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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김춘수 시인은 ‘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 인간은 언어 능력이 있어 자기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모든 사상(事象)에게 이름을 붙인다. 해, 달, 별, 외롭다, 그립다, 아득하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되 함부로 여서는 안 된다. 공자님도 ‘정명론(正名論)’, ‘올바른 이름’을 주장하셨다.
“명(名)이 바르게 서지 않으면 말(言)이 바로 서지 않으며, 말이 서지 않으면 일(事)이 이루어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禮)와 악(樂)이 일어나지 않고......”
그중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땅의 이름, 지명의 중요성은 아래와 같은 까닭에 있다.
"역사적으로 지명은 한 고장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특징이나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특성에 의해 명명되어 왔기 때문에 오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지질과 산업,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지리학적인 특성은 물론 유물이나 유적, 제도와 인물 등 지명에 얽힌 전설과 함께 한 시대의 역사가 숨쉬고 있으며 사라진 풍속이나 생활 습관도 살필 수가 있다." ―《지명이 품은 한국사》 (이은식, 타오름. 2010)
"지명은 인간의 지각 과정을 거쳐 땅이 장소로서 존재하게 하는 언어적 기호이다. 장소는 지명을 통해 유일적인 정체성을 지닌다. 또한 지명은 공간을 표상화하는데 있어 사용되는 도구이다. 인간은 지명을 통해 공간 구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여 이를 일상에서 사용한다. 지명을 수록한 지도에서 읫 소통 기능이 중요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지명유래집》 (국토지리정보원, 국토해양부. 2011)
2004년, 내가 이 대야마을로 이사를 왔다. 마을 뒷산 이름이 ‘감토산(甘土山. 518m)’이었다. ‘달 감’, ‘흙 토’, ‘메 산’, 흙이 단 맛이 나는 산? 어떻게 이런 이름이 지어졌을까? 궁금했다. 은퇴 후 화려한 잉여 인생을 누리는 자가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그래서 이런저런 자료를 뒤지고 요모조모 궁리를 해 보았다.
아주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가보자. 기원전 2만 년 전 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한다. 그때는 인구분포도 희박했고 조직적인 사회 체계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한 혈거 집단끼리 띄엄띄엄 한 마을씩을 이루고 사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때는 공식적인 ‘지명’이 필요가 없었다. 마을 사람끼리 그저 거주지 부근의 지형지물을 ‘앞산’, ‘뒷여울’, ‘큰고개’, ‘새터’라고 부르면 되었다. 공식적인 문자가 없었기에 기록할 방법도, 필요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 체계가 확립되고,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는 행정구역을 나누고 지명을 붙여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원 전 1~2세기에 한자가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한글 창제는 800여년 후이므로 공식 기록 문자는 당연히 한자였다. 관청이나 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붙이는 큰 마을, 큰 산, 큰 강은 한자 작명에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전국에 산재한 수없이 많은 마을, 산, 강들의 이름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그 지역 사람들이 부르던 순우리말 이름을 빌려 한자말로 바꾸는 작업을 거쳤을 것이다.
자, 이 작업에 적용되는 두 가지 원리를 간단히 설명하자. 하나는 뜻으로 옮기는(차의:借意)것이고 하나는 소리를 빌려(차음: 借音) 옮기는 방법이다. ‘검은 섬’이라 부르는 한 섬의 이름을 한자로 옮기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차의법으로 하자면 ‘검을 흑(黑)’, ‘섬 도(島)’자를 써서 ‘흑도’, ―그런데 그 섬의 산이 도드라져 보여 ‘메 산(山)’자를 끼워 넣어― ’흑산도‘가 되었다. 차음법으로 해보자. ‘검은’의 소리에 딱 들어맞는 한자가 없어서 한자를 갖다 붙이기 편하고 그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거문’을 생각해 낸다. 그 다음 ‘검다’는 의미와는 상관없이 ‘클 거(巨)’, ‘무늬 문(文)’을 갖다 붙여 ‘거문도(巨文島)’란 섬 이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섬에 살거나 배를 타고 그 섬 옆을 스쳐 오가는 수많은 뱃사람들이 보기에 저 멀리 수평선 너머 검은 빛으로 보이기에 그 섬을 아는 사람들끼리 ‘검은 섬’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섬이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전남 신안군에 소속되어 서해 바다에 떠 있는 ‘흑산도’로 불리게 되었고, 하나는 전남 여수시에 소속되어 남해 바다에 떠있는 ‘거문도’가 된 것이다.
기록에 남아있기는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대대적으로 정리를 했다 한다. 그러나 큰 산, 큰 강, 큰 마을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짐작컨대, 건너뛰긴 하지만, 조선 후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면서 지명이 좀 더 촘촘해졌을 것이고, 일제강점기에 쪽바리들이 좀 더 악랄한 한반도 수탈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없던 지명도 작명을 해가며 대거 정리를 했을 것이다.
자, 화두인 ‘감토산’으로 돌아가자. 앞선 긴 설명이 이 ‘감토산’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이 동네에 살면서 언젠가, 감토산이 ‘감투봉(감투峰)’(‘감투’는 순우리말)으로 불리기도 하며 그렇게 불리게 된 배경으로 전설 하나가 전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옛날 대바지(지금 대야마을. 마을에 대밭이 지금도 있다)의 무는 맛이 천하일품이어서 궁중으로 진상되어 임금님의 수랏상에 올라 임금님의 입맛을 돋우기도 했고, 고관대작들의 집에서 잔치 음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1) 그래서 거창에 부임해 오는 원님은 꼭 대바지 무를 맛봤다고 한다. 어느 때 거창에 새로 부임해 온 한 원님도 대바지 무 맛이 절품이라는 말을 들어온지라 부임하자마자 이방을 불러 "대바지 무 맛이 일품이라고 소문이 났으니 내가 맛을 보려고 하니 빨리 가서 무를 구하여 오라."고 재촉했다. 원님의 분부를 들은 이방은 아전을 시켜 무를 구해 오도록 시켰다. 아전은 길도 멀고 다리도 아프고 하여 중간쯤 가다가 무덤실(지금 무릉마을)의 무를 구해서 대바지 무라고 속이고는 원님에게 바쳤다. 원님은 대바지 무에 대한 기대가 워낙 컸던지라 깎아 바치는 무를 이모저모 살펴보고 한입을 베어 먹더니 갑자기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입 안의 무를 뱉어 버렸다. 무가 너무도 맵고 단단하여 약이 오른 고추를 씹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원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아전을 불러 대령시키고는 이것이 진짜 대바지 무냐고 다그쳤다. 게으름을 부려서 원님을 속였으니 그 죄가 보통은 아닌지라 아전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하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대바지 무 맛에 대한 미련이 강한 원님은 아전에게 진짜 대바지 무를 구해 오면 자신을 속인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고 했다. 아전은 온몸에 흐른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듯이 대바지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진짜 대바지 무를 구해 와서 원님에게 바쳤다. 진짜 대바지 무를 맛본 원님은 그 맛이 너무 좋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원님이 아전에게 대바지에 감투를 내릴 만한 것이 없었는지 물으니, 아전이 대바지에는 산과 들뿐이라서 감투를 내릴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원님은 대바지의 산에다 감투를 내린다고 하였다. 이에 연유하여 이곳의 주민들은 대바지 마을 뒤편에 있는 산을 감토봉(감투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2)
아롱다롱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아로새긴 자수품처럼 서사로 충만한 전설이다. 자, 원님이 산에다가 감투를 내려 ‘감투봉’이 되었다고? 그리고 의당 산 이름을 등재하려면 한자로 표기해야 하니 앞서 설명한 차음법에 따라 발음이 비슷한 ‘달 감’, ‘흙 토’를 붙여 ‘감토산’이라..... 근데, 하필이면 왜 ‘달 감’자, ‘흙 토’자를 붙였을까? 그 부분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가 어릴 적만 해도 ‘펜대 잡은 놈(식자: 識者)이 장땡’이란 말이 있었으니까. 지명 등록 업무를 맡은 어느 하급 관리가 발음이 같은 한자 중에 뜻이 괜찮은 한자를 골라 쓰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런 연고로 아래와 같은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겠다.
돌쇠 아비: (면사무소에 들어선다.) 저어기, 우리 아아 출생신고하로 왔심니더.
면서기: 보자, 이름이 우찌 되요?
돌쇠 아비: 집에서는 그냥 ‘돌쇠’라 카는데요.
면서기: 어허, 이름이 한자라야 등록이 되는데.....[순우리말 이름이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1980년대다.]
돌쇠 아비: 우짜까요? 내가 까막눈이 돼서 한자도 모리고, 쌩돈 디리서 이름을 새로 짓는 것도 마땅찮고요.
면서기: 거 참, 딱할세. (머리를 긁적이다가, 펜대로 책상을 톡톡 치다가)그라마 이랍시다. 내가 한자 이름을 지어 보까요? 나중에 막걸리라도 한 잔 사소, 마아.
돌쇠 아비: 아이구, 지야 고맙지예.
면서기: 보자, 집에서 돌쇠라 부른다 캉께, ‘돌 석(石)’, ‘쇠 금(金)’, ‘석금이’, ‘박석금’이, 이름에 돌도 들어가고
금붙이도 들어강께 아아가 야무치고 귀하게 클 좋은 이름이네!
그런데, 과연 이 ‘감투봉 전설’이 ‘감토산’ 작명에 어느 정도, 어떻게 관여했을까? 거두절미하고 나의 생각을 밝혀 본다.
① 애초에 마을사람들이 ‘감투봉’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마을 앞 벌판에서 감투봉을 정면으로 마주 하고 바라보면 산의 모양새가 감투 모양이다. 주봉이 가운데 솟고 그 양쪽이 약간 낮은 등성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옛 사람들이 벼슬길에 올라 감투 쓰기를 얼마나 앙망하였던가? 하여, 동래 정씨 집성촌인 이 대야마을 사람들이 문중에 감투를 쓰는 후손이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까지 담아 기꺼이 ‘감투봉’이라 하였다.
② 조선 시대 어느 시기 쯤 거창(그 당시는 안의현)의 대야벌 무 맛을 풍문으로 들어 아는 원님이 부임하였다. 여기까지는 전설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전설의 나머지 세세한 내용은, 모든 전설과 신화가 그러하듯, 누대에 걸쳐가며 많은 사람들이 집단 창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③ ①과 ② 사건과의 선후 관계는 분명치 않으나 어느 시기에 ‘감토산’이란 지명이 행정상 공식 명칭으로 등록된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도 의문은 남는다. 동래 정씨들이 이 터전에 자리 잡을 시초부터 산에다 감투를 씌우고 감투봉이라 불렀을까? 글쎄다. 하지만 내 아무리 세월 낚는 정태공이기로서니 어원을 밝히는 이런 일에 목숨까지 걸 까닭은 없는 것, 궁금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내 서가에 진작부터 꽂혀 있던 최지용 지음 《우리땅 이야기》를 발견하고는 오랫동안 명치를 꽉 막고 있던 고구마 궁금증이 한방에 공중분해 되었다!
인용한다.
“우리 고대어에서 ‘감(ㄱ+아래 아+ㅁ)’, ‘검’, ‘곰’, ‘고마’와 같은 ‘ㄱ’의 변형들은 ‘신성하다’는 본래의 뜻 외에도 점차 범위가 넓어져 ‘크다’, ‘많다’, ‘뒤쪽’ 등의 다양한 뜻을 갖게 된다. 이 말이 뒤쪽(북쪽)을 뜻하게 된 것은 ‘신(神) 중에서도 여성 신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에서 보듯 '곰'은 여성으로 변한다. 여성은 음양(陰陽)에서 음, 방위에서 북쪽을 뜻한다.”(p.88~89)
<황강은 흐른다>
정리하자. 1986년 즈음 합천호 건설을 앞두고 수몰예정지역인 대야마을을 포함한 거창 남하면 황강 유역을 학계에서 조사한 결과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다수 발굴되었다 한다. 신석기 시대, 이 마을 사람들이 감투봉 이전에 부르던 애초 순우리말 이름은 ‘뒷산’, 또는 ‘북쪽산’을 뜻하는 ‘감뫼’, ‘감메’였다. 그 말에 장구한 세월, 하늘과 땅과 산과 강의 품에 안겨 이 터전을 자손만대 살아온 필부필부들의 소망이 쌓이고, 은원(恩怨)이 모였다 흩어지고, 전설이 덧씌워져, ‘감뫼’→‘감메’→‘감투봉’→‘감토산’으로 변화한 것으로 결론에 갈음할까 한다. 이로써 없는 재주에 내 나름 용만 썼던 이 ‘돈 안 되는 짓’을 종 치고 막 내린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한때 이 마을에 사임사(沙任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의 이름을 따서 뒷산을 ‘사임산(沙任山)’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 마을 남쪽에 있는 남상면 임불 마을에 고려 말경 ‘천덕사(天德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조선조로 들어서며 억불숭유정책으로 그 절이 사라졌다 하니 사임사도, 사임산도 그때쯤의 이야기가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다.
우리 조상님들은 왜 ‘봄’을 무수한 소리 중에 ‘봄’이라는 소리로, ‘가을’을 무수한 이름 중에 하필 ‘가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하나의 대상을 두고 왜 우리는 ‘꽃’이라 하고 영어권에서는 ‘flower’라 부르고 한자권 같으면 ‘花’라고 표현할까? 언어발생학 같은 학문도 빠져보면 나름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내가 사흘만 젊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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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무는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 토양에서 잘 자라고, 대야 마을 앞 벌판은 황강이 휘어져 도는 안쪽, 그러니까 상류로부터 떠 내려온 모래가 퇴적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무 맛이 뛰어났다는 이야기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
(2) [출처] ①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geochang.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1033
② 《거창명승지의 역사와 전설》(박종섭, 거창문화원. 1997).
첫댓글 * 말 나온 김에, 우리 마을 이름 '대야리(大也里)'의 어원도 궁구를 해보자.
기록에 남아 있기로도 이 동네에 대밭이 많아 '대밭' + '이' ---> '대바지'(자음 탈락) ---> '대야리'로 변천되었다 한다. 차의법을 썼으면 '대 죽(竹), 밭 전(田)자를 써서 '죽전리' 가 되었을 것인데, 차음법을 써서 대밭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클 대(大), 잇기 야(也)를 써버렸다.