린 나는 다시 일어서기를시도하다 구토와 함께 또 쓸어지자 주선태교수님께서는 나의상태가 뇌졸증인것을 알아체고 119에연락하라고 했다 나는 후배들에게둘러 쌓여서 삼층인실험실을 나와 1층건물밖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상황에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것이 위험하다 생각들어 내발로 갈테니 신발(슬리프)을 가져오라고 소리 쳤다. 그리고는 구급차에 실려져 대학 병원으로갔다는 기억에서 멈춰 있었다. 응급실에서 의 기억은 없다. 응급 수술을 나는 받고, 부모님은 밀양에서 연락 받고 오시는 중이었다. 나는 신경외과팀에 의해서 수술이 거의 자정넘어까지 이루어 졌다. 수술 도중에는수술팀이포기하겠다는 것을 박구부 지도교수님의 설득으로 계속 수술이 진행되었다는 얘기를 정신을 차린뒤 에야 알았다. 400cc혈액이12봉지나 수혈되는 대수술이었다고 한다. 한종우집도교수님이포기하겠다는것을 설득하기 위해 같은과 선후배 대학원생이 수술실을 애워싸는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나는 수술실을 나와서 중환자실에서 기도가절개 되어가레를 인위적인장치에 의해서 제거받아야했기에 말을할 수 없는상태에서 고통을줄이고자 십여일을 잠만 잤다고 한다. 면회 시간에 실험실 후배들과 엄마 누나,동생이 와서 마비된 내왼쪽손발을맛사지했다고 한다.나는 2주후에 깨어나서콧줄(음식을 삼키지못하므로 위까지호스를 삽입하여 주사기로음식물을삼키게되었다 양치도 간호사들에의해서 강제로 받게 되었다.절개된 기도로는 가래소리가 그렁그렁나면간호사들이 썩션장치로뽑아 냈다.이주후의식을 차린후나는 이인실의 일반병실 신경외과 병동으로 옮겨져 누나와 동생 엄마의 보호하에 놓이게 된다. 누나는이때 의사고시 후 전공의과정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고 동생도 석사졸업을 앞두고있어서약간의 시간적여유가있어서 나를간병할 수 있었다. 사고전 나는185의키에 90여킬로그램의 거구에다가 좌측 편마비라서 혼자서는 돌보기가 힘들어 보호자가 항상 둘씩 필요한 상태였다.가래 제거와 대소변때문에기저귀를차고 있어서 몸을 돌려 눕히고 시간에맞춰서 썩션하고 자세를바꾸기위해서는 두사람이 힘을 모아야했다. 200년도에는 의약분업제도시행을 앞두고 의사들의 대모로 대학병원에서도 진료차질이 생기고 있었다.누나와 동생은 나와 의사소통을 위해서 스케치북과매직을가져와서 내게 글로 의사표현하라고 했다.아버지는 친구분의 도움으로 내게 필요한 휠체어를 얻어 오셨고 할머니는 혼자서계시거나 아버지와 같이 밀양에 계셨다. 나때문에 설날에도 우리 가족은 진주와 밀양으로 헛어져 있어야 했다. 일과시간후에는 실험실 식구들이 찾아와 학교소식을 얘기해 주었다.미처다마무리못한 내석사학위논문은 동기인 선진이가 책으로 만들어서 제출해 주었다.
장애극복을위한가족의 노력
나의 뇌출혈로 인한 병원에서의 수술과 입원치료는곳다가올 설날에 온가족에게 입에서 입으로소문이 났고 심지어 청도면에서 나를 모르면 간첩이라할 수 있을 만큼 소문이나 있었고, 많은 고향친척과 동내분들이 부모남과 내가 있는진주 병원까지오셔서 용기잃지 말라면서 격려해주시고 갔었다. 나는그때의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주위에서 누나와 부모님의 병상일지에 기록과 뒷얘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그래서 나는 고향에서 산책하면서 걸어다닐때는 내게 말을 붙여오는 분들이 많아서 들과동내로 내 기억을 쫓아서 걸어다니고는 했다. 재활치료에는 운동이 최고라는 생각에서였고, 또한 나도 사회에 필요한무엇인가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것도 있었다. 재활치료라는 핑게하에 지팡이를 짚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나를보고도 격려해주신 가족과 특히 할머님께감사를 지면으로나마 남기고 싶다. 할머님의 충격은 처음에 엄청난 것이었다. 내가 수술받고반신불수가된 사실은 아들인아버지를 통해서소식 듣고 계셨다.할매는 내가중풍에 걸린사실을 직시하시곤 사람이되겠냐면서 걱정하셨다고한다. 그리고 사람안될거같다는판단을 하셨는지 내 옷가지들을태울것을명하셨다는 이야기를나중에 듣고할머님의충격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은할머님말씀을잘따를려고애쓰는손자이고 싶지만 할머님의 기대에 100%만족은 못드리지만 잘해드릴려고 노력중이다. 병원에서의 재활치료에는 항상곁에 엄마와 형제들이 함께 했었다. 주로 침상을지키면서 운동 독려와 수발은 병우동생이 도맞아서 해주었다. 처음에는 새수와 양치질 그리고 병원치료일과표에 맞추어서 나를 휠체어에 태워서 각 물리치료실을 시간에 맞추어서 이동 시켜 주었다. 밤에도 몇 번씩일어나서 나의 침대위 이불과 불편한곳이없는지 살펴주었고, 초기에는 소변을받아낸다고 잠도많이설쳤다. 길이가맞지않는 간이침대에서의 잠자리가 불편해서병실바닥에 야외용 돗자리를 깔아서 자는동생이안서러워서 오후에는 내가침대를 조금양보하기도했었다. 동생의 노력과 격려덕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사람구실을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아마 병원에서 최고 수준의 간병인들을대동한 환자는나였을 것이다.당시 인턴생활하든 누나가 자주병실에 왔었고 24시간 서울대 대학원다니든 동생이붙어있고, 엄마가 항상인근에 계셨다. 재활병동에서는 다들처지가비슷한 환자들끼리여서 서로들 정보를 교류하면서 치료 과정이 어떻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두려움을줄일 수 있었다.의학적 지식에 대한궁금증은 누나를 통해서 쉽게 풀이해서들을 수 있어서 난 이해가빠르고 치료에 매우협조적인 환자가 될 수있었다. 처음 지팡이로걸을수 있었을때부터는휠체어를접어두고는걸어서물리치료실과병원 밖 산책도 할 수 있었다.병원에서의재활치료는 두달만에 거의종결 되었다. 걸어다니니 퇴원하라는 권유가 있었다.이때나는누나가공부하든 아주대병원앞 아파트로 퇴원해서 다음단계의 치료를 기다려야 했었다.재활치료중 밝혀진내오른쪽시력 회복치료와 외삼촌께서 강원도홍천에서의 침술원생활을 권유받아서 한달간의 일정으로 엄마와함께나는수원에서 길을 떠났다.동창침술원이라는곳에서엄마와단둘이숙식하면서아침저녁으로침을맞고, 엄마와침술원주변동내를산책도하면서시골에적응하는훈련을받았고 나보다더한장애에도훌륭하게사회에적응하신 침술원원장님을만날수있었다.원장님은시각장애인이지만부러울만큼 훌륭하게사회적응하셔셔살고계신것같아서장애인도보람되게살수있다는것을생갓할수있었고, 침술원에서도 동병상연의환자들과서로정보교환으로희망이라는작은불씨를맘에품게되었다.강원도는완전시골이라서 내가 수원에서밀양집으로갔을때적응하기쉬울것이라는외삼촌의깊어신배려에서엄마와나는이장애극복을위해서보내졌든것이다.나는처음엔유배라고생각했어나,지금은외삼촌의깊어신배려를고개쑥여감사드려야한다고생각한다.침술원생활이끝나기전에 아빠가 밀양에서나를만나볼려고12시간걸려서홍천에오셨다.예전에아버지의발령지로돌아다니면서세방살이하시든기분이셨는지밀양집에서새벽에나셔서서 홍천에한밤에도착하셨다.이러한노력에나는침을맞을때의고통도이꽊물고참아야했다.한달후에는안과검사가있어서 다시수원으로옮겨서 안과와재활치료와장애인등록을위한진단서등의필요한서류와앞으로의예후에관한자료와자가치료용도구를구비해서밀양집으로돌아가기를기다렸다.이때누나의남자친구를소개받았고, 앞으로자형이될사람이라생각했었고, 할머님의걱정과 고모부님의배려로나는자가용으로편하게수원에서밀양집으로병원생활을 접고내려올수있었다. 앞으로의 치료과정을 일단1년안에눈수술하고, 머리뼈넣는 수술 등을남겨두고있었다.두개골접합술은 뇌수술 만 일년만에 했었다. 눈 수술은 머리수술후재활치료종결1년후에아주대병원에서받았다이때는누님의결혼준비와겹쳤지만병원에아는의사두명에많은혜택을누릴수있었다. 두 번의수술은내가어느정도일상생활을하는지라 침상을지키는보호자는엄마한명만으로도 충분했었고 엄마의 애간장을녹이는기다림의시간들이 이어졌다. 두 번의수술은 다 잘 되었지만나의시력회복은시간을두고기다려보자고 했다. 머리뼈가들어가서 이젠 넘어져도 어느 정도는안심하겠다는생각이들어서 나의 외출이 가능하리라 생각 되었다. 밀양에와서도 아빠가 나를 태워서 상동면에있는삼세한의원이라는곳에서 침을맞고 밀양병원재활치료를받을수있도록해주셨다.이렇게치료를받다가나는침은그만맞기로하고 혼자서 버스를타고밀양병원 물리치료실을 주기적으로 가서 운동과물리치료를 받고 장애인 등록도할 수 있었다.
장애인으로서의나의인생 방향에 대한 고찰
지금 나의가장큰 사명은장애 극복과사회즉응 이라 생각 한다. 죽어가는 나를 다시 살려 주신 많은 선생님들과 부모 가족 여러분들께감사하는맘으로밝고 희망적으로 사회에 즉응하여 살기를 원한다.이제는 경제적인 할동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동안취득해둔 자격증과 학력으로 내가 할만한 일을 찾아서 내가 받은 사회로 부터의 사랑을 환원해야 할 것이라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